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초반 김창흡 시문 지으며 노년 유유자적
1778년 단원 김홍도 직접 찾아 절경 화폭에 담아
주변 노송 지금도 늠름…경포호는 매립 사라져
66세 노인은 인제에서 출발해 미시령을 넘었다. 바다를 따라 내려오는데 경포호가 발길을 잡는다. 특히 호해정(湖海亭)이 마음에 들었다. 노년을 보낼 만했다. 1718년에 아들 양겸(養謙)에게 편지를 쓴다. “경포호 가운데 있는 조도(鳥島), 경포호의 안개와 연기가 만나는 경치는 더욱 기이하구나! 거기다가 사람들이 머물기를 권하니, 정성스러운 마음을 거절할 수 없구나.”
노인은 호해정에 머물면서 학문과 시문을 강론했다. 틈틈이 경포호에 배를 띄우고 흥에 겨우면 시를 읊었다. ‘호정잡음(湖亭雜吟)'에 지금은 사라진 호해정 앞 경포호가 넘실거린다.
옛날 홍장이 머문 이 호수(紅粧舊臨水)/ 바위엔 아직 풍류 남았네(片石尙風流)/ 늙은이 온갖 상념 사라져(夫灰萬念)/ 흥겨움 없어도 배에 머무네(無興駐扁舟).
세속적 욕망이 사라진 노인의 편안한 얼굴이 보인다. 시비를 잊고 망연히 배에 앉은 모습도 보인다. 기쁨과 슬픔의 경계를 넘은 듯 무심(無心)하다. 그렇게 한동안 김창흡(金昌翕·1653~1722년)은 호해정에서 유유자적했다.
1750년에 화재로 소실돼 폐허가 됐다. 주인은 김창흡의 유적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해 정자를 새로 짓고, 민우수(閔遇洙·1694~1756년)는 ‘호해정기'를 짓는다. ‘호해정기'는 곧바로 맹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觀於海者難爲水).” 무슨 의미일까.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바다를 본 사람은 시냇가에서만 논 사람들 앞에서 물에 관해 말하기가 어렵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경포대는 큰 바다 부근에서 자체로 하나의 구역을 형성해 바다와 접하지 않은데도 승경이 빼어나고 훌륭해 이에 짝할 만한 게 없다. 동해가 참으로 장관이기는 하지만 경포대가 없다면 동해의 승경은 완전히 갖추어지지 못하는 셈이다.
호해정은 경포대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경포대에서 보면 호해정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호해정에서 보면 경포대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경포호를 내호(內湖)와 외호(外湖)로 구분하는데 각각 그 승경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해를 보는 자가 장관이 동해에만 그친다고 여겨 경포대와 호해정의 승경을 아예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성인의 문하에 노닌 자가 그저 성인의 말만 듣고 천하에 또한 사람들의 법이 될 만한 정언(精言)과 묘론(妙論)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1778년엔 김홍도가 김응환과 함께 이곳에 들러 화폭에 담았다. 호해정과 매립되기 전의 경포호의 물결,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배가 흔들거린다. 송환기가 찾았을 때는 1781년 8월이었다. 저물녘에 경포호에 배를 띄웠다. 물결이 잔잔하여 즐길 만했다. 북쪽 언덕에 호해정이 있는데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서 은은히 비친다. 노를 저어 배를 대려고 하는데 어둑한 빛이 밀려와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서둘러 가자고 보챈다.
홍장암에서 인월사를 지나 좁은 길을 따라가니 호해정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굵은 배롱나무가 입구를 지킨다. 정자의 전면에는 초서체 ‘호해정'과 측면에 해서체 ‘호해정' 편액이 걸려 있다. 정자 뒤로 호위하는 듯 노송들이 늠름하다. 처마 밑에서 앞을 바라보니 상전벽해다. 매립되어 밭이 되거나 주택이 들어선 지 오래다. 눈을 감고 김창흡의 시를 읊조리니 다시 호수에 물이 가득하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