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철수
출연 : 방은진 / 박철수 / 문정숙
시간 : 116분
제작년도 : 1996년
장례식 – 살아남은 이들의 의식 그리고 축제
‘학생부군’이라는 말은 생전에 벼슬하지 못하고 죽은 남자를 높여 이르는 말이고 이 신위를 모신다 하여 ‘학생부군신위’라 한다. 이 영화는 박노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이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의 가장 주된 사건이자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가장 큰 틀은 장례식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장례식 얘기를 하고는 있지만 정작 장례식의 주인공인 죽은 박노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박노인의 장례를 핑계로 모여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벌이는 천태만상의 행태에 관심을 둔다.
오빠의 영정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는 바로 보험 판매에 들어가는 여동생, 유교 영정 앞에서 찬송가를 틀어대는 셋째 아들, 박노인이 자주 가던 읍내 로타리 다방의 마담과 아가씨들의 놀자판 노래, 선거철을 앞두고 미리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몰려든 야당 측 여당 측 국회의원 관계자들이 싸움을 벌이면서 장례식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임권택 감독의 <축제>와 비교하자면 <축제>는 따뜻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화해의 장인 장례식을 바라보고 있지만 <학생부군신위>는 객관적이고 차가운 시선으로 온갖 다른 배경을 가진 가족들이 모여드는 요지경 장례식의 모습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영화 <축제>에서는 마지막 가족사진을 찍을 때 혼자 대문 밖에서 서성대는 영순을 불러들여 가운데 앉혀주는 가족의 모습을 통해 남은 가족들이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골을 보듬는 화해의 자리로서의 장례식을 보여준다, 영화 <축제>에서의 장례식은 살아남은 자들의 따뜻한 향연 그대로이다. 하지만 <학생부군신위>는 조금 냉정한 시각으로 장례식을 바라본다. 바로 이 장례식은 같은 핏줄을 가진 가족이지만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살아 엄청나게 달라진 사람들이 모여드는 아주 흥미로운 장소인 것이다. 이 영화에선 시신 앞에서 통곡하고 오열하는 사람들의 울음조차도 모두 죽은 이와 연관되어 떠오르는 자기 삶의 서러움이 반영된 살아남은 자의 울음으로 비춰진다.
영화 <축제>와 <학생부군신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장례식이 그저 죽은 사람을 보내고 기리는 의식이 아니라 바로 살아있는, 살아남은 자들의 축제로서 비춰진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장례식에서 죽은 사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장례식은 그저 건너 뛰어서는 안 될 의식이라고 인식되어 있다. 사람들은 과장된 슬픔을 표현하지만 이내 그것도 의식이 일부분이 될 뿐이다. 저마다 그 동안 쌓아왔던 이야기를 나누며 먹고 마시고 노래하면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기리기 보다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며 주어진 축제를 즐긴다. 박노인의 장례식에 온 로타리 다방의 마담과 아가씨의 노래판에서 장례식의 엄숙함이나 슬픔은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반해 영화에서 보여지는 죽은 사람은 비록 영화 초반에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장례식의 주인이 되지만 이들은 그대로 영화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잔치인 장례식을 끝까지 지켜보는 시선으로 존재한다. 죽은 사람은 장례식을 통한 가족의 화해 혹은 연결의 매개체가 된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가족 – 피는 물보다 진하다?
박노인의 장례를 위해 모여든 가족들은 저마다 다른 곳에서 세월을 보내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장례식 내내 화합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대비되는 것은 까다로운 시골 어른과 도시 사람들의 괴리이다. '아무렇게나 울고 아무렇게나 슬퍼하고 아무렇게나 절하는' 행위를 용납 못하는 까다로운 어른은 쉴 새 없이 장내를 정돈하려 든다. 까다로운 시골 어른의 대표격인 호상은 무너져 가는 윤리의식과 도덕성을 보며 안타까워 한다. 상례를 유교적 관습에 입각하여 가장 정확하게 치뤄내려 하는데 날이 갈수록 현대화, 도시화 되고 있는 가족 문상객들은 좀체 호상의 엄격함을 거추장스럽게만 생각한다. 하지만 까다로운 절차도 '도시 사람들'에게는 무시된다. 이를 대변하고 있는 인물은 찬우의 처인 혜리로 그녀의 모습은 유독 자주 클로즈 업 된다. 그녀는 현대 문명의 이기성을 상징하는 여인으로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 찬우를 무시하며 시아버지의 상례 도중에도 서울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상황만을 걱정할 뿐 상례에는 도통 정성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검정 한복은 큰 어른에게도 쉽사리 용서되고, 오직 그녀만이 전화로 상가가 아닌 외부와 끊임없이 접촉한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유리되는 의식으로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입관 장면에서도 유독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 업 되는데, 이 때의 시선은 제 3자에 가까울 정도로 냉정하다. 이 시선은 '시골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셋째 아들인 찬세의 경우 역시 크리스찬으로 검은 양복을 입는 것이 어른들께 쉽게 인정 돼 버리는 데 이것 역시 도시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분명 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시골 사람과 도시 사람이라는 경계를 쉽사리 무너뜨리지 못하고 어떠한 유대감도 찾아 볼 수 없다.
박노인의 배다른 형제와 보험 외판원 여동생등은 모두 과장된 연기로써 슬픈 척 하는 것 뿐이다. 이와 반대로 박노인의 부인이나 둘째 며느리는 과장되게 통곡을 하거나 슬픈 척 하지 않지만 박노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인물로 분류될 수 있다.
영화에서 감독 자신의 시선을 대신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악동 바우이다. 시종일관 못된 짓만 저지르는 이 악동 바우는 그러나, 박노인의 핏줄이며 그래서 진실로 박노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바우의 역할은 영화 속에서 절대적이다. 그리고 다분히 보수적이다. 바우의 등장은 유심히 살펴보면 한 사건의 종결과 함께 이루어진다. 돼지를 잡아먹기 여념이 없는 어른들에게 돌을 던지고, 문상을 와서 이어폰을 꽂고 있는 괘씸한 조카들을 곯려주고, 상가에서 자신의 정당을 홍보하는 정치인들의 화환을 태우고, 문상을 무슨 이벤트쯤으로 여기는 다방 레지의 구두를 던진다. 바우가 하는 행동들은 표면적으로는 못된 짓이나, 그 대상들이 지닌 속뜻을 알게 되면 오히려 가장 도리를 아는 인물쯤으로 여겨진다.
박노인의 둘째 며느리는 장례식 당시 임신을 하고 있었다. 임신을 한 몸으로도 아버님 식사는 제 손으로 차린다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장례를 치뤄냈다. 그 후 장례식이 끝나고 둘째 며느리는 출산을 했다. 영화 내내 이어지던 죽음, 즉 소멸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며느리의 출산은 소멸 후 탄생이라는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여기에는 긍정적 혹은 희망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그래도 가족’이라는 명제로의 당연한 회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화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들리는 스크린 밖의 “cut!”소리로 인해 이 모든 것들이 짜여진 연기에 불과한 것이라는 감독의 조소로 들린다.
그래도 가족? – 가족의 변화와 해체
요즘 들어 우리 사회에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만연된 가족관념, 가족의 가치 등에 점차 의문을 제시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또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의문을 통해 가족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족 관념이 재정립 되어야 한다고 제기한다. 가족이 혈연의 끈끈한 정에 의해 가치를 지니는 것도 아니고, 삭막한 세상으로부터의 안식처 역할을 수행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배타적 권리를 수행하기 위한 권력의 장이 되었다면, 과연 우리는 가족적이라는 것에 투영된 따뜻함, 화목함, 우애, 포근한 위안등의 감정을 어디서 회복해야 하는가?
<학생부군신위>에서는 조심스럽게 90년대 중반 우리 나라 사회에서 보이는 가족의 붕괴 혹은 변화의 모습을 나타낸다. 서로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가족들은 한군데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해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가족 사이에서 흔히 말해오던 유대감 역시 찾을 수가 없다. 결국 이들 구성원들 스스로는 가족 안에서 기대하던 가족이라는 것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도 감정적 의미의 가족 집단으로의 화해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영화 속의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제도의 틀에 갖혀있다.
우리 나라도 차츰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그 이전에 절대적으로 여겨왔던 혈연 위주의 대가족 혹은 전형적인 4인 가족의 형태를 벗어나 차츰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나타나고 있으며 가부장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도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모습은 점점 구체화 되며 현실적으로 우리 일상에서 느낄 수 있다. <학생부군신위>가 나왔던 90년대 중반과 현재의 모습은 분명 차이가 있다. 최근에 나온 <바람난 가족>만 보더라도 10년쯤 지난 우리 나라에서 가족을 보는 시선은 분명히 달라졌다. 이제는 혈연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는 지나갔다. 호주제 폐지가 대두되는 오늘날 가족의 문제점이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 뿐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지금까지 당연시 되어왔던 가족의 역할과 가족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