1.
"날이 궂은디 나락은 다 베셨소?"
"아따, 저렇게 비꽃이 무시로 피는디 어찌 벤다요? 폴새 벴어야 하는디. 요즘은 하루걸러 비설거지니 하늘도 참 무심허요. 그 짝(쪽)은 다 베셨소잉?"
"베기는 혔는디, 날씨 땀시 나락을 몰(말)리지 못하겠당께로."
예배당 입구에서 두 집사님이 서로 주고받으며 가을 하늘에 지청구를 쏘아 올린다. 한가을에는 부지깽이도 저 혼자 뛴다는데, 참깨며 들깨며 이미 거둬들인 나락이며 널어 말릴 것이 많아 이리저리 분주한 집사님들의 가슴앓이에도 아랑곳없이 가을장마가 몇 날 며칠 지루하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라는 노랫말이 무색하다.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다. 따스한 햇살과 쪽빛 창공을 그리워하여 집사님들이 쏘아 올리는 지청구는 화살기도인 셈이니, 요즘 남녘 하늘은 귀가 따가워도 한참 따갑겠다. 집사님들의 화살기도를 들으면서 나도 릴케의 시구를 빌어 기도를 바친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녘에는 바람을 풀어놓아 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에게 명하시어 알차게 하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녘의 낮을 주셔서
그들을 무르익게 하시고,
알찬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넣어 주십시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1-2연
산은 단풍 들 생각도 않건만, 누가 물감 칠을 해놓았나, 들녘이 노르께하다. 달을 품더니 그예 달빛을 띠었고나. 여름철, 한 덩이씩 달을 품던 다랭이논들이 보름달 빛깔만큼 노르스름한 천을 둘렀다. 설악(雪嶽)이 풍악(楓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데, 남녘은 들녘에서부터 슬금슬금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노란 비단보를 두른 다랭이논의 손짓에 이끌려 구불텅한 논틀길을 걷는다. 재 너머 둔답(屯畓)은 가장자리가 두부모를 내듯 각(角)이 졌는데, 계동에 자리한 논들은 가장자리가 구부정해서 자연스럽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진다. 굽고 좁다란 논틀길은 걸음발타듯 걸어야 제 맛이 난다. 속도를 잊고 편안히 걸음을 떼다보면 소풍 나온 민물농게가 잰 걸음으로 내닫는 모습도 보이고, 물방개가 둠벙에서 자맥질하고 우렁이와 다슬기가 느릿느릿 대지를 뒤적이며 비밀을 캐는 모습도 보인다. 그들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둥둥 울리며 자연스럽게 마음갈피에 쌓인다.
다랭이논 지대의 군데군데가 비어 있다. 벼 베기가 이미 끝난 논들이다. 그들 논에서는 볏짚들이 편안히 누워서 낭랑한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일부러 코를 벌름거리지 않아도 볏짚 냄새가 스스로 날아와 코끝에 앉는다. 깊이 들이마시면, 몸 속 깊은 곳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오오, 새큼달큼하면서 깊다! 허브향이 따로 없다. 밀폐된 공간에서 향기 요법에 심취하는 이들이여, 가을걷이가 한창인 두렁길을 나릿나릿 걸어보라! 아득한 흙냄새와 그윽한 볏짚 냄새가 뒤섞여 그대들의 몸과 마음을 사정없이 붙잡으리니…
볏짚 냄새에 취해 걷던 걸음이 농부의 낫질을 기다리는 논에 닿았다. 무르익어 고개를 수그린 나락들이 순간순간 발목을 잡아챈다. 그쯤 되면 나그네의 발은 그만 길을 잃고 만다. 경전을 만난 듯 걸음 떼기를 포기한다. 다만 자기의 발목을 잡아챈 벗 앞에 웅크리고 앉을 뿐이다. 고개 숙인 벼를 마주하고 앉으면 경전을 읽을 때처럼 마음이 그저 죄스럽다. 나는 벼처럼 먹히는 삶, 죽어서 사는 신비에 아직 들지 못한 까닭이다. 마주한 벼에서 외출의 의미를 읽는다. 무릇 외출이란 저 벼의 한살이 같아야 하리라. 크게 한 번 죽어 이후에 없을 삶으로 다시 살아난다(大死一番 絶後蘇生)고 했는데, 벼의 한살이가 꼭 그러하다. 그러고 보면 벼는 예수를 똑 닮았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 10,45)." 한 몸 스러져 생명의 씨앗을 드레드레 품었으니 벼의 귀가는 참 행복하겠다.
외출의 의미를 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제법 큰 둠벙을 만났다. 주인이 여러 해 동안 부쳐 먹지 않아서 갈대밭이 되어버린 논귀에 둠벙은 있었다. 잠시 비쳐든 햇살에 둠벙이 한 세상을 열고 있었다. 낟알을 다래다래 단 벼와 꽃대를 무수히 밀어올린 갈대숲과 잿빛 구름 두터운 하늘이 그 속에 있었다. 속을 들여다보니 둠벙 속의 내가 환히 웃으며 둠벙 밖의 나를 내다보고 있었다.
2.
오리 주둥이처럼 입이 비쭉 나온 채로 중학교 2학년인 민경이가 공부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민경아, 무슨 일 있니?"
걱정되어 아내가 묻는 말에 민경이가 입을 씰룩거리며 대답한다.
"10월 7일이 우리 학교 소풍날인데 선생님들이 우리 계동으로 소풍 온다잖아요. 정말 짜증나요. 우리 동네로 오는 소풍이라면 차라리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예쁜 민경이의 얼굴에 서운함이 가득 서려 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재미난 지 내 속에서 장난기가 솟는다.
"우리 동네로 소풍 온다는 건 우리 동네가 그만큼 살기 좋고 경치 좋다는 말 아니겠니?"
"목사님, 오늘 오후에 바닷가에 나가보셨어요?"
"아니, 왜? 바닷가가 어쨌는데?"
"그물 씻는 냄새 좋아요? 너무 비릿하잖아요. 그물도 여기저기 널려 있고…"
"바닷가에 살면 다 그런 거지 뭐."
내가 좀처럼 동의해주려 하지 않자 민경이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어버린다. 아내가 그만하라고 내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
"민경아, 내일 학교에 가서 다시 한 번 장소를 바꾸자고 말해봐."
민경이를 얼러보려고 아내가 꺼낸 말에 민경이가 도리머리를 짓는다.
"안 된대요. 이미 결정했대요. 선생님들이 우리 계동에서 회를 드시고 싶어서 안달이 나셨나 봐요."
"그럼 학생들은 소풍날 무엇 하며 시간을 보내고?"
"낚싯대 가져와서 낚시하래요. 아예 우리 동네 물고기들 씨를 말리려나 봐요."
그 말에 공부방에 있던 아이들이 배를 잡고 깔깔 방바닥을 구르며 깔깔 좀처럼 웃음을 갈앉히지 못한다. 민경이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난다.
사실 소풍 타령은 사오일 전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집 둘째 아이가 입만 열면 "소풍, 소풍" 노래를 불러댔기 때문이다.
"야아, 신난다! 10월 14일은 우리 학교 소풍가는 날이다."
"한솔아, 그 날 소풍가지 말고, 아빠하고 모처럼 낚시하러 가지 않을래? 요즘 고등어도 잘 낚이고 감성돔도 제법 잡힌다더라."
"싫어요. 낚시보다는 소풍이 더 좋아요. 이번 소풍은 남원으로 간대요.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도 탈 수 있대요."
전교생이라야 마흔일곱 명이 고작인 초등학교이고, 지난 봄 고만고만한 규모의 세 학교가 모여서 연합운동회를 했는데 한 학교가 재미를 보지 못했는지 그만 가을운동회를 취소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한솔이가 다니는 학교도 가을운동회를 취소하게 되었단다. 재미난 가을운동회가 취소되었으니 가을 소풍이 오죽 기다려지겠는가 싶어서 더 이상 한솔이를 꾀지 않았다.
소풍! 듣기만 해도 벌렁벌렁 가슴 뛰는 단어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봄철 한 날 가을철 한 날 빠짐없이 맞이하는 소풍이었지만 소풍날을 앞두고는 몇 날 며칠 가슴이 뛰었다. 소풍날 륙색에 싸가는 거라곤 사이다 한 병에 삶은 달걀 두 개와 김밥 한 줄이 고작이어도 마음만은 한없이 들떴다. 소풍날 비가 오면 어쩌나, 날이 흐리면 어쩌나, 하면서 수일 전부터 마음 졸인 적은 또 얼마였던가. 집과 학교를 오갈 줄만 알았던 내게 소풍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던 일상을 탈출할 유일한 기회였다. 그 시절에 가본 제천의 의림지, 영월의 청령포, 충주의 탄금대, 단양의 고수동굴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잘 갈무리하면 의식은 지평을 넓히는가. 내게 소풍 의식은 넓은 지평으로 다가온다. 삶을 고단하게 하고 팍팍하게 하는 어둠과 고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 세상살이는 소풍이 아니던가. 나는 하느님이 차려내신 우주적인 성찬(盛饌)에 손님 자격으로 소풍 온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나는 한살이를 소풍처럼 사는 능력을 생생히 유지하고, 순간순간을 설렘과 들뜸으로 무엇보다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하리라.
소년 시절에 맞이한 소풍은 지리적인 떠남에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 맞이하는 소풍은 주위에 펼쳐진 우주의 선물을 끌어당겨 읽고 음미하는 내적인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풍 길에 오르면, 울녘에 베풀어진 모든 것이 은총으로, 주위의 온갖 것이 숨을 할딱이며 달려와 방금 도착한 신의 선물로 다가온다. 그 선물을 마주하는 일은 실로 벅찬 감동의 연속이다. 구원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는가? 헛다리짚지 말자! 소풍 의식을 갈무리하는 데서 구원은 시작된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의 아름다운 섭리를 찬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구원이다(마이스터 엑카르트)." 소풍 길에 오르면,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눈여겨보려는 의지, 마음의 귀를 쫑긋 세우고 새겨듣고자 하는 의지가 한층 돌올해진다. 신의 메시지는 소풍 길에 만난 사람과 피조물 형제자매를 통해 순간순간 다가온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나의 입술만이 하느님을 드러내고 전하는 것이 아니다. 돌멩이도 똑같이 한다(누가 19,40). 광채 없는 피조물은 없다. 저마다 푸릇함이나 씨알, 꽃이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메시지는 그들을 통해 무시로 전달된다. 늘 간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조물을 통해 다가오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재미는 실로 크고 쏠쏠하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내게 다가와 말을 걸고, 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나의 가야할 길을 가리키고, 내게 건강한 에너지를 내뿜는 영적 스승들이다. 소풍 길에 영적 스승을 만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영혼은 갈 데 없이 푸릇해지고 촉촉해진다. 그는 꽃이 만발한 과수원 같다. 그는 실로 바람직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소풍 의식을 갈무리한 사람은 날개 없는 천사다. 나 역시 날개 없는 천사가 되어 소풍 길에 만난 누군가에게 신의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 가슴이 후끈 달아오른다. 소풍 길에 오른 누군가에게 나 역시 하나의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 뜻밖의 알찬 선물이 되고자 하는 결의가 오롯이 솟아오른다. 들풀 한 포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구름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 항구의 시끌벅적한 활기, 개수대에서 덜그럭거리는 설거지 소리, 사람들의 마음에 기름을 치고 웃음꽃을 피워주는 유머 한 마디, 부산한 일터의 모습,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가 소풍 길에 만날 수 있는 경전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비장해진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헤아릴 줄 알고 마음의 청진기와 돋보기를 마련한 사람, 그런 사람을 내 소풍 길의 어느 길목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행동거지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혀는 한결 잠잠해진다.
3.
언젠가 벗이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라는 영화를 CD에 담아 가져다 주었는데, 소풍 의식이 흐릿해질 때면, 나는 그 영화를 즐겨 보곤 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시고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그 영화는 이따금 좌절과 절망의 그늘 속으로 숨어버린 소풍 의식을 내 마음의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 다시금 소풍 길을 나서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인 1939년 이탈리아 아레조 지역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유태인이자 항시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인 귀도는 친구와 함께 아레조로 돌아와, 호텔지배인인 삼촌 밑에서 웨이터로 일한다. 귀도는 익살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필연 같은 우연을 여러 차례 만들어가면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랑스러운 아들 조슈아가 태어난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도 잠시뿐, 귀도는 삼촌 및 아들과 함께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유태인이 아니었던 그의 아내도 자원하여 같은 수용소에 수용된다. 귀도는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숙소에 아들을 숨겨두고, 불안해하는 아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갖은 익살을 떤다. 다들 고된 노역과 고문에 지쳐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귀도는 늘 웃음을 잃지 않는다. 여자 수용소에 수용된 아내를 위해 아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남몰래 확성기로 크게 틀어주는 기지도 발휘한다. 드디어 종전이 다가오고, 나치가 유태인 수용자들을 사정없이 처형하는 일이 벌어지자, 귀도는 조슈아를 남모르는 곳에 숨겨두고, 아내를 구하러가다가 나치에게 발각되어 어둠 속에서 처형된다. 귀도의 어린 아들과 아내는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상황, 유태인 수용소의 침울하고 어둔 현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시종일관 관객에게 폭소와 배꼽 잡을 일을 연출하는 귀도! 그는 한살이를 소풍처럼 살다 간 장본인, 어둠과 고통을 삼키고 노래와 웃음을 뿜어내는 브라이트 홀(Bright Hall), 저주를 축복으로, 고뇌를 노래로 바꾼 광대였다.
세상의 모든 길이 다 사라져도 꼭 살아남을 길이 있다면, 그것은 광대의 길이리라. 광대가 걷는 길이야말로 소풍 길인 까닭이다. 어둠과 고통을 불쏘시개 삼아서 웃음꽃을 선사하는 사람이 걷는 길은 정녕 소풍 길이다. 소풍 길에 오른 사람은 누구나 광대가 된다. 그의 말은 노래가 되고 그의 춤사위는 웃음꽃이 된다. 그 길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궁극은 하느님의 환한 웃음뿐이다. 연꽃처럼 환하고 백합처럼 향기로운…
유진 오닐(Eugene O'Neil)이 쓴 [아홉 개의 희곡](Nine Plays) 가운데 "라자로가 웃었다"(Lazarus laughed)라는 제목의 희곡이 있다. 예수에 의해 무덤에서 살아난 이후의 라자로의 삶을 묘사한 희곡이다. 그 희곡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내려놓은 라자로는 우리를 웃음의 세계로 초대한다.
어둔 이미지의 대명사인 죽음을 내려놓는 순간, 라자로는 광대의 길, 소풍 길을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걷는 소풍 길에는 웃음으로 바뀐 예수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초대를 따라 비극을 딛고 희극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 광대의 길, 가슴 뛰는 소풍 길을 통해서. →김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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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3알전 저역시 소풍을 댕겨왔습니다. ^^ 한가을 부지깽이도 저혼자 뛴다는데 오락가락하는 가을하늘에 저또한 지청구를 쏘아 올렸습니다. 당일 얼기설기 내리는 약한 비에 내심 조아리며 아이들과 부모들과 함께한 소풍날, 여러 생각들의 교차가 목사님의 귀한 글을 읽으며 깨끗한 걸레질이 됩니다.
소풍처럼 이제 저제 기다린 글을 접하며 마음의 청진기와 돋보기를 마련하는 전언을 수확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참 감사함으로 인사드립니다. ^^
상록수님, 잘 지내시지요? 찌푸린 날의 소풍은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록수님이라면 찌푸린 날도 화창한 마음을 건져올렸으리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좋은 글 가져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