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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앨런 셰퍼드(Alan B. Shepard, Jr., 1923~1998) 사망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앨런 셰퍼드가 1998년 7월 21일 캘리포니아의 병원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조종사 출신인 셰퍼드는 지난 1961년 5월 5일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우주선 '프리덤7'을 타고 15분간의 우주유영을 하는 등 역사적인 우주비행을 수행했다. 셰퍼드의 우주비행은 옛 소련의 유리 가가린 우주비행보다 23일 뒤진 것이었으나 불충분한 상황 속에서 미국 우주개척의 첫 장을 용감히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1971년 1월 31일에도 아폴로14호 사령관으로 달 탐사에 나서 달을 밟은 5번째 인류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그는 9시간의 달 탐사 도중 달 위에서 인류 최초로 골프를 치기도 했다. 1974년 항공우주국과 해군에서 은퇴한 그는 기업체의 대표로 활동하며 각종 사회활동을 펼치다 말년에 백혈병을 앓아왔다.
미국이 최초로 선발한 7명의 우주비행사 중 한 명이었던 그는 1979년 명예훈장을 받는 등 미국 우주 개척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chosun.com-인용)
1960년 ---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Bandaranaike), 세계 첫 여성 총리로 선출
1960년 7월 21일 실시된 실론(현 스리랑카) 총선거에서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가 이끄는 자유당이 여당인 통일국민당을 누르고 제1당이 돼 세계최초의 여자 총리가 탄생했다.
반다라나이케는 1959년 9월에 암살된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총리의 미망인으로 실론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신하리족의 호족출신이었다. 그녀는 남편 사후 세간의 동정을 싫어해 정계를 떠날 것으로 보였지만 예상을 뒤엎고 1960년 5월 만장일치로 자유당 당수에 선출됐었다. 선거에서 사회당ㆍ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대담하고 유연한 정치력과 ‘실론 제1주의’의 중립외교정책을 표방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는 선거에는 입후보하지 않고 유세에만 전념했다. 그 결과 자유당 73석, 통일국민당 30석, 타밀 연방주의자들 16석, 트로츠키당 12석, 공산당 5석, 무소속이 19석을 차지했다.
1965년까지 총리를 역임한데 이어 1970~1977년에도 총리로 재임했으나 1977년에 총선 패배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994년에 대통령이자 딸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가 그를 다시 총리로 기용함으로써 2000년 8월까지 총리직을 역임하다가 그해 10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chosun.com-인용)
1899년 --- '노인과 바다'를 쓴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출생
사고하는 지성인이자 정력적인 행동가였던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899년 7월 21일 미국 시카고교외의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헤밍웨이는 낚시와 사냥을 좋아하는 의사인 아버지와 음악과 그림에 뛰어난 어머니에게서 기질과 재능을 이어받으며 자랐다. 그는 고교졸업 후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캔자스시티 스타지(誌)의 기자로 첫 펜을 들었다.
유난히도 전쟁의 마(魔)가 세상을 휩쓸던 20세기 전반, 종군기자들은 역사적 현장에 서 있었던 탓인지 문학과 연관이 많았다. 헤밍웨이 역시 그랬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서 ‘무기여 잘 있거라’(1929년)를 집필했고,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년)를 써내려갔다. 전쟁의 허무함, 상처받은 영혼들을 저술한 헤밍웨이는 이 작품들을 통해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대표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삶의 질’에 대한 그의 끝없는 의문은 1952년작 ‘노인과 바다’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삶이 비록 패배하는 싸움일지라도 그 패배가 갖는 존엄성과 그 자체로 승리인 삶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으로 1953년 퓰리처상과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렇듯 진정한 ‘삶의 질’을 추구했던 그였지만, 두 번의 아프리카 여행에서 얻은 사고 후유증과 평생 네 번에 걸친 결혼생활의 불화에서 비롯된 신경쇠약으로 말년을 보내다 1961년 7월 2일 엽총으로 자살했다. (chosun.com-인용)
1898년 ---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처형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문, 1863년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다. 64년(고종 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 ·울진(蔚珍)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18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그 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육임소(六任所)를 설치, 조직을 강화했다. 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 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관군 ·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2000년 7월 1일 발행된 '동학 농민운동' 우표를 참고로 올려보았다.)
1888년 ---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영화감독 페데르(Jacques Feyder, 1888~1948) 출생
벨기에 브뤼셀 교외 출생. 1930년대 프랑스영화의 황금시대를 구축한 영화감독이다. 예술가의 아들로 태어나 무대배우에서 영화배우, 조감독을 거쳐 《여자의 머리, 머리의 여자들》(1916)로 감독이 되었다. 1914년 여배우 F.로제와 결혼하여 평생 콤비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되었으나 1918년 부상을 입고 퇴역한 후 《무당거미》(1921)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명철한 인간관조(人間觀照)에 의한 사실주의로 일관되어 있다. 전반은 《무당거미》라든가 《테레즈 라칸》(1928)에서의 차가운 응시를 통한 인간 분석, 《크랭크뷰 Crainquebille》(1922) 《눈사태》(1923) 《모습》(1924) 등에서의 서정적인 인간 관찰, 《급조신사(急造紳士)》(1928)에서의 풍자적인 감각 등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928년 프랑스에 귀화하였고, 다음해 미국에 초대되어 《키스》(1929) 《안나 크리스티》(1930) 《여명(黎明)》(1931)을 제작했으나, 할리우드식 멜로드라마 작법에 맞지 않아 1932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1933년 《외인부대(外人部隊)》에서는 앞에서 말한 인간분석과 인간관찰의 특징이 하나로 융합되어 유성영화의 심리표현에 최초의 성공을 거두었다. 뒤이은 《미모자관(館)》(1934)에서는 아내 로제 주연으로 양자(養子)에 대한 사랑의 슬픔을 주제로 한 남프랑스의 시적인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였다. 1935년 《여자만의 도시》에 이르러 세 유형의 작품이 하나로 어울려 그의 일생일대의 걸작이 되었다. 그후 1936년 영국에서의 《갑옷 없는 기사(騎士)》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작품 없이 마감하였다. 그는 자신을 아르티장(직공)이라고 칭하였으나, 조용한 응시 속에 집중되었던 인간성찰과 풍토 특성의 적확한 파악은 그를 높은 예술가의 위치에 올려놓았으며, 프랑스 영화 특유의 명석함과 인간분석을 심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858년 --- 독일에 인상주의를 도입하고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친 화가 코린트(Lovis Corinth, 1858~1925) 출생
동프로이센 타피아우 출생. 1876∼1880년 쾨니히스베르크, 1880∼1884년 뮌헨의 여러 미술학교에서 배우고, 1884∼1887년 파리에서 아카데미 쥘리앵에 다니면서 제작에 종사한 후, 뮌헨·베를린에서 활약하였다. 초기 작품은 P.루벤스, F.할스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적이었으나, 후에 외광파(外光派)회화로 전향하여 독일인상파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러나 1911년 갑자기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부터 점차 표현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졌으며 만년에는 석판·에칭의 수작도 남겼다. 저서로 《자서전 Selbstbiographie》 등이 있다.
(1975년 발행-코린트의 'Self-portrait', 1978년 발행-'Easter at Walchensee')
1858년 --- 스페인 왕 알폰소 12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ristina, 1858~1929) 출생
스페인 왕 알폰소 12세의 왕비(1879~85). 아들 알폰소 13세의 섭정(1885~1902)으로 있으면서 뛰어난 지략과 지혜를 발휘해 스페인이 어느 정도 평화와 정치적 안정을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자유주의파 지도자인 프라헤데스 마테오 사가스타에게 정부를 맡기고 언론의 자유와 정치범의 일반사면을 인정함으로써 통치의 기반을 잡았다. 그녀가 섭정을 맡은 동안 보수주의자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와 자유주의자 사가스타가 번갈아 권력을 잡았다. 그녀는 미국과의 전쟁(1898)에서 크게 패해 쿠바·푸에르토리코·괌·필리핀 등을 빼앗기는 등 스페인 제국의 종말을 경험했다. ...
(1926년 발행-'Princess Maria Cristina and Beatrice')
1831년 --- 벨기에,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17세기의 벨기에는 영국·프랑스·에스파냐·오스트리아 등 각국의 투쟁 무대가 되었다. 18세기 초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로부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 지배권을 이양하여 벨기에는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1789년 프랑스의 혁명정부군이 두 번에 걸쳐 벨기에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영토권을 확립하였다. 1804년부터 10년간 나폴레옹 1세가 통치하였으나 그의 반(反) 그리스도교적·군국주의적인 정책은 시민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의 싸움’에서 실패하자 같은 해 빈회의에서 벨기에는 네덜란드에 병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1830년 8월 혁명에 의해서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1831년부터 벨기에 왕국으로서 각국으로부터 승인되고 또한 1839년의 런던회의에서 벨기에의 영세중립(永世中立)이 보장되었다. 독립 후에는 레오폴드 1세·2세의 현정(賢政)이 계속되고 1885년에는 본국의 80배나 넓은 콩고자유국을 영유(領有)하여 경제적 대국(經濟的大國)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이 벨기에를 점령하였고, 다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전후 벨기에는 베넬룩스·북대서양조약기구 등에 적극적으로 가맹하고, 국토의 방위와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였다. 1960∼62년에는 콩고 기타 지역의 독립에 의해서 해외영토를 모두 잃었다.
1817년 --- 추사 김정희(金正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 판독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2000년 11월 1일 발행된 '김정희의 추사체' 우표를 참고로 올려보았다.)
1796년 --- '올드 랭 사인'을 작시한 스코틀랜드 국민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 사망
스코틀랜드 에리셔 출생. 각지의 농장을 돌아다니며 농사를 짓는 틈틈이 옛 시와 가요를 익혔으며, 스코틀랜드의 방언을 써서 자신의 사랑과 마을의 생활을 솔직하게 노래하였다. 최초의 시집 《주로 스코틀랜드 방언에 의한 시집 Poems, Chiefly in the Scottish Dialect》(1786)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한때는 에든버러에서 문단생활도 하였다. 그 후 고향에 돌아가 농장을 경영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세금징수원으로 일하면서 옛 민요를 개작하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프랑스혁명에 공감하여 민족의 자유독립을 노래하여 당국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18세기 잉글랜드의 고전취미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코틀랜드 서민의 소박하고 순수한 감정을 표현한 점에 특징이 있다. 《샌터의 탬 Tam o’Shanter》(1791)을 비롯한 이야기시(詩)의 명작과, 《새앙쥐에게 To a Mouse》(1785)와 《두 마리의 개》처럼 동물을 통하여 인도주의적 사상을 표현한 작품도 있으나, 역시 그의 진면목은 《둔 강둑 The Banks of Doon》(1791)이나 《빨갛고 빨간 장미 A Red, Red Rose》(1796)와 같이 자연과 여자를 노래한 서정시, 《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1788) 《호밀밭에서》와 같은 가요에 있다. 지금도 그는 스코틀랜드의 국민시인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1515년 --- '오라토리오회(會)'를 창립한 이탈리아의 사제 네리(San Filippo Neri, 1515~1595) 출생
가톨릭의 성인. 가톨릭개혁 운동의 대표적 인물의 한 사람으로, 회심한 뒤 로마로 가 가정교사를 하면서 철학·신학을 공부하고, 1548년 자선을 위한 삼위일체신심회(三位一體信會)를 설립하였다. 1551년 사제가 되어 산 지롤라모델라 카리타 성당에 정주(定住), 자기 방에서 젊은이들과의 세미나를 가졌다. 참석자가 늘어나자 장소를 교회의 다락방으로 옮겼는데, 그들은 그 곳을 오라토리움이라 불렀다. 이 모임이 발전하여 '오라토리오회(會)'가 되었으며, 거기서 노래한 음악이 '오라토리오'가 되었다.
1575년 그레고리우스 13세로부터 산타마리아교회의 터를 제공받아 회를 창립하고, 1577년에는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622년 시성(諡聖)되었는데, 축일은 5월 26일이다. 유머리스트의 보호성인이다.
1414년 --- 로마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 1414~1484) 출생
본명 Francesco della Rovere.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를 거쳐 1464년에 그 수도회의 총회장이 되었으며, 1467년에 추기경, 1471년에 교황에 선출되었다. 터키와의 전쟁에 힘썼으며, 1474년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국왕 크리스티안 1세 인견(引見)하고, 1475년에는 코펜하겐대학교를 창설하였다. 이탈리아 국내에서는 메디치가(家)에 반대하여 1478∼1480년의 내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교황에 즉위하자 시스티나성당을 세우고 1471년부터는 바티칸도서관을 확장하는 등 학문과 예술을 장려함으로써 문화사상(文化史上)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첫댓글 ㅎㅎㅎ... 우표 오늘의 역사도 재미있습니다.. 어디서 이런것들을 날아오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수고 많으십니다..덕분에 눈이, 머리가, 마음이 즐겁게 놀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