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글로브 `최다 노미네이트`<뷰티풀 마인드> 미리보기
유리창에 쓴 천재의 공식, 혹은 영혼의 분열
히스로 공항을 향해 급속으로 하강하는 비행기를 맞이하는 건 안개였다. 이제 겨우 4시를 넘긴 런던을 어둠으로 뒤덮어버린 런던포그.
그 시각, 비틀스가 횡단했던
애비로드에서는 지난해 11월 떠나간 조지 해리슨에게
한 아줌마 팬이 눈물의 꽃다발을 바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마블아치 정거장에서 2층짜리 빨간버스를 타고 조금만 달려가면 다다를 수 있다는 노팅힐은 커피로 뒤범벅되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세기의 여배우가 꺼벙한 눈의 책방 주인에게 첫눈에 사랑을
느끼는 동화 같은 일이 펼쳐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해 아침
<All by Myself>를 목놓아 부르던 통통하고 붉은 볼의 영국 아가씨가
그 책방 주인과 연애하다가 직장에서 쫓겨난 채 쓸쓸히 신발끈으로
우려낸 푸른색 수프를 젓고 있었는지도 정말, 모를 일이다. 여기는 런던, 런던이다.
정킷 속보,“오늘 러셀 컨디션이 안 좋아”
엉겁결에 `말과 생활`의 기자가 돼버린 휴 그랜트가 영화홍보를 위해
런던에 머무르던 줄리아 로버츠와 재회하는 것도 알고 보면 다 이런
정킷행사가 열리는 호텔이 아니었던가. 밤낮 상관없는 조깅족들이 겨울공기를 가르며 가쁜숨을 내쉬는 하이드파크 앞 도체스터호텔은 런던의 모든 것이 그렇듯 모던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속에도 클래식한
위엄을 떨쳐보이고 있었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프랑스,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취재진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는 호텔 앞은
오스트리아산(産) 미국 배우를 먼 발치에서라도 보겠다는 소녀들의
발걸음이 왔다갔다, 정중한 도어맨들의 손놀림도 조금씩 바빠지고 있었다. 인터뷰를 기다리는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른 아침에 시사를 마친 영화에 대한 각각의 평이 오가고 “오늘 러셀이 컨디션이 안 좋아
조금 날카롭다더라”는 속보가 실시간으로 전달되기도 했다.
이미 올해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비롯 6개 부문에 이르는 `최다 노미네이트`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뷰티풀 마인드>는 국내 관객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인 존 포스 내시 주니어(1928∼ )라는 실존 수학자의 생을 담은 영화다. 실비아 나사르가 쓴 동명의 전기를 아키바 골드만(Akiva Goldsman)이 각색하고 <그린치>의 론 하워드가 감독한 <뷰티풀 마인드>는 1947년 존 내시가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하던 스무살 무렵부터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타기까지 50년의 긴 세월을 아우르고 있다. 천재수학자가 어린 나이에 학계의 인정을 받고 제자와의 사랑도 이루지만 불행히도 정신분열로 고통받게 되고 결국엔 그것을 극복해
나간다는 이야기만 보자면 얼핏 <샤인>식의 `천재드라마`를 떠올리기 충분하지만
“다큐멘터리도, 단순한 전기영화도 아니다”는 제작진의 주장대로 이 작품은 그만의 오묘한 미스터리와 반전을 숨기고 있다.
유리창이 노트가 된 사나이
“나만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찾아내고야 말겠어.” 1947년 프린스턴. 존 내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두뇌와 수려한 용모를 지녔지만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모두 강의실에서 `누가
넥스트 아인슈타인이 될 것인가`라는 교수의 질문에 분발하고 있을
때 존 내시는 비둘기가 머리를 몇번이나 조아리나를 세고 있거나 말없이 바둑을 두는 엉뚱한 행동을 일삼는다. 게다가 짓궂은 친구들에게 등떠밀려 만난 아가씨에게 “우리 빨리 타액이나 교환하자”며 뺨맞기 적당한 대사를 날리면서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순진한 총각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에게도 친구가 있으니
바로 “세상에, 어떻게 수학처럼 따분한 걸 좋아하지?”라며 헤벌레한 자세로 술만 들이켜는 룸메이트 찰스다. 찰스는 잔뜩 긴장된 내시의 삶에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며 분열된 내시의 다른 모습을 대변하기도 한다.
연구실도 없이 생각이 떠오르면 기숙사 창문 유리창을 노트삼아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써내려가던 존 내시. 어느날 그는 친구들과 들른 술집에서 `누가 금발의 미녀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상황 속에서 종래의
게임이론을 발전시킨 `균형이론`의
단서를 발견해낸다. 그리고 5년 뒤,
논문 발표 이후 촉망받는 젊은 학자로 명성을 쌓아가던 내시에게 뜻밖의 제안이 온다. 냉전시대 과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정부를 위해 일하던 그에게 정부의 비밀요원 윌리엄 파처(에드 해리스)는 암호해독
스파이로 활동할 것을 권유한다. 이후 내시는 팔의 피부 속에 기관출입을 위한 비밀 바코드를 장착하고 펜타곤의 지시에 따라 암호를 해독하는 코드 브레이커로서의 잿빛 삶과 그에게 용기있게 프로포즈해온 당찬 제자 알리샤와의 온기있는 로맨스를 병행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스런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생명의 위협을 받는 몇번의 사건으로 인해 망가져가고 내시는 급기야 정신분열 판정을 받기에 이른다. 편집증적인 자료수집과 그가 보는 것을 아무도 믿지 못하는 상태로
35년간 의학치료를 받으며 늙어가는 존 내시. 그러나 “나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리라 믿어요”라는,
끊임없는 믿음으로 그의 곁을 지키는 알리샤의 노력과 함께 점점 회복해가던 그에게, 어느날 노벨상 담당자가 찾아온다. “내가 상을 못
받을 만큼 미쳤는지 보려고 왔나요?”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 위해 연단에 오른 그의 눈물 속에는 어느덧 백발이 된 아내의 얼굴만이 고일 뿐이다.
새로운 건물 짓듯이, 혹은 조각하듯이
1권의 책과 2명의 실존인물과 3가지 진실. 즉 실비아 나사르의 전기
한권, 존 내시와 그의 아내 실비아 내시라는 두명의 실존인물, 그리고
내시가 천재였다는, 정신병력이 있었다는, 그리고 노벨상을 탔다는 3가지 심플한 사실만을 가지고 제작진은 “새로운 건물을 짓듯이” 혹은 “조각하듯이” 이 드라마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임상의인 아버지와 심리학자인 어머니 때문에 어린 시절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자라났다”는 각색자 아키바 골드만에게
다른 아이들의 눈에 보이는 환영의 세계 역시 공기처럼 “매우 자연스럽고 익숙한 일”이었다.
35년간 의학치료를 받아온
존 내시는 과거 자신이 어떤 환영을 보았는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실제 그가 암호해독자로 활동했었는지조차 증명할 방법이 없다. 존 내시의 구술보다 실비아의 치열한 조사의 결과물이었던 전기를 참조해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결국 실화에 자극받은 철저한 픽션이다. 그러기에 가능했던 인물들이 바로 <기사 윌리엄>에서
매력적인 방랑자 윌리엄 초서 역의 폴 베터니가 분한 룸메이트 찰스와 늘 반쯤 그늘을 드리운 상태로 등장하는 중절모의 비밀요원 윌리엄, 에드 해리스다. 이들이 부여하는 이완과 긴장은 자칫 연대기적 구성 속에 잃기 쉬운 영화적 리듬을 양끝에서 팽팽하게 당긴다.
마지막으로 기자들에게 론 하워드는`영화의 중요한 반전에 대한 이야기는 관객의 즐거운 영화보기를 위해서 함구해달라`는 정중한 편지
한통을 전달했다. 이야기의 진실은 <뷰티풀 마인드>가 국내 관객에게
그`아름다운 마음`을 열어보이는 2월22일이 돼야 밝혀진다.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런던=백은하 lucie@hani.co.kr
※사진설명※
1. <뷰티풀 마인드>에서의 러셀 크로.
2. <뷰티풀 마인드>는 1947년 존내시가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던 스무살 무렵부터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타기가지 50년의 긴세월을
아우르고있다. 천재수학자였지만 정신분열로 평생 고통받았던 존 내시의 삶이 러셀 크로에 의해 회고된다.
3. 모두 강의실에서 공부에 골몰하고 있을때 비둘기가 머리를 몇번이나 조아리나를 세는 사람, 처음 본 아가씨에게"우리 빨리 타액이나 교환하자"라고 말하면서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사람, 통속적인
삶을 살기엔 너무 순수했거나 통상적이었던 사람, 그런 존 내시의 곁을 아내는 평생 지켜준다.
4. <뷰티풀 마인드>는 실화에 자극받은 철저한 픽션이다.찰스(왼쪽)와
월리엄은 그러기에 가능했던 인물들. 헤벌레한 자세로 술만 들이켜는
내시의 룸메이트 찰스(폴 베터니)는 내시의 삶에 윤할유 역활을 한다.
정부 비밀요원인 월리엄은 내시에게 암호해독 스파이로 활동할것을
권유한다.
5. 이 영화에서 러셀크로는 존 내기의 삶을 연기한다. 론 하워드는 그를 캐스팅한 이유로 "러셀이 신체적으로 스무살에서 쉰살 이후를 소화낼 배우"라는 점과 "천재 수학자를 연기할만큼 충분히 지적"이 라는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