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영화 <애수 : 원제 워터루 다리(1940)>을 극장에서 보다
나에게 감정적 영향을 준 영화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작품 몇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애수>이다. 여주인공 비비안 리의 쓸쓸하면서도 고혹적인 눈빛이 특히 기억난다. 사랑에 정직(?)하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가련한 여인의 모습은 오랫동안 사랑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조그만 TV화면으로 보았던 이 영화를 대형 화면으로 다시 만날 기회를 가졌다. 과거 허리우드 극장은 여전히 <실버극장>, <낭만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데 <애수>의 상영을 알게 된 것이다.
영화를 다시 보면서 특별했던 점은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영화가 만들어졌고, 바로 현재가 영화의 배경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대령인 로이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로이는 워터루 다리에서 상념에 빠진다. 로이는 1차 세계대전 중 그 곳에서 만난 한 여인과 특별하고도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는 전시라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만났고 예측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무너지고 깨어진 그들의 사랑이 가져다 준 안타까움에 공감했다면, 40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 다시 본 영화는 계급적인 신분의 한계 속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하층 계급의 불행한 모습에 시선이 갔다.
공습경보를 피해 들어간 장소에서 가까워진 로이와 여인은 로이의 과감한 행동을 통해 곧바로 결혼을 약속하고 식을 올리려 하지만 로이는 군의 명령으로 전쟁터로 떠나야 했다. 순수하지만 무책임한 로이의 행동은 어쩌면 부유한 젊은이의 낭만적인 충동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여인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여인 또한 로이와 사랑에 빠져 무용수라는 직업도 팽개친 채 로이의 요구를 따랐으며 그 결과 무용단에서 쫓겨나고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우연하게 신문에서 발견한 로이의 사망 소식은 결국 그녀를 길에서 몸을 파는 여인으로 전락시킨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워터루역에서 상대를 물색하던 여인은 로이와의 예상치 못한 만남을 갖는다. 로이는 포로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군표를 분실하여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우여곡절 끝에 귀환한 것이다. 로이는 다시 여인과의 결혼을 위하여 여인을 자신의 부유한 대저택으로 안내하고 가족과 친척들에게 소개한다. 영화 속 로이의 가족들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신사와 숙녀들의 집단이다.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여인은 결코 자신의 과거를 씻을 수 없으며 그들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고 그 곳을 떠나 결국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한 남자와의 사랑이 인생 그 자체를 파괴시키는 운명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여인의 쓸쓸한 죽음은 여전히 가슴을 에리는 슬픔을 전달한다. 정직했고 헌신했고 믿었던 사랑이었지만, 운명과 현실의 벽 앞에 철저하게 무너지고 파괴된 것이다. 하지만 전시라는 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벌어진 로이의 충동적 행동은 결코 낭만적인 아름다움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책임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계급적 우월감에서 연유된, 타인의 사정에는 관여하지 않는 자신감이자 자기중심적 이기심의 발로였기 때문이다. 전쟁터로 떠나는 남자가 남아있을 자들의 고통에 주목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모습은 그가 아무리 사랑 그 자체의 열중하고 결코 거짓된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더라도 정말로 철없는 모습이었다.
남자에 의해 운명이 변하는 여자들의 모습 또한 안타까움을 준다. 분명 여인은 장교 신분의 남자가 접근했을 때 호감을 느꼈고 신분적 변화의 가능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의 충동적 청혼을 받아들였고 비극적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전시라는 극한적 환경 속에서 벌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몸을 파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일을 할 수 없는 여성들의 열악한 생존조건은 철저하게 사회경제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받던 집단의 어려움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로이가 다시 돌아오고 그의 집에 방문했을 때 여인은 다시금 계급적 한계와 절망에 직면한다. 모두가 친절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그녀를 상대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위선적인 모습이었고 완고한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이었다. 그녀가 느낀 것은 계급과 신분의 벽이었으며 결코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배타성이었다. 그녀가 로이의 집을 방문한 뒤에 죽음을 결정한 것은 사랑에 정직하고 철저하려는 그녀의 애틋한 감정일 수도 있지만, 더욱 큰 요인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게 되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 사슬 속에 갇혀있다는 인식의 결과였을지 모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여줬던 달려오는 차를 향해가는 눈동자의 단호함은 어리석었던 운명에 대한 기대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독립적인 의지의 표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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