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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환 칼럼 ■ 스크랩 경주에 다녀와서
김석환 추천 0 조회 49 06.09.06 19:5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윗집 친구가 자기 전시오픈이 있는 경주에 같이 가잔다.

나는 쉽게 그러자고 했다.

그 전시 말고도 몇 번 나한테 권한 적이 있었지만 번번이 일이 있어서 못 움직였는데 이번에도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모임에 갈 것을 포기하고 같이 가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랫동안 밀렸던 초상화 작업의 밑그림을 완성해 놓고 집을 나섰다.

참살당한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묻혀있는 배티고개를 넘어 백곡저수지를 꼬불거려서 중부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대전을 지나 추풍령 휴게소에 들렸다.


우리는 콩국수를 시켰다.

그런데 점심시간인데도 여름이라 그런 지 식당이 한적하기만하고 분위기가 좀 설렁하다.

꼭 내가 올 여름에 갔다 온 유럽의 고속도로 휴게소 같기만 하다.

우리 말고 두 사람이 더 있을 정도인데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 같지 않게 아주 친절하다.


전에는 사실 나는 그 셀프서비스라는 것이 너무 맘에 안 들어서 어떤 때는 일부러 먹은 그릇을 안 갖다 주기도 했었다.

음식도 싸지도 않고 맛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비스가 좋은 것도 아닌데 굳이 먹은 그릇을 가져오고 갔다 까지 줘야 한다는 것이 너무 맘에 안 들어서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사람들이 표정이 밝고 말도 싹싹하고 시킨 콩국수도 검은 콩으로 직접 만든 것이라서 맛이 있다고 자상하게 설명을 해 주고 음식을 시켰다가 물려도 싫은 기색이 없는 등 너무도 친절하기만 하다.

왜 그러냐니까 요즈음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오지를 않는 단다.

아마도 휴게실의 그 동안의 행태에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식상한 모양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점차로 쉬운 일이 사라져 가는 세상인가보다.

말하자면 휴게소도 전성기가 지난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콩국수가 맛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 둘은 국물까지 다 후루룩 마셔 버려서 늦게 시킨 ‘시골식 떡 볶기’는 더 넣을 공간이 없어서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배를 튕기며 다시 차에 올라 아직은 공사가 덜 끝나서 운전하기에 불편하기만 한 고속도로를 달려 경주에 도착을 했다.


시간이 남은 터라 우리는 첨성대를 찾아 갔다.

첨성대 진입로가 애매해서 차를 돌리다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걸어가니 잘 조성된 연밭이 있고 그 사이의 산책로가 폼이 난다.

흙길을 따라 가다 방부 목을 깔은 길을 따라 가는데 그 옆의 도랑에 흐르는 물이 맑기만 하다.


물속에 쓰러져 물살방향으로 누워서 그 가는 잎들을 나풀거리는 잡초들의 하늘거림과 그 위로 휘날려 떨어진 아주 작은 야생초의 이파리들이 너무도 아름다울 것 없이 아름답다.

맨발로 첨벙거리고 싶은 욕망이 절로 인다.

그런 길 양옆으로 조성되어 있는 백련 밭의 연 줄기나 연잎 들이 어찌나 굵고 큰지 볼 폼 적은 내 작업실의 연들과 비교가 된다.

남쪽이라 그런지 잘 가꾸어서 그런지 연 사이에 잡초도 적고 그 자람 모습들도 월남에서 봤던 그런 제대로 자란 백련의 모습이다.

아쉽게도 꽃은 이제 막판이라 그런지 눈에 잘 안 띈다.


그런 길을 지나 평평하게 잔디로 잘 조성이 된 발굴지를 지나 우리는 첨성대에 도착을 했다.

입장료 800원인가를 내고 첨성대에 들어섰다.

천 이삼백년을 버티고 선 첨성대가 우람하기 보다는 좀 초라하게 서 있다.


전 돌을 약간 원형으로 같은 크기가 한 개도 없이 깎아서 차곡차곡 쌓아서 만든 정성이며 접착제 한 개 없이 그 높이를 유지하게 만든 정성이나 기술도 기술이지만 그 형태가 새삼 암만 봐도 특이하다. 철길 간격의 원형이 폼페이 마찻길의 간격이 원형이라고 하더니 코카콜라의 원형은 여기인 것만 같다.

그런 유려한 곡선을 자주 보는 지금에야 별 신기한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처음 만들어 졌을 때는 무척 신기했을 법하다.

현대적 감각으로 봐서 분명 우수한 조형미의 집산체임이 분명하다. 특히나 그것을 만든 이가 지금처럼 특별하게 무슨 미술교육도 안 받은 이가 만들었을 터이니 더욱 그렇다.


한 바퀴 돌아보니 역시 돌들은 조금씩 틀어져서 아귀가 부분적으로 안 맞는 부분이 있는데다가 무슨 피사의 탑도 아닌데 한 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상층부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댄 돌이 있고 맨 꼭대기에도 우물정자도 눌러 댄 돌이 있기에 쉽게 무너지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좀 걱정은 된다. 그런 공학적인 받침이 일견 대단하게도 보인다.


하긴 무너진다고 한들 우리나라 처처에 상처투성이로 서 있고 길에 처 박혀 있는 탑들 같기야 하겠는가?

그저 탑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유물들에 눈이 어두워 밧줄 걸어 끌어 내려서 여기 저기 깨지고   쪼개진 모습들을 볼라치면 애석하기만 하다.

그런 인간들이 일찍 죽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부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첨성대는 다행이다.

그냥 천문대로 돌을 쌓기만 한 것이라서 그 속에 무슨 보물이 들었을 것이란 상상 자체를 포기시켰을 것이고 또한 그러다 보니 오늘날 까지 돌들이나 형태가 저 만친 온전하게 보전이 된 셈이니까 말이다.

정말이지 첨성대는 부처님 근처에도 안가서 너무 다행이다.


하지만 그게 천문관측소였다는 것은 역시 나도 의아하기만 하다.

주변에 산이 좀 멀기로 서니 굳이 그처럼 낮은 시내 한 복판에 관측 대를 만들려고 했을까 싶다. 조금 옆으로 가면 그래도 거기보다는 높은 지대인 월성이 있고 더 가면 남산도 있는데 말이다.

남산으로 말하면 그냥 돌만 한 개 놓고 서도 첨성대 높이의 몇 배일 것이고 그냥말로 누워서 떡 먹으며 별을 관측할 수가 있었을 텐데 굳이 그처럼 어렵사리 돌을 낮게 쌓아서 고생을 했을까 싶다.

그렇다고 천년 넘는 세월을 앞서간 예술가가 조형물로 만들어 놨다고 보기도 어렵고 말이다.


그리고 첨성대는 아쉬운 것이 이끼라는 옷을 입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끼의 수명이 정확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걸 입고 있으면 정말이지 시간의 때로서는 그만이다. 그걸 걸치고 있으면 자동으로 수 천 년이 그냥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이 그랬다.

습기라는 것이 문화재를 망치는 악재이기도 하지만 그처럼 세월의 흐름을 과장시키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습기가 많은 나라이지만 사계절이 뚜렷해서인지 그런 평지에는 이끼가 별로 안 끼니 세월의 연출력을 생각하면 아쉽다.

그 첨성대에 이끼의 갑옷만 입힐 수 있다면 수백편의 첨성대 시가 나왔을 텐데 말이다.


하긴 유럽의 문화재는 워낙 건조한 지역이다 보니 더더욱 이끼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들은 규모라는 무기가 있어서 이끼 이상의 압도감이 또한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월이고 시간이고 하는 그런 물리적 감동의 깊이가 아니고 그냥 그 자체가 사람에게 무너져 내려온다.

그 문화적 양감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힘이 워낙 미미한 것이다 보니 그런 규모가 주는 위압감은 그런 자잘한 효과를 초월하는 힘일 것이다.


폼페이가 그랬고 로마의 카라칼라 목욕탕이 그랬고 이번에 본 크로아티아 폴라의 원형극장이 그랬다. 필요이상으로 두껍고 크기만 한 그 벽면이나 기둥만을 봐도 그냥 압도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크기만을 가지고 그 문화의 질을 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크기가 주는 압도 감을 피할 수는 없다.


첨성대를 돌아 나오면서 기념품점을 보니 거기에 하회탈 기념품이 있지 않은가?

그건 약과다. 월남 모자도 있지를 않은가?

그 월남 모자로 말하면 작년에 하노이 갔을 적에 일불씩 주고 사서 쓰고 다니다가 남들이 버린 것까지 주워온 그 모자다.

이번에 하노이 들려서 들어 올 때도 시장에서 이불을 주고 사서 들고 온 것이다.

그게 들고 오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짐으로 부칠 수는 당연히 없는 지라 꼭 기내까지 들고 들어가야 한다.


무슨 귀금속이나 귀중한 공예품이나 골동품도 아닌데 기내까지 안전부절하며 부여 앉고 가지고 가야하는 물건이다.

가격에 비하면 엄청 나한테 대접을 받은 그 물건이 이처럼 첨성대 공예품 가게 한 귀퉁이에 천연스럽게 걸려있다니?

안어울림을 넘어서 나한테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비 맞은 거시기처럼 중얼거리면서 첨성대를 나와 친구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경주 박물관에 갔다.

우리는 전시 작가들이란 미명하래 천원의 입장료를 생략하고 박물관에 들어섰다.

늘 보던 친구의 작품과 낯설기만 다른 작가들의 구상작품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옆 댓 명중에 아는 사람 작품이 친구 말고 두 사람 것이 더 걸려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은 작년에 내가 지원금 받으려고 심사받던 나보다 나이어린 그 심사위원의 작품이다.

그 때의 그 창피함이 다시 스물 스물 살아 나오는 듯해서 대충 훑어보고 밖으로 나왔다.


문가에 나이든 도우미 아주머니가 예쁜 한복 차림으로 차와 경주 빵을 앞에 놓고 있어 나는 넉살좋게 붉은 색깔 기운이 아삼삼한 매실차와 빵을 한 개 집어 들고 홀짝이며 나왔다.

밖은 군데군데 학생의 무리들이 있고 그 앞에 열심히 설명하는 선생님의 무리가 서너 군데 보인다.

듣는 이나 가르치는 이가 열심인 모습이 경건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저처럼 우리 문화를 피부로 느끼면서 자란 애들은 분명 박물관 안이나 밖에 그냥 말없이 자리나 지키고 있는 생명 없는 문화재들보다 훨씬 살아 움직이는 문화적 가치 이상의 그 무엇을 잉태시키는 것이리라.


목 잘린 불살들이 즐비한 잔디밭을 서성이는데 어떤 초등학생 애가

“저거 일본 놈들이 다 저런 거래!” 한다.

글쎄 그 말이 그 교육이 얼마나 사실에 입각한 것인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파손되고 해외로 반출 된 그 많은 유물들이 모두 일본인의 소행일까?

숨어 있던 민비를 찾아 낸 사람이 일본인이고 많은 유물을 도굴한 사람이 모두 일본인일까?

이완용이가 있었듯이 자객의 앞잡이가 있었을 것이고 유물을 사들이는 일본인의 앞잡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역할에 대한 비판이나 반성은 왜 없는지 모르겠다.


심난한 마음을 삭이며 유물들을 돌아드니 참으로 그 비참한 모습이 참담하다.

그 부서진 모습이 오랜 풍상에서 온 것이라면 세월의 흔적이어서 감동스러울 것이지만 일거에 잘라지고 깨진 모습은 인간의 포악성만을 내 비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기만 했다.

그것을 덕지덕지 이어 붙여서 콘크리트로 보수한 모습은 더욱 사지를 깁스하다 못해 몸통까지 기브스하고 있는 환자의 모습 그것이다.

그런 문화적 으깨짐의 처참함은 폼페이나 로마노 거리의 폐허에서 오는 느낌과 같은 돌의 쪼개짐이련만 서로 너무나 다르다.

하나는 깨어져 있을망정 여전히 남아 있는 웅장함이라면 하나는 문화적 아픔의 돌새김 그 자체다.

너무도 처연해서 그 또한 비장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조형물처럼 보일 정도다.


뒤뜰로 가니 감은사탑에 버금가는 크기에 비슷한 형태의 탑이 구석에 어울리지 않게 웅장하게 서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온갖 상처투성이의 모습 그대로다.

그 떨어져 나간 자국이나 쪼개진 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도굴꾼들이 밧줄을 걸어서 탑을 끌어내렸던 모습이 생생하기만 하다. 그 만큼 잘려나가고 깨진 모습이 전혀 닳음 없이 현장감이 넘친다.

그 자국들을 통해 그 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듯 하기만하다.


그런 처연한 모습이 오히려 그 탑이 이고 있는 세월에 더해져서 웅장미와 함께 비장미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과장된 측면이 있을 런지도 모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좋은 면도 있다하겠다. 모든 예술미 중에서 가장 지고한 가치는 그런 비장미에 더 비중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의외의 훌륭한 작품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 옆을 돌아드니 역시 탑의 부재들과 건축물의 부재들이 바닥에 즐비하다.

언젠가 그런 부재들이 발견되었을 때의 박물관 관계자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리 저리 흩어져 있는 것들을 낙엽 긁어모으다시피 해서 박물관까지 왔을 것이고 그것들을 제대로 전시를 하자니 제각각이고 짝도 엉망이고 문화재니 버릴 수도 없을 것이고 자연 빈 뜰에 무슨 무장공비나 무슨 사태 때나 시체를 쭉 늘어놓듯이 쭉 적당한 공간에 열을 지어서 놓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 또한 제 시간의 공간에 알맞게 놓여 지지 못하고 장마 때 떠내려 온 잡동사니 마냥 그런 모습으로 놓여 있는 모습이 처연하다.

그런 돌 부재들 속에 군데군데 보여 지는 천여 년 전의 장인의 숨결이 또한 끈 떨어진 연처럼 영원히 돌아 갈 수 없는 역사의 시간에서 외따로 떨어져 나온 모습들이 안쓰럽게만 보인다.


그럴 즈음 가느다랗게 타종소리가 들린다. 성덕대와 신종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쪽을 봐도 종을 치는 소리는 아니고 실제 종소리치고는 너무 작다는 느낌에 갸우뚱 하면서 부재들 사이를 지나는데 무슨 카페테리아가 멋있는 연못을 끼고 자리하고 있어 내려가 보니 백련과 수련 그리고 어리연이 어우러져 있는 연못가에 한옥으로 지은 식당의 모습이 그런대로 옛 멋을 풍길락 말락 하다.

어리연과 백련이 나름대로 멋있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그런대로 볼만하여 작업실 연못의 어리 연을 그 때마다 뽑아내던 것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싶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차에서 기다리니 친구가 행사가 끝나 나오기에 우리는 애프터 장소인 한식당으로 갔다.

식당의 풍경이 우선 손님이 들어가서 두 줄로 쭉 맨 바닥에 앉는 것이다.

한참을 어색하게 무슨 조폭들 대면하듯이 서로 얼굴을 대면하고 앉아 있으니 상이 그 사이로 차곡차곡 와서 놓이고 술들이 한잔씩 따러진 후에 건배 후 식사다.

대단한 조폭상견례의식이다.


그런데 그런 거창한 상 나름과 의식과는 약간 다르게 상은 그저 수수하다.

적당히 끼니때가 되었고 특별히 친구 말고는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고 또한 워낙이 약한 술을 그나마 운전수로 왔기에 그저 고개만 푹 파묻고 열심히 숟가락질을 한 후에 밖으로 나와 차에서 기다리니 친구도 적당한 시간 후에 나온다.

아줌마 팬이 어쩌고저쩌고 했는데 아마 별 볼 일이 없었던지 술 좋아 하는 친구가  얼굴이 허해가지고 멀쑥하게 나온다.


우리는 기름을 넣고 밤길의 고속도로를 달려 한참을 올라오는데 역시 길이 좁고 꼬불꼬불해서 트럭 옆을 지날 때는 좀 신경이 쓰였다.

거기다 비도 질척거려서 좀 애를 먹으며 우리는 또 다시 추풍령 휴게소에 다다라 음료수 한잔을 마신 후 다시 경부선 중부선 그리고 오창 아이씨를 빠져나와 백곡 저수지 뺑 돌아 배티고개 넘어 집에 오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원래 오기로 한 시간보다 근 한 시간은 먼저 왔다.

나는 근 육백 킬로미터를 운전한 지라 좀 피곤했다.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이 닦고 얼굴 닦고 그 물에 발 올려 디밀고 닦고 나서 귀마개 후 잠에 드니 밤잠이 달기만 하고 오늘의  짧은 여행은 또한 기억창고에 넣어져 자물쇠로 꼭꼭 채워진다.

 

 

 

 

 

 

 

 

 

 

 

첨성대 안의 나무와 가게

 

첨성대 안에 있는 나무(개 얼굴?)

 

차와 황남빵

 

외로운 약사보살.

 

 

머리만 있는 부처 얼굴 옆 모습.

 

밑에 사진의 뒷 모습. 현대 조형물?

 

 

 

 

 

얼굴이 부정확해서 오히려 아름다운...

 

 

카페테리아 앞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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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9.06 23:13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10여년 전 갔던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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