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世 醒菴 李喆榮 先生 초상
[생졸년] 1867(고종 4)~ 1919년 / 향년 52세
[생원] 순조(純祖) 28년(182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3위(63/100)
--------------------------------------------------------------------------------------------------------
[역문] 선선유교경전연구소 고주환 대표
醒菴 李喆榮 先生 墓碣銘 幷書
오호라! 큰 기운을 모아 뭉쳣으니 타고난 산악의 자품이요. 충만한 천지의 기운이로다. 참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 하여 올바른 길을 천명하셨으니, 인의와 충신은 인식의 본분이요. 총칼의 위협에도 행하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다. 이로써 세상의 도를 부추기고, 이로써 인륜의 기강을 수립한 자가 고금에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 성암 선생 같은 분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선생이 세우신 업적을 말하지 않는 이가 없으되 학문의 정맥과 진리를 함양하고 조용히 실천하여 가학을 계승하고 율곡(석담)에 연원하여 정주의 도학에 이른 데 대해서는 아는 자가 더욱 드무니 아! 덕을 실천함이 어려운 일이고 덕을 알기 쉽지 않음인가?
선생의 휘(諱)는 철영(喆榮)이요. 자는 계형(季衡)이요. 초휘는 은영(殷榮)이요. 성암(醒菴)은 그의 호(號)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시조(始祖)는 신라 원훈이신 알평(謁平)이고, 고려시대 대제학과 검교정승을 지낸 휘 세기(世基)는 호가 송암(松庵)이고, 휘 천(蒨)은 대제학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으로 호는 국당(菊堂)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휘 성중(誠中)은 조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검교좌정승 시호가 정순(靖順)이고, 휘 휴(携)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이며, 이를 이어 벼슬이 대대로 이어졌다. 휘 유태(惟泰)라는 분은 실로 문헌공(文憲公) 초려(草廬) 선생이니 기록할 필요도 없다.
고조 휘 광중(光重)은 효행으로 도의 천거를 받았고, 증조 휘 재원(在元)은 호가 호은(湖隱)이니 학문에 연원이 있고, 재주는 경제를 겸했다 하여 도의 천거를 받았고, 조부 휘 건(鍵)은 백씨 휘 횡(鐄)의 아들 휘 홍제를 양자(養子) 하였으니 바로 선생의 아버지시다.
어머니는 상산 박씨(商山朴氏) 통덕랑(通德郞) 용원(龍遠)의 따님이다. 조(祖)는 참판(參判) 희현(熙顯)이다. 고종 정묘년(丁卯年,1867) 3월 17일에 공주(公州) 중동(中洞)의 옛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태어남에 자질이 특출하여 어엿한 장자(長者)의 기상이 있으니 보는 자가 큰 그릇이 될것을 알았다.
선생의 백씨(伯氏)가 종가(宗家)에 입후(入後)했는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병에 걸렸다. 선친(先親)이 고향 땅이 불리하다 하여 집안을 정리하여 연산(連山)으로 이사했다가 병자년(丙子年,1876)에 돌아가시니 객지에서 망창(茫蒼)한 지라 상중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또 종가 형님 상을 당하니 종손(從孫)과 지손(指孫) 중에 남자는 오직 선생 한분 뿐이었다. 문중에서 의논하여 호은공(湖隱公)의 종증손(從曾孫)인 용호공(龍湖公) 휘 회영(晦榮)을 종가의 차자로 계통을 이으니 선생에게는 종형(從兄: 4촌형)이다. 용호공이 종가의 일을 담당하고 선생으로 하여금 선생님을 따라가 유학하게 하였다.
마침 겸와 처사(慊瓦處士) 유공(柳公) 대원(大源)이 부여 당리(扶餘唐里)에 은거하며, 강학 하거늘, 선생이 그집에 장가들고 오가며, 수업할 적에 매양 집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여 자잘한 일로 봉양함에 수업에 전념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무자년(戊子年,1888)에 정 조비(丁祖妣) 안유인상(安孺人喪)을 당하고 다음해 연속하여 어머니 박유인상(朴孺人喪)을 당하였다.
상복(喪服)을 마치고 겸와(慊瓦) 유공을 따라 당리(唐里)에 이주하여 날마다 학문의 깊은 경지에 차츰차츰 들어가고 처남(妻男)인 경운(耕芸), 병위(秉蔚)와 학문과 덕을 연마하여 덕행과 문망(文望)이 향방의 지표기 되었다. 앞서 국가가 여러 차례 당고(黨錮)를 겪고 이어서 외척이 정권을 잡아 유(儒)와 속(俗)이 구분이 없어지니 내홍과 외우는 한 터럭에 천균의 무게가 매달린 형세였다.
선생이 더욱더 은둔하여 심신을 단속하여 모든 관록과 명예를 못 본 듯이 하고, 사람이 혹 과거 볼 것을 권하는 이가 있으면, 문득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금일 국운의 위태함이 실로 선비의 기풍이 퇴화되어 내수와 외양의 실책에 말미암은 것이거늘,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한갓 이록만을 탐하여 남의 집 일 보듯이 하고, 구제할 줄 모르니, 이 어찌 지사와 인인(仁人)이 일핳 수 있는 때인가?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찌할 수 없거든 두문불출하고 독서하여 스스로 제 몸을 지킴이 옳다'하였다. 갑진년(甲辰年,1904)에 일본이 철로를 부설할 적에, 그 선이 문헌공(文憲公: 이유태선생)의 묘소를 침범하거늘 선생이 두루 조정의 여러 대신을 만나서 통렬하고 절실하게 항의하여 일이 마침내 해결되었다.
을사년(乙巳年,1905)에 일본이 강제로 늑약을 맺거늘 선생이 의려문(義旅文: 항의문)을 지어 의리를 들어 나라의 원수(怨讐)를 갚고자 하였으나 형세가 여의치 못했다. 이후 오랑캐의 교육이 더욱 치성하여 각처의 향교와 서원에 신학을 설치함에 사람이 바람에 쏠리듯이 다투어 나아가거늘 선생이 개탄하여 말하였다.
"중국이 망함에 우리의 도가 동방에 있거늘 지금 또 이와 같으니 해(害)가 홍수와 맹수보다 심하다. 명색이 유학을 한다는 자가 어찌 구제하는 한마디 말도 없겠는가?" '당우(唐虞) 3대의 도와 공자(孔자),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학문은 우리 동방의 종교이니,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곧 오랑캐와 금수일 뿐이다. 춘추(春秋)의 의리는 존화양이(尊華攘夷> 華攘/왕실을 존중하고 이적을 배척함)가 큼이 되니, 어찌 이 오랑캐의 교육을 성인의 문에 들일 수 있는가?'라고 운운한 것은 부여 향교에 보낸 글이요.
'저 왜구가 맹세코 이 하늘을 함께할 수 없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거늘, 지금 도리어 그들이 하는 짓을 본받아 선생의 영혼이 오르내리는 뜰을 더럽 핀다'라고 운운한 것은 돈암서원(遯巖書院)에 보낸 글이다. 또 면암 최익현, 운강 이강년, 재상 조병세, 판서 민영환, 안중근, 이준 등 여러분의 의를 들어 순절한 것에 대하여 각각 시(詩)로써 그 일을 말하고, 그 뜻을 보이니 내용을 아는 자가 정확한 의론임을 알았다.
앞서 왜가 속임수를 써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칭하며, 국호를 대한이라 고치고, 거짓으로 고종을 광무황제(光武皇帝)라 높이며, 다시 강제로 융희황제(隆熙皇帝/순종)에게 선위케하여 모든 정치 명령을 황칙이라 칭탁하여 자행하니, 당시의 사대부들 모두가 황제의 높임을 영예로 여겨 다투어 앞장 서거늘, 선생이 '조맹(趙孟: 晋나라의 정승 )이 귀하게 해준 것을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으니 사람이 귀하게 해준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니, 조맹이 귀하게 해준 것은 조맹이 능히 천하게 한다.
지금 거짓 높임이 장차 후일의 축출의 조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산양공(山陽公)과 안락공(安樂公)의 칭호를 못할 짓이 없으리니, 내가 이를 어찌할꼬? 단지 마땅히 나의 의를 행하여 옛법을 따름이 옳다.'고 하였다. 기유년(己酉年,1909)에 왜가 민적(民籍>民籍簿)에 편입시키거늘 선생이 의리로 호적에 편입하여 삶을 도모할 수 없다하여 글을 써서 일본 정부에 보내 신복이 되지 않겠다는 의리를 보이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갑신년(甲申年,1884)에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 일본공사)이 우리 임금을 협박하여 옮기고, 우리 재상을 살육했으며, 갑오년(甲午年,1894)에 대도규개(大島圭介 =오오지마 게이스케)가 우리 궁궐을 노략질하고 우리 전장 문물을 파괴했으며, 을미년(乙未年,1895)에 삼포오루(三浦梧樓,미우라고로/명성황후 시해범)가 우리 국모를 시해(弑害)하였고, 을사년(乙巳年,1905) 10월 21일 밤에 박문(博文), 권조(權助), 호도(好道)등이 군대를 인솔하여 궁궐에 들어가 강제로 늑약(勒約)을 체결하고 정부를 협박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국가 세금과 벼슬, 포상, 형법 등을 제 멋대로 하고, 궁궐을 파괴하며, 우리 도성을 헐며, 우리 군대를 해산하고 우리를 신첩(臣妾)과 노예(奴隸)로 삼고자 했으며, 기타 인의를 콱 틀어막아 윤리를 파괴하고 충량한 사민(士民)을 구속하여 국가의 원기를 다 끊어놓고, 난적을 유인하여 앞잡이로 삼고, 어리석은 사람을 모집하여 멕시코에 팔고 광산을 개발하고 항로를 개설하여 국가의 재원을 강탈하고 돈과 화폐를 환통하여 백성의 고혈을 고갈 시켰으니 전후 이런 종류의 포학을 이루 다 손꼽을 수 없다.
이는 전일의 서약을 따르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고 장차 인종을 바꾸려는 악독한 계책을 행하여 우리 국민을 한 사람도 살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악을 쌓으면 반듯이 죽게 되고 지나치게 강하면 반듯이 부러짐은 자연의 이치이니, 지금 우리의 국운이 비록 비색 하다고 하나 마침내 천리가 안정되어 인위적인 악을 이긴다면 어찌 오늘날 일본의 패망이 임진왜란의 참혹함을 따르지 않겠는가?
이쯤에서 그래도 그칠 수 있는 때에 이미 벌어진 춤판이라 말하지 말고, 전자의 잘못을 말끔히 고치어 양국이 각기 자국의 청치를 닦아 영원히 서로 편안할 수 있다면, 이상 없는 다행이겠다" 글을 부여읍 주재소에 보내니, 얼마 안 되어 왜 장졸 6~7명이 와서 체포하여 하룻밤을 가두고 이튿날 홍산경찰서로 압송하였다.
왜놈의 두목이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선생이 대답하였다. "너희 나라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 감히 조선의 보호를 선언하고서 실상 흉악한 행동이 끝이 없음은 무엇 때문이냐?
왜가 말하였다.
"한국이 일본 개화의 힘이 없었다면 이미 러시아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우리 나라가 개화 이전에는 윤리가 밝고 교화가 행하여 500년을 면면히 이어 왔는데, 개화 이후에 불과 수십년에 이 지경으로 무너 졌으니, 나라를 망치고 사람의 도리를 말살하는 것은 너의 이른바 개화이다.
또 개화의 근원이 실상 서양에서 나왔거늘 너희 나라가 영국으로부터 개화를 받아 들일 적에 영국이 일본정부를 강탈했느냐? 군대를 해산했느냐? 도성을 헐었느냐? 너희 임금을 겁박하여 옮겼느냐? 너희 왕비를 시해했느냐? 영국이 이런일을 너희 나라에 행하지 않았거늘 너희는 어째서 조선에 행하느냐? 노희는 단지 중화의 죄인일뿐만이 아니라 또한 개화의 죄인이다." 왜가 말하였다.
"시세 형편에 따라서 재단하여 처리한 것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 나라가 임금을 시해하여 개화하고 아비를 죽이고, 즉위한것 또한 시세 형편에 따르는 도인가?" 왜가 성내며 칼을 뽑아 위협하거늘 선생이 말하였다. "내가 말한 것은 만고(萬古)의 대의(大義)요. 네가 믿는 것은 한 조각 칼날이니, 너는 내 몸을 살해하는데 불과할 것이다. 어찌 나의 의(義)를 빼앗을 수 있겠는기?" 왜가 또 설문하였다.
"이웃마을에 화재가 나면 가서 구제하는가?" "가서 구제한다" 왜가 말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대한의 화재를 구제하기 위해 왔거늘 공(公)은 어째서 원수로 대하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는 화재를 구제하는 자가 아니라 방화자이다. 가령 너희 말대로라도 화제를 구제하여 불이 꺼지면 떠나야할 것이거늘, 이에 머물면서 암암리에 불난 집 재산을 강탈하려 함은 무엇 때문이냐?
너희들은 속히 철수하여 돌아가라. 나는 우리 식구와 함께 살림살이를 하겠다." 얼마 안 있어 부여 주재소 왜인이 다시 선생을 끌고 가 강제로 호적을 편입하게 하거늘, 선생이 꾸짖으며, 말하였다. "내 차라리 죽어 조선의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일본의 백성이 되고 싶지 않노라"
왜인이 '내가 비록 일본 사람이지만 한국의 관리가 되어 이 지방을 책임졌으니 너는 지역민이니 정부의 멸령을 어찌 감히 거부하는가?'하고 큰 몽둥이로 매우 심하게 구타하고 쫓아냈다. 이어서 또 홍산(鴻山: 부여의 옛지명) 경찰서에 잡혀갔다. 선생이 두편의 글을 썼으니 하나는 재차 일본 정부에 보내는 것이요. 하나는 경찰서장에게 보내어 고금의 역순(逆順)이치와 피차간에 편안함과 위태함의 방도로써 깨우쳤다.
경찰서에 이르니 여러 왜경이 법 조문을 보여주면서 갖가지 방도로 달래고 협박하거늘 선생이 말하였다. "나는 우리 왕의 신민(臣民)이니 죽일 수는 있어도 형벌을 쓸 수는 없다." 왜경이 심히 성내어 의관을 벗기려 하거늘 선생이 크게 꾸짖으면서 "군자는 죽어도 관을 벗지 않나니 너는 큰 칼로 찍으면 머리를 베고 허리를 끊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시(詩)한수를 읊조렸다.
사십이 넘어 더디게 문을 나서니
온전히 돌아갈 것을 기약하여 반걸음조차도 조심하였네.
종사와 백성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몸과 뼈가 가루가 된들 의를 어찌 사양할까?
왜는 마침내 억지로 의관을 벗기지 못하고 어지럽게 구타하면서 축출하였다.
경술년(庚戌年,1910) 가을에 왜가 강제로 합방조약을 체결하고 양여했다는 말로 국중에 포고하여 황실을 이왕가라 하고 각 군에 주재하는 왜로 하여금 합병의 가부를 우리 국민에게 물어 만일 불가하다 하면 마땅히 혹독한 재앙이 있을 것이다 운운하니, 아! 선생이 양존(陽尊: 거짓으로 높임)이라고 예언한 것이 약속한 증서와 같이 일치하였다.
저 황제라고 높임을 주장한 자들이 장차 부끄러워 땀흘릴 겨를 조차 없으리라. 이윽고 왜 헌병이 와서 물었다. "합방한 사실을 들었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이런 말은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다" 왜가 더 이상 힐란하지 않고, 가더니, 몇 일 뒤 왜병이 와서 '일본 대대장이 어제 본군에 도착하여 공의 고명함을 듣고 우리들로 하여금 데려오라 했다.' 하거늘 선생이 말하였다.
"강약이 갖지 않으니 너희가 체포해 갈 수는 있어도 만일 말로 부르면 비록 너희 임금이 불러도 의리상 갈 수 없다" 왜병이 심히 급하게 잡아갔다. 이때 경운(耕芸)과 함께 체포되어 부여읍에 들어가 군청의 진전(眞殿=임금의 어진을 모신곳)에 이르러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자 왜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곡하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이곳은 곧 우리 500년 종사가 있던 곳인데 지금 우리나라가 너희들의 손에 전복된지라 그래서 곡하노라." 왜가 연설상을 설치하고 군민 수백명을 불러모아 놓고, 강제로 선생을 당에 오르게 하거늘 선생이 '전패를 받든 곳에 의리상 감희 오르지 못한다.'하자 여러명의 왜가 붙잡아 올려놓고 이른바 연설이라는 것이 우리를 달래고 협박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선생이 귀를 가리고 앉으니 왜가 성내어 칼로 베려 하거늘 선생이 목을 들이대니 왜가 도리어 물러나면서 말하였다. "완고한 유생이 나라를 위해 통곡하는 것을 내가 그르다 할 수 없으나 단지 지금 합방은 조선이 가난하여 자치할 능력이 없어 누차 양여했기 때문에 부득이 받은 것이거늘 너희들이 도리어 우리를 원수로 여김은 무엇때문인가?"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 나라가 강화도조약(1876/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초부터 우리의 반역자를 불러들여 금일 너희 계획을 달성하고 감히 양여설로 우리 백성을 속이고, 천하의 이목을 가리고자 하는가? 내가 비록 만 번 죽어도 지키는 바는 변하지 않는다." 왜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망국 후에 고사리를 뜯어 먹다 굶어 죽었다는 글을 써서 보여주고 집으로 보냈다.
이후로 왜의 염탐이 더욱 빈번하여 모든 계책을 다 썼지만 끝내 거절하고 모든 일에 저들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일절 하지 않았다.
이때 왜는 국민으로 하여금 각기 산과 밭을 측량하게 하면서 하지 않으면 국유로 소속 시키겠다고 운운 하거늘 선생이 종씨와 의논하면서 말하였다.
"사가의 좋은 일과 궂은일을 마땅히 국가와 함께 해야 할 것이니, 원수(怨讐) 오랑캐에게 구걸함은 차마 못할 것이다." 심지어 차와 우편마저도 절대로 이용하지 않았고, 일찍이 철도시를 지은 데에 '남은 이용해도 나는 이용하지 않으니 괵(虢)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다른 길이 아니다.'는 구절이 있다. 한 선비가 선대의 충의로써 서원을 세워 향사를 올리고자 선생에게 문의하거늘, 선생이 춘추의 '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장례를 쓰지 않는다.'는 의리를 들어 제지하였다.
갑인년(甲寅年,1914) 가을에 또 부여읍에 체포되었다. 분대장이 말하였다. "일본을 배척하는 뜻을 지녔다는 말을 듣고, 누차 만나려 해도 한결같이 완고하게 거절하고, 민적은 국가의 큰 정사거늘 끝내 신고하지 않으니, 이는 무슨 행위인가?" 선생이 말하였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과 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침)일 뿐이다."
왜가 칼을 내밀면서 "지금 온 국민이 순종하지 않는 이가 없거늘 너는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이같이 어긋난 짓을 하는가?"하고, 그길로 판옥( 板屋)에 굳게 가두고 경계를 심하게 하였다. 몇 일 뒤 왜가 힐문하면서 말하였다. "네가 이로써 결약(結約) 하면 능히 너희 나라를 회복하겠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과연 내마음과 내 행동 같이하면 어찌 다만 내 나라만을 회복하겠는가? 실로 천하 금수(禽獸)의 풍속을 바끌 수 있으되, 단지 나 같은 자가 적을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이처럼 횡행(橫行)하는 것이다." 하루는 공주 경무부장(警務局長)이 포병(砲兵) 열두어 명을 거느리고 끌어내 물었다.
"네가 이 아무개인가?" 선생이 말하였다. "그렇다. 네 이름은 뭐라 하는가?" 왜가 버럭 소리 지르며 말하였다. "감히 이렇게 당돌할 수 있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의리로 말하면 너는 나의 원수요. 존비(尊卑)로 말하면 나는 중화며, 너는 오랑개이니, 너라 호칭함이 어찌 공손하지 않다고 하는가?"
왜가 말하였다. "들어니 네가 민적에 들지 않는다 하니 바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리이다. 그러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은(殷)나라가 망함에 굶어 죽었는데 너는 어째서 죽지 않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한(漢)나라의 소중랑(蘇中郞)은 북해(北海) 상에서 한나라의 부절(符節)을 지닌 채 죽지 않았고, 송(宋)나라의 김인산(金仁山,1232~1303)은 세상을 등지고 금화산(金華山)에 숨어 살면서 생을 마쳤고, 우리나라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은 중국 심양(沈陽)에서 항의하다 살아 돌아왔으되 의론하는 자들이 백이. 숙제와 다르게 보지 않았으니,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이 어찌 옳지 않은가?"
왜가 말하였다 "옛적에 백이. 숙제와 칭송은 같고 행실이 다른자가 있으니, 이윤(李伊)이 이런 분이로되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닌가?' 하였으니 어찌 이를 본 받지 않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하(夏)나라 걸왕(桀王)은 천자요. 상(商)나라 탕왕(湯王)은 제후라서 이윤(李伊)에게는 다 군신(君臣)의 의리(義理)가 있고 단지 선악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말이 이와 같았거늘 세상에 임금을 잊고 원수를 섬기며, 행실이 개돼지 같은 자가 감히 이윤(李伊)을 이끌어 구실을 삼으니, 이는 성인의 글을 잘못 읽고 책임의 성인을 잘못 인식한 자이다. 대저 남의 나라를 빼앗으면 종국엔 반드시 패망하는 것이 또 사람과 짐승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얼음과 숯불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니 각기 자기 나라를 지킨다는 뜻으로 돌아가 너희 임금에게 고함이 옳다." 왜가 멍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혹은 별관에 가두고 혹은 감옥에 가두어, 늦추고 핍박함이 한결같지 않았지만 끝내 굽히지 않을 줄 알고, 년 말을 기하여 석방하니 모두 70일 감옥에 있었다. 한 절의로 시종일관함에 말이 바르고 이치가 순수(純粹)하니 저들 또한 감복하여 혹은 양반이라 호칭하고 마침내 일등 대장부(大丈夫 )라 호칭했으며, 심지어 왜에게 붙던 자들까지도 처음에 심히 비웃더니 뒤에 머리를 굽혀 공경을 다하니 정의가 취향을 달리하는 사람까지도 감복시킴이 그러하다.
문인과 자질이 날마다 읍에 들어가 옥중 생활을 탐문하더니, 하루는 선생이 작은 칼을 청구하면서 손톱자르는 용도로 핑계를 대니, 그 의도는 장차 머리털 깎이는 환란을 염려하여 자결의 도구로 예비(豫備)한 것이었다. 또 집안 및 경운(耕芸)과 문생(門生)에게 편지를 보내 뒷 수습을 잘하는 방도로 권면(勸勉) 하였다.
옥중(獄中)에서 지은 시(詩)에
5~6년 전에 이미 이곳을 거쳤으니,
여생 지금 다시 죽음으로 기약하네.
찬바람 이는 감옥 외로운 등불 아래 누워
청음의 설교시를 읊노라.
또
오랑캐(犬羊/견양) 무리 속에서 이미 30일
가정 일 모두 잊어 단지 내 몸 뿐이라네.
창과 칼이 공중에 눈서리처럼 번득이되
마음엔 한 덩어리 봄기운이 줄어들지 않네.
교목(喬木)을 읊조린 시(詩)에
백년의 교목 바라봄에 가볍지 않으니
우뚝 하늘 높이 인간 세상을 벗어났네.
어찌 유독 봄여름만 영화를 누리겠는가?
서리와 눈을 흠씬 먹어도 능히 살 수 있다.
이 몇편의 시(詩)들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 되었으니, 여기에서 선생이 현재 처한 위치에서 도의(道義)를 실천하여 그처럼 가혹한 감옥 생활이 마치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더는 정도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왜가 또 묘적(墓賊)신고를 하라면서 분묘의 화로써 협박하거늘, 선생이 역시 죽음을 맹세코 따르지 않고, '차라리 선영(先塋)과 함께 화를 받을지언정 어찌 묘적을 가지고 원수(怨讐) 왜를 따르겠느냐?'는 詩를 지었다.
무오년(戊午年,1918) 가을에 또 다시 수감되었다가 즉시 석방되었다. 12월에 고종(高宗)의 승하 소식을 듣고, 제생을 거느리고 애도하며, 성복(成服)하고 국복록(國服錄)을 지었다. 기미년(己未年, 1919)에 해소 천식으로 숨이 차 나날이 생명이 꺼져가는 가운데서도 신기(身氣)가 또렷하여 검속(檢束)을 평소와 같이 하였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장차 죽을 것이다. 다른 생각은 없으나 단지 10년간 왜의 사찰(査察)로 끝내 다시 선영을 참배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너희들은 용기 백배하고 몸 단속을 다하여 자신의 대책을 확립함이 옳다. 또 우리 부모상(父母喪)에 가난으로 장례범절을 알맞게 하지 못하여 마음에 부족함을 느끼니, 내가 죽으면 단지 심의(深衣)와 이불 한 벌이면 충분하다."
임종하는 날에 평상과 자리를 소제[청소] 하라 명하고,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구술하여 쓰게 하는데 말과 글이 통창(通暢)한 채 드디어 기쁘게 돌아가니, 곧 기미년(己未年, 1919) 12월 6일이다. 향년 53세이다. 문생이 다 가마 하고 같은달 10일에 부여 염창리(扶餘鹽倉里) 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2년 뒤 신유년(辛酉年, 1921)에 공주(公州) 중동(中洞) 선영(先塋)에 반장(返葬)하고 몇년 뒤에 다시 본동바깥쪽 와야동(瓦也洞>現소학동) 모좌 언덕에 이장(移葬) 하였다.
오호라!
선생은 총명하고 장중한 자질로 태어나 덕과 기량이 천연으로 이루어 밝음은 은미(隱微)한 이치를 살피고, 굳셈은 그 위대함을 수립하였다.
학문을 함에 순서에 따라 부지런히 해서 주야로 이어지고 경(敬)으로서 중심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외모를 방정하게 하며, 마음에 간직한 것이 순수하여 잡된 것이 없고, 바깥으로 표현함에 줄기차게 막힘이 없어 천만인이 막아도 나는 밀고 나가서 한 터럭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비록 지극히 무도한 왜구조차도 형틀을 씌우고 박해하여 극도로 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끝내 능히 독해를 입히지 못하고, 고종명(考終命) 하게 했으니, 공자께서 이른바 '하늘이 우리 도(道)를 없애지 않는다, 하신 것이 선생 같은 분을 두고 말한 것이다.
평소에 조용히 한방에 거처하여 바르게 앉아 침잠하여 터득한 것을 미루어 몸으로 가르치니 문생(門生>제자)은 부지불각(不知不覺) 중에 마음이 취하여 기꺼이 복종하였다.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서 내외를 엄히 하며, 무당을 금지하고, 예릏 실천하였다.
종가가 상화로 인하여 살림을 할 수 없는지라 맏형수를 받들고 우리 아버지 형제를 불러들여 10여년을 동거하고 횡거 선생의 여계와 장공예의 백인(百忍)을 손으로 써서 벽에 걸어 집 식구로 하여금 경계하고 살필 바를 알게 하며, 또 언문으로 고금의 여행과 당시 윤리와 도덕에 어긋난 일을 요약하여 부녀자로 하여금 귀감을 삼게 하였다.
사람을 대함에 정성을 다하여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일이 의리에 관계되고 사람이 선악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는 칼로 베듯 하고 돌처럼 확고하여 주저하는 마음이 없었다. 언론이 소통하여 공정하게 보고 공동으로 취하였다. 일찍이 '우리나라가 당쟁 이후로 학문하는 선비가 혱세에 구애되지 않은이가 없어 동(東)에서 끌리고 서(西)에서 당겨서 털을 불어 흠집을 찾아 마침내 국가로 하여금 그칠 곳을 없게 하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은가?'라고 말하였다.
말이 문헌공의 예방사에 이르면 '진실로 의심할 만한 점이 있으면 자손 된 자가 말하지 않는 것이 옳지만 우리 선조와 같이 정대한 심법과 명백한 예론이 백세에 의혹함이 없다고 말할 만할진댄 그 억울하게 모함한 것을 분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분별하는 도는 그 글을 나타내고 그 도를 밝히는 데에 있다.'고 하여 일찍이 종씨와 사서답문(四書答問)을 간포(刊布)하고 또 제종조(再從祖) 문산공(文山公)이 편찬한 변증문자(辯證文字)를 다시 자세히 교정하여 바로잡으니, 대개 선생이 선조의 학문을 독실이 믿어 출처에 어렵고 곧은 의에 깊은 감동이 있으니, 그 심오(深奧)한 조예(造詣)의 유례가 멀다.
혼란한 시대를 만나 은거하여 종적(蹤迹)은 멀리 나간적이 없었지만, 국내 상황과 세계정세를 두루 모르는 것이 없어 시대를 상심하고 국가를 걱정함이 진정에서 나왔으니, 그의 꿈에 지은 詩에
백척의 누각에 오르니,
바람 잠잠하고 비 소리 그쳤내.
삼각산은 하늘에 닿도록 우뚝하고,
한강물 땅에 가득히 흐르네.
북쪽 오랑캐 입을 열지 못하고,
남쪽 오랑캐 고개를 들지 못하네.
라고 읊었으니, 그 시대를 추적하여 그 마음을 상고하면, 대대 우리 종묘사직을 회복하고 우리의 정치와 교육을 회복하여 강상(綱常)의 도(道)를 다시 밝히고 민족자결을 하고자 한 것이 본래 지닌 충심이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다. 일찍이 선생의 말에 '중화(中華)가 멸망한 한이 나라가 망하는 아픔과 경중이 없다,'하니, 진실로 지극한 의논이다.
슬프다.
왜가 망한지 60년 동안에 국가의 취향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서구문물에 빠져 마침내 호적법을 폐지하여 금수가 되는 지경에 그쳤으니, 선생의 충심과 정성이 실로 근본한 것이 있고, 단지 한 시대의 감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生民)을 위해 도를 세운 자만이 거의 이를 수 있다.
선생이 성리설(性理說)에 잠심(潛心)하고 묵묵히 연구하여 근원을 통찰하여 사물에 나아가 그 당연한 바를 알고 도를 체념하여 그 소이연(所以然)을 깨우쳐 『사상강설(泗上講說)』한 책을 저술하여 이기(理氣)를 논함에 눈과 마음에 환하고 호락론(湖洛論) 및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1792~1868)와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의 학설에 대하여 다 의문 처를 기록하고, 또 율곡 선생의 학설로 널리 조율하여 절충하니 독자가 '이기심판론(理氣審判論)이라 하였다.
경운(耕芸)이 일찍이 선생의 항의문(抗義文)을 수집하여 『정명록(正明錄)이라 이름 짓고, "대저 절의와 학문이 애초 두 가지 일이 아니요. 다만 절의(節義)는 학문 중 한 가지 일일 뿐이니, 진실로 그 근본이 없으면 어찌 이를 갖출 수 있겠는가?
公이 학문이 깊고, 식견(識見)이 고명(高明)하여 평일 의논이 매양 남보다 한 등급 뛰어나서 개연(介然)히 三代의 성왕 정치를 만회할 뜻을 지녔으니, 그의 말에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이 군신의 의리보다 엄격하다.'하니 이는 진실로 만고(萬古)에 바꾸지 못할 의론(義論)이다."하였으니, 이로써 선생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신축년(辛丑年,1961)에 문집(文集) 4책(冊)을 간포(刊布)하고 몇 년 뒤에 공주 향교의 많은 선비들이 통문을 내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향사 하였다. 배위(配位)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 곧 겸옹(慊翁)의 딸이니, 합장(合葬)하였다. 二男二女를 낳았으니, 맏이는 광산(光山) 김원중(金元中)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다 요절하였다.
족제(族第) 준영(埈榮)의 둘째 아들 규룡(圭龍)으로 입후(入後)하니, 선대의 궤범(軌範)을 계승하여 문집(文集)을 간행하고, 서원을 건립함에 온 힘을 다하였다. 능성(綾城) 구병희(具炳喜)의 딸을 맞이하여 二男二女를 낳았으니, 남(男)은 종구(鍾龜), 종호(鍾祜)요. 여(女)는 김충현(金忠顯). 김순중(金舜中)에게 출가했다.
또 아들 종린(鍾麟)과 이성희(李晟熙). 김학재(金學在). 송진영(宋鎭永). 조우상(趙佑相)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 또 김일남(金一男). 선학(善學)이 있고, 조길구(趙吉九). 성하주(成河珠)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 증손(曾孫) 이하는 기럭하지 않는다.
오호라!
지금 선생이 돌아가신지 90년이 되었다. 훌륭한 우리 선생의 큰 덕과 큰 절의가 이미 사람들의 입에 새겨지고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럼에도 지금 세상이 더욱 강하되어 인문(人文)이 옛 같지 않아 병필자(秉筆者)가 없으니 이로 보면 장차 비석이 없어도 된다.
그럼에도 삼종형(三從兄)인 종구(鍾龜)씨는 묘갈 세울 것을 도모하여 나에게 글을 재촉하거늘, 삼가 긍당(肯堂) 선백부(先伯父=36世 李圭憲) 및 우재 유공이 기술한 행장(行狀)을 상호 참고(參考)하여 서술하니, 두 어른은 선생의 조카이며 고제(高第: 뛰어넌 제자)이니, 그 말의 친절함이 영원토록 믿을 만하다.
명(銘)에 이르되
아! 우리 선생은, 하늘이 내신 빼어난 자품이로다.
군자의 담박함과 간략함은, 비단 옷에 홑 옷을 더하셨내.
선생의 태어나심은, 하늘이 실제 온전히 하셨도다.
선생의 학문은, 경과 의를 함께 간직하셨네.
그 도에는, 빗장과 자물쇠를 열은 듯하고.
몸에 쌓인 덕에, 뭇 행실도 우뚝하다네.
속에 찬 것이 밖으로 표현되니, 문장은 평이한 숙속(菽粟: 콩과 조) 지문이라네.
10년 걸친 항의는, 작열하는 태양과 같고, 가을 서리와 같다네.
감옥과 형틀을, 큰 대로와 같이 했다네.
만인이 막아도 나는 밀고 나가고, 필부의 뜻 누구도 빼앗지 못한다네.
위태한 상황에서도 도는 형통하니, 왜도 능히 살해하지 못하였네.
공자께서는 인을 이룬다 하셨고, 맹자께서는 목숨을 버린다 하셨지.
선생께서 이를 소유했으니, 그 이름 영원히 아름다우리라.
금강 물 먼리 뚜렷하고, 계룡산 푸르고 울창하네.
선생께서 여기에 잠드셨으니, 지나는 자가 유풍을 들으리라.
선생이 돌아가신지 90년만인 무자년(2008) 정월 일에
후학 재종손 종낙은 삼가 쓰다.
(後學 再從孫 鍾洛 謹述)
-------------------------------------------------------------------------------------------------------
▲애국지사 이철영선생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