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德齡獄事啓
金德齡之獄。臣終不能無惑焉。德齡別無情跡之可據。特以其騰諸賊口。而疑其謀逆。必殺乃已。則何以解國人之疑乎。德齡之名。非但國人知之。夷夏皆知。賊魁之當初謀聚徒黨。誘脅愚氓也。必先自張皇聲勢而言曰。吾今擧事。必無不濟。某陣某將軍且來。某地某力士亦至。一口倡之。百口和之。此其兇謀之最深者也。賊中之事。不可謂必無此謀。至於洪季男。時在守城。而稍有名字。故亦不免云云。而終不及德齡。德齡名最重。故見賣於賊口尤甚。似不得以此指謂必參逆謀也。凡賊招湖南往來相通云。按之多不驗。五道軍馬幷來之言。等是賊中之語。無非誇張之說。決不可以此據而爲信。昔扶蘇, 項燕。其死已久。陳勝之徒。猶假其名。德齡之爲逆魁所藉。何足怪哉。凡賊張皇之說。槪不出此。非所難知。德齡南下之後。會失時宜。雖無寸功之可記。而別無喪師辱國之罪。及其湖賊倡亂之初。聞元帥傳令。卽日調兵。翌日發行。亦別無徘徊觀望之跡。只以騰諸賊口之故。不究情跡。而遽令徑斃嚴鞫之下。則罪名不白。國人疑終不解。而南藩授閫寄者。相與危懼。咸懷反側不自安之心。則恐非國家之福也。臣之過慮。終始在此。且當國事多難。尙未戡定。海寇情跡。亦且難測。無故而殺一名將。深恐徒致賊人之笑侮。而無裨於撥亂之政也。苟或以爲未可輕釋。則亦有說焉。德齡實有逆謀。則其情跡萬無終掩之理。不如姑且仍囚。遲延時日。待情跡彰著。然後聲罪致誅。則用法不苟。罪人無辭而就死。國人之疑。亦且大解。南藩將士之宣力者。庶皆自安而終無反側之心。豈不幸甚。伏惟上裁。
김덕령 옥사계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신(臣) 정탁(鄭琢)은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김덕령(金德齡)의 옥사(獄事)는 신은 끝내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덕령에게 별로 근거할 만한 정적(情迹)이 없는데도, 다만 그 역적(逆賊)의 입에 오른 까닭으로 이로써 그가 반역을 꾀 하였다고 의심하여 꼭 죽이고야 만다면 어떻게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
덕령의 이름은 다만 나라 사람들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일본 오랑캐와 중국에서도 역시 알고 있습니다. 역적 괴수가 당초에 무리들을 유혹하고 위협할 적에, 필시 먼저 스스로 성세(聲勢)를 과장하고 속임수를 끼고서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거사(擧事)함에 있어 반드시 성공 못할 리가 없다. 아무 진(陳)에 아무 장군(將軍)이 마땅히 올 것이며, 아무 지방에 아무 장군도 역시 따라 올 것이다."고 하여 한 사람의 외침에 백 사람들이 뇌동부화한 것일 터이니, 이것이 그 흉모(凶謀)중의 가장 앙큼한 것입니다. 적중(賊中)의 일이 반드시 이런 음모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홍모(洪某) 등도 당시에 지키던 성(城)에 있었는데, 조금 이름자가 있는 까닭에 역시 연루를 모면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덕령에게는 못치지 못합니다. 덕령은 이름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역적의 입에 이용 당함이 더욱 많을 것이니, 이 때문에 꼭 역모(逆謀)에 참여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지적하여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체 역적의 공초(供招) 내에, "호남(湖南)에 왕래하면서 서로 내통하였다."는 것도 조사해 봄에 대부분 서실이 아니었습니다. 매한가지로 이 적중(賊中)의 말이 과장된 말 아닌 것이 없으니, 절대로 이를 근거하여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옛적에 부소(扶蘇)와 항연(項燕)이 죽은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진승(陳勝)의 무리들이 오히려 그들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지금 덕령이 역적 괴수에게 이용당한 것이 또한 무슨 이상하잘 것이 있겠습니까 ? 그 사건을 고찰해 보면 무릇 역적의 과장한 말이 대체적으로 이에 벗어나지 않음이 알기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덕령이 남쪽으로 내려간 이후에 이미 시기를 놓쳐버려, 비록 힘을 펴서 조그마한 공도 기록할 만한 것은 없지만, 별로 군사를 죽게하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없습니다. 그 호서(湖西)의 역적이 반란을 선동한 초기에 이르러 그 도원수(都元帥)의 전령(傳令)을 듣고 그날로 군사들을 정돈하여 그 이튿날 출동하였고, 또한 별로 망설이면서 관망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역적의 입에 이름이 올랐다는 까닭만으로 그 정적(情迹)을 구명해 보지도 않고, 갑자기 엄한 국문(鞫問) 아래에서 곧바로 죽도록 한다면, 죄명(罪名)이 밝혀지지 않아 나라 사람들의 의심이 끝내 풀리지 않고, 남쪽 변방에서 병권(兵權)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위험스럽게 여기고 두려워 하여, 모두들 자면서 뒤척거리며 스스로 편치않은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국가의 복이 아닐성 싶습니다. 신(臣)의 지나친 염려는 종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국사(國事)가 어지러움이 많음을 당하여 아직도 평정되지 못하였고, 해구(海寇)의 정적(情跡)도 또한 헤아리기가 어려운데, 까닭없이 한 명장(名將)을 죽인다면 다만 적국(敵國)의 비웃음과 업신여김만을 초치할 뿐, 난리를 평정하는 정사에는 아무 도움이 없을까 몹시 두렵습니다.
덕령이 참으로 역모(逆謀)가 있었다면 그 정적(情跡)이 반드시 드러나 절대로 끝내 은폐될 리가 없습니다.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그대로 시일을 끌어 반드시 그 정적이 드러남을 기다린 뒤에야 그 죄를 성토하여 죽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면 법을 사용함이 구차스럽지 않아 죄인이 아무 말없이 죽음에 나아갈 것이고, 나라 사람들의 의심도 또한 크게 풀리어 남쪽 변방의 장사(壯士)로서 힘을 펴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스스로 안심하여 마침내 자면서 뒤척거리는 마음이 없을 터이니, 어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臣)도 또한 황공스럽게 ......... 추국청(推鞫廳)에서 대죄(待罪)하면서 가만히 망령된 소견이 있어서, 감히 품달하지 않을 수 없기에 황공하옵게도 감히 아뢰옵니다.
만력(萬曆) 24년 (서기 1596) 8월
(약포집 3권에도 위내용이 실려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나 역모의 누명을 쓰고 옥사했던 광주(光州)출신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장군의 억울함을 선조에게 주청했던 영남 출신 명유(名儒) 약포 정탁의 본 상소문은 지역감정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요즈음 세태에 비춰볼 때 대단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본다.
동서분쟁이 극에 달한 즈음,
동인으로 영남의 거유(巨儒)인 72세의 약포 정탁이 서인의 29세 호남출신 청년 장군 충장공을 살리기 위해 자신에게 닥치게 될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상소문을 올린 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경북 예천 출신으로 대사헌과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던 정간공 정탁은 선조 29년인 1596년 충장공 김덕령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정탁은 '김덕령의 명성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면서 '그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데다 왜적들이 퍼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소문은 이어 '아직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이때 한 이름난 장수를 죽인다면 남쪽 지방의 장군과 장수들이 불안에 떨게 돼 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적고 있어 충장공의 죽음이 의병과 관군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던 정탁은 1594년에는 김덕령·곽재우등의 명장을 천거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옥에 갇히자 무고함을 극력 주장해 백의종군토록 하는 등 뛰어난 학문과 강직한 성품으로 명성이 높았다.
咸崇德等七人罪名及金德齡獄事議
臣琢 議以爲咸崇德附賊。射殺本國人命。罪名極重。而他無可據。只以箭上刻名之故歸罪。事涉疑獄。梁應運, 宋檥, 權克烈, 朴仁賢等罪名亦重。而已受刑。累次發明。且皆業武之人。特命減死。使之立功自效。則似合爲囚求生之意。李承男罪名。特出於閔宗祿現告。而別無現贓之物。且宗祿旣以誣告自服。則此是已完之獄。不當仍爲刑訊。尹滃罪名。實犯贓汚。而其穀。置之於嫌怨人家。似不近情。囚人等罪犯情狀。大槪如此。新經大亂。人心愁苦。犯罪且多。此政朝家專尙寬政之時。犯罪之人。雖不無自致之失。而亦不無誤陷之事。一向加刑。則恐或有枉死獄中之冤。自上寧失不經。特示欽恤之仁。一體疏放。則實是鎭撫人心之一大端也。七人之外。如有情法稍涉可議者。唯冀裁自聖衷。分其輕重。幷示好生之德。不勝幸甚。且金德齡獄事。臣不能無惑焉。殺人者死。此實古今常行不易之定法。而爲將帥者。受命臨陣。設有誤殺之罪。而必視殺人之律。則此豈古者命將推轂。專制閫外之意乎。如德齡則已矣。假有人焉。授以元帥之任。寄以三軍之命。其委任責成之意。顧不重耶。受命專征。別無喪師辱國之罪。而特以管下誤殺之故。遽令離陣。拿致王獄。則與賊對壘之日。事變無窮。此實致危之道。非但此也。凡爲主鎭之將。如以管下之故。朝廷輒加殺人之律。則其勢將至於主將不能措手。戰陣之間。其何以整肅其衆。而使赴功耶。德齡之獄。不幸似之。此臣之所以不能無惑者也。德齡雖非元帥之比。亦朝廷命遣之將也。濫殺人命。德齡誠不能無罪矣。然而違主將一時之令者斬。亦軍中古今通行之法也。主鎭之將。若以軍律。而殺其管下。則朝廷恐不必深罪。以損主將之權。當國家多亂。一才可惜。古者。刑餘黥卒。名汚羣盜者。苟有一才。則皆得致用。未有大過。則不苟加罪。況且德齡。身負重名。當初以仗義討賊自任。朝廷褒奬。至賜以忠勇之號。德齡馬首南下。雖無平賊之功。虎豹在山之勢。未必不在於忠勇陣中。兇賊亦必聞知德齡之名。一朝因管下之訴。遽致王獄。明示顯戮。則兇賊聞之。恐必增氣。亦何以振南方將士之心耶。然則一將之死。無裨於萬人之警。而徒長萬人之惑。所關非輕。豈不重可慮哉。自亂生之後。身陷賊汚。忘恩負國者何限。如德齡者。雖無寸功。別無負國之罪。而竟陷刑戮。則國人之惑。恐終不解也。且德齡之受命無功。蓋亦有說。唐將時方主和。一禁我軍之討賊。德齡雖有勇智。抑何爲哉。亦不可以此深罪德齡也。臣之妄見。以爲朝廷初因公論之發。旣命拿致。德齡亦知公論之可畏。而自分必死。自上特命寬宥。以責後功。則朝家御將用才之道。咸得其宜。而德齡亦當知感國恩。以死自效。古之帝王御世戡難。多用是道。今猶可考。伏惟上裁。
약포 정탁이 咸崇德 등 7명과 金德齡의 옥사를 선조왕에게 올린 글이다.
함숭덕이 왜적에 붙어서 본국인을 활로 쏴 죽였다고 하는데 화살에 새겨진 이름으로 그에게 죄를 돌리는 것은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梁應運·宋檥·權克烈·朴仁賢 등은 죄가 중대하여 이미 형벌을 받았고, 이들은 모두 武人이니 죽음을 감하여 전공을 세워 스스로 속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李承男의 죄상은 閔宗祿의 誣告였음이 밝혀졌고, 尹滃은 臟物罪를 범했다고 하는데 그가 곡물을 그와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집에 숨겼다는 것은 실정에 맞지 않다고 하였다. 이들의 죄가 대부분 이와 같으니 용서하여 조정의 너그러운 정치를 보여주라고 하였다. 金德齡의 경우는 敵前에서 명을 어긴 자의 목을 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고 변론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나 역모의 누명을 쓰고 옥사했던 광주(光州)출신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장군의 억울함을 선조에게 주청했던 영남 출신 명유(名儒) 약포 정탁의 본 상소문 초고본은 지역감정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요즈음 세태에 비춰볼 때 대단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본다.
동서분쟁이 극에 달한 즈음
동인으로 영남의 거유(巨儒)인 72세의 약포 정탁이 서인의 29세 호남출신 청년 장군 충장공을 살리기 위해 자신에게 닥치게 될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상소문을 올린 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나 누명을 쓰고 옥사했던 호남출신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억울함을 선조에게 주청했던 영남출신 명유(名儒)의 상소문 초본이 최근 공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경북 예천 출신으로 대사헌과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던 정간공 정탁은 선조 29년인 1596년 충장공 김덕령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정탁은 '김덕령의 명성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면서 '그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데다 왜적들이 퍼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소문은 이어 '아직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이때 한 이름난 장수를 죽인다면 남쪽 지방의 장군과 장수들이 불안에 떨게 돼 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적고 있어 충장공의 죽음이 의병과 관군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던 정탁은 1594년에는 김덕령·곽재우등의 명장을 천거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옥에 갇히자 무고함을 극력 주장해 백의종군토록 하는 등 뛰어난 학문과 강직한 성품으로 명성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