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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 葵禪軒 독서일기 2025년 1월 8일 수요일]
《密陽朴氏世系上》 시조왕 박혁거세
제1세 박혁거세 朴赫居世 (BC 57~AD 3, 재위 60년)
始祖王
姓 朴 氏
諱 赫居世
漢宣帝地節元年壬子秋七月聖母自仙桃山降于楊山蘿井
始祖誕降有神異祥
漢宣帝五鳳元年甲子夏四月丙辰卽位國號徐羅號居西干
漢平帝元始四年春三月薨享壽七十三
陵在國都南七里曇岩寺傍南亭藪內卯坐
始祖王妃閼英氏初龍見於閼英井
始祖王妃誕降有神異祥
漢宣帝甘露元年戊辰春正月立
王妃有賢行(能)輔國人謂之二聖
王之薨七日王妃亦薨
陵在同原同坐
誕三男一女
《密陽朴氏世系上》
시조왕
성 박 씨
휘 혁거세
한선제지절원년임자추칠월성모자천선도산강우양산나정
시조탄강유신이상
한선제오봉원년갑자하사월병진즉위국호서라호거서간
한평제원시사년춘삼월훙향수칠십삼
릉재국도남칠리담암사방남정수내묘좌
시조왕비알영씨초용견어알영정
시조왕비탄강유신이상
한선제감로원년무진춘정월립
왕비유현행(능)보국인위지이성
왕지훙칠일왕비역훙
릉재동원동좌
탄삼남일녀
시조왕의 성은 박 씨이고 휘는 혁거세이다. 한나라 선제 지절 원년(BC 69년) 임자년 가을 7월에 성모가 선도산에서 내려와 양산 나정에 이르러 시조가 태어났는데 신이하고 상서로움이 있었다.
한나라 선제 오봉 원년(BC 57년) 갑자년 여름 4월 병진일에 (12세) 즉위하여 국호를 서라라 하고 거서간이라 불렀다.
한 평제 원시 4년(AD 4년) 73세로 돌아가시다.
릉은 국도의 남쪽 7리 담암사 부근 숲속에 묘좌이다(오릉).
시조 왕비는 알영 씨이고 처음에 용으로 알영우물에 나타났다.
시조 왕비의 탄강도 신이하고 상스러웠다.
한 선제 감로 원년(BC 53년)에 왕비가 되었다.
왕비는 현명하고 보필에 능해 나라 사람들이 두 성인이라 일컬었다.
왕이 돌아가신 7일 후에 왕비도 역시 돌아가셨다.
릉은 (왕과) 같은 자리 같은 좌에 있다.
(슬하에) 3남 1녀가 태어났다. 박민(朴慜 南海王), 박특(朴忒), 박민(朴忞), 공주 李謁平).
[팔경논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들어 있는 박혁거세 탄생 신화를 《密陽朴氏世系上》은 인용하지 않고, 다만 <聖母自仙桃山降于楊山蘿井 始祖誕降有神異祥>라는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알영 탄생 신화는 <初龍見於閼英井 始祖王妃誕降有神異祥>라며 ‘龍見’를 써서 신화성을 나타낸다.
엄격한 유학자인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들어 있는 탄생 신화를 그대로 옮겨 써도 과히 흠 될 게 없는 데도 ‘降’ 자와 ‘神異祥’ 자로 신화성을 최소화했다. 이 족보의 저자가 왜 그랬을까?
조선 1600년대에 족보 《密陽朴氏世系上》를 편집한 박씨족 사람들은 ‘怪力亂神’을 언급하기를 꺼리는 유학자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300여 년 동안 전해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무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신화성을 최소화했을 것이다. 500년 전에 공자가 살았으니, “박혁거세 신화를 강조하는 것은 곧 우리가 중국보다 500년이나 미개합니다”며 자백하는 꼴이 된다. 신라의 성골들은 그런 신화를 만들어서 무지한 백성들을 현혹시켜 복종하도록 하는 통치술을 썼겠지만, 합리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신화가 유치했을 것이다.
그럼 고려시대 유명한 유학자인 김부식은 왜 《삼국사기》에 <박혁거세 탄생 신화>를 넣었을까? 그것은 경주 김씨인 자기의 조상 <김알지 신화>를 넣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박혁거세와 김알지는 104년의 시차를 갖기 때문에 박혁거세 신화가 있기 때문에 김알지 신화를 삽입해도 아무런 문제 될 점이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씨 왕조가 박씨 왕조와 같은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치한 신화라 하더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상징 몇 가지를 근거로 하여 당시의 역사적 사실의 뼈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정착민과 이주민의 관계이다.
경주 지역에 선주민은 청동기 문명을 가진 이씨, 최씨, 정씨, 손씨, 배씨, 설씨 성으로 묶이는 6촌민들로서 이들은 평양 지역에 살다가 위만조선이 망하자 여러 씨족 집단이 남하하여 이미 다른 씨족들이 선점한 지역을 지나 경주에 정착했다. 이후 약 40년 후에 한사군에 복종하던 박씨족이 철기문명을 갖고 평양 지역을 떠나 남한을 통과하여 경주 지역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6촌민들이 경주의 주요 지역을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경주의 서북쪽 변두리인 선도산 지역에 살다가 형산강을 건너 평지로 진출하면서 가까운 양산촌민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나정과 알영정이 있는 양산촌이 당시에 가장 대촌이었고 세력이 강했다. 박혁거세와 알영이 결혼하여 낳은 딸이 커서 이알평에게 시집갔다. 또한 대수촌 손씨는 박혁거세를 키워주었다고 해서 지금도 우리 박씨 집안에서는 손씨를 고맙게 여기라는 말씀이 가전되고 있다.
6촌과 박씨족 두 집단은 원래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정서적인 면에서 평화적인 타협이 가능했고, 빼앗지 않고서도 주거지와 경작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충돌하지 않고 이웃할 수 있었을 것이다. 6촌민들의 조상은 위만조선에서 중간급 층이었고, 후래한 박씨족의 조상은 귀족층으로 더 발달한 문명을 가졌기 때문에 선주민과 후래인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결과가 어린 박혁거세를 왕으로 한 국가의 건설이었다.
신라는 선주 육촌민과 후래 박씨족이 폭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타협하며 세운 국가였다. 이어서 온 석씨족과 김씨족이 큰 충돌 없이 지배계급에 편입되었다. 그 상징이 박혁거세 신화, 석탈해 신화, 김알지 신화이고, 그 실질이 박석김 삼성의 혼인동맹이다. 석탈해는 박씨족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김알지는 석탈해왕의 아들이 되었다. 성골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초기사의 해석이다. 그러나 박씨족 족보에는 남해왕에게 공주가 없다. 탈해가 사위가 아니다. 즉 역사적 사실은 달랐을 것이다.
연대가 지나면서 박석김 삼성 간에 권력 투쟁이 발생하였고, 김씨족이 박씨족과 동맹하여 석씨족을 축출하고 356년 내물이사금 때부터 왕위를 대대로 계승하였다.
780년 37대 선덕왕이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 후부터 시작된 김씨족들 간의 왕위 쟁탈전이 912년 52대 효공왕이 아들 없이 죽음으로써 일단 끝났다. 132년 동안 15대의 왕이 바뀔 정도로 왕권이 쇠약해지면서 국력도 쇠약해졌다. 뿐만 아니라 51대 진성여왕을 세울 정도로 씨가 마르고, 겨우 세운 52대 효공왕 조차 재위 5년 만에 후사 없이 죽어버리니 왕권이 세워질 리가 없었다.
912년 후사 없이 죽은 효공왕의 하나뿐인 공주인 김씨 왕비 덕분에 왕이 된 신덕왕과 아들인 경명왕, 경애왕이 15년 동안 쇠약해진 국력을 다시 강하게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데다가 박씨족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씨족이 반격의 기회를 노리다가 927년 견훤군을 이끌어 들여 경애왕을 참살하였다. 왕비는 견훤에게 능욕당하고, 후궁들과 궁녀들은 견훤군에게 곳곳에서 강간당하였다. 신덕왕의 셋째 아들이자 경명왕의 아우인 孝廉은 신하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생사를 모른다. 김부가 왕위에 올라 경순왕이 되었다가 8년 만에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천년 사직 신라가 멸망한 원인은 왕권 쇠약이지만 결정적인 근인은 김부가 견훤군을 이용하여 반란을 성공시키고 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흑역사 면에서 보면, 김부 경순왕은 신라의 역적이자 매국노인 것이다. 김씨족 알지가 신라 왕족에 편입하여 득세하고, 자손 내물왕이 김씨족 만의 왕통을 만들더니 결국 김씨가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김부의 반란이 없었다면, 918년에 경명왕으로부터 밀양, 고령, 함양, 죽산, 상주, 전주, 순천, 경주 등지로 분봉을 받아 간 8명의 왕자들은 자기 지역에서 힘을 길러 신라는 부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신라를 고향으로 하는,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박, 석, 김, 이, 최, 정, 손, 배, 설씨 등이 한국 인구의 51%가 된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핏줄 속에는 신라가 맥맥히 흐르고 있다.
[참고자료 1] 경주 선도산(慶州 仙桃山)
경주시 형산강 서쪽 효현동에 위치하며 높이는 390m이다. 신라시대부터 지목도가 높았던 산이며 신라사람들은 이곳을 서방정토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경주의 서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서악이라고도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2] 선도산 성모사(仙道山 聖母祠)
경주 서악 선도산 큰 바위 아래 마애삼존불이 있고 사소(娑蘇)라고 전해지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성모(聖母)를 배향하는 성모사(聖母祠)가 있다. 일연이 기록하기를 '어떤 사람은 서술성모(西述聖母)가 혁거세를 낳았다' 고 했는데 서술성모는 곧 선도성모이며 선도산이 바로 서술산이다. 중국의 공주 사소(娑蘇)가 동방으로 와서 성자(聖子)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박혁거세라는 것이다. 신라에서는 산신에 올리는 제사 중에 선도산 성모에게 올리는 제사를 제일 우선시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3] 경주 나정(蘿井)
오릉과 멀지 않은 곳에 혁거세 탄생설화를 간직한 나정이 있다.
나정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팔각형의 건물터와 타원형 우물터가 확인되었다. 팔각형의 건물은 시조가 태어난 곳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제사시설인 ‘신궁’의 터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현재 나정은 구역이 정돈되어 있고 석재유물 일부, 그리고 조선 순조 때에 세워진 비석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4] 알영정 閼英井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비(妃) 알영부인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우물로 경주 오릉 내 숭덕전 대나무 숲 속에 위치하고 있다. 우물 위에는 길이 2m, 너비 50㎝의 석재 3매가 덮여 있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알영정 옆에는 1931년 세운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가 안치된 비각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알영정에 용이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은 여자아이를 낳았고 한 노파가 길렀는데 훗날 신라의 왕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알영정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동경잡기≫에는 경주부 남쪽 5리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5] 오릉 五陵 : 사적 제172호, 경북 경주시 탑정동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의 고분.
문천에서 남쪽으로 약 120m 떨어진 구릉성 평지에 위치한 5기의 고분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인다. 즉 "신라시조인 박혁거세와 왕비의 시신을 합장하고자 하는데, 큰 뱀이 쫓아와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나누어 장사지냈으므로 오릉이라고 하며 또한 사릉(蛇陵)이라고도 일컫는다"고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5릉은 박혁거세·알영왕비·남해차차웅·유리이사금·파사이사금과 같은 박씨 왕가의 초기 능묘로 전해지고 있다.
분묘의 양식은 원형봉토분으로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제1호분은 높이 7.25m, 지름 38.8m로 5릉 가운데 가장 높고 규모가 크다. 제1호분의 동북쪽에 있는 제2호분은 장축을 동서로 한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으며 길이는 6.3m이다. 제3호분은 5기의 분묘 가운데 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정원형의 분구로서 높이는 3.75m이다. 제4호분은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는 2.25m이다. 제5호분은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가 가장 적은 분구로서 높이는 2m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6] 서라벌 6촌
일찍이 진한 땅에 골짜기마다 조선의 유민들이 흩어져 살았는데, 6촌이 있었다. 6촌의 촌장들이 모여 박혁거세를 맞아 '사로(斯盧)'의 왕으로 받들어 진한 12소국의 하나인 사로 6촌이 되고, 점차 신라 6부로 발전하였다. 이들이 나중에 그 공으로 서기 32년 유리왕 9년에 각기의 성(姓)을 받아 신라 6성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경주 6부로 개편되었다.
(1) 표암봉(瓢嵒峰)에 내려온 알천 양산촌장 알평(謁平 李氏) :경주시 동방(東方), 인왕(仁旺), 구황(九黃), 노동(路東), 노서(路西), 동부(東部), 성동(城東), 성건동(城乾洞) 일대.
(2) 형산(兄山)에 내려온 고허촌장 소벌도리[4](蘇伐都利 崔氏) : 경주시 배동(拜洞), 내남면 덕천리, 울주군 두서(斗西), 두동면(斗東面) 일대.
(3) 화산(花山)에 내려온 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 鄭氏) :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외동읍(外東邑) 일대.
(4) 이산(伊山)에 내려온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 孫氏) : 경주시 현곡면(見谷面) 일대.
(5)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온 가리촌장 지타(祉陀) 裵氏 : 경주시 감포읍(甘浦邑) 양남(陽南). 양북면(陽北面) 일대.
(6)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온 고야촌장 호진(虎珍, 설거백 薛氏) : 경주시 천북면(川北面) 화산(花山), 물천(勿川) 동산리(東山里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7]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알영 탄생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 꿇고 울고 있으므로 곧 가보았으나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卵)이 있어 깨뜨려 보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거두어 길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벌써 장대하여 숙성하니,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이(新異)하므로 추존하다가 이에 이르러 임금으로 세웠다. 진(辰)의 사람이 호(瓠)를 박이라고 하므로 처음에 큰 알이 박만하였기 때문에 성를 박(朴)이라 하였으며, 거서간은 진의 말로 왕의 뜻이다(혹은 귀인을 칭한다).
4년 여름 4월 신축(辛丑)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5년(BC 53년. 박혁거세 17세) 봄 정월에 용이 알영(閼英)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쪽 갈빗대에서 계집아이를 탄생시키니 할범이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기르며,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장성하여 덕기가 있으니 시조가 듣고 비(妃)로 맞아들였는데 행실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그때 사람들이 이성(二聖)이라 하였다.
8년에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변방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신덕(神德)이 있음을 듣고 이내 돌아갔다. 9년 봄 3월에 패성(孛星 : 혜성)이 왕량(王良 카시오페이아자리)에 있었다. 14년 여름 4월에 혜성이 삼(參 오리온 자리)에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8] 탈해이사금 조 김알지 탄생
(탈해이사금) 9년 (서기 65년) 봄 3월에 왕은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녘에 호공을보내어 보게 하였다. 금색의 작은 궤짝(櫝)이 나뭇가지에 걸린 채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으므로,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본즉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기위(奇偉)하였다. 왕은 기뻐하며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 아니냐.” 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이내 알지(閼智)라 이름하고, 그 출생이 금독(金櫝)이므로 성을 김씨(金氏)라 하였으며,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하고 따라서 국호를 삼았다.
김부식의 평론 : 논하여 말한다. 신라 고사(古事)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姓)을 김씨(金氏)로 삼았다."하는데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하는데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이는 신라 국자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朴居勿)이 지었고 요극일(姚克一)이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에 보인다.
신라에서 김씨 가문이 박 씨, 석 씨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라는 점을 그들의 토템인 닭과 연결시켜서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 이사금
알지는 훗날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학계에서 김성한으로 추정하기도 하는 김세한(金勢漢), 혹은 김열한(金熱漢)이다. 경주 김씨 족보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세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 이사금이 13대 왕위에 오르며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되고, 17대 내물 마립간 시기 이후부턴 김씨 세습이 고착화되면서 오늘날 신라는 대중들에게 김씨 왕조로 많이 알려져있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