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쌍화점’에서 공민왕 역을 맡은 주진모. 역사 서술에서는‘개혁의 화신’으로 묘 사되고 있는 공민왕이지만, 기록에 따르면 폭군으로 소문난 연산군 못지않게 성(性)에 집착했다. / 쇼박스 제공
그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개혁 군주의 상징'이라는 고려 공민왕은 왜 불명예스러운 시해(弑害)를 당한 것일까? 시해는 조선왕조 500년에는 단 한번도 없었고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를 당한 바 있다. 도대체 왜 공민왕은 이날 측근 인사들에게 시해를 당한 것일까?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9월 22일(갑신일) 밤 공민왕은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해 침전(寢殿)에서 잠이 들었다. 내시 최만생(崔萬生)과 총애를 받던 신하 홍륜(洪倫)이 무리를 이끌고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만취해 있던 공민왕은 단 한번 저항도 못해보고 어이없이 당했다. 머리에도 칼이 지나갔는지 어떤 사서(史書)에는 그 날 밤 현장을 묘사하면서 '왕의 뇌수(腦髓)가 벽에 뿌려졌다'고 적혀 있다.
비극의 씨앗은 공민왕 자신이 바로 전날(21일) 뿌렸다. 이 날 측간(변소)에 가는 공민왕을 따라온 내시 최만생은 공민왕이 간절하게도 바라는 소식을 전했다. "익비(益妃)께서 아기를 밴 지가 벌써 5개월이 되었습니다." 익비는 같은 왕씨 집안으로 고려 현종의 아들인 평양공 왕기(王基)의 13대손인 덕풍궁 왕의(王義)의 딸이었다.
후사(後嗣)가 없던 공민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건이 터지기 1년 전인 1373년(고려 공민왕22년) 공민왕은 10월 초하루 일종의 미소년 동성애 집단인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했다. 대언(代言-조선의 승지에 해당하는 벼슬로 오늘날의 청와대 수석에 해당) 김흥경(金興慶)으로 하여금 총책임을 맡도록 했고 그 아래의 홍륜, 한안(韓安), 권진(權瑨), 홍관(洪寬), 노선(蘆瑄) 등이 항상 침실에 함께 있었다.
▲ 영화‘쌍화점’에서 공민왕(왼쪽·주진모 분)과 호위무사 홍림(오른쪽·조인성 분)이 함 께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 / 쇼박스 제공
공민왕이 직접 이들과 동성애를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려사'에도 '왕은 성질이 여색(女色)을 즐기지 않았고 또 관계도 되지 않았으므로 죽은 공주(공민왕이 사랑한 노국공주)의 생시에도 가까이 하는 일은 심히 드물었다.'
그런데 왜 공민왕은 자제위를 만든 것일까? 그에 관한 분명한 답이 고려사에 있다. '공주가 죽은 후에 여러 왕비를 받아 들이기는 했으나 별궁(別宮)에 두고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
고려사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공민왕은 관음증 환자에 동성애자였다. 공민왕은 스스로 여자 모양의 화장을 하고서 여종을 불러들여 김흥경 홍륜 등으로 하여금 '난잡한 행동'을 하게 하고 자신은 옆에서 지켜 보았다. 그러다가 '마음이 동하면 홍륜 등을 자기 침실로 불러 들여서 마치 남녀 사이와 같이 자기에 대하여 음행을 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하룻밤에) 수십명을 갈아대고야 겨우 그쳤다.'
자제위 중에서는 특히 홍륜이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공민왕은 홍륜 한안 김흥경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왕비들과(고려 때는 후궁 개념이 약했다) 관계를 강요했다. 이에 정비(定妃) 혜비(惠妃) 신비(愼妃) 등은 죽음을 각오하고 자제위와의 잠자리를 거부했지만 익비는 공민왕의 강압에 굴복했다. 익비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공민왕이 칼로 위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제위 멤버들과 관계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홍륜은 재미가 붙어 '왕명을 빙자해' 자주 익비를 찾았다. 그 익비가 마침내 임신을 한 것이다.
다시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9월 22일 공민왕의 측간이다. 공민왕은 아들이 생길 경우 자기 자식으로 삼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최만생은 그래서 '측간'에서 그 말을 은밀하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최만생의 말을 들은 공민왕은 겉으로 기뻐하면서 "누구와 관계했느냐?"고 묻는다. 이에 최만생은 "익비의 말에 따르면 홍륜이라고 합니다"고 답한다. 공민왕은 "내일 선조의 릉에 참배하고 오는 길에 '홍륜의 무리', 즉 자제위 무리들을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고 말한다. 이 모든 일을 은밀하게 최만생에게 맡겼어도 공민왕은 다음날 죽었을까?
미칠 때로 미친 공민왕은 그 자리에서 최만생에게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아라"고 실언 아닌 실언을 했다. 바로 그날 밤 두려움에 떨던 최만생은 이런 사실을 홍륜을 비롯한 자제위 멤버들에게 알렸고 호위무사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왕을 모셨던 자들이기에 만취한 공민왕을 쉽게 시해할 수 있었다. 조사 결과 최만생이 먼저 칼로 치자 나머지 멤버들이 달려들어 칼과 주목으로 마구 내리쳤다. 폭군(暴君) 연산군을 능가했던 광군(狂君) 공민왕의 최후는 이처럼 허망했다.
역사에서 연산군은 지금도 욕을 먹는 희대의 폭군이건만 공민왕은 '개혁의 화신'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다. 역사적 평가라는 게 얼마나 쓰는 자의 임의대로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역사 서술과 평가가 이러하니 드라마나 영화 속의 공민왕도 늘 멋진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