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아펜젤러는 많은 미국인들처럼,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의 조류들로부터 유래된 한 가족에서 태어났다. 아펜젤러 집안은 본래 스위스 출신이었으며, 미국에서 독일 개혁파라고 불리웠던 개혁교회의 한 지파에 속해 있었다. 아펜젤러의 어머니인 마리아 게르하르트는 메노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아펜젤러 집안의 사람들은 가정에서 독일어 성경을 연구했으며 자녀들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를 배웠다.
아펜젤러는 힘세고 활동적인 소년이었다. 그는 1876년 10월 6일, 18세에 회심하였으며, 매년 그 날을 영적 생일로 기념하였다. 그가 랭카스터의 한 감리교회의 교인이 된 것은 1879년 대학에 다닐 때였다. 그는 그 당시에 목회자가 될 결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1년, 대학 3학년일 때 그는 이미 선교사업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드루(Drew)신학교 시절에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였던 J.S. 워즈워드는 해외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특히 조선에 가기를 원하였다. 아펜젤러는 일본 선교사업에 지원할 것을 고려하였으나, 워즈워드가 미국을 떠날 수 없게 되자, 그대신 조선에 가서 선교하기로 결심하였다. 드루 신학교 재학시절 그는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널리 인정받고 있었으며, 우수한 헬라어 학자로 간주되었다.
아펜젤러가 1883년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열린 신학교연맹 회합에 참석한 것은 그가 신학교 재학시절이었다. 이는 해외선교 진흥을 위해 신학생들이 만든 모임이었다. 거기서 그는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만났다. 언더우드는 이때 조선에 선교사로 가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후 아펜젤러는 감리교인 엘라 다지(Ella Dodge)와 결혼하였다.
인간 아펜젤러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아펜젤러의 전기를 쓴 W.E. 그리피스(Griffis)는 아펜젤러의 생활태도의 적극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펜젤러는 항상 명랑하였으며, 위로의 설교자였고,모든 일에 적합한 일꾼이었다. "그는 예민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익살을 좋아하고 농담의 진의를 재빨리 파악하며, 사물의 유쾌한 면을 보는 성격때문에 그의 많은 짐이 가벼워졌으며,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유쾌한 기분으로 이끌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사와 은총이 후에 그로하여금 이교도들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리피스에 의하면,"의무를 회피하는 비겁한 자, 교회의 돈을 낭비하는 게으른 자, 야비한 자, 극히 교만한 자, 남을 속이는 자 등에 대하여 그의 분노는 쉽게 불타 올랐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펜젤러는 고의적인 낭비와 불필요한 태만에 대하여 고귀한 증오로 가득찼던 사람이었다." 알렌 박사는 아펜젤러에 관하여,"그는 마지막까지 매우 열렬한, 요한 웨슬리 형(形)의 감리교도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펜젤러는 그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도 엄격하였던 일종의 완전주의자로 보였을 것이지만, 동시에 매우 도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강력한 전형이었던 것이다. 그는 특별한 날들과 절기들을 좋아하였다. 그는 항상 가정과 교회에서 복음서에 서술되어 있는 위대한 사건들을 기념하였다.
아펜젤러가 비록 많이 시도해 보기는 했으나 결코 농촌지역의 조선 음식을 먹는 일에 익슥해지지 못했으며, 결국 여행 중에는 식품과 요리사를 함께 데리고 가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가 설교한 바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고된 노동을 제창하던 사람으로서, 그는 너무 심할 정도로 일에 몰두하였기 때문에 결국 의사가 휴양차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는 5년간의 선교활동으로 체중이 많이 줄기도 했다. 그는 배재학당을 세웠고, 교회일꾼을 발굴 육성하는데 관심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