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卯年 神武王陵 春季大祭 奉行
신묘년 신라45대 신무왕릉 춘계대제 헌관 및 제관일동
신라숭혜전에서는 지난 5월 3일(음 4월 1일) 경주시 동방동 660번지에 있는 신라45대 신무왕릉(사적185호)에서 전국에서 모인 후손들이 참사한 가운데 辛卯年 신무왕릉 춘계대제를 봉행하였다. 이날은 모처럼 따뜻한 봄 날씨를 보여주었고, 멀리 대종회의 길수 상임고문, 성중 경기도종친회장, 대구,경북도종친회 용찬 상임고문,용달 상임고문, 용운 상임고문, 용호 회장과 부산종친회에서 대절한 한 대형버스에 광김 일가들이 참사하고, 경주김씨종친회 일가들과 신라김씨 왕릉 전참봉, 시참봉들이 도열한 가운데 엄숙하게 제향이 시작되었다.
신무왕릉
大祭는 오전 11시 參奉 金世洪(慶州人) 집례로 봉진례 . 진폐례를 시작으로 진행되어 初獻官에는 碩學 金興俊(광산김씨 부산종친회 상임고문) . 亞獻官에는 碩學 金敏夫(광산김씨 부산종친회장) . 終獻官에는 神武王陵 參奉 金昭洋(광산김씨 부산종친회 상임고문) . 大祝官에는 參奉 金止喆(慶州人) . 典祀官에는 參奉 金永佑 (慶州人) . 司尊에는 參奉 金周泓(慶州人) . 謁者에는 幼學 金容?(광산김씨 부산종친회 상임이사) . 贊引에는 幼學 金永權(광산김씨 부산종친회 事務局長) . 幼學 金泰完(광산김씨 부산종친회 靑壯年會長) . 判陳設에는 參奉 金學祿(慶州人) . 奉爐에는 幼學 金春得(광산김씨 부산종친회 상임이사) . 奉香에는 幼學 金永福( 광산김씨 부산종친회 부회장) . 封爵에는 幼學 金善明(광산김씨 부산종친회 수석부회장) . 尊爵에는 幼學 金哲中(광산김씨 부산종친회 부회장) . 贊者에는 參奉 金成達(慶州人) . 直日에는 金漢斗(慶州人) . 金吉洙(광산김씨대종회 상임고문) . 金萬五(慶州人)씨가 맡아서 엄숙히 봉행하였다.
제향에 들어가기전 신라45대 신무왕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며 신무왕의 4子중 셋째 아드님께서 광산김씨의 시조가 되시었다고 하면서 금년에 신무왕릉의 참봉을 처음으로 광산김씨 문중에서 맡아서 열심히 봉심하고 있다고 하였다.
신무왕릉 춘계대제를 위하여 제물을 진설하고 있다
신무왕릉 춘계대제를 위한 3헌관 인사 소개 및 제관 소개를 하고 있다.
신무왕릉 춘계대제 초헌관 석학 淡溪 김흥준 (광산김씨 부산종친회 상임고문)
신무왕릉 춘계대제 아헌관 신무왕릉 참봉 般谷 김소양 (광산김씨 부산종친회 상임고문) 신무왕릉 춘계대제 아헌관 석학 呼湞 김민부 (광산김씨 부산종친회장)
신무왕릉의 참봉은 임기가 2년이며 경상북도지사의 임명장을 받고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관리이다. 지난해 12월 19일 부산종친회 회장인 般谷 昭洋회장이 광산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신라김씨의 왕릉 참봉에 도임하였으며, 금년에 이렇게 신무왕릉의 대제를 광산김씨 문중에서 전체적으로 주관하여 봉행하는 것도 처음이다.
신라 45대 신무왕은 사적 제185호. 무덤의 지름 15m, 높이 3.4m.의 왕릉으로 산기슭 약간 경사진 지점을 이용하여 분묘를 축조했는데 아무런 부대시설이 없는 원형봉토분이다.
죽어서 제형산(弟兄山) 서북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 인근에서도 예로부터 이 분묘를 신무왕릉이라고 전해왔다.
신무왕릉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정작 왕릉을 찾는 이는 드물다. 신라 45대 신무왕릉은 신문왕릉에서 7호 국도를 따라 2킬로미터쯤 남쪽으로 가다 만나는 LPG 주유소 부근에서 좌회전하여 철로를 지나 500미터쯤 올라가면 최근 개발붐이 일고 있는 도동택지구획정리지구가 나오는데, 차를 세우고 북쪽을 바라보면 남북으로 길게 일렬로 늘어선 마을 한복판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그 속에 신라 45대 신무왕릉이 있다.
우징(훗날 신무왕)은 흥덕왕의 신임으로 시중벼슬을 두 번이나 맡았지만, 자신의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에 임명되자 부자가 함께 벼슬에 있을 수가 없다고 흥덕왕께 해직을 청원하였고, 대아찬 김명이 시중 자리를 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스스로 시중에서 물러난 김우징과 그 덕분에 시중 자리에 오른 김명과의 인연은 후에 큰 악연으로 돌변된다. 흥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위 자리를 두고 김균정과 조카인 김제륭간의 권력싸움이 벌어졌을 때, 우징은 김양과 함께 아버지 균정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자신이 자진 사퇴한 시중자리를 이은 김명의 지지를 받은 사촌 제륭일파에 밀려 작전상 후퇴를 했고 아버지 균정이 살해되는 비극을 맞는다. 제륭(희강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김명(민애왕)에게 살해되었고, 아버지의 한을 품었던 우징은 청해진 장보고 장군의 지원을 받아 김양의 도움으로 부모의 원수인 민애왕을 죽이고 정월달에 왕위(신무왕)에 오르지만 그 해 7월에 병으로 붕어하셨다.
그렇게 오르고 싶었던 왕좌인데 불과 6개월 만에 병으로 붕어하신 신무왕의 이야기에서 신라 후대 왕족들의 비극적인 삶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흥덕왕 사후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간에 벌어지는 왕권다툼과 거기에 등장하는 균정,제륭,명,우징,양,배훤백,장보고,정년 등 인물들의 이야기 또한 사극과 역사소설의 소재로 부족함이 없는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시기 중국의 역사를 비교해보면 결코 신라왕조만의 흔들림은 아니었다. 당나라와 통일신라는 밀접한 교류를 했었고, 흥망의 길 또한 함께 걸었음을 알게 된다. 신라 42대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826년부터 희강왕, 민애왕을 거쳐 신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붕어하신 다음해인 840년까지 중국의 황제는 문종이었다. 연호는 ‘태화’와 ‘개성’을 사용했는데, 태화는 흥덕왕 재임시절과 일치하고 희강왕과 민애왕 신무왕의 권력다툼 기간은 ‘개성’연호기간이다. 당나라 문종황제 재임시절 그 유명한 ‘감로의 변’이 일어났다.
중국 역사에 귀족간의 당쟁과 아울러 환제의 외척과 환관의 횡포 또한 당이 멸망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측천무후 때 점차 세력을 얻어 현종시기에 3,000명 이상이 된 환관들은 중국황제에 밀착하여 권세를 휘둘렀는데, 당나라 12대 목종(재위 820-824)때부터 당왕조 멸망 직전인 제19대 소종(재위 889-904)까지 여덟명의 황제 가운데 환관이 옹립하지 않은 황제는 13대 경종 뿐이었다. 이러한 환관의 횡포를 막으려고 문종은 봉상번진의 절도사 정주와 함께 중앙환관을 몰살할려고, 궁궐 정원의 석류나무에 거짓으로 감로가 내렸다고 하고 이를 보려고 환관들이 모이면 한꺼번에 죽일 계획이었으나 바람에 불어 복병들이 숨은 천막이 벗겨져 탄로나서 환관의 금군에게 정주등이 죽임을 당하고 문종은 “짐은 가노(환관)에게 눌려 어떻게 할 수도 없다”라고 옷깃을 적시며 울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태화’연호를 사용하던 문종황제는 ‘감로의 변’이후 ‘개성’으로 연호를 바꾸었고 환관들에게 물려 허수아비 황제노릇을 하였는데, 이 ‘개성’연호 기간동안에 신라에서는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간에 드라마틱한 권력투쟁이 벌어졌으니 어쩌면 중국황실보다는 역동적인 역사였는지 모른다.
- 자료출처 : 이진락의 문화산책(신문기고문정리) 중에서 일부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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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진이 있는 "양촌재의 행복갤러리" 원문보기 글쓴이: 촌장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