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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상(李鳳祥)
[본관] 덕수(德水: 지금의 황해북도 개풍)
[경력] 형조참판, 충청도병마절도사, 훈련금위대장
[생졸년] 1676년(숙종 2)~1728년(영조 4) / 향년 52세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의숙(儀叔). 이순신(李舜臣)의 5대손이다. 1702년(숙종 28)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경종의 재위 중에 포도대장·훈련원도정·삼도수군통제사·총융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 형조참판으로서 훈련금위대장을 겸임하였다. 이 때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의 죄상을 논박하였다가, 정미환국으로 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어영대장에서 좌천되어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함락하였을 때 작은아버지 이홍무(李弘茂)와 함께 반란군에게 붙잡혀 죽었다. 충청감영에 들어온 이인좌가 항복할 것을 권하였지만 충무가(忠武家)의 충의(忠義)를 내세워 끝내 굽히지 않았다 한다.
어사 이도겸(李道謙)이 청주로부터 돌아와 그 순절을 전하자, 영조는 정려를 세우고 좌찬성에 추증하였으며, 뒤에 헌종이 청주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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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절도사 증 찬성 이공 신도비aud(節度使贈贊成李公神道碑銘)
숙종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 28) 3월, 성상이 문묘를 배알하고 알성과(謁聖科)를 시행하여 문무(文武)의 인사를 시취(試取)하였다. 문과에서는 이해조(李海朝) 자동(子東)을 얻었으니 3세에 걸쳐 문형을 지낸 집안이었고, 무과에서는 이봉상(李鳳祥)을 얻었으니 고(故) 명장(名將)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대의 공렬을 훌륭히 계승하기를 기대하였다. 자동은 문학과 언의의 재능이 사류들의 중망을 받았지만 중도에 요절하여 공론이 안타까워하였다. 이공(李公)은 일찍부터 장수에 올랐는데, 험난한 상황을 만나면 한결같이 올바름을 지켜 끝내 난리 때 순절하여 위용을 세웠으니, 나라에 있어선 충신이고 가문에 있어선 훌륭한 후손이었다.
세상의 부침과 인간의 수명은 본디 행불행이 있기 마련이지만 두 공과 같은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충정공(忠定公) 장영(張詠)이 스스로 말하기를“나와 동방급제한 사람 가운데 인재가 가장 많다.”라고 하였는데,보잘것없는 나도 그러한 영예를 누렸다.
공의 자는 의숙(儀叔)으로 덕수(德水) 사람이다. 부친 홍저(弘著)는 상주 영장(尙州營將)을 지내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 광윤(光胤)은 현릉 참봉(顯陵參奉)을 지내고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증조 지백(之白)은 순릉 참봉(順陵參奉)을 지내고, 고조 회(薈)는 임실 현감(任實縣監)을 지냈는데 모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두 충무공의 자손들이다. 공은 숭정(崇禎) 후 병진년(丙辰年, 1676, 숙종 2) 4월 20일에 태어났다. 키가 장대하고 수염이 수려했으며 눈빛은 번개처럼 번뜩이고 목소리는 쩌렁쩌렁하였다. 급제한 이후로 지위와 명망이 매번 남보다 앞섰는데 곧 선전관에 제수되어 비변사 이정청 낭관을 겸하였고, 얼마 뒤에 차례를 뛰어넘어 천거되어 훈련원의 주부, 도총부의 도사와 경력으로 옮겼다.
삭주 부사(朔州府使)로 나갔다가 훈련원 정을 거쳐 내금장으로 발탁되었고, 다시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나갔다가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옮겼다. 체임되어 겸내승에 제수되었고 다시 선전관과 우림장이 되었다. 재차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다시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나갔다.
당시 흉년이 들었는데 공이 보관하고 있던 곡식 4만 섬을 모두 꺼내어 진휼하며 말하기를, “차라리 유곡(留穀대출하지 않고 창고에 보관한 곡물)을 멋대로 써서 죄를 받을지언정 차마 나의 백성을 굶주려 죽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714, 숙종 40) 남병사가 되고, 병신년(丙申年, 1716, 숙종 42) 선전관이 되었다. 정유년(丁酉年, 1717, 숙종 43) 삼도 통어사에 올랐다가 체직되어 금군 별장에 제수되었다. 춘천 부사(春川府使)에 제수되자 훈련도감에서 아장(亞將)으로 머물기를 청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720, 숙종 46)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자 어영청에서 다시 머물기를 청하였지만, 경기 감사가 할 일이 많은 고을에 폐단을 해소하는 일은 아무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아뢰자 성상이 주청을 받아들였다. 얼마 뒤에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옮기게 되자 양주의 백성들이 달려가 호소하며 머물기를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축년(辛丑年, 1721, 경종 1) 10월에 조정으로 들어가 좌변포도대장, 훈련원 도정이 되었다. 당시에 김일경(金一鏡)의 무리가 장차 난입하려고 하여 인심이 두려움에 떨었는데, 이삼(李森)이 그때 포도대장으로 있으면서 마음이 내숭스럽고 우악하였다. 우리 중부 귀락공[歸樂公, 이만성(李晩成)]이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특별히 이삼을 내보내고 공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공이 흉악한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임인년(壬寅年, 1722, 경종 2)에 통제사로 나갔다가 겨울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당시에 구장(舊將)들은 모두 제거되고 공은 오래된 명망으로 한직에 머물고 있었는데, 도로 포도대장과 훈련원 도정의 직분을 맡았다. 갑진년(甲辰年, 1724, 경종 4)에 총융사와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었다.
공은 부지런히 직분에 이바지하면서도 날마다 울적하여 즐겁지 않아 두문불출하며 공무가 아니면 집밖을 나가지 않았다. 항상 충무공의 유훈(遺訓)인 “등용되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등용되지 않으면 초야에서 농사짓는 것만으로 족하다.〔用則效死於國, 不用則耕於野足矣.〕”라는 열네 글자를 문미에 걸어두고 아침저녁 암송하였으니, 공의 지조를 알 만하다.
을사년(乙巳年, 1725, 영조 1) 봄, 형조 참판으로 훈련도감, 금위영 및 좌우포도청의 일을 겸찰하게 되었다가, 이어 훈련도감 대장 겸 훈련원 도정에 제수되었다. 당시 조정의 의론이 한창 김일경 무리의 역적들을 모두 주벌하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무신(武臣)이 비록 당벌(黨閥)의 논의를 해서는 안 되지만 이는 실로 충신과 역적의 판가름에 관계된 일이니 의리상 분명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빈청(賓廳)에서 회의하고 정청(庭請)에서 청대할 때 참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승민진원(閔鎭遠)이 대행왕(大行王)의 편찮았던 실상을 교문(敎文)에 첨가하여 군흉들이 기만하고 무함한 정상을 밝게 보이기를 청하였는데,공이 성상의 하문에 그 말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힘써 아뢰었다. 5월에 대간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어영대장과 지훈련원사에 제수되었고 동지의금부사가 된 것은 두 번이었다.
특진관으로 입시했을 적에 역적이사성(李思晟)이 중국의 규례를 증거로 대며 죄를 지어 유배된 사람들을 모두 변방의 수령으로 보임하도록 청하자, 공은 그에게 딴 생각이 있다고 의심하여 힘써 저지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727, 영조 3) 여름, 다시 대간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공은 안으로 지키는 것이 매우 확고하면서도 밖으로는 너그러운 듯하였다. 위태롭고 불안한 시절을 당해서는 과격한 행동으로 화를 초래하는 일을 하지 않고자 하였다. 모르는 자들은 공이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었다고 의심하며 비방하는 말이 낭자하게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혹자는 “찰싹 달라붙어 몰래 교활한 짓을 하여 심사가 음침하다.”고 하고, 혹자는 “군수물자를 남용하여 역적 유봉휘(柳鳳輝)에게 몰래 부의를 보냈다.”라고 하는 등 반드시 공을 함정에 밀어 넣고자 하였다. 대신이 조사하여 밝히기를 청하였는데 결국 사실무근으로 나오자 성상이 매번 위로하고 달래며 말하기를 “충신의 후손으로 됨됨이가 질박하고 성실하다는 것은 내 이미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비록 잠시 동안 면직되기를 허락하여 염의(廉義)를 펼치게 했지만 곧 다시 도로 제수하였다.
7월에 김일경 무리가 다시 들어와 조정이 일변하였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논핵하며 삭출된 여러 신하들과 같은 죄로 처벌해 주기를 청하였다. 누차 성상의 명을 어기자 특명으로 외직으로 쫓겨나 충청 병사(忠淸兵使)에 보임되었다.
공은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은 일찍이 토벌을 청했던 역적들인데 지금 도리어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내 어찌 차마 그들을 대신으로 대우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끝내 그들에게 하직인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광좌의 고발로 공이 법리(法吏)에 넘겨져 사실대로 공초를 바치자, 성상의 특명으로 관직을 띤 채로 석방되었다. 애초에 공을 의심하고 헐뜯었던 자들은 도로 부끄러워하며 사죄하였다. 공은 시세가 염려스럽고 중외가 떠들썩하였기 때문에 하직인사를 하는 날 여러 고을을 엄히 신칙하고 군무(軍務)를 정비하기를 청하였는데, 성상이 편의에 맞게 수행하라고 명하였다.
감영에 도착한 후에 우선 오영(五營)을 신칙하고 중요한 길목에서 기찰하는 곳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또 무작위로 추출하여 순찰하기를 청하였는데, 비변사에서 막고서 보고하지 않기도 하고 망녕되고 경솔하다고 비난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시끄럽고 자잘한 일은 조정에 전파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공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전후로 보고한 것이 걸핏하면 저지되고 막혀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니, 지혜로운 자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서소문(西小門)의 괘서(掛書) 변고를 듣고 말하기를 “나는 화란이 지방이 아니라 조정에서 일어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당시 군흉들이 권세를 훔치고 세력을 형성하여 안팎으로 결탁하였으니, 이를테면 충청 감사 권첨(權詹), 전라 감사 정사효(鄭思孝), 함경 감사 권익관(權益寬), 평안 감사 이사성(李思晟)은 특히 적발된 자들이다. 이때에 숙장(宿將)으로 중요한 번진을 맡은 이는 공 한 사람뿐이었다. 이 때문에 역적들의 공초에서 모두 청주 병사를 반드시 먼저 제거한다면 나머지는 두려울 게 없다고 말하였다.
3월 15일 먼저 청주가 함락되었다. 역적 양덕부(梁德溥)는 공의 부장(副將)으로 역적의 후한 뇌물을 받고서 성문을 열어 길을 인도하니,
밤 4경(更)에 곧장 공의 침소로 돌진하였다. 공은 놀라서 일어나 검을 뽑아들고 적들과 맞서 싸우다가 한쪽 손이 잘리자 적들이 마침내 공을 치면서 포박한 채 속히 항복하라고 협박하며 말하기를, “13일에 이미 경성이 함락되었다.
만약 군대를 출동시켜 우리를 따른다면 부귀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성을 내며 꾸짖기를 “나는 충의(忠義)를 지킨 가문의 후손이다. 어찌 너희 역적놈을 따라 배반하겠는가. 이 역적놈아, 이 역적놈아. 어서 나를 죽여라, 어서 나를 죽여라.” 하고 이렇게 세 번 고함을 쳤다. 죽어가면서도 입으로 계속해서 적들을 꾸짖었다.
비장(裨將) 홍림(洪霖)이 난리를 듣고 공을 구하러 들어가 검으로 공격하여 수 명의 적을 해치웠다. 적들이 그를 포박하여 남쪽 담장 아래서 죽이고는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기를 “저자는 주장(主將)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으니 열사(烈士)로다.”라고 하였다.
또 중영(中營)을 습격하여 영장(營將)인 남연년(南延年)을 사로잡아 항복하라고 협박했는데, 그 또한 적들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공의 계부 이홍무(李弘茂)가 적들에게 사로잡히자 조카 이학상(李鶴祥)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불의(不義)로써 목숨을 구걸할 수는 없다.”라고 하고 꼿꼿이 서서 무릎을 꿇지 않았고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적들이 노하여 칼을 뽑아 마구 찔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다가 구류된 지 6일 만에 결국 죽었다. 16일에 그 지역 군교(軍校) 김지행(金志行) 등이 적에게 빌어서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성의 서쪽에 묻었고, 26일에 아산(牙山)으로 반구(返柩)하여 널을 바꾸고 다시 염습하여 집 뒷마당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5월 16일에 본현의 나산(羅山) 선영의 자좌(子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청주 목사 박당(朴鏜)이 애초에 관인(官印)과 병부(兵符)를 버리고 도망갔다가 후에 변고의 사유를 아뢸 적에 공의 사실을 모두 빼버렸는데, 어사 이도겸(李道謙)이 난리에서 돌아와 비로소 사실을 모두 아뢰었다. 이에 성상이 특명으로 공을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고 또 그로 인해 정려(旌閭)하게 하였으며, 본도에서 공의 장례를 치르게 하고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에 어사 오원(吳瑗)의 주청으로 청주에 공을 기리는 사당을 세워 남연년과 홍임을 배향하도록 하고 표충사(表忠祠)라고 사액하였다. 아산(牙山)의 현충사(顯忠祠)는 바로 충무공을 제향하는 곳으로, 충무공의 조카인 증 판서 이완(李莞)이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에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서 국난에 세상을 떠나이 사당에 배향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또 배향되었다.
공의 모친 진주 정씨(晉州鄭氏)는 당시 살아있었는데, 조정에서 미곡과 포목을 공급해주고 정경부인으로 특별히 봉하였다. 부인은 성품이 엄하고 식견이 있었는데 공을 바른 도리로 가르쳤다. 공이 통제사로 있을 적에 부인이 경계하기를 “일찍이 통영의 군정(軍情)을 들어보니 충무공의 자손이 통제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한다.
너는 반드시 선조의 공렬을 유념하여 국사에 심력을 다해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또 옷상자를 내보이며 말하기를 “시원하고 따뜻한 너의 옷가지가 갖추어져 있으니 관가의 어떤 작은 물건도 사용하지 말거라.”라고 하였다.
공의 상례 때 부인은 곡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 자식이 나라를 위해 죽어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내 어찌 슬퍼하리오.”라고 하였다. 아! 부인의 어짊이 이와 같으니 공이 부인의 자식됨이 마땅하구나.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수사 안적(安績)의 딸로 1남 북병사 한필(漢弼)을 낳았다.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찰방 홍일장(洪日章)의 딸이다.
달성 서씨(達城徐氏)는 서종의(徐宗誼)의 딸로 1남 한익(漢翊)을 두었는데 요절하였다. 한필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재해(載海)이고 딸은 김경주(金景柱)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한익의 양자는 달해(達海)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옛날의 명장으로 / 在古名將
충무공이 계셨네 / 曰忠武公
산과 바다에 맹세하였으니/ 誓海盟山
걸출한 기개를 상상할 수 있네 / 想像英風
예전의 전장에는 구름도 시름겨운데 / 戰處雲愁
거대한 비석에 공적을 기록하였네 / 穹碑記功
선조를 빼닮은 후손 있으니 / 有孫克肖
나라를 지키는 뛰어난 장수였네 / 干城之雄
어찌 난리에 임하여 / 豈徒臨難
죽는 것만이 충성이리오 / 决死爲忠
이 화란은 / 蓋此禍亂
얼음이 차츰 단단해진것이네 / 馴致冰至
안의 분쟁과 밖에서 오는 적은 / 內訌外寇
참으로 두 가지 일이 아니네 / 諒非二事
공은 조정에 있을 적에 / 公在于朝
그 마음이 변치 않았네 / 厥心不貳
훼방과 칭찬 분분하였으니 / 紛紛毁譽
남이 몰라준들 무슨 상관이리오 / 不知何傷
저 역적의 무리들 / 彼哉逆儔
조정에서 극성을 부렸네 / 赫赫巖廊
끝내 무릎을 굽히지 않았으니 / 有膝不屈
이미 의지가 굳세었네 / 此已倔強
오직 청주 병사가 / 維淸之閫
나라의 한 훌륭한 신하였네 / 國有一臣
역도들이 공을 해치기를 / 賊徒害之
몸에 붙은 독초를 제거하듯 하였네 / 如菫在身
형세상 반드시 먼저 제거되었지만 / 勢必先去
공은 마침내 인을 이루었네 / 我乃成仁
3월 15일 / 三月十五
고립된 성을 지키지 못하였네 / 孤城不守
호랑이 같은 공을 포박하니 / 縛侯如虎
적들을 개처럼 꾸짖는구나 / 罵賊如狗
표충사에 / 表忠之祠
유자들이 제사를 올리네 / 儒衿奔走
남공(남연년)은 왼쪽에 있고 / 南公在左
공은 오른쪽에 있네 / 公則在右
또한 건너편에 있는 홍 비장(홍임)은 / 亦越洪裨
의리로 공을 저버리지 않았네 / 義不負公
천억 년 지나도록 / 有來千億
무궁하게 숭양한 보답을 받으리라 / 崇報無窮
사람이 태어날 적에 / 凡人有生
각자 인륜을 타고나네 / 各賦天常
누군들 이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 孰無是心
공만이 잃어버리지 않았네 / 公獨勿喪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겠느냐/ 無念爾祖
그 광채가 열렬히 빛나네 / 烈烈其光
공의 죽음이 없었다면 / 微公一死
사람의 도리가 거의 실추되었으리라 / 人紀幾墜
내가 명을 지으니 / 我作銘詩
두 마음을 품은 자 부끄러우리라 / 二心是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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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절도사 …… 신도비:
이봉상(李鳳祥, 1676~1728)의 신도비이다. 이봉상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의숙(儀叔),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순신(李舜
臣)의 5대손이다.
[주02] 나와 …… 많다:
장영(張詠)은 북송의 명신으로 자는 복지(復之), 호는 괴애(乖崖),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익주(益州)ㆍ항주(杭州) 등의 지주사
(知州事)로 나가 치적을 쌓았고, 내직으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장영이 과거에 합격할 때 동방급제한 인물로 준걸들이 많
았는데 일찍이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나와 동방급제한 사람 가운데 인재가 가장 많았다.
근중하고 아망이 있기로는 이문정이 제일이고, 침중하고 덕이 있어 천하를 감복시키기로는 왕공이 제일이고, 면전에서 직언으로 간
쟁하고 본디 풍채가 있기로는 구공이 제일이고, 방면의 임무에는 나도 누구 못지않다.[吾榜中得人最多, 謹重有雅望, 無如李文靖;
深沈有德, 鎭服天下, 無如王公; 面折廷爭, 素有風采, 無如冦公; 當方面寄 則詠不敢辭.]”라고 하였다.《事文類聚 卷29 榜中得
人》
[주03] 보잘것없는 …… 누렸다:
저자 또한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 28) 3월 알성 문과에 급제하였다.
[주04] 민진원(閔鎭遠)이 …… 청하였는데:
영조가 시민당(時敏堂)에서 대신 등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민진원(閔鎭遠)이 “고묘문(告廟文)에 ‘질환이 있었다’라고 첨가해 넣는
문제는 실로 주저하실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는데, 영조는 굳이 ‘질환이 있었다’는 말을 넣을 필요가 있겠냐며 물었고, 이에 대해
홍치중(洪致中), 이의현(李宜顯), 김흥경(金興慶) 등이 이 말을 넣어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영조는 “교문에 ‘질환이 있었다’라고 할 필요도 장황하게 말할 필요도 없다. 단지 ‘대행왕이 편찮으셨기 때문에 간흉들이 그 기회를
틈타 성덕을 가렸다.’라고 하면 좋을 듯하다. 내가 오늘 한 말만으로 상세하게 거조(擧條)를 낸 다음 교문에 그 말을 첨가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承政院日記 英祖 1年 4月 2日》
[주05] 이사성(李思晟)이 …… 저지하였다:
전임 북병사 이사성이 문신으로 일찍이 승지를 지낸 사람을 북평사로 차임하여 보낼 것을 청하고, 수령에 있어서는 현재 쫓겨나 귀
양살이하고 있는 사람을 옮겨다 보임하여 실효를 내도록 책임지울 것을 청하였는데, 말씨가 외람되게 조금도 고려하고 기탄함이 없
으므로, 참찬관 나학천(羅學川)이 추고할 것을 청했으나, 영조가 따르지 않았다.
이때 특진관으로 입시했던 이봉상(李鳳祥)은 이사성의 말을 두둔하였다.《英祖實錄 3年 3月 15日》그러나 같은 날《승정원일
기》의 기사에는 이봉상이 이사성의 의견에 반대한 것으로 나온다.
[주06] 서소문(西小門)의 괘서(掛書) 변고:
경종이 영조에 의해 독살되고 영조가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내용의 괘서가 1728년(영조4) 1월 서울 서소문(西小門)에 유포된 것
을 가리킨다.
[주07] 이완(李莞)이 …… 떠나:
이완(1579~1627)은 이순신의 조카이다. 정묘호란 때 적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자 분사(焚死)하였다. 1706년(숙종 32)
아산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주08] 산과 바다에 맹세하였으니:
이순신 장군의 시에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꿈틀대고, 산에 맹약하니 초목이 알아주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하였다.
《李忠武公全書 卷1 無題一聯》
[주09] 얼음이 차츰 단단해진:
일이 작은 일에서 촉발되어 차츰 심각한 변고를 초래한다는 뜻이다.《주역》〈곤괘(坤卦) 초육(初六)〉에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履霜堅冰至]”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상전(象傳)〉에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는 것은 음이 처음 응
결한 것이니 그 도를 점차 이루어서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는 것이다.[履霜堅冰, 陰始凝也, 馴致其道, 至堅冰也.]” 하였다.
[주10] 너의 …… 않겠느냐:
《시경》〈대아(大雅) 문왕지십(文王之什)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
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