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페로프는 순회전시파, 페레드비즈니키 Peredvizhniki를 대표하는 풍속화가이다. 순회전시파는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집중된 미술활동을 지방에 있는 대중에게도 퍼트리자는 취지, 미술을 통해 유럽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를 계몽의 길로 인도하자는 취지에서 설립되고 운영된 예술단체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예술적으로 문화적 격차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지방의 대중을 염두에 두다보니, 이들의 미술은 좀 더 아방가르드한 스타일보다는 사실주의쪽으로, 주제도 삶의 진실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장르화, 즉 풍속화, 그리고 역사화를 중심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순회전시파들은 이런 스타일의 제약, 주제의 제약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들이 견지했던 이른바 "비판적 사실주의"는 러시아 미술에서 오랫동안 주류로 자리 매김을 했다.
페로프는 지방 귀족의 혼외자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조상은 독일에서 시작되어 고향인 토볼스크에 오래 뿌리를 내린 지방 귀족이었고, 아버지는 페로프를 낳은 후 어머니와 결혼을 했지만, 결혼 전에 낳은 자식을 친자로 만들 수도, 자신의 작위를 물려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페로프는 대부에게 입적이 되어야 했고, 아버지의 성을 쓸 수도 없었다고 한다. 페로프는 그가 어릴 적 캘리그래피 (서양의 펜으로 하는 서예) 선생님이 붙여준 별명 (원래는 깃털펜이라는 뜻인 모양으로, 제법 캘리그래피를 잘 했던 모양이다)으로 이게 마음에 들었던지, 나중에 자신의 성을 아예 페로프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가 그린 풍속화에는 풍자와 사회비판이 유머로 잘 버무려져 있다. 시골마을의 부활절 행렬은 기득권인 러시아 정교회 사제를 비난하는 그림이다. 1년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활절 행렬이 이미 출발을 했는데, 마을 사제는 숙취에 절은 표정을 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 집의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깨어나지도 못한 상황이다. 뚱뚱한 사제는 야외에서 즐겁게 차를 즐기고 있는데, 그 앞에 참전용사인 가슴에 훈장을 달고있는 걸인이 자비를 구하고 있다. 하지만 사제는 이를 외면하고 있고, 그의 하인은 걸인을 밀쳐내고 있다. 자기 현세의 쾌락만을 탐닉한 채, 자비와 자선, 애국 등 자신들이 떠드는 덕목은 개무시하는 사제들의 행태를 비판한 그림이다.
세입자 부인을 받아들이는 아파트 관리인이라는 그림은 새로 입주를 하려는 세입자를 고압적으로 대하는 관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새로 입주하려는 아파트는 딱히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치 록뮤직을 하는 듯, 삿대질을 해가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관리인의 옷은 구멍이 숭숭 뚫려 엉망이다. 오히려 관리인 앞의 모녀 세입자의 옷은 엄청 고급스럽다. 이런 곳에 월세를 살만한 지체의 부인이 아닌 듯하지만, 이렇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최근에 남편에게 나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이 반역자로 처형을 당했던, 도박 빚에 몰렸던..) 조그만 권력을 휘두르는 관리인도 한심하지만, 귀부인과 딸도 새로운 현실을 마주하게 된 듯 하다.
페로프의 가장 유명한 트로이카라는 그림이다. 세 아이가 일을 배우기 위해, 또는 어린 나이에도 돈을 벌기 위해 세찬 바람을 거스르며 커다란 물통에 물을 나르고 있는 모습이다. 트로이카은 말 세마리를 맨 삼두마차를 이름인데, 말 대신 세 아이가 그 일을 하고 있다. 이 세 아이에게 놓여진 세상은 만만치 않겠지만, 당당하게 이겨내기를 바래지는 그림이다.
이처럼 그는 사회비판과 풍자, 그런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주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마치 만화에 나오는 그림과도 같이 다소 우스광스러운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그가 다른 그림을 그릴 때는 진지해 지기도 한다.
낚시꾼은 낚시를 드리워놓고 찌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늙은 낚시꾼의 모습이다. 페로프는 후년에 모스크바 미술대학의 교수 직을 얻게 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한다. 그는 48세의 나이로 일찍 죽기는 했지만, 사냥과 낚시의 광팬이었던 그는 자신의 늙은 후 모습이 아래 그림 같기를 바랬을 것 같다. 맨 아래 그림은 도스토옙스키의 영정처럼 사용되고 있는 페로프가 그린 초상화이다. 고뇌하는 대문호의 표정이 아주 잘 잡혀진 그림이다. 죄와 벌, 백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라흐마니노프 등 등장인물처럼 고뇌하는 형상이 압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