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1408>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한다. 밀실공포라는 흔한 소재를 가지고 관객들을 거의 지칠 정도로 몰아붙이며 규모가 아닌 심리의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호러의 제왕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스티븐 킹의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들 중 공포보다 드라마가 두각을 나타냈던 만큼, 공포영화 <1408>은 ‘킹 월드’의 새로운 기념비가 될 만하다.
공포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하지 말라는 짓을 굳이 해서 화를 자초한다. <1408>의 주인공 마이크 엔슬린(존 쿠색)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는 ‘사후세계’라는 소재로 먹고 사는 공포소설가다. 마이크는 <귀신 붙은 집에서의 열흘 밤> <귀신 붙은 묘지에서의 열흘 밤> 등의 소설을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이크는 오컬트나 초현실을 믿는 부류가 아니다. 한 팬이 “책에 적힌 이야기가 진실이냐?”고 묻자 그는 주저 없이 “아니”라고 답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회의론자다.
마이크는 집필 중인 <귀신 붙은 호텔에서의 열흘 밤>의 마지막 챕터를 완성하기 위해 뉴욕에 있는 돌핀호텔 1408호에 들어선다. 그에게 찾아 든 정체불명의 돌핀호텔 엽서 때문이다. 그 엽서에는 ‘Don’t enter 1408(1408호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단 한 문장이 적혀 있다. 마이크는 1408호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의 뉴스 기사를 검색하곤 곧바로 돌핀호텔로 향한다. 호텔 지배인인 제럴드 올린(새뮤얼 L. 잭슨)은 마이크에게 펜트하우스로 업그레이드시켜줄 테니 1408호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배인은 지난 95년간 1408호에서 56명의 투숙객이 1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자살, 혹은 자연사 했다면서도, 그간의 사건들을 정리한 파일을 마이크에게 넘겨주는 등 마이크의 호기심을 부추긴다.
처음 1408호는 여느 호텔방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갑자기 침대 옆에 놓인 전자시계에서 울리는 카펜터스의 노래 ‘We've Only Just Begun’을 기점으로 1408호의 무한공격이 시작된다. 전자시계는 스스로 60분을 가리키고 0을 향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창문, 벽, 화장실, 그림, 유령들, 환영. 마이크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1408호에서 보이는 모든 요소들과 사투를 벌인다. 마이크는 “보이는 것을 믿지 마라”는 말을 주문처럼 녹음기에 대고 속삭인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던 이 남자는 이제 눈에 보이는 것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환영처럼 나타난 지배인 제럴드는 마이크에게 말한다. “당신이 원하는 게 중요해.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히며 자신만 알고 살아왔는지 생각해봐.” 1408호의 공포는, 1408호라는 악마의 실체는, 사실 그 방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의 내면의 발로다. 1408호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자신이 대면하기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과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마이크는 그곳에서 자신이 상처 입고, 상처 입혔던 과거와 만난다.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와 어린 나이에 죽은 딸, 그리고 헤어진 아내가 마이크의 공포 대상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미스터리
동명의 원작 <1408>은 원래 스티븐 킹이 자신의 지나온 인생과 소설창작의 방법론을 풀어놓은 <유혹하는 글쓰기 On Writng>(2000)에서 원고의 퇴고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쓴 짧은 예문이었다. 스티븐 킹은 그 예문을 발전시켜 단편소설의 꼴로 만들어갔고, 오디오북 (2000)에서 첫 선을 보인 후, 단편모음집 (2002)에 수록했다. 단편소설 <1408>에 대한 스티븐 킹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내가 읽어도 정말 소름 끼칠 만큼 최고”라며 만족감을 드러낸 작품이었던 것이다.
공포영화 전문 제작사 디멘션필름이 원작의 판권을 사들인 후 <매트릭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오션스 일레븐> <트랜스포머> 등의 블록버스터를 제작해온 로렌조 디 보나벤추라와 스웨덴 출신의 미카엘 하프스트롬 감독의 결합으로 영화가 완성됐다. 하프스트롬 감독은 <스페셜 킬러>(1995)로 데뷔해 <이블>(2003)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다. 그 후 할리우드로 건너와 제니퍼 애니스톤, 클라이브 오웬 주연의 스릴러 <디레일드>(2005)를 찍었다. 보나벤추라와 하프스트롬의 목표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스티븐 킹의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 하지만 단편소설을 영화화에 적합한 정도의 스토리로 늘려 각색한다는 것은 어려운 도전이었다. 제작자 보나벤추라는 “사건을 실시간으로 진행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원작이 장편영화로 옮겨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1408>은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다 맞춰지지 않은 퍼즐 조각처럼 완벽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이야기다. 곱씹어볼수록 모든 시간과 상황은 뒤죽박죽이고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 상황들이 많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주인공 마이크처럼 관객 역시 보이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는 미스터리한 구조다. 지배인이 마이크에게 1408호 열쇠를 건네자 마이크는 “요즘에는 다 카드키를 쓰지 않느냐”고 묻고 지배인은 “1408호에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답하지만, 1408호에서 마이크는 불을 켜고, 심지어 무선인터넷까지 사용한다. 분명 1408호에는 창문이 2개 있는데, 마이크가 녹음기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돌려 듣는 장면에선 ‘이상하게 창문이 없다’는 소리가 나온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면서, 환영과 현실의 구분을 넘어 과연 1408호가 실재하기는 한 건지조차 의심스러워질 지경이다.
하지만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1408>의 가장 큰 매력이자 공포의 핵심이다. 관객들이 주인공 마이크의 심리 상태를 읽게 되면서 생기는 불안과 두려움이야말로 <1408>이 조성하는 공포감의 정체다. 하프스트롬 감독은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관객들의 긴장감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이완시키는 것을 반복한다. <1408>의 이런 심리적인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방식은 주인공 마이크가 밀폐된 호텔방에서 맨몸으로 펼치는 거의 ‘다이 하드’식의 원맨쇼다. 주인공은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지만 그의 활동량은 액션 활극에 못지않다. 특수효과를 줄이고 실제로 벽을 부수고, 방 안에 물을 쏟아 부어 만들어낸 장면들은 보는 쾌감을 극대화시킨다. 그것은 1408호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주인공을 공격할지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단지 유령이나 살인마를 등장시켜 '깜짝 놀라게 하는' 공포가 아닌 롤러코스터에 탄 듯한 짜릿함을 동반한 공포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면의 공포를 시각화해 한 호흡으로 몰아치는 기술은 <1408>을 적어도 새롭지는 않더라도 색다른 공포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1408>은 볼만한 공포영화의 미덕을 충분히 지녔다. 존 쿠삭과 새뮤얼 L. 잭슨의 탄탄한 연기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관객들의 동질감을 얻어내기 위해선 주인공 존 쿠삭의 감정 연기가 중요했는데 그는 세밀한 감정의 농도를 그럴 듯하게 표현해낸다. 또 많은 장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호텔 지배인 역의 새뮤얼 L. 잭슨 역시 든든한 무게감으로 영화의 미스터리를 고조시키는 데 모자람이 없다.
지난 6월 22일 미국에서 개봉한 <1408>에 대한 언론과 평단의 반응은 열렬한 지지까지는 아니지만 썩 괜찮은 편이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사이트 '로튼토마토닷컴(www.rottentomatoes.com)'의 신선도 지수는 현재 76%다. “스티븐 킹 원작의 걸작 영화들 중 하나”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지루하게 결말을 연장하고, 이를 반복한다”는 평도 있다. 만약 이 영화의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전자 쪽의 반응을 보일 공산이 크다. 한 남자가 귀신 들린 방을 찾아가 벌어지는 공포담이라는 새로울 것 없는 재료를 가지고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묘사로 오싹한 성찬을 차려낸 스티븐 킹의 소우주가 고스란히 스크린 위에 담겼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과 영화의 줄기찬 인연
‘내 소설을 각색한 디멘션픽처스의 <1408>을 추천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 영화는 당신의 피부 밑으로 파고들어 그곳을 기어 다니는, 진정으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영화입니다. 카펜터스의 노래 ‘We've Only Just Begun’에 시달리는 남자보다 더 무서운 게 어디 있겠어요? 당신이 극장에서 엄청난 비명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겠죠), 영화가 끝난 뒤 많은 관객들이 집에 돌아가 전등을 켜놓고 잠들게 될 겁니다.’ -스티븐 킹(www.stephenking.com)
스티븐 킹은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 영화 <1408>에 대한 추천사를 올려놨다. 아마도 그는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자신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 중 공식 홈페이지에 찬사를 쓸 수 있는 기쁨을 준 영화는 제작 편수에 비해 많지 않았고 특히 공포영화는 더더욱 그러했다. 흔히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중 수작으로 꼽는 작품은 <캐리>(1976), <샤이닝>(1980), <스탠 바이 미>(1986), <미저리>(1990), <돌로레스 클레이븐>(1995), <쇼생크 탈출>(1994), <그린 마일>(1999) 등이다.
그러나 스티븐 킹의 판단은 조금 달랐다. 그가 지속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 몇 년 전 발표한 자신이 뽑은 원작 영화 베스트 10에는, 위의 리스트 중 유독 두 편의 공포영화 <캐리>와 <샤이닝>이 제외됐다. 그 안에는 졸작이라 평가받은 <공포의 묘지>(1989), TV 시리즈 <세기의 폭풍>까지 포함돼 있는데 말이다(두 영화는 스티븐 킹이 직접 각본을 썼다). 스티븐 킹은 영화제작에 있어 그리 까다로운 원작자가 아니라고 알려져 있다. 2004년 개봉한 스티븐 킹 원작의 <시크릿 윈도우>의 연출과 각색을 담당했던 데이빗 코엡 감독은 DVD 코멘터리에서 “스티븐 킹은 영화제작 전반에 일일이 관여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며 “스티븐 킹의 원칙은 시나리오가 최악이 아니라면 영화제작엔 개입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에 대한 스티븐 킹의 불만은 실로 대단해서 동명의 TV 시리즈를 직접 기획하고, 각본도 썼다. TV 시리즈의 감독은 스티븐 킹 원작을 줄기차게 영화화하고 있는 믹 게리스가 맡았다. <스티븐 킹의 샤이닝 The Shining>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시된 DVD의 서플먼트에서 스티븐 킹의 울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큐브릭 팬들의 엄청난 원성을 살 것을 알지만”, 어쨌거나 “원작이 왜곡된 큐브릭의 스타일에 너무 실망했다”고 회고한다. 음산한 분위기로 스탠리 큐브릭의 인장을 찍은 이 영화가 “평범한 사람이 미쳐가는 과정을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보여주고 싶었던” 스티븐 킹의 의도와는 동떨어져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작의 정수를 헤치지 않으면서도 깔끔한 만듦새를 보여주는 영화 <1408>에 스티븐 킹이 환호를 보내는 것은 일면 당연해 보인다. 더군다나 <그린 마일> 이후로 스티븐 킹 원작을 스크린으로 옮겨온 최근 작품들이 흥행과 비평에서 줄곧 미끄럼틀을 타고 있던 터다. 스콧 힉스 감독의 휴먼드라마 <하트 인 아틀란티스>(2001)는 앤소니 홉킨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부재와 탄탄하지 않은 구성으로 별 반향을 얻지 못했다. 로렌스 캐스단 감독의 SF 스릴러 <드림캐쳐>(2003)는 ‘원작을 망친 멍청한 영화’라는 평까지 들었다. 데이빗 코엡 감독의 스릴러 <시크릿 윈도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다소 늘어지는 데다 상투적인 결말이 조니 뎁의 훌륭한 연기를 받쳐주지 못했다. 믹 게리스 감독의 스릴러 <라이딩 더 불릿>(2004) 역시 지루한 범작에 그쳤다.
영화보다 영화적인 ‘킹 월드’
스티븐 킹은 그가 마르고 닳도록 열렬한 애정을 고백하는 H.P. 러브크래프트와 그가 “호러의 미래”라고 칭송한 클라이브 바커와 함께 현대 공포문학의 3대 대가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호러뿐 아니라 판타지, SF, 본격소설 등 장르를 편식하지 않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장편소설 <리시 이야기>(2006)는 놀랍게도 스티븐 킹 최초의 로맨스물이다. 올해 9월이 되면 예순이 되는 스티븐 킹은 장편소설 데뷔작 <캐리>(1974) 이후 30여 년간 무려 500여 편에 달하는 장,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초판으로 백만 부를 찍을 수 있는 작가이고, 총 판매 부수가 3억 부를 넘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성경보다 많은 판매량을 기록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중 70여 편이 영화와 TV영화로 제작됐다.
스티븐 킹 소설의 어떤 지점이 그토록 영화제작자들과 감독들을 매료시키는 걸까?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스티븐 킹의 소설은 영화화하기 매우 적합하다"고 입을 모은다. 영화 <1408>의 제작자 보나벤추라는 한 인터뷰에서 “스티븐 킹은 이야기의 많은 부분들을 영화적으로 쓴다”고 말했다. <시크릿 윈도우>의 데이빗 코엡 감독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장점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로 잘 개발된 캐릭터, 둘째로 그들의 심리 묘사가 매우 치밀하다는 것, 셋째로 저마다의 심리적 동기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는 것."
지난 6월 캐나다서적상협회가 수여하는 평생공로상을 받은 스티븐 킹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글쓰기가 근본적으로 공격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내 책들은 헤비메탈 음악에 비유할 수 있다. 독자들이 웃던지, 비명을 지르던지, 오바이트를 하던지 관계없이 다만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티븐 킹은 대중소설의 문법에 달통한 작가이기 때문에 언제나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은유와 상징을 심는다. 사실 그가 건드리는 소재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을 기반으로 성장기의 공포, 기독교의 원죄 의식,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등을 매우 극적인 장치를 통해 구축한다.
실제로 스티븐 킹의 책을 읽다 보면 영상을 활자로 옮긴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테면 지난해 발표한 정통 고어물인 장편소설 <셀>은 휴대폰 전파가 만들어낸 살아 있는 좀비들의 공포를 그리고 있는데, 첫 부분에서 묘사되는 일명 ‘폰 사이코’들의 만행을 읽고 있노라면 움직이는 영상으로 봤을 때의 충격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셀>은 <호스텔>의 일라이 로스 감독에 의해 영화제작 중이다. 또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에 실렸던 <안개>는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의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에 의해 영화화된다. 이처럼 영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킹 월드’의 마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