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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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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렇게 보니까 그것을 가지고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자유. 여기 17절에 보면 주는 영이시는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뭐가 있습니까? 자유함이 있다. 여기 자유함이라 하는 것은, 보통 이 세상에서 자유라는 것은 간섭 안 받기 잖아요. 네 그 말 맞아요. 어디로부터 간섭 안 받기 입니까? 주의 영이 있는 성도는 어디로부터 간섭을 안 받을까요? 바로 죽음의 위협과 저주, 죄의 권세와 율법의 권세로부터 간섭을 안 받아요.
놀려도 ‘놀려라!’ 하면 되고 저주해도 ‘저주해봐라!’ 하는 거예요. 이것이 자유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이 자유함이 있어요. 이것을 다른 말로 두 자로 이야기하면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뭘까요? 참 이거 중요한 질문 하나 던져 볼께요, 답변해 보세요. 사람 대 사람은 신체를 갖고 있으니까 사랑의 표시를 할 수 있잖아요. 신체적 접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하고 사람이 사랑을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누구 답변해 보세요.
사람 대 사람은 신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껴안는다든지 표정과 태도를 통해서 사랑을 발산하거나 표현을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신체가 없잖아요. 신체가 있는 인간을 사랑할 때 어떤 식으로 사랑을 할까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 봤습니까? ^^ 어떤 식으로 사랑을 할까요. ...(무답)... 사랑을 안 받아보셨나 봐요? ^^
답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예, 말씀이 되었다, 그러면 같은 신체라는 말이죠. 그런데 같은 신체가 되신 예수님이 팔장을 끼는 것은 아니잖아요. 보통 남자가 팔장을 끼잖아요. 팔장끼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떤 식으로? 답변; 죽으심으로... 예, 죽으셨는데... 죽으셨다 해도 신체는 없잖아요. 신체성의 사랑은 아니란 말이죠. 부부간 사랑할 때 멀리 떨어져 밥먹으면서 ‘밥 먹자’ 이렇게 합니까? ^^ 아니잖아요. 잘 때도 너는 네 방에서 나는 내 방에서 떨어져 자자, 이것이 사랑은 아니잖아요. 그죠? 친밀하고 긴밀하게 하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때는 어떤 식으로 하느냐면, 아! 이렇게 주님의 사랑이 깊고 짙은 사랑이구나! 라는 주님의 사랑을 어떤 때 느끼냐 말이죠. 답변; 죄를 깨달을 때... 아, 이것이 정답이예요. 제가 원했던 정답이 그겁니다.
지금 이미 캥커루 주머니에 새끼는 있잖아요. 지난 달에 2장에서 캥거루 이야기를 했나요? 캥거루를 주머니에 넣잖아요. 캥거루가 어릴 때는 여기 주머니가 전부인 줄 알아요. 그런데 커서 보니까 어미 얼굴이 보이잖아요. 엄마 주머니 속에 있다고. 사랑이라는 것은 이미 포대기, 주머니 속에 담겨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죄가 무엇이냐면, 이것이 자기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거예요. 지갑에 돈 좀 없다고 울고불고 난리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울던 좋던 상관없이 이미 캥거루 포대기에 이미 놓여 있는 상태에서, 내가 예수를 붙드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예수 손목을 힘껏 잡는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주님이 아예 캥거루처럼 포대기에 아예 담아서 여기서 까불든지 촐랑대든지 잘난체하든지 관계없이 이미 현재 놓여진 상태를 깨닫게 하죠.
그 때, 뭘 느끼냐 하면 죄를 느낍니다. 그 때. 아이고, 미련스럽게도 나는 내 생각만 했네. 죄.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생각만 하는 것이 죄입니다. 요것이 중요한데 한 번 적어 봅시다. 자.기.생.각. 죄는 자기생각. 간단하게 네 자 입니다. 자기생각. 오늘 진도 많이 나가서 다 잊어버리면 안되는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 이야기할 때 반드시 무엇과 대비해서 이야기하느냐 하면 ‘누구든지 처나 아비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여기 보면 전부다 처는 누구 처예요? 자식은 누구 자식입니까? 내 자식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고, 주님을 미워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죄가 무엇입니까? 간단하죠. 자기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아니 목사님 자기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죄이지요. 아니 목사님 하나님 믿는 것도 ‘자기’ 구원받으려고 믿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죄이지요. 아닌 찬양할 때 전도할 때 헌금할 때 ‘내가’ 전도하고 ‘내가’ 찬양합니다. ‘내가’ 선교합니다 하는데 그것도 다 죄입니까? 죄이지요. 왜? 죄는 자기 생각이 죄예요.
그러면 사람이 한 평생 죄 없는 순간이 어떤 순간입니까? 없지요. 90평생 한 평생 죄만 짓지요. 왜? 평생동안 자기생각만 하는 거예요. 왜 자기 생각하느냐? 내가 있으니까. 뭐, 죄 지어야겠다! 꼭 안 해도, 내가 여기 있으매 내 생각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자기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잖아요. 사람이 주님 생각할 때는 잠시 자기가 있다는 것을 잊어 버립니다. 그런데 누가 돌맹이를 던져서 맞게 되면, ‘아야!’ 화를 내요. 누가 맞았어요? 내가 맞았어요. 맞은 내가 화를 내지 돌에 안 맞은 주님이 화낼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돌 안 맞은 개가 화 낼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아프고 배고프면 세상에는 예수도 하나님도 모두 다 버립니다. 아프고 배고프면. 배고프다는 것은 돈이 없다 이 말입니다. 아프고 돈 없으면 모든 것이 다 귀찮아요. 성경공부 수십년 해도 한 순간에 다 날아가요. 아프고 배고프면. 아파보세요. 그렇지 않나요? 아프고 배고프면. 아프면 만사가 귀찮아요. 남편도 원수예요. 자식도 원수고 다 귀찮아요. 다 발로 차고 싶어요. 심지어 너무 아프면 자기도 귀찮아요.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싶어요. 정말 아플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들던가요?
나도 없어졌으면. 이렇게 욥도 그런 소리를 했으니까요. 너무 아프니까 욥이 뭐라 했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었다면...혹시 태어나더라도 사산되었더라면... 엄마 뱃속에서 햇빛을 보지 않고 죽었었으면... 왜냐하면 욥이 아파서 생각하기를 엄마 뱃속으로부터 나와서 몇 십년 살다 죽으나 그냥 10개월 안 되어서 죽으나 뭐 마찬가지인데 왜 태어나서 아픔이란 것을 경험하느냐 말이죠.
욥이 아주 통곡을 했어요. 왜 나에게 아픔을 주느냐 말이죠. 그 때 하나님의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광야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이 말은 욥이 무엇이다? 황무지이다. 이 말입니다. 다른 황무지는 비 내려도 가만히 있는데 너는 왜 까부느냐 이 말입니다. 다른 황무지의 자갈이나 잡초는 가만히 있는데 너는 뭐가 잘 났다고 왜 아픕니까? 왜 태어났습니까? 왜 까부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이 아니면 죄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예요. 악마로부터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것은 죄라는 것이 인간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죄가 나오는 역할을 충실히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충실히 해주세요. 어떤 때 충실히 해주면 됩니까? 죄는 무엇이다? 자기생각. 자기 생각의 기초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프고 돈 없고. 딱 두가지 밖에 없어요. 아프고 돈 없고. ^^
누구든지 나를 아프게하고 심지어 하나님이라도 아프게하고 배고프게 하면 나의 원수다. 용서를 못해요. 용서가 안 되요.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요. 왜? 내가 아프니까. 남이 아프면 용서가 되겠는데 ‘내가’ 아프니까. 아픈 내가 용서가 안 된다. 이것보다 더 생생한 것이 있을까요? 가장 생생한 것은 그러다가 죽는다는 거예요. 죽음.
그래서 인간의 미래는 없어요. 과거에 결정된 사항을 확인하는 시간 끌기가 미래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뭡니까? 십자가에서 우리는 이미 죽기로 확정되었죠. 죽은 이유는 뭡니까? 죽는 이유는 죄 값은 사망이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이는 거예요. 이미 너는 십자가를 통해서 너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었다 이말 아닙니까. 너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 이 말은 실은 우리가 죽어야 될 저주받아야 될 당사자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가 이미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는 이미 보였잖아요. 그러면 미래는 뭘 확인합니까? 결국 나는 아무리 달아나고 도망쳐도 이 십자가로 규정된 죄인을 못 벗어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90년 세월을 살아갑니다. (인생을) 계단으로 보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 마다 저 밑바닥에서 죽음의 파도 소리가 들여야 되요. 그런데 20대 30대에는 자기 죽음과 멀리 있다고 여기기에 죽음에 대해 잘 몰라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이것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나도 크라이슬러 타고 벤츠 탄다, 그 생각만 하지요. 나중에 80이 되고 90세가 되면 느껴요. 불신자도 느껴요. 죽음의 파도소리가. 그러면 그 검푸른 죽음의 파도소리가 자기 발목까지 넘치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그래서 제가 부산강의 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그림을 아주 끔찍한 그림을 그렸는데, 사람이 이렇게 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발 부분부터 지워나갑니다. 1년 살면 1년 지워나갑니다. 발을 지웁니다. 발이 간질간질 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고 여기 입이 있다고 자기 잘 난 척 하죠. 나는 착하다. 그런데 점점 하나님께서 지우죠. 발목, 허리 다 지우고 나중에 죽으면 이렇게 잘 난 척 하는 주둥이도 흙이 되어 버립니다.
젊은 사람은 이것을 몰라요. 오토바이타고 신나게 천하 이 세상은 자기가 정복해야 맛이고, 직장 좋은 데 다녀야 하고, 남보다 지기 싫고 상대를 죽일지언정 자기가 더 잘나야 되고 뭐 든지 잘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점점 더 이렇게 죽기로 과거에 확정된 것을 몰라요.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호화 아파트에 살면 행복이 저절로 올 것처럼 여기죠.
어릴 때 제가 일본 만화책을 보니까 일본 도쿄에 고가도로, 그 당시 우리나라에 고가도로가 없을 때, 선진국의 고가도로, 미래도시 보면 고가도로 있잖아요. 그래서 어릴 때 생각이 이런 고가도로가 있는 도시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 안산에도 고가도로가 있잖아요. 귀찮아요. 사람들이 지하철이 들어오면 참 멋있다 하다가 막상 들어오면 귀찮아 죽죠. 지하철 타려면 막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귀찮죠. 멀리서 보면 환상이죠. 환상이 아름다워 보이죠. 신비롭게 보이죠. 가까이 보니, (복잡복잡 귀찮죠). 아이 촌에 텃밭이나 갈면서 간섭없이 살았으면... 합니다.
식당에 아르바이트하는 아줌마들이 그런 생각을 해요. 남편에게 얻어맞고 이혼당하고 아이가 둘이나 있어 벌어야 하니까 식당 아줌마로 일 할 때 ‘우리 식당에 사람 안 필요한데요.’ ‘도와주세요. 우리 아이들 불쌍해서 취직해야 되요’ 해서 (취직) 했을 때는 신나죠. 그런데 식당에 하루 100명 오던 손님이 50명으로 줄으면 걱정되는 거예요. ‘아줌마 안되겠어요. 이제 그만 오세요’ 할 까봐. 그 때 150명 되었으면 좋겠다 하거든요. 나중에 150명 100명 와 보세요. 월급은 나오지만 (몸이) 다 망가지는 거예요. ‘오늘 좀 손님 많아 바쁘니 연장근무 좀 해 달라. 아쉬울 때 서로 도와줘야죠’ 하다보면 한 16시간 어떤 사람은 18시간 서서 일한다니까요.
집에 오면 너무 피곤해서 말이 안 떨어지죠. 이것 벌어서 아이들 교육시켜야 하는데 (막상) 교육이 안 되요. 왜? 아이들은 지 맘대로 코 흘리고 옷도 세탁 안 된 옷을 엉망으로 입어도 자기는 피곤해 퍼져 자고 일어날 힘도 없고, 또 아침에 일어나야 되고. 잔업수당 몇 천원 더 줄테니 도와달라고 하니. 그러다 (손님이) 150명 오다가 70명 오면 ‘아줌마 나가 줘야 되겠는데요.’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그래서) 자기 식당을 하면 딱 적당하게 12시간만 일 하기 위해서는 한 100명은 와야 되요. 세상에 그게 자기 맘대로 됩니까?
사회생활 오래 하신 분들은 잘 알겠죠. 바쁘면 바쁜대로 짜증나고 안 바쁘면 잘릴까봐 걱정되고. 구조 조정 들어갈까봐 걱정되고. 꼭 줄타기 하는 것 같아요. (영화) 왕의 남자에 나오는 공중의 줄타기. 조금만 긴장이 풀어지져서 깜빡하면 땅바닥에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그것은 뭐가 없습니까? 자유가 없고 예속밖에 없죠.
이미 구원되었을 때만 자유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런데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까? 성령님의 소망입니까? 여기 보니까 주의 영이 모세의 수건 역할을 해서 우리를 덮쳐서 구원하였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살이 하면서 세상과 부대낄때는 자유함을 못 느껴요. ‘한 번 만 봐 주세요. 애가 둘입니다.’ 하지만 막상 성경의 영의 해석을 듣고 보니까 ‘세상에 거지 나사로도 가는 나라인데 나라고 못 갈까.’ 거지 나사로가 거지로 고생한 것을 다 잊었잖아요. 맞아 내가 남의 나라에서 참, 내 나라가 아니지.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 였지. 그 성령이 주는 기쁨을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빼앗아 갈 수 없어요.
욥이 아팠어요. 배고픈 것은 물론이고. 전 재산 다 날라가고. 재산 날라갔을 때에는 참을 수 있었는데 아플 때에는 너무 아프니까 참을 수가 없어요. 어쩔수 없이 원망이 나오고 하나님에게 대들기도 하고 그랬어요. 광야에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자갈이나 잡초는 가만히 있는데 네가 뭐라고 그렇게 대드느냐? 하고 너에게 믿음 준것도 처음부터 비 내린 것처럼 주었기 때문에 나중에 주님께서 욥에게 무엇을 줍니까? 축복을 줄 때, 욥이 고난받은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예요. 고난은 그냥 스쳐가야 할 거쳐야할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거쳐야 할 과정이고요.
이 자체가 성경공부하는 자체가 고난이예요. 주인도 없는 집에 와서 ^^ 이것도 하나의 고난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 이것이 목자 되신 주님이 베푸신 이벤트입니다. 육의 속에서 영을 발견하는 그 상쾌함, 속이 시원함.
14절 봅시다. (고후 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 수건이 벗어지지 아니하고, 라는 것은 모세가 이야기 할 때 그 당시 사람들은 모세 말은 들었지요. 말은 들었지만 모세 얼굴에 있는 영광 자체는 보지 못했죠. 왜냐하면 보면 죽으니까. 눈이 부시니까. 그런데 이제 오늘날 주님을 믿은 우리들은 수건까지 벗겨져 버려요. 그러면 진실로 수건이 벗겨진 것 같이 주님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인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주의 영으로 말미암으니라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야~, 이것은 더 이상 주님의 우리 사이에 막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말입니다. 주의 영이 함께 함으로 주와 한 덩어리 되게 하신 겁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 감탄 하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면서 감탄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어떤 경우에만 그렇다는 겁니까? 주의 영이 계실 때만 그렇다는 말 아닙니까.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을 해 보면 맨 날 영광 영광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 힘으로 주의 영광을 볼 수는 없고, 성령이 있는 사람은 우리가 이 땅에 세속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다시 우리로 하여금 주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겁니다. 잊어버리는 예를 고린도후서에서 보겠습니다. 요 근래 자주 인용을 하는데 인용할 때마다 제가 감사해요.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이것은 성경을 풀 때 영적으로 영광 속에서 풀어야 제대로 푸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풀때에 11장 30절을 보세요.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다면 이런 기쁨이 나오겠습니까!. 내가 한 번 자랑해 볼까? 뭔데? ‘나 약하데이. 나 아프데이. 나는 기도할 능력도 없데이. 나는 전도도 잘 못한데이. 그래도 괞찮아’, 라고 자랑하는 겁니다. 여기 자랑거리를 끄집어 내보라하면 나도 자랑해볼게 나 무능한 것 자랑할게. 됐나?
얼마나 성령 안에서 영광스러웠으면, 얼마나 좋았으면 내가 지금 월급 얼마 받고 내 자식이 몇 명이고 아파트 몇 평이고 그게 지금 생각조차 나질 않아요. 우리교회 몇 명이고 이런 것이 생각 날 필요가 없다니까요. 왜? 나무 영광스러우니까.
그리고 그렇게 영광스러웠으면 어느 정도가 되냐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구태여 그 영광스러운 것을 알릴 필요가 없어요. 왜냐? 내가 그 사랑을 알면 되니까. 그러니까 ‘아, 이것은 알아 줘야 되는데, 알아 줘야 되는데...’ 이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나 셋째 하늘에 올라 갔었어, 좀 알아줘, 알아줘. 그리고 나에게 헌금 좀 팍팍 내 놔. 나 그런 사람이야. 그럴 필요가 없다고요. 헌금을 주던 말던 알아주던 말던, 아우 난 너무 좋아!.
주여, 내가 자랑 좀 할께요. 해봐. 저 약하죠. 맞죠. .주님 앞에서. 사랑 앞에서. 얼마나 자유로와요. 도대체. 애를 셋 낳았는데 그 중 둘이 죽었을 때, 아 기분 좋다 다니면서. 꼭 미친 놈 같아요. 완전히 사람으로는 감히 표현을 못 할 정도로. 세상이 세속이 육에 속한 것이 감히 흉내를 낼 수 없는, 근처에도 못 가요. 그런 나라에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 억지로 집어 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하고 하나님하고 얼마나 싸우겠어요. 자존심 싸움. ‘안 갈랍니다. 안 볼랍니다. 안 들으렵니다. 하나님 말씀 생각 안 할 랍니다.’ 얼마나 ??? ‘그거 하지말고 내가 원하는 돈이나 주소. 시답지않은 소리하지 말고 우리 애 천재가 되게 해 주시고’ 그것뿐 다른 것 요구하는 사람 없어요. ‘나 안 아프고 배 안고프게 돈하고 건강케 하옵소서.’ 그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
주님은 그런 것 조차 다 문제시 안 되는, 소소한 것까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영의 나라를 해 버려요. 그 영의 나라는 마태복음 17장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가 자기 생각 안 하잖아요. 초막 셋을 지어서 드리겠습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산 밑에 내려가지 맙시다. 이것이 실재 상황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는 바쁘다 보니까 이런 생각을 못하죠. 몸이 아프다보니까 돈이 없다보니까 다급한 것이 돈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힘으로 영적인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바꿀 수 있을까요? 안 바뀝니다. 회개해도 안되고 기도해도 안되요. 주의 영이 그런 과정으로 거치게 해요. 지독하게 거치게 해요. 지독하게 거쳐가게 해서 낙담하게 만들고 실망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들고 주님 앞에 항의도 해보고 삐지기도 해 보고, 그런 과정 가운데서 아하, 내가 육으로 세상을 보았구나. 영으로 봐야 할 문제를 육으로 보았구나, 그래 되는 겁니다.
자 본문 들어가 봅시다.
모세이야기 좀 해 봅시다. 3장6절에 보면,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여기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나오죠. 지금 모세가 수건을 쓰고 이야기 하고 돌판 들고 와서 할 때 그 때 그 밑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죠. 특별히 선택 받은 사람들이예요. 지금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모세를 통해서 맛보기로 보여주는 영광도 아무나 다 보여주는 겁니까? 아니면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보여 주는 겁니까?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주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이 목사 왜 좋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안 해주냐 할 때 원래 그래요. 원래. 뭐가 원래 그런데? 원래 이스라엘 나라가 그래요,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책에 기록된 택한 이스라엘에게만 모세가 나오지 아무나 다른 나라 일이 있어도 모세가 나오지를 않아요. 원래 그래요. 하나님은 일은 이렇게 해요. 저에게 멱살 잡고 따질 문제가 아니고요.
하나님은 원래 이 세상과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원래 구분하십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에는 악인과 선인 또는 염소와 양을 구분하듯이. 하나님께서 이 좋은 천국의 영광된 백성 되는 것을 오직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도록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선택 받은 사람에게만. 그래서 전도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아들의 계시를 받은 자가 누구냐를 찾아가는 것이 전도입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봅시다. 진지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로또 복권처럼 공의 숫자와 자기가 써낸 숫자가 서로 맞아야 될 텐데 얼마나 조마조마 합니까. 그런데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예요. 애한테 영어 과외시키는데, 그 아이가 학교에서 적응 잘 해야 할 텐데, 적응 못해 얻어맞으면 안 될 텐데. 뭐가 되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지요. 그죠? 내가 신앙생활을 잘 했는데, 마지막에 구원받아야 되는데... 이것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죠.
내 뜻이 너무 들어가 있어요, 내 욕망이 너무 들어가 있다고요. 그것이 아까 자기생각이 뭐라고요?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너가 구원받은 것은 너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가셔서 구원받은 거야.’ 왜 찾아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나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간절한 정신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예요.
달 떠오를 때 물 떠 놓고 빌 때, 손이 뜨겁도록 빌 만한 소원을 끄집어내라하면 10가지 조건 내에서 내 놓아요. 뭐냐 하면 가정화목하고, 사업 잘 되고, 이사 잘 하고, 공부 잘하고 다 끄집어 내어 보면 10가지 정도 범주에서 못 벗어나요. 이유 없이 아프다든지 결혼을 앞두고 배우자 구하기. 처녀 때 얼마나 기도 많이 했습니까? 안했어요? 대단하다 ^^
기도하며 빈다고요. 그런데 비는 것도 짐이요 응답되어도 (짐이예요). 왜? 그 다음에 또 빌어야 되니까. 예를들어 전문대학 들어가려면 한 이틀 빌지만 서울대 갈 때는 사흘, 양심상 적어도 금식하면서, 한 달은 빌어야 할 것 아니예요. 그 모든 게 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비는 분이 계세요. 내가 비는 맞은편에 주님이 빌고 계세요. 마주보면서. 그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너를 구원하였음을, 포대기 안에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빌고 계십니다. 그게 아들의 소원이예요. 아버지의 소원입니다. 우리는 내 기도소리만 크게 들리지요. 예수님의 기도소리, 나 구원하려고 주님 잊지 말라고 내 십자가 피의 공로를 놓치지 말라고 비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탄식하시면서 빌고 계세요. 성령께서.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른 자를 의롭게 영화롭게 했는데, 그걸 왜 세상 사람들의 소리에 다 묻히게 만들고, 세상 크락송 소리에, 기계 소리에, 돈 세는 소리에 다 묻히게 만들고, 성경에서 울려 나오는 영적인 소리는 전혀 듣지 못하고 주의 소원은 못 듣고 얼마나 우리가 한심 스럽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소원을 생각해 보면 세상에 이렇게 배은망덕합니다. 평생 주님께서 주신 몸 가지고 살면서도 내 몸이라고 우기고, 주님이 주신 은혜가지고 살면서도, 들풀보다도 못하면서도 마치 왕자로 만들어 달라, 공주되게 해 달라, 주 앞에 억지를 부리는 우리의 한심스러운 (모습입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더 천하게, 힘들게, 고생스럽게 인생을 살아갔건만 우리는 예수처럼 되지 말고 재물(?)처럼 되어 달라는 우리의 욕망을 더 크게 듣습니다. 주여, 주님이, 죄 없으신 분이 대신 죽기 위해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나는 주를 위해서 무슨 고생을 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