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는 말
2. 이라크의 치안부재상황
3. 누가 그를 납치하였을까?
4. 운전기사 후세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5. 녹화영상물은 왜 미국 언론사에 전달되었을까?
6. 피랍사실은 누가 언제 알았을까?
7. 인질석방교섭을 왜 뒤늦게 시작하였을까?
8. 피랍사실을 왜 대사관에 신고하지 않았을까?
9. 미군당국의 정치적 음모는 없었을까?
10. 미군당국과 김천호는 어떠한 관계일까?
11. 미국이 그려낸 악마의 영상
12. 맺는 말
1. 시작하는 말
이라크 전선에서 동포청년 한 사람이 이라크 무장단체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가 결국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비보가 전파를 타고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비통함을 느꼈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고 울부짖는 유가족과 함께 우리 사회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
고 김선일 씨의 죽음 앞에서 남, 북, 해외의 민족 전체가 슬퍼한 것은, 지난 5월 11일 미국인 인질 니컬러스 버그(Nicholas Burg)가, 그리고 6월 18일 폴 존슨 2세(Paul M. John, Jr.)가 참수 당하였을 때 미국 사회가 보여준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다.
미국인 인질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미국 사회는 슬퍼하지 않았고,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군하라는 함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너무도 덤덤하게 지나갔다.
그런데 그런 미국인들과는 참으로 대조적으로, 우리 동포들은 눈물을 흘리며 긴 추모행렬을 이루었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파병반대의 촛불을 들고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대조적인 현상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그러한 대조적인 현상은 우리 동포들과 미국인들 사이에 놓여있는 심정적 차이나 정서적 표현의 차이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동포들이 추모의 눈물을 흘리며 파병반대의 촛불을 든 것은, 참혹한 피살사건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포청년의 참혹한 피살사건 속 깊은 곳에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응어리가 박혀 있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그 응어리의 실체는 아직 세상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참혹한 죽음에 얽힌 의혹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의 참혹한 죽음을 계기로 하여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드러날 수 있다는 예감이 그 응어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고 김선일 씨의 참혹한 죽음에 휘감겨있는 의혹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그의 참혹한 죽음에서 드러난 정치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려는 목적에서 이 글을 집필하였다.
감추어진 비밀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감추어진 비밀은 저절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의혹의 그늘 속에 감추어진 비밀은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투쟁에 의해서 드러난다.
2. 이라크의 치안부재상황
김선일은 지난 5월 31일 납치되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김선일은 그가 소속된 회사의 직원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통역사였다고 한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를 납치하였는지를 알려면, 현재 이라크 상황이 어떠한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 지금 이라크에서는 미군과 반미무장단체들의 혈전이 계속되고 있다.
1년 넘게 계속되는 쌍방의 전투는 막대한 인명손실과 생산기반의 파괴로 이어졌고, 시중에 총기류가 마구 나도는 무질서와 혼란, 그리고 경찰력이 마비된 치안부재의 상황을 조성하였다.
이라크군이 붕괴되면서 군대 무기고에 있던 총기류 4백20만 정이 도난 또는 밀매되었는데, 거기에 이라크 민간인들이 이미 보유하고 있던 총기류 3백20만 정까지 더하면 현재 약 7백40만 정의 총기류가 이라크 전역에 나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무장강도단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무장강도단은 이라크에서 이른바 '재건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는 미국 기업의 직원을 납치하여 인질로 잡고 거액의 몸값을 받아내는 단순범죄집단이다.
이라크 전역에서 치안부재상황이 계속되면서 이른바 '알리바바'라고 불리는, 금품을 노린 무장강도들이 날뛰고 있는데, 그들이 외국인을 납치하여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인질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이라크 현지에서 사업을 하였던 오무전기 부사장 황장수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라크에서는 금품을 노린 무장강도들이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이라크인까지 납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무장강도단이 노리는 범죄대상들 가운데 주요표적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본사를 두고 있는 케이비알(KBR, Kellog, Brown & Root)이다.
이 회사는 이라크 점령 미군에게 식품과 생필품을 공급하는 군납업체다.
이 회사는 이라크 전역의 미군에게 하루 25만 명분에서 50만 명분의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일하고 있는 케이비알 직원과 그 하청업체 직원은 2만4천여 명이다.
케이비알은 1995년부터 2000년까지 현 부통령 딕 체니(Dick Cheney)가 회장직(CEO)을 맡았던 세계 2대 유전개발업체인 핼리버튼(Halliburton)의 자회사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병참용역과 전후복구사업과 관련하여 1백80억 달러의 계약을 미국 국방부로부터 따냈다. 핼리버튼은 미군 계약수주 규모 제6위에 오른 초대형기업이다.
핼리버튼 자회사인 케이비알이 미군에게 제공하는 식품 및 생필품 공급계약을 맺은 상대는 미국 육군·공군 교역공사(Army and Air Force Exchange Service, AAFES)다.
1895년에 설립된 교역공사는 미국 본토는 물론, 전세계에 주둔하는 미군들과 해외파견 정부관리들에게 식품과 생필품을 공급하는 준정부기관이다.
교역공사는 한국(조선)전쟁에 동원된 미군에 대한 군납도 담당하였다.
교역공사 사장은 미군 현역 여성육군소장인 캐스린 프로스트(Kathryn G. Frost)이고, 부사장은 현역 여성공군준장 토리서 스틸(Toreaser Steele), 그리고 이사장은 현역 중장인 찰스 매헌 2세(Charles S. Mahan, Jr.)이다.
미국 육군성 부차관보 존 맥클로린(John McLaurin), 미국 공군성 부차관보 켈리 크레이븐(Kelly F. Craven) 같은 미군수뇌들이 이사로 되어 있다.
4만7천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교역공사는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35개 나라에서 미군영내 매점(Post Exchange, PX) 3천여 곳, 미군영내 대형상점(Base Exchange, BX) 2백여 개 등, 미군과 그 가족들을 상대로 하는 군납시설 1만2천여 개를 운명하고 있다.
거기에는 햄버거 판매점, 간식판매점, 이발소, 미용실, 사진관, 영화관 등이 포함된다.
김선일이 직원으로 소속되어 있었던 군납업체 가나무역(Cana General Trading Co.)은 케이비알의 하청업체다.
케이비알은 미군 군납업체이므로 무장강도단만이 아니라 반미무장단체들의 테러표적으로 되었다.
지난 4월 9일 반미무장단체의 매복공격으로 미군 2명과 미국계 민간인 7명이 실종되었는데, 피습지점 부근에서 시체로 발견된 4명은 케이비알 직원들이었다.
또한 6월 27일 알-아라비아 텔레비전방송은 미군이 사흘 안에 이라크에서 억류한 수감자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파키스탄인 인질을 참수하겠다고 협박하였는데, 그 파키스탄 인질도 케이비알 직원이다.
이처럼 케이비알이나 그 하청기업인 가나무역과 같은 미군 군납업체들은 현재 반미무장단체의 납치·테러표적이 되었다.
이라크에서 사업을 하는 동포기업인의 말을 인용한 『서울신문』 2004년 6월 28일자 보도에 따르면, 반미무장단체들은 미군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에게 금 10-20kg의 현상금을 걸어놓고 납치·테러하려고 하는 실정인데, 가나무역도 납치·테러표적에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라크 주재 남(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지난 4월초부터 5월 사이에 이라크 주재 대사관이 팩스를 통해 가나무역에게 납치 및 테러 대상임을 알려주고 무려 스무 차례 이상 철수를 권고하였다고 밝혔다.
3. 누가 그를 납치하였을까?
지난 5월 31일 케이비알 직원들이 납치되었다.
케이비알 직원들과 함께 무장강도단에게 납치된 사람들 가운데는 케이비알 하청업체 가나무역의 직원 김선일과 그의 이라크인 운전기사 후세인도 있었다.
가나무역 사장 김천호는 6월 20일 『연합뉴스』 특파원과의 전화통화에서 김선일과 함께 이동했던 케이비알 소속의 제3국인 직원 여러 명도 함께 납치되었다고 말했다.
김선일과 함께 납치된 케이비알 소속의 제3국인 직원들은 터키인 세 사람인 것으로 알려졌다.
6월 29일 남(한국)의 엠비씨(MBC) 라디오방송은 이라크에 있는 익명의 동포기업인과의 전화통화를 방송하였는데, 그는 김선일을 살해한 반미무장단체에 납치된 터키인들은 지난 5월 31일 김선일이 납치될 때 함께 납치된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김선일을 살해한 반미무장단체는 자기들이 억류하고 있던 터키인 직원 세 사람을 6월 29일에 풀어주었다.
김선일을 납치한 무장단체는 어떤 단체인가를 묻는 『연합뉴스』 특파원의 물음에 김천호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무자헤딘(특정한 무장단체의 이름이 아니라 이슬람 전사를 통칭하는 아랍어-옮긴이)의 하부조직으로 알고 있다. 무자헤딘의 대장을 접촉한 결과 자신들의 하부조직이 억류중인 것 같다고 말하면서 걱정 말고 하부조직의 소행이니 손을 써보겠다고 했다. 그들은 특히 김선일 씨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표적은 케이비알(KBR) 직원들이었는데 김선일 씨가 이들과 함께 있어 우연히 붙잡혀 온 것이라고 말했다."
김천호는 김선일을 살해한 무장단체가 무자헤딘의 하부조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으나, 그것은 그의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미군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김선일을 살해한 것은 알-자르카위가 이끄는 반미무장단체 알-타우히드 왈-지하드(al-Tawhid wa'l-Jihad)라고 한다.
알-타우히드 왈-지하드라는 단체이름은 '일신교와 성전(Monotheism and Holy War)'이라는 뜻이다.
어쨋든 알-자르카위의 반미무장단체는 무자헤딘의 하부조직이 아니다.
납치범들의 표적이 케이비알 직원들이었으므로 납치범들은 그들을 인질로 붙잡고 케이비알에게 요구조건을 내걸었어야 하고 케이비알 직원들을 살해한다고 위협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납치범들은 자기들의 표적이었던 케이비알 직원들이 아니라 우연히 붙잡혀 왔고, 신변안전을 보장한다고 했던 김선일을 살해했다.
이것은 케이비알 직원들과 김선일을 함께 납치하였던 납치범들이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서 자기들의 표적이 아닌 우연한 피랍자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김선일이 다른 무장단체에게 살해되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김선일을 납치한 것은 무장강도단이었고, 그를 살해한 것은 알-타우히드 왈-지하드라는 반미무장단체라는 것이다.
범죄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납치범과 살해범이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이라크에서 사업을 하는 동포기업인의 말을 인용한 『서울신문』 2004년 6월 28일자 보도에 따르면, 김선일은 지난 5월 31일 금품을 노린 무장강도들에게 납치되었다고 한다.
김선일을 고용한 가나무역 사장 김천호와 가깝게 지냈던 오무전기 부사장 황장수도 김선일이 반미무장단체가 아니라 금품을 노린 무장강도단에게 납치되었을 가능성을 내비쳤다. (『연합뉴스』 2004년 6월 28일자)
6월 29일 남(한국)의 엠비씨(MBC) 텔레비전방송은 피랍 당일인 5월 31일 김선일이 탔던 차량을 대여한 이라크 현지 운송회사 관계자 알리와의 전화통화내용을 보도하였는데, 알리의 말에 따르면, 김선일은 그 회사의 운전기사인 후세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후세인과 함께 납치되었다고 한다.
김선일을 납치한 사람들이 미국 기업의 직원들이나 이라크인 부유층 인사를 납치하여 몸값을 받아내는 단순한 무장강도들이었다면, 무장강도단이 케이비알 직원들을 납치한 목적은 정치적 목적에서 그들을 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몸값으로 거액을 받아 챙기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케이비알 직원들, 그리고 김선일과 후세인을 납치한 무장강도단은 인질들을 살해하려는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미무장단체가 아니라 무장강도단이 케이비알 직원들과 김선일을 납치하였다는 점을 밝히는 문제는, 김선일 피살사건의 전모와 진상을 파악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가나무역 사장 김천호는 케이비알 직원들과 김선일을 납치한 사람들의 정체에 대해서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김천호는 7월 1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석방교섭을 하였던 단체와 김선일을 살해한 단체가 동일한지를 묻는 기자의 물음이 제기되자, "동일단체라고 생각한다. 협상과정에서 바뀌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당혹스럽다."고 답변하였다.
『연합뉴스』 기자는 '굉장히 당혹스럽다'는 그의 표현을 지적하면서 "묘한 여운을 남겼다."고 지적하였다.
아래의 분석과정에서 밝혀지는 것은, 김선일을 납치한 무장강도단, 김천호가 인질석방교섭을 벌이면서 접촉한 반미무장단체, 김선일을 살해한 반미무장단체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4. 운전기사 후세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남(한국) 엠비씨(MBC) 라디오방송이 이라크에 머물고 있는 익명의 동포기업인과 6월 29일에 진행한 국제통화에 따르면, 김선일과 함께 납치됐던 운전기사 후세인은 5월 31일 납치된 후 나흘이 지난 6월 3일에 풀려났다고 한다.
후세인은 피랍사건에 대해서 발설하면 총살하겠다는 무장강도단의 협박을 받고 은신하고 있다고 한다.
무장강도단이 후세인을 곧 풀어준 까닭은, 이라크인이 경영하는 운송회사를 상대로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후세인이 풀려난 직후 김천호가 그를 만나서 피랍상황을 파악하였다는 사실이다.
남(한국) 엠비씨(MBC) 라디오방송이 이라크에 머물고 있는 익명의 동포기업인과 6월 29일에 진행한 국제통화에 따르면, 김천호는 후세인이 풀려난 후 바로 그를 만났다고 한다.
이라크에서 사업을 하는 동포기업인의 말을 인용한 『서울신문』 2004년 6월 28일자 기사에서도 김천호가 후세인의 소재를 알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김선일 피살사건의 전모와 진상을 규명하는 데서 후세인에 관련된 문제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피랍사건에 관하여 발설하지 말라는 총살협박을 받고 은신 중인 후세인을 김천호가 은밀히 만났다면, 김천호가 어떻게 그의 소재를 파악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김천호가 은신 중인 후세인의 소재를 파악하여 만났다면, 그것은 적어도 케이비알 직원들과 김선일이 납치된 사건에 관해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그 사건을 추적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협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후세인 석방을 전후하여, 다시 말해서 피랍사건 초기에 피랍사건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그 사건을 추적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미군정보당국자들밖에 없다.
따라서 만일 김천호가 후세인을 만났다면, 그것은 미군당국이 김선일 피살사건을 초기부터 추적·파악하고 있었다는 점, 김천호가 미군당국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 김천호가 김선일 피살사건을 초기부터 알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김천호는 7월 1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후세인이 풀려났다는 주장이나 후세인이 풀려난 뒤에 자기가 그를 만났다는 주장을 모두 부인하였다.
5. 녹화영상물은 왜 미국 언론사에 전달되었을까?
5월 31일 케이비알 직원들을 인질로 납치한 범인들이 무장강도단이었다면, 그들이 케이비알을 상대로 인질의 몸값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장강도단이 인질의 몸값을 요구하려면, 케이비알 직원들을 자기들이 납치하였다는 사실을 케이비알에 알려주어야 한다.
납치범들이 인질억류사실을 통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인질 모습을 촬영한 녹화영상물(Videotape)을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6월 3일 합동통신 텔레비전방송망(Associated Press Television Network, APTN) 바그다드 지국이 입수하였다는 문제의 녹화영상물이다.
지국의 발표에 따르면, 그 녹화영상물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배달원에 의해 전달되었다."고 한다. 공개된 녹화영상물에는 김선일의 진술모습이 촬영되어있다.
반미무장단체가 인질모습을 촬영한 녹화영상물을 공개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아랍어 텔레비전방송에 녹화영상물을 방영하게 한다.
그런데 김선일의 진술을 촬영한 문제의 녹화영상물은 아랍어 텔레비전방송이 아니라 이례적으로 미국 언론사인 합동통신 텔레비전연계망 바그다드 지국에 전달되었다.
더 이상한 것은, 반미무장단체 관련자가 인질모습을 촬영한 녹화영상물을 직접 들고 가서 미국 언론사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녹화영상물이 반미무장단체에 의해서 촬영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반미무장단체가 인질모습을 촬영한 녹화영상물에는, 칼리쉬니코프 소총(Kalishnikof assault rifle)과 로켓추진수류탄(PRG)을 비껴들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반미무장단체요원들이 인질을 앞에 앉혀놓고 아랍어로 자기들의 정치적 요구를 발표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미무장단체요원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요구를 발표할 때 이교도의 언어이며 적국의 언어인 영어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 김선일의 진술을 촬영한 문제의 녹화영상물에는 반미무장단체요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촬영각도에서 벗어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어떤 질문자가 영어로 질문하고 김선일이 영어로 자세하게 답변하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다.
반미무장단체가 인질모습을 촬영한 녹화영상물에서는 죽음의 공포를 느낄 수 있는데, 문제의 녹화영상물에 나타난 김선일의 진술모습이나 질의·응답 분위기에서는 죽음의 공포가 엿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살벌한 인질극이 아니라 마치 기자회견 장면을 촬영한 듯한 분위기다.
이것은 그 녹화영상물이 반미무장단체에 의해서 촬영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반미무장단체의 녹화영상물에는 자기들의 정치적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인질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문제의 녹화영상물에는 아무런 요구조건도 담겨져 있지 않다.
문제의 녹화영상물에는 미군이 체포·투옥한 알-카에다(al-Queda) 조직원들을 석방하라는 요구도 없고, 미국을 저주하는 말도 없고, 외국군을 철군하라는 요구도 없다.
나의 판단으로는, 그 녹화영상물에는 김선일의 진술만이 아니라 김선일과 함께 납치된 케이비알의 터키인 직원들의 진술도 담겨있으며, 그들을 납치한 무장강도단이 인질석방의 대가로 거액의 금품을 케이비알에게 요구하는 내용도 담겨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장강도단이 노린 것은 미국 회사인 케이비알의 몸값지불이었으므로, 하청업체인 가나무역의 통역사 김선일의 진술내용보다는 피랍된 케이비알 직원들의 진술내용을 더 중시하여 촬영하였을 것이다.
합동통신 텔레비전방송망은 김선일 피살사건이 일어난 뒤에, 김선일의 진술부분만을 공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합동통신 텔레비전방송망 바그다드 지국이 문제의 녹화영상물을 입수한 바로 그날(6월 3일), 합동통신 서울지국 기자는 발빠르게 김선일의 억류사실을 확인하는 내용의 전화를 외교통상부에 걸어 "김선일이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이라크에서 실종되었느냐?"고 물었다.
외교통상부 직원은 피랍보고가 없었다고 답변하였다.
문제의 녹화영상물에 김선일만이 아니라 케이비알 직원들의 진술도 촬영되어 있다면, 합동통신 기자는 외교통상부만이 아니라 케이비알 또는 이라크 주둔 미군당국에도 직원들의 억류사실을 확인하는 내용의 전화를 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피랍사실은 누가 언제 알았을까?
김선일이 케이비알 직원들과 함께 실종되었다는 통보를 김천호에게 전해 준 것이 미군당국이었다는 사실은 김천호 자신의 발언에서도 드러났다.
김천호는 6월 20일 『연합뉴스』 특파원과의 전화통화에서 "미군측으로부터 김선일 씨가 케이비알 소속 직원들과 함께 기지를 떠나 바그다드로 향한 뒤 소식이 없다는 통보를 받고 실종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김천호가 김선일 실종사실을 미군당국으로부터 통보 받았다면, 그는 그 이후에도 미군당국과 계속 연락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김천호는 미군당국으로부터 통보 받은 내용을 '실종사실'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실종사실이 아니라 피랍사실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김천호가 미군당국으로부터 피랍사실을 통보 받았다는 것은 김천호 자신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김천호는 6월 20일 『연합뉴스』 특파원과의 전화통화에서 "무장세력은 자기들이 김선일 씨와 이라크인 현지직원 한 명, 그리고 케이비알(KBR) 직원을 억류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케이비알(KBR) 직원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모르며, 미군측도 말을 안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미군당국이 피랍자들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고 있다는 김천호의 말은, 그가 김선일 피랍사건과 관련하여 미군당국과 연락하고 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랍된 자기 회사직원을 구출하기 위해서 미군당국과 연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장세력이 김선일과 이라크인 현지직원 한 명을 억류하고 있다는 김천호의 말에 나오는 이라크인 현지직원은, 김선일과 함께 납치된 운전기사 후세인을 뜻한다.
후세인이 6월 3일에 풀려났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후세인이 억류 중이라는 김천호의 말은 6월 3일까지의 억류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하게도, 김천호는 『연합뉴스』 특파원과 전화통화를 하였던 6월 20일에 6월 3일까지의 상황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김천호는 김선일 피랍사실을 미군당국으로부터 통보 받았다는 자신의 발언을 부인하였다.
그는 팔루자에 갔던 가나무역 직원이 팔루자 근처에서 김선일이 타고 갔던 지엠씨(GMC) 차량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보고를 받고, 김선일이 무장단체에 억류 중이라는 사실을 6월 10일쯤 알게 되었다고 바그다드 주재 『연합뉴스』 특파원에게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말이다.
가나무역 직원이 김선일이 타고 갔던 차량을 우연히 발견하였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지만, 길가에 버려진 차량을 보고 어떻게 무장단체에 억류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까?
김천호는 6월 20일 『연합뉴스』 특파원과의 전화통화에서 "케이비알의 부식수송 트럭과 트레일러 세 대, 가나무역의 차량 한 대도 납치범들에게 압류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납치범들에게 압류된 차량을 우연히 발견하였다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피랍 당일인 5월 31일에 김선일이 탔던 차량을 빌려준 이라크 현지 운송회사 관계자 알리는 6월 29일 남(한국)의 엠비씨(MBC) 텔레비전방송과의 대담에서 자기가 가나무역과 전화통화를 하였던 6월 4일 또는 5일에 가나무역은 김선일 피랍사실을 대사관에 알리겠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밝히면서, "김천호 사장이 6월초에 이미 김선일 씨가 무장세력에 억류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알리의 말에 따르면, 김천호는 이미 6월 4일 또는 5일에 김선일 피랍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천호가 미군당국으로부터 김선일 피랍사실을 통보 받은 시점은 6월 3일 직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천호는 7월 1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군당국에게 김선일의 실종과 관련하여 어떠한 문의나 협조요청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미군당국이 김선일 피랍사실을 피랍사건 초기에 알고 있었다는 주장과 자신이 김선일 피랍사실을 피랍사건 초기에 알고 있었다는 주장을 모두 부인하였다.
김천호는 7월 1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6월 10일께 본사 매니저 장계인 씨가 개인적으로 평소 알고 지내던 미군 거래 업체인 에이에이에프이에스(AAFES-미국 육군·해군 교역공사를 말함-옮긴이) 소속 군무원 매니저 짐(Jim)에게 김 씨의 실종사실에 관한 소식을 알아봐 줄 수 있는지 문의했는데 짐으로부터 '그 문제는 우리가 확인하기 힘들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하고, "(짐에게 문의한 것) 이외에 미군당국에 김 씨의 실종과 관련돼 어떠한 문의나 협조요청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6월 28일 오무전기 부사장 황장수에게 보낸 전자편지에서 자신의 귀국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한국인 직원 4명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미군 각 부대장과 에이에이에프이에스(AAFES) 담당자와 접촉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김천호의 두 가지 발언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회사 직원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문제에 관해서 미군당국과 협의하였던 김천호가 정작 김선일 피랍사건에 관해서는 미군당국과 협의하지 않고 자기 회사 지배인을 통하여 미군교역공사 소속 군무원에게 개인적으로 문의하였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7. 인질석방교섭을 왜 뒤늦게 시작하였을까?
열린우리당 진상조사단이 6월 25일 국회기자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개한 김천호와의 전화통화 녹취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진다. (『연합뉴스』 2004년 6월 25일자)
첫째, 김천호는 변호사, 이라크 현지직원 두 사람과 함께 팔루자에서 인질석방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상대측에서 여러 사람이 나왔고 높은 사람이 와서 자기들을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여 협상하였다.
둘째, 김천호는 6월 3일에 김선일 실종사실을 알았고, 6월 15일께부터 2-3회 정도 인질석방교섭을 진행하였다.
셋째, 김천호가 인질석방교섭에서 상대한 "팔루자에서 가장 큰 무장단체"는 자기들과 김선일을 억류한 무장단체가 상하관계라고 말했는데, 김천호는 나중에 두 단체는 서로 관계가 없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김천호가 김선일을 억류하고 있었던 무장강도단을 상대로 인질석방교섭을 한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김선일 억류사건과는 무관한 다른 무장단체와 인질석방교섭을 진행하였음을 말해준다.
주목할 것은, 김천호가 인질석방교섭을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문제다.
김천호는 6월 25일에 진행된 열린우리당 진상조사단과의 전화통화에서 6월 15일께부터 인질석방교섭을 시작했다고 말했다가, 7월 1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6월 18일 이후부터" 인질석방교섭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가 발언한 내용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인질석방교섭이 시작된 시점은 6월 15일이 아니라 6월 17일이나 18일인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분석한 바 대로라면, 김천호는 6월 3일 직후에 이미 미군당국으로부터 김선일 피랍사실을 통보 받았으면서도 6월 17일이나 18일에 가서야 인질석방교섭을 시작한 것이 된다.
이것은 김천호가 인질석방교섭을 아주 뒤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는 7월 1일에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19일 또는 20일쯤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얘기를 (변호사로부터) 듣고 굉장히 당황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인질석방교섭을 시작하자마자 상황이 어려워지고 따라서 매우 당황했다는 말이며, 인질석방교섭이 처음부터 통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선일 억류사건과는 무관한 무장단체와 인질석방교섭을 진행하였다면, 처음부터 아무런 성과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반미무장단체에게 납치된 미국인 폴 존슨 2세의 억류장면이 6월 15일에 공개된 것은 인질억류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천호가 인질석방교섭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김선일이 인질석방교섭을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인질억류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무장강도단은 가나무역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억류하고 있던 김선일을 반미무장단체에게 넘겨버렸던 것이다.
김선일과 함께 납치되어 억류되었던 케이비알 소속 터키인 직원 세 사람도 김선일과 함께 반미무장단체에 넘겨진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 2004년 6월 28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에서 사업하는 익명의 동포기업인은 『서울신문』과의 국제전화통화에서 미군당국은 김선일이 무장단체로 "넘겨졌다"는 사실을 6월 10일께 김천호에게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김선일을 비롯한 인질들이 반미무장단체에게 넘겨졌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미군당국이 김선일이 반미무장단체에 넘겨졌다는 사실을 6월 10일께 김천호에게 알려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에 있는 온누리교회의 이라크 선교단 관계자는 6월 29일 남(한국)의 인터넷 언론매체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가나무역 직원 정영하 씨가 26일 귀국했을 때 밝힌 대로 현지에서는 6월 10일에 피랍사실을 인지했다. 이때쯤 선교팀도 알게 됐고 김선일 씨가 안전하게 풀려날 수 있도록 기도모임도 가졌다."고 말했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김천호가 왜 인질석방교섭을 늦게 시작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발언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그가 한때 미군당국에게 불만을 가졌다고 발언한 사실이다.
미군당국에 대한 김천호의 불만은, 그가 6월 20일 『연합뉴스』 특파원과의 전화통화에서 "김 씨 사건(김선일 씨 납치사건을 뜻함-옮긴이)을 해결하고 미군측에 항의도 할 겸해서 (모술에) 갔다."고 말한 사실에서 엿보인다.
나의 판단으로는, 미군당국에 대한 김천호의 불만과 인질석방교섭의 지연이 서로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발언 맥락을 살펴보면, 6월 20일 당시 김천호가 미군당국에 항의할만한 불만요인은 김선일 피랍사건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김천호는 미군당국이 인질석방교섭을 무관심하게 대하거나 또는 지연시키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라크에서 사업하는 동포 기업인이 『서울신문』과 국제전화통화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김천호는 미군당국으로부터 김선일이 무장단체로 넘겨졌다는 사실을 통보 받은 직후 가나무역 직원들에게 김선일의 피랍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김천호가 김선일 피랍사실을 숨기려 하였음을 말해준다.
김천호는 김선일 피랍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결국 알-자지라 텔레비전방송을 통해서 전세계에 알려졌다.
6월 20일 알-자지라 텔레비전방송은 심야보도시간을 통해 김선일이 복면을 한 세 명의 반미무장단체요원들 앞에서 울부짖으며 석방을 호소하는 장면을 담은 녹화영상물을 방영하였다.
이튿날인 6월 21일 이라크 점령군 임시행정처(CPA) 대변인 댄 세너는 기자회견에서 김선일 피랍사건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모든 인질사건에 있어 최우선 순위를 두고 접근한다. 김선일 씨를 포함한 모든 인질의 안전한 구출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정보와 군사자원을 투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빈말에 지나지 않았다.
이라크 점령 미군 대변인 마크 키미트(준장)는 김선일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작전계획이 있는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피했다.
알-자지라 텔레비전방송을 통해 김선일 피랍사실이 세상에 공개되자, 몇몇 사람들은 반미무장단체를 상대로 하는 인질석방교섭에 들어갔다.
뒤늦게 인질석방교섭에 나선 사람들은 사설경호업체 엔케이티에스(NKTS) 사장 최승갑과 아시아종교평화회의(ACRP) 사무총장이며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인 김성곤이다.
6월 21일 최승갑은 김선일 피랍소식을 듣고 이라크인 동업자 모하메드 알-오베이디에게 김선일의 소재 파악과 안전귀환을 위한 방안을 모색할 것을 요청하였다.
알-오베이디는 이라크 명문가 출신으로 여러 무장단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승갑은 납치된 김선일의 소재가 파악되는 대로 바그다드 주재 남(한국) 대사관 등에 알려 정부 차원의 조속한 석방노력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2004년 6월 21일자)
6월 22일 최승갑은 "알-오베이디가 21일 저녁에 김선일 씨를 억류하고 있는 무장단체와 두 차례 협상을 벌였다. 요구조건이 수용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죽이지 말라고 요청해 참수를 막았다. 자기들이 내세운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질 경우 조만간 김 씨를 풀어줄 것이라는 의향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구체적인 석방조건이 알려질 경우 협상이 무산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 오베이디가 오늘(22일) 인질범들과 다시 만나 석방 조건 등에 대해 협의하고 있으며 김 씨는 현재까지 안전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변안전 문제 때문에 정확한 억류장소는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승갑은 무장단체와 직접협상을 통해 김선일을 구출하기 위해 6월 23일 이라크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6월 22일 김성곤은 『연합뉴스』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세계종교평화회의(WCRP) 소속 이라크 종교계 인사들이 22일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김선일 씨를 직접 만나 생존을 확인하였으며, 내일 다시 무장단체와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협상에 진척이 있는 대로 바로 연락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미군당국이 김선일의 시신을 발견한 시각이 6월 22일 오전 8시30분(현지시간)이었으므로, 이라크 종교계 인사들이 6월 22일에 김선일을 직접 만났다는 말은 와전이 아니면 거짓이다.
김선일이 생존한 경우라도, 외부인이 반미무장단체의 정치적 인질을 직접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승갑과 김성곤이 긴급히 나섰던 인질석방교섭은, 김천호의 인질석방교섭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선일을 억류하고 있는 반미무장단체가 아니라 억류사건과는 무관한 다른 무장단체를 상대로 협상이 아니라 탐문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때는 너무 늦었다.
김선일의 생사운명은 6월 18일 노무현 정부의 한국군 추가파병 공식발표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6월 18일 오후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린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 회의에서는 한국군 추가파병안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이를 공식발표하였다.
그 공식발표를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 국무부는 즉각 성명을 발표하면서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파병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한국이 병력 3천명을 이라크에 배치하면 한국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이라크에서의 안정화 작전에 대한 세 번째로 큰 기여국이 될 것이다. 이 배치는 이라크 재건과 관련한 연합군의 노력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노무현 정부가 한국군 추가파병안을 공식발표하고, 부시 정부가 사의를 표명하였다는 소식은 전파를 타고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카타르에 본부를 둔 알-자지라 방송과 두바이에 본부를 둔 알-아라비아 방송은 한국군 추가파병을 공식발표한 것을 주요소식으로 일제히 보도하였다.
6월 19일 이라크 최대 일간지 『아자만』도 한국군 추가파병 소식을 1면 주요소식으로 보도하였다.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추가파병을 공식발표하였던 바로 그날(6월 18일),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반미무장단체에 인질로 잡혀 있던 미국인 폴 존슨 2세가 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추가파병을 공식발표하였다는 소식과 미국인 피살사건 보도는 이라크에 체류하는 남(한국) 사람들에게 테러공포를 안겨주었다.
이라크에 머물고 있는 남(한국) 민간인은 "한국인에 대한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사관 등 정부 파견 인사들은 물론이고 교민과 상사원 그리고 체류 기자도 모두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4년 6월 18일자)
8. 피랍사실을 왜 대사관에 신고하지 않았을까?
지금 감사원은 김천호가 김선일 피랍사실을 왜 이라크 주재 남(한국) 대사관에 신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 문제를 조사하고 있다.
김천호는 대사관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나의 판단으로, 그 말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에서 김천호와 가깝게 지냈던 오무전기 부사장 황장수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최근 이라크에 있는 김천호와 너 다섯 차례 국제전화통화를 하였다고 하면서, 김천호가 김선일 피랍사실을 이라크 주재 남(한국) 대사관에 "알리지 않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에 있는 온누리교회 이라크 선교단 관계자는 6월 29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피랍사실을 왜 대사관에 알리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 "김천호 사장이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우리도 그렇게 판단했다."고 말했다.
6월 20일 밤, 알-자지라 텔레비전방송이 억류된 김선일의 모습을 방영하기 직전, 바그다드 주재 『연합뉴스』 특파원은 이라크 주재 남(한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직원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한 뒤 대사관 잔디밭에서 약 세 시간 동안 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 특파원은 만약 대사관 직원들이 당시에 피랍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자기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운동도 함께 하는 여유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바그다드의 가나무역 직원들이나, 서울의 온누리교회 이라크 선교단에서는 김선일 피랍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정작 남(한국) 대사관은 김선일 피랍사실을 거의 막판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김천호가 대사관이 아니라 미군당국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호가 김선일 석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의지해야 했던 상대는, 무능한 이라크 주재 남(한국) 대사관이 아니라 대사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력한 미군당국이 아니었을까?
이라크 주재 남(한국) 대사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대사관은 지난 4월초부터 5월 사이에 가나무역에게 팩스를 통해 납치·테러의 위험성을 알려주면서 스무 차례 이상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김천호는 철수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천호가 대사관의 철수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김선일 피랍사실을 대사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대사관보다 미군당국을 더 신뢰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정황증거로 생각된다.
김천호는 대사관에 왜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제기되자, 자기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김선일을 석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서 신고하지 않았고, 석방교섭에 관여한 이라크인 고문변호사가 대사관에 신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한 권고를 받아들여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였다.
오무전기 부사장 황장수는 6월 28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천호가 김선일 피랍사건으로 "정신적 혼란에 빠져 대사관에 알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혹은 여전히 남는다.
김천호가 대사관보다 미군당국을 더 신뢰한다는 것, 자기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김선일을 석방시킬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다는 것, 그리고 고문변호사의 권고를 받아들였다는 것 등은 대사관에 신고하지 않을 만한 결정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다.
미군당국에 대한 신뢰, 자기의 독자적인 석방노력, 고문변호사의 권고는 대사관에 신고하는 것과 배치되는 것들이 아니다.
여기서 의혹의 초점은 김천호가 석방교섭을 너무 늦게 시작하고, 대사관에 신고조차 하지 않은 것이 상황판단에서 착오를 빚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에 따라 진행된 일련의 행동이 아니었을까 하는 물음으로 집중된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혀줄 진술이나 발언은 나오지 않았으나, 김천호가 미군당국과 연락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의혹은 김천호 의 개인적 의도가 아니라 미군당국의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가를 밝혀야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9. 미군당국의 정치적 음모는 없었을까?
아주 공교롭게도, 김선일이 억류되어 있었던 바로 그 기간에 바그다드-워싱턴-서울을 잇는 삼각공간에서는 주목할만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군 추가파병을 실행하기 위한 마지막 정리작업이 그것이다.
그 정리작업은 이라크 주둔 미군당국, 워싱턴 정치권, 노무현 정부당국이 3자 합동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김선일이 무장강도단에게 납치된 이튿날인 6월 1일 공교롭게도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 송기석을 단장으로 하는 이라크 파병협조단이 이라크 아르빌을 방문하였다.
이라크 파병협조단은 6월 3일까지 다국적군단사령부(MNC) 부사령관 캐나다군 소장 나틴체크와 기획처장 미군 대령 웰치와 동행하여 아르빌을 돌아다녔고, 한국군을 파병하기 위한 실무협상을 쿠르드 자치정부와 진행하였으며, 6월 3일에는 바그다드로 가서 이라크 주둔 다국적군단사령부 사령관 미군 중장 토머스 메츠(Thomas Metz)를 만났다.
이라크 파병협조단은 6월 4일 나시리야에 주둔하고 있는 서희, 제마부대를 방문하였다.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 송기석이 이라크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추가파병될 한국군 자이툰부대의 주둔지 두 곳이 결정되었다고 밝힌 것은 6월 7일의 일이었다.
상황전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김선일이 억류된 가운데 이라크 파병협조단이 아르빌을 찾았던 바로 그날,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권진호가 워싱턴을 방문하였다. 그
는 워싱턴에서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Colin L. Powell), 국방차관 폴 월포위츠(Paul D. Wolfowitz),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그리고 연방의회 관계자들을 두루 만나 한국군 추가파병문제를 논의하였다.
권진호는 6월 3일 워싱턴에서 열린 남(한국) 특파원들과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병 결정 때 반대가 많았으나,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줘야 한다는 동맹정신이 정부 결정의 결정적 요소가 됐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우리 국회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텐데 일일이 잘 설득해 미국과 약속을 꼭 지키도록 노력하겠다고 사석에서도 말씀했다. 그런 입장을 전했다. 우리 정부 입장이 그렇게 진지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군을 이라크에 추가파병하는 시기가 앞으로 2주안에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2004년 6월 4일자)
남(한국) 언론은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의 워싱턴 방문이 주한미군 이라크 차출문제와 한국군 이라크 추가파병문제에 관한 "추측, 걱정, 낭설을 부시 정부에게 해명하는 것"이 한·미 관계의 최대 현안임을 시사해주었다고 지적하였다. (『연합뉴스』 2004년 6월 4일자)
무장강도단이 억류하고 있던 김선일이 반미무장단체에게 넘겨졌다는 정보를 미군당국이 김천호에게 통보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6월 10일 청와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는 이라크 파병 한국군 선발대를 파병할 날짜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6월 16일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지도부 및 국민통합실천위 소속 의원 등 19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한국군 추가파병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하였다.
이처럼 바그다드-워싱턴-서울을 잇는 삼각공간에서 한국군 추가파병문제가 마지막으로 정리되고 있던 시기에 만일 김선일 억류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추가파병반대투쟁이 청와대를 강타하면서 남(한국) 사회는 대혼란에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
한국군 추가파병문제가 마지막으로 정리되고 있던 중대한 시기에 미군당국은 김선일 억류사실을 은폐시키고 인질석방교섭을 지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천호는 6월 20일 『연합뉴스』 특파원과의 전화통화에서, 미군당국이 김선일 억류에 관하여 어떤 대책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받았을 때, 미군당국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고 답변하였다.
상황을 지켜보자는 미군당국의 말은, 미군당국이 6월 20일까지 김선일 억류사실을 은폐시키고 인질석방교섭을 지연시키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국군 추가파병결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미군당국이 김선일 억류사실을 은폐시키고 인질석방교섭을 지연시키고 있는 가운데, 김선일은 반미무장단체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았다.
미군당국은 한국군 추가파병결정이라는 자기들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인질로 붙잡혀 있었던 김선일을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10. 미군당국과 김천호는 어떠한 관계일까?
현재 언론의 관심은 김천호와 미군당국의 관계에 쏠려있다.
김천호는 7월 1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과 미군당국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검토할 때, 미군당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그의 주장은 신빙성을 잃게 된다.
김천호는 6월 20일 『연합뉴스』 특파원과의 전화통화에서 "미군이 어제(6월 19일) 빨리 좀 보자고 해서 모술에 가서 대책을 협의한 뒤 그 결과를 갖고 공관에 신고하려다 늦었다."고 말했다.
알려진 대로, 모술이라는 도시는 이라크 북부유전지대에 있는 이라크 제3의 도시이며, 점령군의 전략요충지다.
모술에는 미군소장 데이빗 페트리우스가 지휘하는 101공중강습사단 지휘부가 있다.
주목할 것은, 모술의 미군당국이 6월 19일에 김천호를 급히 만나자고 연락하였다는 사실이다. 미군당국이 김천호를 급히 만나자고 연락했던 까닭은, 바로 그 전날 노무현 정부가 한국군 추가파병을 발표하고(6월 18일), 미국인 폴 존슨의 피살소식이 전해진 것(6월 18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부가 한국군 추가파병결정을 공식발표하자 미군당국은 김선일이 반미무장단체에 억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공개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 추가파병이 이미 확정·발표된 이상, 김선일 억류사실이 공개된다고 해도 그것이 추가파병결정을 뒤집을 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미군당국은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미군당국은 만일 김선일이 살해되는 경우 억류사실이 공개되는 것보다 더 부정적인 영향을 추가파병결정에 미칠 것으로 예상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미군당국은 추가파병결정이 공식발표된 6월 18일 이후부터는 김선일을 구출하기 위한 대책을 김천호와 만나 논의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6월 23일에 진행된 『연합뉴스』 특파원과의 대담에서는 모술에 왜 갔느냐는 물음에 대해, 김천호는 "쿠웨이트에서 원청회사 직원들이 오기로 돼 있어서 김 씨 문제도 상의하고 부대이전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할 겸 갔다."고 답변하였다.
그는 미군당국이 급히 만나자고 하였다는 이전의 자기 발언을 사흘만에 번복하였다.
그러나 미군당국자들이 김천호를 만나 김선일 석방대책을 협의하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김천호는 6월 20일 『연합뉴스』 특파원과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지금 모술에서 미군 정보부대 관계자 및 케이비알(KBR) 회사측 간부들과 함께 김선일 씨 석방대책을 협의하였으며, 협의가 끝나는 대로 오늘 중으로 바그다드로 복귀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모술에서 무슨 대책회의를 했느냐고 특파원이 묻자 김천호는 "미군과 케이비알(KBR) 직원들과 만나 대책을 협의했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김천호는 6월 23일에 진행된 『연합뉴스』 특파원과의 대담에서는 김선일 억류사실을 미군측으로부터 통보 받지 않았으며 모술에서 미군당국과 만난 사실도 없다고 번복·부인하였다. 그는 모술에서 미군당국과 김선일 석방문제를 논의했다고 사흘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는 특파원의 확인질문에 대해서, "미군측을 만난 사실이 없다. 다만 원청회사측에 보고를 한 만큼 당연히 미군측에도 통보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고 답변했다.
그는 7월 1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모술에서 미군당국과 만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김천호는 6월 20일에 자기가 했던 발언을 사흘 뒤인 6월 23일에 번복·부인하기까지 고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호는 6월 21일 오전에 모술을 떠나 오후 4시쯤 바그다드에 도착하자마자 남(한국) 대사관을 찾았다. 그는 "지난 21일 모술에서 바그다드로 내려와 대사관 관계자를 면담한 뒤 그 날 밤 많은 고민 끝에 모든 진상을 밝히기로 결심했다."고 『연합뉴스』 특파원에게 말했다.
그의 고민은 미군당국이 김선일 피살사건에 깊숙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것에서 생겨난 고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천호가 미군당국의 개입사실을 은폐하려고 고민하고 자기의 발언을 번복하고 있었던 시각, 김선일은 반미무장단체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6월 22일 미군은 바그다드로부터 팔루자 방향으로 약 35km 떨어진 지점에서 오전 8시30분(현지시간)에 김선일의 시신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김선일이 피살된 이후, 미국은 김선일 피랍사실을 사전에 몰랐다고 남(한국) 정부당국에게 여러 차례 통보하였고, 남(한국) 정부당국도 미군당국이 김선일 피랍사실을 사전에 몰랐다는 그들의 주장을 적극 옹호·지지하였다. (『연합뉴스』 2004년 6월 27일자)
그러나 미군당국과 김천호의 관계가 밝혀질수록 사전에 김선일 피랍사실을 몰랐다는 미군당국의 주장은 거짓말로 드러나고 있다.
김천호는 모술회동에 관한 자신의 발언을 사흘만에 번복·부인하였지만, 미군당국과 김천호의 모술회동은 김선일 피랍사건에 의해서 즉흥적으로 가능했던 것으로만 볼 수 없으며, 적어도 10여 년 전부터 김천호와 미군당국과 관계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천호가 소유한 기업체인 가나무역은 1991년 걸프전 시기에 미군 군납업체의 하청기업으로 등장했으며,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오만, 두바이 등에 사무소를 둔 종합무역회사다.
남(한국) 정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가나무역 본사는 서울이 아니라 카타르의 도하에 있다.
김천호와 친분이 있는 자유기고가의 말을 인용한 『프레시안』 보도에 따르면, 가나무역은 지난 10여 년 동안 월매출 1백만 달러가 넘는 기업체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가나무역은 미국 육군·공군 교역공사의 계약자인 미국 군납업체 케이비알의 하청업체다.
남(한국) 정부 관계자는 "미군에 군납을 할 정도면 미국 군기관이나 정보기관 등과 모종의 끈을 맺어야 가능한 일 아니었겠냐"고 말했다. (『프레시안』 2004년 6월 28일자)
이라크에서 사업을 하는 동포 기업인의 말을 인용한 『서울신문』 2004년 6월 28일자 보도에 따르면, 김천호는 이라크 점령 미군이 언제 어디를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정보까지 알 정도로 미군에 대한 정보력이 뛰어났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예상정보는 사실상 군사작전기밀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천호가 미군의 군사작전기밀에 속하는 정보까지 알고 있다는 발언은, 김천호와 미군당국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특수관계임을 말해준다.
김천호는 6월 28일 오무전기 부사장 황장수에게 보낸 전자편지에서 자신의 귀국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한국인 직원 4명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미군 각 부대장과 에이에이에프이에스(AAFES) 담당자와 접촉중"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는 자기 회사 직원의 귀국문제를 미군당국자들, 그리고 미국 육군·해군 교역공사 담당자와 협의할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인 것이다.
11. 미국이 그려낸 악마의 영상
부시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김선일을 살해한 반미무장단체의 지휘자는 올해 서른 여섯 살인 아브 무삽 알-자르카위(Abu Mussab al-Zarkawi)라는 사람이다.
본명이 파델 나잘 알-할라일레로 알져진 그는 원래 요르단 출신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옛 소련군과의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9.11 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군과의 전투에서 한 쪽 발을 잃은 지체장애인이며, 독약제조 전문가라고 한다.
미군 정보당국은 그를 생화학무기 전문가로 부른다.
미국 언론보도를 종합해보면, 미국은 알-자르카위를 악마의 영상으로 그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발표에 따르면, 알-자르카위는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과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를 연계해주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워싱턴포스트』 2003년 2월 5일자) 미국 대통령 부시는 2004년 6월 15일 알-자르카위가 사담 후세인과 알-카에다를 연계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알-자르카위가 사담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을 연계해주고 있다는 주장 하나만 가지고서도 미국은 그를 적으로 규정하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에 의해서 알-자르카위는 중동과 유럽에서 발생한 모든 국제테러의 원흉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2002년 미국 외교관 로렌스 폴리를 살해하는 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혐의로 요르단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이미 사형언도를 받았다.
미국은 2003년 1월 13일에 영국 런던에서 발각된 맹독성 물질 '리신' 사건의 배후로 그를 지목하였다.
미국은 2003년 8월 바그다드 시내 유엔본부 건물과 나시리야 경찰서 등을 습격하여 수 백 명을 죽인, 적어도 10여 건의 테러공격을 배후에서 지휘한 인물로 그를 지목하였다.
미국은 2004년 3월 2일 수백만 명이 모인 카르빌라와 바그다드의 이슬람 종교집회에서 1백70명 이상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던 연쇄폭발테러에 관여한 혐의자로 그를 지목하였다.
미국은 2004년 3월 11일 사망자 1백90 명, 부상자 1천8백 명을 낸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폭파사건의 배후조종자로 그를 지목하였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관리는 2004년 5월 11일 공개된 미국인 니컬러스 버그 피살사건의 주범으로 그를 지목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김선일 피살사건의 주범으로 그를 지목하였다.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2003년 2월 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특별회의 연설에서 이라크에서 알-카에다 조직이 알-자르카위의 지도로 활동한 것에 관한 정보를 보고하였다.
부시는 2003년 7월 1일 백악관에서 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한 30주년 기념일을 맞아 행한 연설에서 알-카에다 지도자인 알-자르카위와 연계된 테러범들이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아직도 이라크에서 암약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2004년 5월 12일 미국 상원의원 청문회에 출석한 미군 합참의장 리처드 마이어스(Richard B. Myers)는 "참수의 배후는 알-자르카위이며 그는 어떤 일도 저지를 가장 독한 극단주의자"라고 말했다.
미국은 알-자르카위를 잡거나 죽이기 위해 현상금 2천5백만 달러를 내걸었다.
그는 미국이 추적하는 '현상수배 1호'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알-자르카위를 극악한 원흉으로 지목한 미국이 아무런 물적 증거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미국이 자기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서 알-자르카위를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악마의 영상으로 그려놓고 있음을 말해준다.
알-자르카위 추종자들이 김선일의 목이 잘린 시신에 폭발물 부비트랩까지 설치하였다고 언급하였던 미국 국방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씨엔엔(CNN) 텔레비전방송 보도는, 미국이 자기의 적을 어떻게 악마의 영상으로 그려놓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알-자르카위에 관한 아무런 물적 증거도 내놓지 못하면서 그를 극악한 원흉으로 지목한 미국은 그의 활동거점으로 의심이 가는 대상물을 자의적으로 지목하고 그에 대한 공습을 집요하게 계속하고 있다.
알-자르카위의 활동거점에 대한 공격은, 미군에 대한 저항이 가장 격렬한 팔루자에 집중되고 있다.
미군이 알-자르카위의 활동거점으로 지목한 대상에 대한 공습은 2004년 6월 한 달 사이에 네 차례나 자행되었다.
미군은 김선일의 시체를 발견한 지 다섯 시간 뒤에 알-자르카위의 본부라고 지목한 팔루자의 한 안가를 폭격하여 무고한 민간인 4명을 죽였다.
그러나 미군의 공습은 반미무장단체의 저항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공격으로서, 알-자르카위와는 무관한 이라크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인민의 재산을 파괴하고 있다.
팔루자를 중심으로 반미항전을 벌이는 반미무장단체들을 미군이 공격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알-자르카위라는 원흉이 요구되는 것이다.
12. 맺는 말
감사원은 앞으로 한 달 동안 김선일 피살사건을 조사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감사결과에서는 김선일 피살사건의 전모와 진상이 밝혀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감사원은 김선일 피살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생각되는 미군당국과 김선일 피살사건의 관련의혹에 대해 아무 것도 조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사원은 미군당국을 조사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언론사인 합동통신이 보관하고 있는 문제의 녹화영상물조차도 조사하지 못한다.
감사원은 사건현장인 이라크 현지에 접근하지도 못한다.
결국 감사원의 조사범위는 서울에 들어가 있는 김천호의 오락가락하는 진술로 좁혀지는 것이다.
지난 몇 일 동안 자기의 발언을 여러 차례 번복하면서 김선일 피살사건과 미군당국의 관련성을 전면부인하고 있는 김천호의 헷갈리는 진술을 가지고 김선일 피살사건의 전모와 진상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감사원이 얼마 뒤에 발표할 수박 겉 핥기 식의 감사결과와는 무관하게, 김선일 피살사건은 영원히 풀지 못하는 사건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김선일 피살사건의 정치적 원인은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나의 판단으로는, 김선일 피살사건에 두 가지 정치적 원인이 얽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명백하게도, 김선일 피살사건의 근본원인은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전쟁과 군사점령이다.
만일 부시 정부가 이라크 침략전쟁을 도발하지 않았고 이라크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지 않았다면, 김선일 피살사건 같은 참극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선일 피살사건만이 아니라 이라크 인민에 대한 미군 점령군의 학살과 고문, 파괴와 살육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김선일 피살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추가파병결정이다.
김선일이 인질로 억류되어 있었을 때, 만일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추가파병결정을 공식발표하여 그를 억류하고 있었던 반미무장단체를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구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추가파병결정을 공식발표한 것은, 김선일을 구출할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끊어버리고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었다.
김선일을 살해한 반미무장단체의 행위가 잔인하다면, 그를 죽음으로 내몬 이라크 주둔 미군당국의 행동, 부시 정부의 한국군 추가파병압력, 노무현 정부의 추가파병결정도 역시 잔인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 남, 북, 해외의 동포들과 진보적 국제사회가 한국군 추가파병결정을 반대·규탄하고 있는 데도 노무현 정부가 추가파병을 강행하고 있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친미예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만일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서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부시 정부의 한국군 추가파병압력을 당당히 거부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경우 김선일 피살사건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김선일 피살사건의 정치적 원인을 규명하면, 그 사건의 근본원인이 부시 정부의 제국주의 침략전쟁과 군사점령에 있으며, 그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 노무현 정부의 친미예속성에 있는 사실이 밝혀진다.
제국주의자들의 살육과 파괴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이슬람의 땅에서 기독교 선교사로 일해보겠다는 결심을 안고 이라크에 들어갔던 김선일은 결국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참혹한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문제의 녹화영상물에서 이라크 석유자원을 약탈하려는 미국 대통령 부시야말로 진짜 테러리스트라고 지적하였고, 자기 친구에게 보낸 전자편지에서는 남(한국)에 돌아갈 때 미군의 만행이 담긴 사진자료를 가지고 가겠다고 적었다.
이라크에 가기 전에는 제국주의라는 말조차 생경하게 들렸을 순진한 기독교인 김선일은 미군의 만행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체를 직시하는 정치적 각성이 자기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김선일은 피살되기 직전,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를 살려달라고, 한국군을 이라크에 보내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처절한 울부짖음을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그는 참혹하게 살해된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김선일의 울부짖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으나, 그가 생전에 돌아가고 싶어했던 조국의 하늘 아래서는 지금 이라크 추가파병을 저지하려는 수백만 명의 거대한 함성이 들리고 있다.
그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노무현 대통령이 추가파병을 강행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명분으로 내놓았던 한·미 동맹이라는 것이 사실상 죽음의 동맹이라는 사실을 민족의 양심에 고발하고 있다.
김선일의 살려달라는 마지막 울부짖음에 대해서 이제 노무현 대통령이 추가파병철회라는 대답을 내놓아야 할 차례다. (2004년 7월 2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