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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박영철교수/(목회자세미나)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발전
존경하는 여러 목사님들 앞에서 부족한 제가 말씀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더 없이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기회인 줄 믿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십 년 목회를 하신 여러 목사님들 앞에 저같이 젊고 새파란 목사가 강의를 한다는 것이 외람된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게 42년간의 길지 않은 생애 가운데서 제 개인적인 신앙경험과 학문적으로 정리한 것,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서 정리한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줄 믿고 오늘 이 자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섰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 제 강의는 현재의 제가 있기까지 제 전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42년간의 결정체를 소개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저에게 주어진 제목은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발전"입니다.
한국 교회에 '제자훈련' 또는 '제자'라는 개념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이 개념은 주로 기성교회로부터 소개되었다기 보다는 소위 말하는 Para-Church Group, 곧 젊은 대학생들을 위한 C.C.C, Navigator, Joy mission, U.B.F. 등을 중심으로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대상자들이 주로 젊은 청년들, 대학생들이었기 때문에 60년대 중반에 시작된 제자훈련운동은 대학생들과 젊은층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후 70년대는 60년대에 훈련받았거나 선교 단체에서 일했던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학교에 진학한 후 자신들이 훈련받은 것을 바탕으로 개척을 한다든지, 또는 교회에 들어가서 목회에 적용시키려는 노력들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첫 제자훈련 개념의 소개는 Para-Church Group들로부터 시작된 60년대이지만 그것의 교회적용은 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젊은 목회자들은 남서울교회, 사랑의 교회, 서울침례교회 등과 같은 교회에서부터 제자훈련의 개념을 개교회, 지역교회의 목회 상황 속에 접목시켰습니다. 80년대에 와서는 그런 교회들이 급성장하였고 1980년대 중반 이후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제자훈련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훈련에 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세미나가 개최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90년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제 자신이 대학교 2학년 때인 1967년에 바로 한국에서 제자훈련 사역이 시작되던 그 초기, Navigator에서 5년간 훈련받은 경험과 그 훈련과정 속에서 발견하게 된 선교단체들의 한계성, 그리고 개교회에서 바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그 교회 개척 당시부터 10여 년 간 동참을 했습니다.
저는 제자훈련의 개념은 모든 지역 교회들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개념이고, 한국 교회교육의 새로운 방향으로 설정돼야 한다는 소명감을 가지고 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공부를 한 후 유학을 가서 여러 권의 제자훈련 교재를 저술한 빌리 행크스와 함께 3년 반 동안 가깝게 교제하면서 그가 정리한 개념들을 많이 배웠습니다. 그 후, 86년에 귀국해서 지금까지 5년 째 저희 신학대학에서 제자훈련에 관한 세 과목을 개설하여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과목은 <제자훈련 개론>으로 신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하는 삶에 대한 훈련이고, 둘째 과목은 <개인 양육 사역과 교회성장>으로 자신이 훈련받은 뒤에 어떻게 교인들을 훈련시킬 수 있느냐, 어떻게 목회에 적용할 수 있느냐를 가르치고 있으며, 셋째 과목은 앞의 두 개의 과목을 A학점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만 수강할 수 있도록 해서 일주일에 6~8시간을 개인적으로, 그룹별로 저와 세미나를 하는 것입니다. 저도 많은 시간을 그들과의 만남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제가 강의한 지난 5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많은 열매들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배운 것을 목회에 적용하는 단계에 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제자훈련개념이 한국교회에 일반화된 것에 대해 누구보다도 기뻐하며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15년 전만 하더라도 '제자훈련'하면 그것은 곧 Para-Church Group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서 지역교회와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훈련 개념조차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의 거부 반응 속에 침잠해 가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경향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제자 훈련개념
저는 이런 일에 자신이 깊이 관여하며 헌신하면서 중대한 문제점 두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제자훈련이라는 개념을 교회 양적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제게 "박목사, 우리교회에서도 제자훈련을 시키려고 하는데 무슨 교재를 가지고 어떻게 훈련시키면 좋겠나?"하고 물으시는데 그것은 제자훈련을 전적으로 한 면만 이해하고 질문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자훈련을 양적 성장의 수단으로 여긴다면 결코 제자훈련이 갖고 있는 근본 목적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제자훈련이 갖고 있는 근본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리스도 앞에서 전 생애를 투자하며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정착돼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훈련의 양적성장을 위한 수단화의 문제는 반드시 저지되어야 합니다.
두번째 문제는 제자훈련이 개인의 영적 발달영적 성장에 치중하기 때문에, 그것은 종종 기술적인 면과 관계되어 또 다른 율법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이름난 어떤 선교단체의 경우, 그 선교단체에서 훈련받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리더들이 가르치는 내용만을 전폭적으로 맹종하고, 이에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세속적이고 타락한 사람으로 규정짓고 있습니다. 심지어 반대 의견을 갖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 정죄하고, 혹 리더의 말을 듣지 않으면 물리적인 압력을 넣기도 합니다. 또 결혼할 배우자조차 반드시 리더에게 승낙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 선교단체에서 대표되는 사람은 군복을 입고 기인(奇人) 행세를 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단 시비까지 일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이 신학적으로 적절한 바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 속에 방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제자훈련이 목회현장과 지역 교회에서 전인적인 성장에 관심을 두기보다 특정한 부분에서 기술적인 성장만을 강조한다면 우리 교회는 지극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겠습니다.
오늘 제 강의는 제자훈련이라는 개념이 한국교회에 범교단적, 초교파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때에 '그것을 어떻게 목회와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한 많은 목회자들의 요구에 작은 응답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제 강의의 제목을 매우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이라는 말보다 '교회발전'라는 말을 주목하여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성장'이란 말은 맥가브란(D. A. McGavran)이 훌러신학교 에서 교회 성장에 대한 강의를 한 이후, 거의 유행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맥가브란의 교회성장 개념은 전적으로(거의 80~90%) 양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대조적으로 교회발전 이라는 개념은 질적인 성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이 세상에서 어떻게 빛을 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교회본연의 자세와 임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발전"이라는 용어를 아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도덕적, 영적, 윤리적으로 형편없이 타락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이나 사회심리학자들이 지적한 바로는 70~80년대의 급작스러운 경제적 성장, 부의 축적은 미처 정신적인 성장이 뒷받침되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문화가 퇴폐적으로 흘렀고, 초토화되는 현실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사천만 중에 천만 성도라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를 가진 기독교로 성장했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이 말하고 있는 삶의 본질적인 변화가 뒤따르지 못한 양적 성장이었기에 질적인 저하의 상태에 빠졌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훈련 개념은 양적인 성장과 아울러, 삶의 질적인 문제를 같이 생각하고 다루는 방향에서 재 설정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질적인 삶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훈련 자료라든지 또는 여러가지 이론적, 신학적인 배경들을 충분히 제시하는 가운데 더 연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제가 오늘 준비한 내용은 제자는 도대체 누구이며, 제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신약성서 시대 제자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새로 시작해야 할 기독교 교육, 또는 제자훈련의 방향을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성경적 제자 개념
오늘날 교회에서 종종 말하는 제자의 개념은 성서적인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목회자들을 일컬어서 성직자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일반 교인들을 일컬어 평신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성서적인 개념 속에는 '성직자 와 평신도(Clergy & laity)'라는 개념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목회자와 일반 교인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인 중의 한 명으로, 소명을 받고, 목회 분야에서 특별한 기능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오직 한 하나님의 백성 (People of God), 한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소위 성직자주의, 교권주의에 의해서 평신도와 성직자의 선을 그어 놓았습니다. 또한 필립 샤프 같은 사람은 4세기에 이르러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선이 완전하게 그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성서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발전으로부터 온 개념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직자가 아닌 성직자화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문제와 비슷하게 제자의 개념이 다시 교인들을 이중 계층 구조로 형성하여 소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 중에, 그리스도인 중에 특별히 뽑아서 특별한 훈련 프로그램을 거친 사람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일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사람들이 제자이고, 예수 믿고 구원받기는 했지만, 그런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훈련을 받은 일이 없는 사람들은 훈련받은 사람들이나 하는 사역을 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이 자기합리화에 빠질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성서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제자입니까?
이에 대해 저는 먼저 제자개념의 사전적인 의미부터 시작해서 신약성서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현대 Para-Church Group들이 말하고 있는 제자의 개념은 무엇이고, 목회자로서 우리가 어떤 제자의 개념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제자의 개념에서 우선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한국어 대사전과 웹스터 사전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스승의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으로 일반적인 의미의 제자입니다. 둘째로 가르침을 받아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고, 셋째로 선택되어 예수와 함께 생활하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훈련받고, 전도에 파송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 세번째 것이 보다 전문화된 개념으로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 제자 개념입니다. 영어의 'disciple(제자)'이라고 하는 단어는 라틴어 'displos'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것은 'diskere'라고 하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매우 유사하게 동등한 것'이라는 뜻을 갖고있습니다. 따라서 'disciple' 하면 '예수님을 아주 흡사하게 닮아 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헬라어로 제자는 ' (마데테스)'인데, 교훈보다는 '경험과 행동으로서 전념하여 배우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 혹은 3년 반 동안 경험하고 생활했던 제자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훈련 방식을 이 단어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이 '마데테스( )'라는 단어는 세 가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 배움의 길에 있는 자들에 대한 용어로서 스승과 제자, 즉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의 제자, 바리새인의 제자, 모세의 제자, 예수님의 제자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스승을 따라 가고 있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조금 더 전문화된 특수층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행전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 이하를 보면 제자라고 하는 단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과 동의어로 쓰여진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2장 41절에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예수 믿고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을 일컬어 제자라고 한이 말씀 이후로 계속해서 소개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제자라고 지칭합니다. 셋째로, 집중적으로 '제자'라 한 것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또는 '제자들'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대표적인 Para-Church Group들의 저술가들은 '제자'에 관해서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먼저 우리나라에도 「원동력 시리즈」로 4, 5권의 책이 번역되어 소개된 케리쿠네는 "제자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일에 노력하고 있는 자로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의 보전을 위해 양육하고 있는 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C.C.C.에서 오랫동안 사역했던 분으로 그의 제자 개념을 'C.C.C 제자 개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양육하는 사역을 못한다면 그는 아직 제자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 중에 특별한 훈련을 받고 특별한 사역을 하는 사람만이 제자라는 이중 계층구조를 형성한 개념인 것입니다.
월터헤릭슨이라는 사람은 네비게이토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했던 사람으로서「훈련으로 되는 제자」라는 책에서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성서에 근거해서 바르게 결정하여, 그대로 계속 살아가며 필요를 느끼는 자를 계속 돕는 사람"이라고 밝혀 역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다음으로 세계 제자 협회 회장인 C. 윌슨은 「목회와 제자양성」이라는 책에서 제자의 개념을 "적절한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자가 되지 못하는 새 신자들을 복음 사역자로 훈련시키는 자로서 적어도 말씀을 가르치며 새 신자를 훈련시킬 수 있는 사람이 제자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번째 포올파웰이 이야기하는 제자의 개념은 앞에서 말하는 세 사람의 개념과 다릅니다. 그는 텍사스의 타일러라고 하는 도시의 침례교 목사입니다. 그가 처음 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인들은 7백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제자훈련을 받은 7년 후에는 7천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답니다. 그는 「Dynamic Disciple」이라는 책에서 "제자란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받으며 순종하고 그 분과 같이 살기를 원하는 자이다. 제자는 그리스도께 철저히 헌신하여 그 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다"라고 제자의 개념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이 개념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번께 질문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고 하는 그리스도인 중에 주님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제자는 그리스도께 철저히 헌신하며"라고 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 중에 어떤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헌신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대강 헌신해도 되느냐는 것입니다. 또 "그 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이다"라고 말했는데 주님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 16 : 24)"고 말씀하셨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부인하지 않으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숨까지라도 헌신하고, 따라 가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일인데, 앞에 말한 세 사람의 개념은 적당히 남아 있어도 괜찮을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이중 계층 구조를 형성시키는 개념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 목사님들께서, '내가 지금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주님의 제자다. 그들이 제자로서 바른 삶을 살도록 훈련시켜야 하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교인들 중 10~20퍼센트 정도만 훈련 받고, 일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제자에 대해 어떠한 개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목회의 방향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자이다'라는 사실을 성서를 통해서 입증해 보도륵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자이다
첫째로 우리 모든 개신교는 전신자, 또는 만신자제사장직 교리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라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왕같은 제사장(Royal Priest)'은 왕을 위하여 왕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3대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가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갖는 신앙과 행습의 유일한 규범은 성경 뿐이므로 성경대로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루터 이후, 개신교 교도들의 공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두번째는 '이신득의(以信得義, Salvation by faith)'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즉 행위나 종교의식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그 복음을 믿는 것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완전, 충분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 얻은 것을 기뻐하며 감격해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 깃발에 쓰여진 교리는 '전신자, 만신자 제사장직 (만인제사장설)교리'입니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All Christian, All believers'가 아니라, 'every believer priest'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제사장 직무를 가진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개념을 신학교 때 배웠습니다만 그 부분에서 강의도 듣고, 책을 읽어도 웬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정리된 것들 중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직접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직책을 맡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사제들이나 신부들의 중간 매개없이, 직접 하나님 앞에 직고할 수 있고, 하나님 보좌 앞에 직접 나갈 수 있다는 개념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는 이 개념이 성경 본문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성경을 들추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 개념에 관해 깊이 생각하면서, 도움을 주는 몇 권의 책을 보며 만신자, 또는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에 대해 새로운 각도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제가 제시해 드리고 싶은 구약성서에서 제사장의 주 임무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구약에서의 각종 제사 제도가 더 이상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분께서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목회자로서 다시 교회에서 양을 잡고, 염소를 잡아 피를 뿌리지 않아도 된 것입니다. 짐승들을 죽여 드린 희생 제물은 예수님에 대한 그림자였고 예표였기 때문에, 실체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장 제도가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명백히 폐지된 구약의 제사장직 개념을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다"라고 베드로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떠한 직책을 맡은 자들'이며 '우리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구약의 제사장 직분을 빌려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면 구약성서에서 제사장들의 주임무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백성들의 죄를 갖고 나아가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화목제를 드리는 것을 그들의 주 임무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앞에서 정리한 제사장 개념은, 자신의 죄를 가지고 직접 하나님 은혜에 직고할 수 있는, 곧 자기를 위한 제사장이지 타자를 위한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저는 전신자, 만신자 제사장직 교회의 핵심은 내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도 물론 포함되지만, 세상 속에서 수행해야 할 직무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환기시켜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른 이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상, 종교개혁자들이 만신자, 제사장직 교리를 강조하는 각도를 살펴보면 중세에 모든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 사제들에게 철저히 얽매어 있어 그들에게 저주를 받으면 자신들의 영혼이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영혼을 책임지는 자는 사제들이 아니라는 각도에서 만신자 제사장직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신도들을 정신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이 더 나아가 우리가 직접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다는 개념으로 발전되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내려온 경험 속에서 크게 다를 바 없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습니다. 전신자 제사장직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급만 했을 뿐, 그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구체적인 삶이 어떻게 돼야 할 것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전신자 제사장직 교리는 중생 경험을 통해서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녀로서의 구원 경험 속에서 우리는 전신자 제사장직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I~10절까지는 한 문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문맥 속에서 왜 베드로가 이와 같은 말씀을 기록했는지 살펴본다면 제사장직 교리를 바로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베드로전서 2 장 I~2절을 보면,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할 영적 아기들(Spiritual baby)은 바로 2장 9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 말씀을 듣고 있는 수신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할 때는 선교 단체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개념인 복음을 전하고 양육할 수 있는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갓난아이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서 계속 자라야 하는, 영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있는, 그 사람들을 향해서 선포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가 얼마나 많은 성경 지식을 알고 있고, 성경 말씀대로 얼마나 훈련을 받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 그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신분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제사장입니다. 그들이 성장해서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그때부터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제사장인 것입니다. 이 개념은 우리 목회자들이 모든 교인들을 주님을 위한 사역자들로 알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을 목회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마디로 제자훈련입니다. 5절 말씀에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제사장이 안 되었으니까 앞으로 제사장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제사장은 제사장이지만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6절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의 신분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방인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맡은 자로서 이방인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나의 본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을,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을 바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 전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 전체가 모두 제물이 됩니다. 그러나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개념은 복음 전도를 통해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을 모두 제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 중 제사장 직무를 맡은지 5년, 10년, 2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한 사람도 주님 앞으로 인도한 경험이 없다면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직무 유기죄를 범하는 것입니다.(웃음) 목사님 교회의 교인들 중에서 직무 유기죄를 짓고 있는 교인들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교인들이 제사장으로서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목회자가 훈련을 안 시키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자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야합니다. 우리 교인 중에 10~20%만이 제자이고 70~80%가 무지한 채로 직무 유기를 한다면, 어서 속히 훈련시키십시오. 그래서 성서적인 목회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택하신 족속으로,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그의 나라에서 축복받는 신분으로 상승시켜 주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직접 갖고 나갈 수 있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책임을 가지고, 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성장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신분이 바꿔진 그 사람들이 바로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너무 지나치게 축복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특히 제가 몸담고 있는 침례 교단의 경우 스스로 비판을 해 봅니다. 침례교는 그 어느 교단보다도 복음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메시지를 전파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책임과 의무라는 측면을 소홀히 여겨왔던 것입니다. '예수 믿을 사람 손 들으시오' 말하며 영접하는 초청기도를 하게 하고는 믿겠다고 나온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소개해 주는 것으로 복음 전도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70~80년대 우리의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는 개념 속에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는 실천적인 부분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동전의 양면으로 표현한다면, 한쪽 면은 바로 예수 믿고 구원 얻는다는 축복의 측면이고, 그 뒷면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책임과 의무의 실천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복음으로 이해해야만 진정한 복음이 한국 교회에 정착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만 가르치는 것을 저는 반쪽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반쪽복음은 명백하게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며 실천을 요구하는 성경 구절을 축복 측면에서만 해석할 우려가 있습니다. 축복을 강조한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고린도후서 5 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저는 이 성경 구절을 대학 2학년 때, 저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도와주신 분에 의해서 소개받았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이렇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라는 말은 누구든 제한이 없다는 말로 우리도 포함된다는 뜻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새로 창조되었다는 뜻이며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는 죄악된 삶이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는 선포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은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고 감격해 하며 암송을 했습니다. 그 후 수년간 다른 사람에게 그 뜻을 소개했고 제가 그렇게 소개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7, 8년 전 이 본문 말씀을 구절 분해법(verse by verse analysis)이라는 성경공부 방법에 적용하여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절 분해법은 암송하고 있는 구절 앞에 나오는 내용, 암송한 구절 뒤에 나오는 내용, 그리고 앞뒤 문맥 속에서 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을 파악하여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생각하는 간단한 성경공부 방법입니다. 저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분석하였습니다. 10절부터 문단이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이라는 데까지 읽고 나서 저는 이 구절을 더 깊이 읽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그 뒤에 나오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그 구절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건성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구절을 다시 읽고 나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구절을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하려 하심이라'라는 구절은 바로 예수님이 죽으신 목적과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었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말씀은 제 생각과 다른 각도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죽으신 목적이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을 위함이라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생략해 버리고, 논리적으로 한 단계 비약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저회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6절에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아무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도 육체대로 보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보다 돈 많은 사람, 학식 많은 사람, 부유한 사람, 명예가 있는 사람‥‥‥ 등으로 다른 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촌부의 아들이셨습니다. 목공의 아들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형편없는 존재로 여겨 십자가에 잡아 죽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을 보는 영적인 눈이 있었다면 감히 주님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삶의 목적과 이유와 동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보는 시각을 갖는다면 상대방이 조금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함께 도우며 살아 갈 것입니다. 자신의 동역자이며 자신과 함께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같이 일할 사람이라는 그리스도인 관(觀)이 있다면 다른 형제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홀히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15~16절에 이어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삶의 목적과 동기가 달라지고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바뀌어진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목회자든, 집사든, 장로든, 처음 믿는 사람이든 간에 누구나 삶의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맡고, 양떼를 돌보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주님 앞에서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도우며, 봉사의 삶을 계속 지속하도록 자극하고 격려하고 훈련시켜야 하는 목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18~22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 직무를 맡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결코 성장한 신학생이나, 목회자나, 장로들이나, 집사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영적으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계속 성장해야 할,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은 사도 바울 개인의 고백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당연히 해야 할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생은 자기를 위해 살던 삶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새롭게 변화됨을 뜻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메시아', '그리스도', '선생', '기묘자', '모사', '평강의 왕', '만왕의 왕'. 이렇게 수많은 용어중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부르는 것은 '주님'입니다. '주님'이라는 단어는 '큐리오스( )'입니다. 그 당시 로마 시민들이 '큐리오스'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자는 로마 황제 뿐이었고 유대인들이 '큐리오스'라고 부르는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노예들이 '큐리오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소유주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큐리오스'라고 부른다면, '예수님은 나의 황제이시고, 소유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즉, 내가 그 분께 완전히 예속되어 있고, 내 존재의 목적과 이유가 완전히 그 분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주여'라고 고백하지만 살아가는 동기와 목적은 여전히 자기자신입니다.
목사님들, 목회 하실 때 힘이 드시죠? 왜 힘이 드십니까? "성경 공부합시다, 훈련을 받읍시다" 해도 참석을 잘 안 하죠? 왜 안 합니까? 그들은 아직도 삶의 깊숙한 동기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 전, 대전에 스포츠 센터가 두 군데 생겨 그곳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잠깐 들렀습니다. 실내 풀장이 있었습니다. 오전 10시 30분쯤이었는데도 표현이 저속할지 모르지만 고무 모자를 덮어 쓴 가정 주부들이 풀장 안에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고 연습하는데 만약 교회에서 가정 주부들을 대상으로 오전 10시에 성경공부를 한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천 명 교인 중에 몇 명이 참석할까요? '교회 건축한다', 또는 '고아원에 간다', '농어촌 교회를 돕자'고 할 때 교인들이 얼마나 협조를 합니까? 이와 같은 실정이면서도 교회에서는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 분명히 확신한다면 가진 모든 것을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해야 하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산다는 개념으로 새롭게 강조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의식으로 각성될 때 비로소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제대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일천만이라는 숫자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오늘 주님 앞에서 주님을 위해 살려는 진실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배출해야 합니다. 저는 80년대까지 제자훈련은 양적 성장과 직결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양적인 성장 뿐만 아니라 질적인 성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반드시 질적인 뒷받침이 있는 양적인 성장이어야지, 질적 성장 없는 양적 성장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기독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몇%나 됩니까? 저는 작년 여름 워싱턴에서 제 친구 이동원 목사님을 만났을 때 물어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장년들만 천 명 정도 모이는, 교포 사회에서는 아주 큰 교회입니다. "목사님, 목사님 교회 교인들 천 명 중에 몇 퍼센트 정도가 훈련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목사님께서는 조금 생각하시더니 "글쎄, 우리교회 교인들 중에 한 2백명 정도, 20%정도‥‥‥‥ 그러면 나머지 8백명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목사님께서는 바로 그 점이 목회에서 가장 괴로운 점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아주 유창한 설교가이시고 제자훈련에 대해서도 남다른 이해를 갖고 있지만 참다운 목회는 쉽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교인들이 잘못 알기 때문에 그것을 깬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출교를 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로마인들이 예수를 믿으면 곧 카타콤으로 들어가야 했고 형장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위험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와 같은 상황속에서 교인들은 엄청나게 늘어났고 자신들의 모습을 즉각적으로 침례나 세례와 같은 신앙고백을 통해 공개적으로 담대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을 마치 '오늘 어떤 넥타이를 매고 갈 것인가'와 같은 그야말로 선택하고 사용할 품목처럼 이해합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아멘)
저는 한 달간 랍비와 함께 유대인 회당에 가서 견학을 하고 회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교육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는 첫날 랍비에게, "랍비여, 내가 알고 있는 신약성서의 개념에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나 돼지처럼 취급하고 상종하지 않으려 했는데, 저의 경우 얼굴이 노리끼리하고 머리가 시커머니까 회당에 드나들면 분명히 이방인 표시가 날텐데 어찌하죠?"라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몹시 신경이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랍비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저를 한참 쳐다보더니 저에게 말도 안되는 질문이라고 하면서 "우리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義)의 요원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제사장 직분을 맡은 자들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로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시내산 계약으로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인들은 편협한 민족주의인 선민사상에 빠져 있었지만, 2차대전을 치르고 난 현대 유대인의 정체성은 달라졌습니다.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진리를 전달해 주는 매개자'라는 의식이 싹튼 것입니다. 랍비는 유대인들은 세계에 들어져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기 위해서 헌신하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테러리즘이나 폭력주의를 배격하기 위해서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없고 억압에서 해방되어 평화가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그러면서 랍비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이 감기에 걸리면 텍사스에 있는 유대인이 재채기를 한다'는 농담을 했습니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소망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을 예수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제사장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제자훈련과 제자 개념을 살려내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몰몬교도들은 자기 자녀들의 훈련을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시키는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에 갈 때는 집회하는 장소(와드)에 가서 한 시간동안 신학훈련을 받고 등교하게 합니다. 우리 한국에 와서도 짧게 머리를 깎고 곤색 바지에 반팔 횐 와이셔츠 입고 둘씩 짝지어 다닙니다. 그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선교 훈련, 성서신학 훈련 등을 받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면 자신들이 관심있는 선교지 언어를 거의 통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몰몬교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한국 선교사로 지정된 청년은 한국에 와 본 일은 없지만 유타주의 솔프레시티 본부에 있는 한국 식료품 가게에 들어가서 한국말로 "아줌마 김치 있어요?"하며 김치를 사서 손으로 먹는다고 합니다. 그토록 철저한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어떻게 교육하고 있습니까? 만약 제가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자녀들을 일주일에 세 번씩 교회에 보내 세 강좌씩 훈련을 받도록 한다면, 아마 일 개월이 못 갈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자이며 제사장이라는 개념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성서적 개념으로 인식한다면 근본적인 삶의 태도부터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훈련입니다. 핀들러는 그의 책「평신도 교리(The doctrine of laity)」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 사역자이며 그 일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목사, 장로, 집사 구분없이 모두 그리스도인이라고 묶고 있으며 여기서 교회 구성의 두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피라밋으로 그린다면한 쪽은 오직 한 무리인 '제자'이고 또 한 쪽은 그리스도인, 제자, 목회자라는 계단이 이루어지는 모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자라고 하는 개념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하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순교는 제사장직을 감당하는 모습과 훈련입니다. 스데반 순교를 계기로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왔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흩어지지 않고 사도 외의 사람들이 흩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사도행전 2장에서 8장까지는 길면 3년, 아니면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인들이 핍박당하여 흩어질 때는 불과 2~3살짜리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수십 년 간 삶의 터전으로 여겨왔던 예루살렘을 떠날만큼 주님께 대한 분명한 헌신과 소명의식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8장 4절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2~3년간 사도들에게 훈련을 받은 후 흩어져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만큼 성장했습니다. 빌립 집사가 복음을 전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사도행전 12장에는 안디옥 교회의 탄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이 각 곳에 흩어져서 그와 같은 선교를 했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13장1절에 기록된 안디옥 교회의 소개를 보면 그 곳에 다섯 명의 유능한 성경 교사와 선지자가 있어서, 그들을 통해 교회가 철저히 훈련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초의 선교사도 파송하게 됩니다.
또 우리의 관심을 끄는 로마 교회를 봅시다. 그 교회를 누가 설립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 10절에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방언으로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 2, 3세들이 여러 곳에서 왔다는 것이 나옵니다. '로마에서 온 몇몇 나그네 된 자들' 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그날 그 말씀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로마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본다면 이들은 정말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증거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했던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을 A.D 58~59년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강림 사건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일입니다. 30년 정도 지난 그 때에 사도바울은 아직 로마에 간 일이 없고 더구나 열 두 사도 중에 누구도 간 일이 없는 그 시점에 로마에는 이미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추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연대를 생각한다면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지 10년 후(62년이나 64년경) 그는 2년간 로마에 갇혀 있었고 셋방에 갇혀 있으면서 행동의 자유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2년 간 그가 복음을 전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68년에 로마 방화사건이 발생을 합니다. 네로의 방화사건입니다. 네로는 로마에 불을 지른 후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고 그것을 계기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네로의 이 핍박을 피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들어간 곳이 카타콤입니다. 우리는 카타콤에 들어간 사람들의 숫자가 수만 명이라는 기록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 오늘처럼 텔레비젼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자동차도, 신문도, 라디오도, 그 어떤 대중 매체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리그레함 전도집회나 민족복음화 성회같이 거대한 집회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지하에서 움직였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로마 방화사건이 있기까지 벌써 로마에는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서 드디어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엄청난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전역에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국교로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까? 더 큰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세력을 업어야만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가 정치적인 세력으로 인정할 만큼 엄청난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그후 313년이 될 때까지 교회는 계속 지하에서 움직였지만 박해를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뜨겁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믿는 그 순간부터 자기들의 신분이 제사장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역자로서 주님을 위해 일하는 자라는 확고한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훈련 방법
이제 제자훈련 방법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비게이토나 그밖의 선교 단체들이 말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몇 개 더 암송하는 것, Quiet Time을 훈련하는 것, 또는 개인전도 훈련을 하는 것 등이 제자훈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제자훈련의 한 방법들일 뿐입니다. 목사님들이 목회하실 때 하시는 설교, 심방, 구역예배, 철야기도, 새벽기도‥‥‥ 등. 이 모든 목회 활동들은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제자로 훈련시키기 위한 교육적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하시고 계신 그 모든 활동들이 곧 제자훈련이라는 사실을 먼저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 활동 위에 훈련을 거의 시키지 못했던 어떤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부분을 보충한다는 의미에서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제시하고 있는 어떤 커리큘럼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주 건전한 입장의 제자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 나는 지금까지 제자훈련을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이 있는 교재를 가지고 제자훈련을 하겠다'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오늘날 선교 단체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만이 제자훈련의 정도라는 독선적인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언제 초대교회 교인들이 암송카드 가지고 암송했습니까? 언제 그들이 성경공부 교재 가지고 공부하고, Quiet Time 했느냐고 조사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으로 계속 훈련되어졌고 그들을 본받아 제자로서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갔습니다. 따라서 선교 단체들이 제시한 프로그램은 우리가 소홀히 했던 부분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보강한다는 의미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은 입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것을 몇 가지 영역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헌신입니다. 자기 신분의식을 확고히 가지고 '그리스도의 주 되심(Lordship of Christ)'을 분명히 하며 우리는 주님의 것을 당분간 맡아서 일하는 청지기라는 입장을 철저히 훈련시켜야 합니다. 또한 사역자로서, 일반 목회자가 아니고 일반 평신도로 산다할지라도 내 직업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직업의식을 분명히 세워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음에는 교인들의 영성개발입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서 말씀을 섭취하는 일, 기도 생활을 하도록 돕는 일, 개인적으로 주님과 깊이 교제하고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도록 하는 것 등입니다. 그래서 생산적인 회복과 휴식이 이루어지고, 또 서로 격려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 다음에 사역자들이니까 사역을 위한 구체적인 훈련으로서 개인 전도라든지, 또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을 계속 양육한다든지, 또 실제로 어려움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훈련이라든지, 사회 봉사할 수 있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네번째 영역으로는 성격개발, 인격개발입니다. 네비게이토에서 십칠년 간 한국 대표로 일을 했던 유광식 선생이라는 분이 미국에서 제가 공부하고 있을 때 저희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네비게이토에서 사역을 그만두고 독자적인 독립교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아주 통탄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 분은 한국대표를 하면서 자기 집 벽에다 스탭들 사진을 붙여서 스탭 밑에 어떤 사람이 어떤 훈련을 받고 있는지, 그래서 제자가 몇 명이 있고 또 그들이 얼마나 제자를 만들었는지를 차-트로 만들어 매년 얼마만큼 변화되었는지를 계속 강조하며 사역을 해 왔답니다. 그후 네비게이토를 그만 두고 나니까 그들과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자기를 이단시하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가슴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지난 16~17년 동안 네비게이토에서 암송을 몇 구절 이상 한 사람이 제자이고, 전도를 일 주일에 몇 명 한 사람이 제자이고‥‥‥‥ 이런 프로필을 만들어 그에 해당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에 최대한의 초점을 맞추었는데 16 ~17년이 지난 후, 자신이 네비게이토를 떠날 때는 다른 스탭들이 그를 이단시하고 그 맴버들이 그를 만나지 못하게 전부 막아 버렸다고 합니다. "나는 16~17년간 제자훈련 에 완전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는 사랑의 훈련을 시키지 못했던 실패자입니다" 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그 분이 아주 깊이 후회하는 이야기를 마음속에 명심해 두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훈련되어야 할 중요한 영역은 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던질 줄 알아야 하고, 진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투신해야 하며,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삶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훈련의 중요한 한 영역으로서 성격개발에 포함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교회지도자가 될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교리적인 훈련을 시킨다든지, 전문화된 특수 훈련, 리더쉽 트레이닝, 제직훈련 등을 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상 제자훈련을 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갖고 계신 분들이 바로 목사님들이십니다. 선교 단체들의 경우에는 대개 일대일 양육이나 소그룹양육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목회 체계를 통해서 제자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전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중심으로, 또는 부흥회나 전체 교인들을 향한 집회를 통해서 방향제시를 할 수 있고, 또는 헌신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소그룹을 통해서 구체적인 성경 개념들을 가르칠 수 있고, 일대 일 심방이나 일대일 양육을 위하여 목회자인 나의 삶을 실제적으로 개방해 주고 모범을 보여주어 어떻게 의로운 삶을 살아가며, 진리를 위해 살아가며,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해 실제적으로 그들을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일대일 방법이 최고다, 또는 '소그룹 방법이 최고다'라고 서로 방법론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일대일, 소그룹, 전체 등의 세 가지 방법을 동시에 병행해서 문자 그대로 삶이 훈련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거듭 강조합니다만, 제자훈련은 교회성장의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입니다. 무슨 특별한 교재를 가지고, 특별한 시간에 모이는 것이 제자훈련이 아닙니다. 목회 전체가 제자훈련이요, 목사의 삶 자체가 제자훈련입니다.
이 제자훈련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함보다 발전시키기 위함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