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산
원주 금대산(708m)
'새농촌 마을 등산로' 따라 오르는 금대산
금대산은 원주시 판부면에 자리한 해발 708m의 산이다. 치악산 비로봉(1282m)을 지나온 영월지맥이 남대봉(1182m)에서 남서쪽으로 곁가지를 일으킨다. 백운지맥이라 이름한 이 산줄기는 백운산(1087m)에 이르러 정북녘으로 또 다시 곁가지를 내린다. 원주시가지를 향하여 내려가는 이 산줄기의 끝에는 또 다른 백운산(537m)이 자리하거니와, 두 백운산 중간에 위치하는 지도상의 무명봉이 오늘 소개하는 금대산이다.
지리원의 지도를 비롯하여 교통지도, 잡지 등에 이름이 없는 이 봉우리에 새로운 등산로가 생겨났다. 원주시 판부면 서곡4리 주민들이 '새농촌 마을 등산로'를 조성하여 용소골과 연계한 멋진 산행코스를 마련한 것이다.
들머리 용소골에는 수령 180년의 보호수를 비롯한 십여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지킨 후리사 절터가 있다. 옥개석이며 우주가 있는 탑신과 앙연이 새겨진 불좌대가 자리한 후리사 절터 맞은편에 서곡4리 주민들이 세운 등산안내도가 자리한다.
안내도에는 '서곡의 유래. 옛날 후리사지와 서곡대사가 유명하여 서곡대사의 이름을 서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수리봉 밑에 있으므로 수리골, 서리골, 서곡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서곡은 백운산 용수골 계곡, 오래된 노송으로 유명하다(중략). 용수골계곡은 1991년 비지정관광지로 지정되었고, 깨끗한 물과 울창한 숲을 형성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용소와 폭포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건과 폐사 연대를 알 수 없는 후리사와 서곡대사를 온갖 자료를 살펴본다. 마침내 찾아낸 서곡대사(1702~1768)는 조선의 승려로 법명이 찬연이다. 불교대학사전에 의하면 '속성은 김이며 완산사람으로 사안, 담월각혜, 관파두옥, 만화원오(1694~1758) 등에게 법을 배우고 경전에 통달하였고 교화에 힘쓰다. 만년에는 교를 버리고 선으로 돌아가 고요히 수행하다가 조선 영조 44년 홍천 수타사에서 67세로 입적하다' 라고 되어 있다.
등산안내도 옆 시멘트길을 따르다가 동남쪽 지능선길을 오르자 옹달샘 쉼터가 보인다. 이를 지나 해발 470m의 저고리봉 삼거리에 올라선다. 네 줄기 소나무가 이정표인양 지킨 이곳이 서곡4리 새농촌 등산로에 표시된 최고봉이다. 이어 밧줄이 준비된 서남쪽을 내려가자 후리사터에서 650m 상류의 백운산자연휴양림 매표소에 이른다(등산안내도 참고바람).
이곳에서 동쪽 능선길을 이어가다가 벌목지대를 지나니 경주 이씨의 무덤이 자리한 안부가 보인다. 계속되는 숲길을 지나서 금대산 정수리에 올라선다. 오늘 산행에는 금대산을 나에게 소개한 '방배 우정산악회'의 최진무 회장과 회원들이 함께했다. 소나무 아래, 너럭바위에 앉아서 백운산(1087m)과 작은 백운산(537m) 사이에 자리한 금대산의 산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산이라기보다 봉이 적당해 보이는 금대산에 이별을 고한다.
정북녘에 자리한 작은 백운산을 향해 능선을 조금 내려가니 큰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삼거리를 만난다. 다시 북녘길 능선을 이어가자 해발 580m 지점에 쉼터가 보인다. 소나무와 굴참나무에 통나무를 얽어 만든 쉼터에서 바라보니 남녘의 백운산이 눈부시고, 동북녘으로 중앙고속국도 너머로 남대봉~향로봉~비로봉을 이어가는 치악산맥이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작은 백운산이 가까워지자 물박달나무 군락이 시작된다. 참나무목 자작나무과의 물박달나무는 방부재와 염료재로 쓰이는 수피가 특이하거니와, 이렇듯 많은 물박달이 군락을 이룬 산은 처음이다. 좌우로 이어지는 물박달을 바라보며 작은 백운산에 올라선다.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도 분명히 이름이 기재된 백운산이건만 삼각점이나 정상 팻말은 커녕 그 흔한 리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를 대신하는 여섯 기둥 신갈거목에 기대서서 아쉬움을 달랜다.
다시 북녘능선을 따라 내려가자 '내남송마을'이 보이고, 노인정 뒤쪽의 생육신 '관란 원호'의 묘역을 찾아간다. "간밤에 울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여라/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도록 나도 울어 보내리라." 그가 남긴 시조를 읊조려 본다.
'원주시 향토유적 제2009-2호'로 지정된 원호 묘역의 안내판을 읽어본다.
'원호(1397~1463)는 조선 단종 때의 생육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자허, 호는 관란, 시호는 정간이다. 선생은 문과에 급제(세종5년)한 이후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나 1453년(단종1년)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원주로 낙향하였다. 단종복위운동으로 사육신이 죽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자 그 상류에 관란제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모하였고, 단종이 죽게 되어서는 삼년상을 치르고 원주 무항동으로 돌아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이후 1699년 원주에 정려각이 세워졌고, 1703년 칠봉서원에 배행되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룬 묘역에서 동녘을 바라보자 치악산맥이 성벽을 이룬다. 원주 원씨인 원호의 중시조는 치악산 자락 행구동에 무덤이 자리하는 고려말의 충신 운곡 원천석(1330~미상)이 아니던가.
눈 맞아 휘어진 대(竹)를 뉘라서 굽다던고/ 굽을 절(節)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두 수가 남아 전하는 원천석의 시조도 읊어보는 이른 봄의 뜻있는 산행이여!
*산행길잡이
용수골 등산안내도-(1시간20분)-금대산 정수리-(50분)-작은 백운산-(1시간)-생육신 원호 묘역 입구
금대산-백운산(537m)의 종주 들머리는 판부면 서곡리의 후리사 절터다. 등산안내도 왼쪽의 시멘트길을 따라들면 작은 컨테이너가 놓인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가다가 다시 왼쪽을 보면 '서곡4리 마을 등산로'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 옆으로 지능선을 오르면 본격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능선길은 옹달샘쉼터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470m의 저고리봉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안부에 경주이씨의 무덤이 있다. 소나무, 참나무가 숲을 이룬 동녘 능선길을 따르면 금대산 정수리다. '원주 462, 1989 재설'로 표시된 삼각점과 너럭바위가 자리하는 정수리에는 나무 기둥에 매단 정상 나무 팻말과 종이 팻말이 걸려있다.
북녘 능선길을 내려서면 너락바위에 나무를 엮어놓은 쉼터를 지나고, 다시 해발 580m 지점의 능선에서 전망 좋은 쉼터를 만난다. 다시 북쪽 능선을 이어가면 여섯 기둥 참나무가 이정표로 지킨 백운산(536m)에 이른다. 이곳에서 하산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취재진은 두 방향으로 나눠 내렸거니와 직진 방향이 제대로 된 길이며 20분 후 해발 350m 지점에서 다시 만난다. 만난 지점에서 다시 북녘 능선을 이어가면 오른쪽에 철탑이 연달아 선 능선길을 만나는데, 이를 지나서 만나는 삼거리는 왼쪽 오른쪽 모두 매봉교로 이어진다. 동물 이동로인 매봉교를 건너 비닐하우스를 지나면 포장도에 내려서고, 이곳에서 왼쪽으로 340m 내려가면 '생육신 원호 묘역 400m' 팻말이 자리한 사거리에 이른다.
*교통
서울고속터미널의 고속버스 또는 기차로 원주까지 간다. 1일 9회 운행하는 32번 원주 시내버스를 타고 용수골 종점에서 내린다. 용수골에서는 6시부터 2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출발하며, 원주 중앙시장으로 간다.
내남송마을은 교통이 불편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택시로 원호묘역까지 가서 산행을 시작하고 서곡리로 하산하는 것이 좋다.
원주터미널 또는 원주역에서 시내버스로 단구동까지 가서 택시를 이용하면 들머리와 날머리의 택시요금이 저렴하다.
*잘 데와 먹을 데
들머리 서곡리에는 서곡막국수(033-763-8137), 용수골민박가든, 이내민박 등 식당과 숙박시설이 여럿 있으나 내남송마을에는 식당과 숙박시설이 전혀 없다.
글쓴이:김은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