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문학의 명작--
「나무를 심은 사람」
최병로崔 秉 魯
⑴ 20세기 프랑스문학의 거장인 장.지오노(1895-1970)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은 미처 읽어보지 못한 작품이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반듯이 구해서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은 것은 모일간지의 칼럼을 읽고난 후였다. 서점에 갔더니 신간 판매대 위에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이 쌓여 있었고 비로서 읽어보게 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소량의 단편물이었고 책은 초라한 편이었지만 읽고나니 과연 생태문학의 높은 수준급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으며 무언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 받은 느낌이 들었다. 칼럼의 내용을 간단히 밝혀볼가 한다. 표제는 「나무를 심은 사람 2」이었고 첫머리는 충청남도 천리포수목원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수목원 주인은 1979년 미국인으로서 한국으로 귀화한 민병갈 원장이다. 그는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나 해군장교가 되었고 한국전에 참전 허였다가 군을 제대한 이후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일대에 18만평 규모의 땅을 구입 하였으며 그곳에 수목원을 만든 것이다. 이어서 칼럼의 내용은 수목원 주인 민씨와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 엘제아르.부피에의 조림(造林)에 관한 이야기를 비교하는 내용이다.
…… 엊그제 8일은 그의 1주기였다. 수목원에서 열린 추모행사는 국내외에서 100여명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 그를 만나지 못하고 뒤늦게 천리포 수목원을 찾은 나는 이곳에서 장.지오노의 소설이 현실화 됐음을 느꼈다. 공교롭게도 소설의 주인공 부피에 노인처럼 천리포의 ‘나무 할아버지’도 꼬박 32년 동안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30년이란 세월동안 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이 수목원도 눈부시게 보여준다.----- 마음이 스산해질 때 나는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었다. 세상 돌아가는게 너무 어지러울 때, 알 수 없느 무력감에 빠져들 때도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리포 수목원, 「나무를 심은 사람2」를 찾으면 될 듯싶다. <임영숙 칼럼>에서
칼럼의 표제를 왜 「나무를 심은 사람 2」인지가 짐작 될 것이다. 수목원장 민씨는 소설의 주인공 부피에와 너무나 흡사한 생을 마감 하였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임영숙의 칼럼을 읽고나니 반듯이 책을 구해서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량이 적은 단편 소설이 단행본으로 출간된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며 어려운 일인데 「나무를 심은 사람」은 단행본으로 출간 되었을 뿐 아니라 책의 후면에는 장.지오노의 문학세계와 충실한 작품해설까지 겸하고 있어서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1983년 처음 발표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40년동안 왜 그토록 여러나라 말로 (13개국 언어) 옮겨져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 조그마한 책에서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편집자의 말>에서
이상과 같이「나무를 심은 사람」은 13개국 언어로 번역 되었을 뿐만 아니라 카나다의 세계적인 화가 프레데닉.박크에 의하여 에니메이션 영화로도 만들어 졌으며 국제 에니메이션 영화제에 대상을 받았다. 그후 「나무를 심은 사람」은 세계적인 환경보호가들에 의하여 산림 녹화 운동의 교재로 읽혔으며 그들의 정신교육 자료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⑵ 필자는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난 후부터 두 가지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첫째는 장.지오노의 문학세계와 그의 작품에 관한 필자 나름대로의 탐구작업이었고 둘째는 수년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자료수집을 하던 일로써 우리 한국의 역대 조림인(造林人)들의 행적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천리포 수목원장 민씨도 그중 한 사람에 속한다. 말하자면 “나무를 심은 사람 2”에 이어서 3. 4. 5. 6 순이 될 것이다.그리고 또 한가지 쓰고싶은 이야기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옛날 필자의고향 마을의 뒷동산 숲 이야기도 써서 남기고 싶다. 필자는 그간 역대 한국인들의 조림 과정에 대한 자료를 발견 하는대로 스크랲 하였다. 특히 4월 5일 식목일을 전후한 각종 신문과 잡지 등을 보면 많은 애림가의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그러나 그와같은 자료가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하며 정리 하자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단 그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본고에서는 장.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어 가면서 문학작품으로서의 감동과 필자의 견해를 조명하여 볼가 한다. 임영숙이 그의 칼럼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느낀 감동이란 황폐한 프로방스의 산악지대에서 35년이란 긴 세월속에 혼자의 힘으로 나무를 심고 가꾸어 인간이 살아가기에 좋은 녹지를 일구어 놓은 부피에의 그 위대한 삶에 대한 감동이었다. 소설의 첫머리 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피에의 행적을 읽어보게 된다.
그가 가려고 한 곳에 이르자 그는 땅에 쇠막대기를 밖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구멍을 파고는 그속에 도토리를 심고 다시 덮었다. 그는 떡갈나무를 심고 있었다. 나는 그곳이 그의 땅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곳이 공유지 이거나 아니면 그런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아니겠냐고 했다. 그는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아주 정성 스럽게 1백개의 도토리를 심었다. ……… 「나무를 심은 사람」30쪽에서
소설의 주인공 엘자아르 부피에는 도토리를 심는 그 땅이 누구의 소유인지에 대하여서는 전연 관심이 없었다. 그 땅이 누구의 소유이든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화자(話者)는 그같은 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하여 끈질기게 물어보았더니 3년전부터 도토리를 심었다는 말을 간신히 대답할 뿐이었다. 그날밤 화자는 부피에의 토굴집에서 하루밤을 자면서 느낀 것은 전연 말이 없는 이상한 노인이란 생각 뿐이었다. 누구의 땅인지도 모르는 곳에 힘들여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에 대하여 독자들 역시 이해할 수 없을 것은 당연하다. 투자를 하면 한 만큼 득(得)을 보는 일이 아니고는 절대로 움직이지 앟는 현대인이고 보면 누구나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부피에는 투자만 할 뿐 그 투자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은 전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알고보면 조림인(造林人)들은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에 속한다. 다시 말하자면 산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사람들은 진정한 산림의 가치와 필요성과 절대성을 알고있는 사람이며 그러나 그와같은 산림의 값어치란 이해하기 어려우며 일반인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산림의 가치란 오직 경제적인 이해타산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약한 한 뿌리의 나무를 심어서 그 나무가 쓸만한 재목으로 되기 까지는 최소 한 10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며 보다 이상적인 목재생산이란 수령 200년 내지 300년의 숲을 필요로 한다.
소설의 주인공 부피에는 이미 50세가 넘은 노인이었다. 그 나무를 심은 땅이 자신의 땅이든 타인의 땅이든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토지의 소유와 투자의 득(得)을 계산하는 사람이라면 부피에와 같은 조림인의 길을 걸어갈 수 없을 것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첫머리에 읽혀지는 부피에의 소유론이 확인되는 순간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았다면 더 이상 소설을 읽어갈 수 없을 것이다. 임영숙 칼럼의 소설에 대한 감동도 부피에의 그런 점에 대한 감동이었으며 천리포 수목원장 민씨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같은 감동의 결과였다.
⑶ 이어서 소설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다음날 화자는 노인과 작별하고 푸로방스의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귀향하였으며 그후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므로써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5년동안 고난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5년전 프로방스 산악지대의 노인에 대하여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으며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날 화자는 옛날과 같이 프로방스의 산행을 하고 있을 때다. 그간 전선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 5년전 도토리를 심던 이상한 노인은 이미 사망하였을 것으로 생각하며 5년전 그 지점을 통과하고 있을 때다. 순간 화자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노인이 심은 도토리는 사람의 키만큼 자랐으며 매말랐던 산골짜기에는 물흐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노인은 아직도 살아 있었으며 당시에는 양을 치고 있었지만 지금은 양 대신 양봉을 하였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계속하여 참나무 심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참나무 뿐만 아니라 너도밤나무며 자작나무의 숲도 보였다. 그후 화자는 1947년 노인의 나이 87세에 이르기까지 계속하며 프로방스의 산행을 하면서 그 황폐한 산악지대가 노인에 의하여 녹색의 숲으로 변화 되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이상과 같은 스토리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어가면서 또 하나의 감동은 부피에의 침묵(沈黙)이다. 화자가 부피에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 없는 이상한 노인이란 생각을 하였는데 게속하여 부피에의 침묵은 독자의 마음을 몹시 안타깝게 만든다.
1933년엔 숲을 보고 깜짝놀란 산림 감시원이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 왔다. 이 관리는 천연 숲이 자라나는 것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니 집 밖에서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고 이 노인에게 경고했다. 그 관리는 순진하게도 숲이 혼자 저절로 자라난 것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나무를 심은 사람」40쪽에서
정부의 산림감독원이 부피에의 집에 나타나 산불조심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산림감독원은 그간 숲을 가꾸어온 부피에의 공로에 대하여서는 전연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부피에는 산림 감독원을 향하여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후 지역의 많은 관리들과 국회의원까지 와서 숲이 우거진 녹색 산림을 시찰하고 갔으며 여러가지 지시를 하였지만 그래도 부피에는 오직 침묵으로 그들을 맞이 하였다. 그후 화자에 의하여 숲이 조성된 것은 부피에의 공로라는 점이 밝혀지자 산림감독원은 계란 한 줄을 선물 하였다. 그래도 부피에는 말없이 계란 한 줄을 받을 뿐 전연 말이 없었다. 이상과 같은 부피에의 침묵의 모티프를 어떻게 평가하여야 될지 필자는 본고를 쓰면서 가장 고심한 내용중 하나다. 부피에는 무엇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가? 왜 당당하게 외치지 못하는가? 그의 침묵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와같이 여러모로 생각 하던중 필자는 문득 프랑스 레지스탕스 문학의 대표작인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침묵에 관한 한 두 작품은 공통의 모티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두 작품은 화자 중심으로 이루어진 단편 소설이란 점이다. 「바다의 침묵」의 경우 화자의 질녀가 소설의 주인공이며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 장교의 집요한 접근을 물리치는 질녀의 침묵이 작품의 모티프가 된다면 「나무를 심은 사람」의 경우 산림 감독원에 대한 부피에의 침묵이 모티프가 되기 때문이다. 침략자 독일군 장교에 대한 프랑스 소녀의 냉정한 침묵이 프랑스인의 최대 저항이요 레지스탕스문학의 대표작이 듯이 부피에의 침묵은 숲을 파괴한 인류문명에 대한 저항과 비평이며 동시에 철학을 뜻하기 때문이다.
⑷
마을로 다시 내려오다가 나는 도랑에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그 도랑은 언제나 말라 있었다. 자연이 그렇게 멋진 변화를 잇달아 만들어 내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이 말라붙은 도랑에도 물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앞서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말했던 폐허가 된 몇몇 마을들은 옛 갈로로망의 터전위에 세워진 것인데 아직도 그 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래서 한때 고고학자들이 이곳에 와서 발굴작업을 하다가 낚시바늘을 찾아내곤 했던 것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44쪽에서
화자가 군대생활을 마치고 프로방스의 산행을 하면서 부피에의 노력으로 녹색의 땅이 된 골짜기의 풍경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로마시대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숲의 배경과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내용이다. 몇행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그 참뜻을 알아내기엔 벅찬 내용이며 동시에 부피에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상기의 내용중 갈로로망의 터전위에 대한 주(注)를 읽어보면 로마제국 당시의 한 지명(地名)으로서 풀이되어 있다. 필자 나름대로 또 다른 풀이를 하여 볼가 한다. 갈로로망이란 낱말은 갈리아(Clesahsi)와 로마(Romall)의 합성어로서 한 시대를 구분하는 역사적 용어에 해당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보면 기원전 58년 로마의 명장이며 정치가인 카이샤르가 6개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프랑스) 전지역을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그로부터 약 400년후 게르만족이 동방의 훈족에게 밀려서 서유럽 지역으로 이동하기 까지의 기간을 프랑스사에서는 갈로로망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옛 갈로로망시대의 터전이라고 번역 되었어야 할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세계 최강의 대제국이었다. 제국의 경제는 약탈에 의하여 운영 되었으며 생산은 전연 하지 않고 소비만을 하는 특권층의 민주국가였다. 그들의 식량은 북아프리카로부터 공급 받았으며 그리스 지역에서는 포도주를 수입하고 에스파니아 지역에서는 올리브 기름을 수입 하였으며 중국산 비단옷을 입고 동남아산 향신료를 사용하였고 아라비아산 화장품을 필요로 하였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1년중 공휴일이 150일 이상이었으며 사계절 목욕을 즐기면서 스포츠 경기에 열광 하였고 오늘날 한국인과 비슷하게 멀정한 집을 헐어버리고 새집 짓기를 좋아 하였다. 이상과 같이 먹고 마시고 목욕과 스포츠를 즐기면서 좀더 안락한 주택을 필요로 하자면 그만큼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로마제국 본토의 숲은 기원전 로마제국의 초창기에 이미 고갈 되었으며 기원후 로마제국의 에너지 정책은 갈리아(프랑스) 지방으로 향하였고 카이샤르에 의하여 프로방스 지역은 로마제국의 본주가 되었고 갈리아의 참나무숲은 파괴되어 갔다. 그들은 원주민 겔트족들을 노예로 삼고 참나무숲을 마구 벌채 하였으며 운반을 위하여서는 참나무 재목을 이용한 선박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선박에 실려간 에너지는 로마제국의 목욕탕 물을 끓이고 많은 건설 현장에 이용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아주 작은 마을에도 한증탕을 겸한 대중 목욕탕이 3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또 한편의 의심되는 구절이 있다. “한때 고고학자들이 이곳에 와서 발굴작업을 하다가 낚시바늘을 찾아 내곤 했던 것이다. ” 로마의 유적지에서 더구나 해변도 아닌 산의 정상 부분에서 왜 낚시바늘 같은 것이 발굴 되었을가? 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사용한 생활용품이든가 아니면 기타 물건들일 경우는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산의 정상에서 낚시바늘이 출토 되었다면 소설의 저자 장지오노는 무언가 암호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만약에 장편소설이었다면 좀더 충실한 내용을 밝혔을 것이다. 그러나 단편인 까닭에 저자 장지오노는 암호를 사용하므로써 만족 하였던 것이다. 프로방스 왕국시대로부터 전하여 오는 서사시 「깔랑달」작품 속에서 낚시바늘의 암호는 해답이 나왔다. 요점만을 밝혀둔다. 고대 프로방스 왕국의 초창기라고 생각 된다. 지중해의 어부 “깔랑달”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왕국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는데 그중 한 가지 일은 그지역 최고의 산인 방투산 위에 거대한 삼나무숲을 벌채하는 작업이었다. 어부 깔랑달은 도끼를 들고 방투산의 정상에 올라가 삼나무 숲에 도끼질을 시작 하였으며 30일만에 숲은 완전히 파괴 되었다. 그러면서 한가지 주목할 내용은 부피에가 참나무를 심고 있는 지역이 바로 그 방투산 지역이며 로마의 유적지는 물이 있는 방투산 골짜기에 해당된다. 알퐁스 도데의 작품 「여행노트」를 읽어 보면 지중해의 어부 깔랑달의 방투산 벌채 이야기가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인간의 힘으로서는 할 수 없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해치웠던가! 저 높은 뤼르의 암벽 속에 나무꾼도 감히 올라가지 못하는 삼목숲을 깔랑달은 올라갔습니다. 그는 30일 동안을 혼자서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30일동안 그는 계속해서 도끼질을 했습니다. 나무숲은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고목들은 하나 둘씩 쓰러져 계곡 밑으로 굴렀습니다. 깔랑달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산 위에는 한 그루의 삼목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 많은 공적의 댓가로 저 나이 어린 어부는 에스떼렐의 사랑을 흭득 하였으며, 까시스의 시민들에 의해 집정관으로 임명 되었습니다. 이것이 깔랑달의 이야기 입니다. 「여행노트」 “시인 미스트랄”에서
서사시「깔랑달」의 이야기는 푸로방스의 숲이 로마인에 의하여 파괴되는 과정을 분명히 읽을 수 있는 기록에 해당된다. 동시에 서사시의 내용중 깔랑달이 방투산의 원시림을 벌채하는데 30일이 걸렸다는 이야기는 푸로방스 지역이 약 300년간 로마제국의 식민지이었다는 사실로 해석 되어야 하며 로마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낚시바늘은 지중해의 어부 깔랑달의 유물로 연결된다.
⑸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나무의 이름은 참나무이다. 이어서 두 번째로는 너도밤나무이고 세 번째가 자작나무 순이다. 작품속에 읽혀지는 이같은 3종의 나무에 대하여 처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하나하나 그 나무의 용도를 밝혀보는 과정에서 3종의 나무는 로마문명의 발전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 참나무는 로마의 신 주피터의 성소(聖所) 주변을 장식하는 나무이었으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석탄과 석유를 화석 에너지라고 한다면 나무는 녹색 에너지에 속한다. 녹색 에너지 중에서 가장 양질의 에너지원은 참나무와 너도밤나무이다.「나무를 심은 사람」에서는 참나무라고 하지 않고 떡갈나무라고 번역 하었는데 좀더 정확하게 구분하면 이베리아반도인 스페인 포르투칼 지역에서는 코르크(Cork) 참나무가 많이 자라고 프랑스 지역에서는 오크(Oar) 참나무가 많이 있다. 프랑스의 세계적 특산물인 명품 와인은 오크나무 술통에서 숙성된 와인이며 포르투칼지역의 코르크나무의 껍질은 프랑스 와인의 병마개가 된다. 이와같이 참나무와 너도밤나무의 용도는 다양하다. 두 나무의 열매와 나무의 목질은 많은 곤충들과 모든 산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고 가축의 사료도 되었으며 흉년이면 인간의 식량으로도 이용되었다. 50년생 참나무 한 그루는 연간 9만개 이상의 도토리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의 대중들이 가장 필요로 한 것은 참나무 장작과 공업용 참나무 숯이었다. 그중 로마인들이 사용한 목욕탕의 경우만을 밝혀본다.
한증막의 온도는 섭씨 70도를 넘어야 했고, 온탕의 온도는 적어도 55도는 되어야 했다. 로마의 목욕탕 유적에서 실시된 한 실험에 따르면, 그곳은 공중 목욕탕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는데도 앞서 말한 온도를 유지하려면 연간 114톤의 땔나무가 필요한 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렇다보니 공중 목욕탕에 필요한 땔나무를 확보하기 위해 전용 산림을 지정했을 정도였다. 존 펄린 지음 「숲의 서사시」118쪽에서
이상과 같이 작은 규모의 목욕탕에서는 연간 114톤의 참나무 장작을 필요로 하였는데 거대한 로마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막대한 양의 참나무장작과 숯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막대한 양의 참나무가 푸로방스로부터 로마까지 운반되는데 가장 중요한 기구는 선박이다. 로마제국의 선박은 참나무 목재로 만들어졌고 그중 대형 선박은 350톤 규모의 운반선으로서 배의 용골과 판자는 모두 참나무 목재를 사용하고 선실의 벽과 바닥은 참나무 껍질을 이용 하였으며 네모진 철정(鐵釘)을 사용 하였는데 현대의 철정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와같은 배를 한 척 만드는데는 최소한 100년 묵은 참나무 500주 정도가 벌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같이 경고한 참나무 선박에는 한가지 단점이 있었다. 너무나 빨리 부패한다. 그러나 그같은 선박의 부패를 방지하는데는 너도밤나무에서 축출되는 방부액 피치(Pitch)를 필요로 한다. 당시 로마제국은 너도밤나무의 피치(Pitch)를 축출하기 위하여 푸로방스의 강변에 대량의 피치증류 시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생산된 피치(Pitch)는 선박의 밑바닥 방수액이 되었으며 또는 포도주를 숙성 시키는 술통의 틈바구니며 각종 로푸의 방수액으로 사용 되었다. 장지오노가 작품속에 3종의 나무를 작품의 배경으로 한 것이나 갈로로망시대 터전의 유물을 운운 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와 뜻이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된다. 이어서 자작나무의 경우도 밝혀본다. 나무의 이름을 한자로 쓸 경우 백화(白樺)라고 부른다. 껍질이 백색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있지만 추운 북부지방에 많이 있으며 나무의 특징은 백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수피(樹皮)의 용도가 다양한 나무다.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백마총의 그림은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져 있다. 그와같은 자작나무의 껍질은 고대인들이 종이 대용으로도 사용 하였지만 지붕을 덮는 건축용 재료로도 활용되었다. 푸로방스 지방의 고산지대나 북쪽 알프스산의 자작나무 수림들 역시 화력이 강한 땔감으로서 로마인들의 목욕탕 화목으로서 이용 돼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작나무의 또 한가지 특징은 고대 유럽 지방의 샤만(무당)들이 필요로 하는 신령스러운 나무였다. 소설 「해리포터」에 나오는 비행기와 같이 하늘을 나르는 마법의 빗자루는 자작나무의 가지로 만들어진 빗자루이며 고대 유럽인들의 생활에 가장 친숙한 나무라는 점을 밝혀 둔다. ⑹ 갈로로망 시대의 유럽의 전지역은 울창한 참나무 숲으로 뒤덮힌 수해(樹海)였다. 유럽의 전래동화를 읽어보면 마녀와 사나운 짐승이 우글거리는 숲속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너무나 유명한 동화 「헨젤과 그레텔」은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와같이 무시무시한 숲속 이야기는 동화작가들에 의하여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당시의 갈리아 지역은 그와같이 울창한 숲이 존재 하였으며 수종은 주로 참나무와 너도밤나무였고 추운 고산지대에는 자작나무숲도 많이 있었다. 전편에서 갈리아 지역을 침공한 로마제국의 영웅 카이샤르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밝힌 바 있는데 그의 저술인 「갈리아 전기(戰記)」를 읽어보면 동화속의 무시무시한 숲속 이야기의 원형이 밝혀진다.
앞서 서술한 바 있는 헤르키니아 숲의 폭은 경무장한 병사가 9일정도 걸을 만큼 넓었다. 달리 측량할 방법이 없고, 길을 측량할 방법도 알 수 없었다. 그 숲은 헬베티족과 네메테스 족, 라우라키 족의 국경에서 시작되어 다누비우스(Danuvius)강을 따라 곧장 다키(Daci)족과 아나르테스(Anartes)족의 국경에까지 이어졌다. 거기에서 왼쪽으로 돌아 강의 흐름과는 다른 방향으로 뻗었고 워낙 넓었기 때문에 많은 부족의 국경과 접하였다. 게르마니인의 어느 누구도 60일간의 행장을 소비하여 숲 끝까지 가보지 못했고, 숲이 어디서부터 시작 되는지 들은 자도 없었다. 숲속에는 확실히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종류의 많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중 다른 동물과 전혀 달라 기억해 둘 만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갈리아전기」 221쪽에서
이와같이 갈리아의 전지역은 끝없이 펼처진 참나무 숲속이었다. 「갈리아전기」에는 숲속의 무서운 맹수들의 이야기며 켈트족과 게르만족의 생활상이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문화일류학의 명저 「황금의 가지」를 읽어보면 고대 유럽인들의 문화는 참나무숲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론강을 중심으로한 프로방스의 산악지대도 마찬가지로 참나무, 너도밤나무, 자작나무의 수해이었다. 만약에 장 지오노가 단편소설이 아닌 장편소설을 썼다면 로마인들에 의하여 방투산지역의 숲이 파괴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 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푸로방스지역의 원시림은 로마인들에 의하여 파괴 되었으며 그후 2차림 3차림은 로마의 문명을 계승한 프로방스 왕국과 프랑스 왕국에 의하여 산하의 숲은 갈수록 황폐 하여젔다. 한국인들에게 번역되어 많이 읽혀지는 알퐁스 도데의 유명한 단편소설 「별」의 무대는 푸로방스의 높은 산악지대에서 양을 치는 목동의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주인공 부피에도 푸로방스의 고산지역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 부피에가 양치기를 포기하고 양봉을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직업도 바꾸었다. 양들을 4마리만 남기고 대신 100여통의 벌을 치고 있었다. 양들이 어린 나무를 해첬으므로 치워버린 것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40쪽에서
서유럽의 산악지대가 황폐하게된 원인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할 수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원인은 두 가지를 들을 수 있다. 1330년대로 부터 시작하여 1450년대에 끝난 백년전쟁을 비롯하여 세계2차대전에 이르기까지 빈번하게 발생한 전환에의한 산림피해는 치명적이었으며 이어서 또 하나의 결정적 원인은 당시 유럽인들이 대량으로 양을 방목하였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의 양의 임내방목(林內放牧)은 중세로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양고기와 치즈를 보급하기 위하여 계속 되었고 그 결과 고산지대의 산림은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유럽 문인들의 글과 화가들의 그림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하는 선한 목자를 모티프로한 많은 작품들이 발견 된다. 그러나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그들의 작품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소설 주인공 부피에는 양치기를 포기하고 양봉인이 되었음은 대단히 깊은 뜻이 표출된 작품이다. 왜냐하면 대량의 양치기란 선한 목자와는 거리가 먼 환경을 파괴하는 직업이다. 반면에 양봉이란 직업은 가장 친환경적인 직업이다. 부피에가 양치기에서 양봉인으로 직업을 바꾸었다는 내용은 새로운 멧시지를 뜻하며 「나무를 심은 사람」의 가장 큰 문학적 매력이며 수확이다. 문득 떠오르는 한가지 생각이 있다. 문명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 뒤에는 사막이 있다는 토인비의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토인비의 명언에 대한 가장 충실한 해답은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어보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
나는 해발 1,200~1,300 미터의 산악 지대에 있는 헐벗고 단조로운 황무지를 향해 긴 산책을 떠났다. 그곳엔 야생 라벤더 외에는 아무것도 자라나 있지 않았다. 폭이 가장 넓은 곳을 가로질러 사흘을 걷고나니 더없이 황폐한 지역이 나왔다. 나는 뼈대만 남은 버려진 마을 옆에 텐트를 쳤다. 마실물이 전날부터 떨어져서 물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낡은 말벌집처럼 집들이 모여 있느 것을 보니 옛날엔 이곳에 샘이나 우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과연 샘이 있긴 했지만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 16쪽에서
뼈대만 남은 황폐한 푸로방스의 산악지대를 묘사한 소설의 첫머리를 읽어보노라면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T.S.얼리어트의 시 「황무지」 제5편의 첫머리에 읽혀지는 물이없는 바위산의 이미지와 너무나 흡사한 작품의 배경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중 낡은 말벌집처럼 집들이 모여 있는곳이 로마 제국의 유물이며 야생 라벤더 외에는 아무것도 자라나 있지 않은 것은 선한 목자들에 의하여 방목된 양들이 숲을 파괴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 냄새가 나는 야생향초인 라벤더만이 남아 있는 것은 라벤더의 잎은 양들이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70년대 알퐁스도데의 작 「여행노트」에는 푸로방스의 고원을 찾아 올라간 암염소들의 신나는 야생초의 향연이 읽혀 진다.
풀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것이 모두 자기 뿔보다 높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 그게 또 어떤 풀이었겠나! 맛좋고 보드럽고 잎가에 들쑥날쑥한 천태만상의 목초였더란 말이다. --- 푸르고 큰 동그라미의 초롱꽃 길다란 꽃받침이 달린 진홍빛 디기탈리스 취하도록 강렬한 액즙이 넘치는 야생화들의 그야말로 참으로 멋진 숲이었던 것이다. <스강씨의 암염소> 에서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후「나무를 심은 사람」이 창작된 1953년 푸로방스의 고원에는 야생향초 라벤더 외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골자기엔 물이 흐르지 않았으며 우물과 샘은 바싹 말라붙어 있었으며 살아있는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의 손에 의하여 파괴된 숲과 그 결과로 만들어진 황무지라면 당연히 인간의 손에 의하여 복구되어져야 마땅한 일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파괴된 산림복구를 촉진하자는 멧시지에 해당되는 작품이며 부피에가 양치기에서 양봉이란 직업으로 변신 하였듯이 20세기 세계화문명은 변화 되어야 한다는 본 소설의 내용을 이해 하였다면 장.지오노의 문학세계를 이해한 결과이며 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을 제대로 읽었다는 뜻도 된다. 생태문학의 명작중 명작에 해당되는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읽어야할 작품이며 우리 한국 산하의 환경을 지키기 위하여 앞장선 젊은 일꾼들의 교과서에 해당되는 작품이라 하겠다.
[동방문학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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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세계명작소설> 코너에
올렸습니다. 이 독서수감은 소설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