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분봉왕이 되어 나자렛 예수가 선교활동을 하던 때에 갈릴리를 다스렸다. BC 4년경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안티파스의 아버지 유언을 인정하여 아버지가 다스리던 왕국의 일부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 아버지의 유언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입었던 피해를 복구했다. 도시 둘을 복구했는데, 이중 하나는 로마의 황족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바꾸어 붙였다. 그는 자신의 왕국과 인접해 있던 사막 왕국의 공주인 나바테아인(人)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배다른 형제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재혼했다. 이 결혼으로 그의 예전 장인의 심기를 건드리고 유대인 신하들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그의 치하에 있던 세례 요한이 이 결혼을 이유로 헤로데를 비난하자 헤로디아는 헤로데를 부추겨 요한을 감옥에 가두도록 했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딸 살로메를 충동하여 그녀가 헤로데의 생일 축하연에서 춤을 추는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게 했다. 안티파스는 마지못해 요한을 참수했는데, 그뒤 예수의 기적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자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자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고 있던 안티파스에게 먼저 보냈다. 왜냐하면 예수는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지역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안티파스는 예수의 또다른 기적들을 보려고 예수를 만나고 싶었으나 재판하는 것을 꺼려 그를 곧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이보다 먼저 안티파스는 갈릴리 해 서부 해변에 부분적으로 그리스 도시를 모방한 티베리아스라는 도시를 세웠다. 안티파스는 궁전 안에 그리스 양식의 조상(彫像)들을 세웠으나 동전에는 인물상을 넣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을 지지하고 로마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부유한 유대인 집단인 헤로데당을 격려했다.
로마 제국 황실과 가까웠던 그는 36년 로마-파르디아 협상의 중재역을 맡았다. 그의 공로로 협상은 성공리에 끝났으나, 이 소식을 로마에 경솔하게 보고하여 이후 황제가 된 로마의 시리아 대사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의 분노를 샀다. 37년경 안티파스가 이혼한 이전 아내의 아버지인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가 안티파스의 왕국을 공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안티파스가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자 황제는 비텔리우스를 파견했으나 그는 여전히 안티파스에게 악감을 지닌 채 일부러 최대한 느릿느릿 이동했다. 37년 칼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되자 헤로디아는 그녀의 오빠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득세를 시기하여 남편 안티파스에게 아그리파를 황제에게 탄핵하도록 설득했으나, 칼리굴라 황제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그리파는 안티파스의 음모를 예견하고 그를 고발했다. 칼리굴라는 안티파스를 갈리아로 추방했으며, 헤로디아도 남편과 함께 그곳에서 지냈다. 또한 아그리파는 안티파스의 영지를 합병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5h0430a "헤로데 안티파스 브리태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