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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8~9/ 사도행전 20:7~12
1. 주님의 평화가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늘로서 좋은나무교회에 부임해 온지 꼭 6년이 되는 날입니다. 세월이 참 빠르지요? 처음 부산에 왔을 때 우리집 은빈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이제 중학교 2학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좋은나무교회에 부임해 와서 느끼는 것 가운데 아주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몇몇 분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같이 맨 뒤나 구석진 자리를 선호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옛날부터 부흥사 목사님들이 예배당 앞자리는 금자리라고 했고 뒷자리는 무슨 자리? 예, 죄송합니다. 똥자리라고 했지요. 그런데 성도님들이 왜 금자리는 앉기를 싫어하고 뒷자리를 선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앞자리에 앉으면 만원씩 준다고 하면 서로 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안내위원이 직접 나서서 앞자리부터 앉으시라고 권해도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는 분들을 보면서 문득 하나의 설교 모티브가 떠올랐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앉아계십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제목을 잡기는 조금 길고 직설적인 것 같아서 설교제목을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고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렇게 여러분의 모습을 보다가 구상하게 된 것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오늘 제가 주 텍스트로 삼으려고 하는 본문은 우리가 오늘 두 번째로 읽은 성서봉독문 말씀, 사도행전 20장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단히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 사도 바울은 드로아라는 지방의 어느 다락방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이 깊어가도록 바울의 설교가 끝나지 않자 유두고라는 이름의 한 청년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아차 하는 순간에 창문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당황하여 소동하는 사이 바울은 설교를 중단하고 내려가 유두고의 몸 위에 엎드려 그의 생명이 돌아오게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이런 일로 젊은 청년이 죽고 말았다면 아직 기반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던 당시 초대교회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오히려 교회와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이적 사건으로 마무리됨으로써 불행이 다행으로 바뀐 케이스로 기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전 오늘 설교를 좀 짧게 할 생각입니다. 바울이 설교를 길게 하는 통에 유두고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죽은 자를 살릴 재주가 없으니 예방 차원에서 설교라도 짧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아무튼 이제 본문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읽고 어떤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죽은 자도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에 대한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 기도 시간, 설교 시간에 졸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다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설교를 밤늦게까지 하지 말라거나 창문 주위에는 되도록 앉지 말라는 다소 유치한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말씀을 풀어감에 있어 진부하고 단순한 교훈을 찾아 제시하기보다는 본문이 제공하고 있는 시각적인 이미지에 좀 더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시각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본문을 들여다보자는 말입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그 이미지들은 어떤 의미를 품고 있습니까? 저는 이제부터 제가 유심히 들여다본 결과물로서 몇 개의 이미지와 그 의미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이미지는 ‘밤중’과 ‘등불’이라는 이미지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이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 ‘주간의 첫 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안식 후 첫날’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두 표현 모두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들이 ‘빵을 떼려고 모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초대 교회에서 ‘빵을 뗀다’ 혹은 ‘떡을 뗀다’는 표현은 성만찬이나 애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예배로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빵을 뗀다’라는 말은 ‘예배드린다’는 말과 동의어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간의 첫 날에 빵을 떼려고 모였다’는 말은 ‘주일에 예배드리러 모였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 곳은 드로아라는 곳이었는데 이 날은 특별히 순회전도자였던 바울이 예배를 인도하는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목회자들이 워낙 넘쳐나므로 그런 일이 없지만, 우리나라도 선교 초창기에는 교역자가 부족하여 목사님 한 분이 여러 교회를 담임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전도사님이, 또 어떤 교회는 장로님이, 어떤 교회는 집사님이 목회하다시피 하고 목사님은 몇 주, 혹은 몇 달에 한 번씩 오시어서 예배를 인도해 주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순회전도자였던 바울도 이와 같은 경우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당시로서는 나라와 나라 사이를 왕래하면서 설교하고 교회를 세우는 국제적인 사역자였기에 교통편 안 좋았던 그 시절 형편을 감안하면 교인들 입장에서는 얼굴 한 번 보기도 쉽지 않은 사역자였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에 의하면 바울은 다음날 드로아를 떠날 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단 떠나면 언제 다시 드로아로 돌아오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떠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던지 바울의 설교가 점점 길어져서 한 밤중까지 계속되었던 모양입니다. 그 시절에 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주위는 온통 칠흑같이 캄캄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밤중에 오로지 이 곳에는 밝은 불이 잔뜩 켜져 있었습니다. 8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모인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 이 집 위층에는 환한 등불이 매우 많이 켜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제가 지적하고 싶은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가 있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과 그 가운데 유독 환한 등불을 잔뜩 켜 놓은 다락방의 이미지 말입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 다락방의 불빛은 더욱 그 가치를 더할 것입니다.
이제 이 이미지를 우리 가운데로 적용해 봅시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는 더욱 빛을 밝혀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잠들어 있지만, 그 곳만은, 예배가 드려지고 성도들이 모이는 그 곳만은, 아니 바로 이 곳, 우리의 공동체에서만은 참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며 거친 밤바다의 등대처럼 “이 곳에 길이 있다!!”라고 외치며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켜진 등불”, 그것은 희망이 없는 세상에 홀로 희망을 품은 하느님 교회의 모습입니다. 생명을 잃은 자리에 호흡을 불어넣는 주님의 열정입니다. 양심을 잃고 타락한 군중 가운데 추상같은 올곧음을 지켜내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둘러봅시다. 뉴스를 곰곰이 봅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흘려들었던 그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어둡습니다. 캄캄합니다. 답답합니다. 갓 출산한 다섯 째 아기를 병원에 팽개쳐 두고 도망갔던 가난한 산모의 이야기가 얼마 전 보도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허망한지 연예인이고 일반인이고 할 것 없이 욕실에서 목을 매고 옥상에서 투신합니다. 따뜻한 온정은 사라져가고 찬란한 도시의 네온사인 뒤로 가련한 인생의 실패자들이 드러눕고 있습니다. 어둠 같은 세상입니다. 밤중 같은 인생들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 믿는 사람들은 책임이 없습니까? 이럴수록 우리의 등불을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꺼낼 수 있는 모든 등불을 꺼내어 먼지를 털고 심지를 돋우며 기름을 채워 불을 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을 잠시만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려 보십시다. 천진난만한 웃음에 상처를 입은 아이들, 순수한 미소를 잃어버린 청소년들, 활화산 같은 기백을 놓쳐버린 채 절망에 빠져 있는 청년들, 점점 더 어깨가 움츠러들고 초라해져만 가는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들, 내세의 소망도 없이 세상을 저주하면 한탄하는 노인들, 그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양심을 팔아먹은 위정자들과 신앙을 난도질한 명색뿐인 그리스도인들과 하느님이 주신 가치관을 고리타분하다고 던져버린 쾌락주의자들은 또 없습니까?
이제 그들을 위하여 우리가 불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그들이 그 빛을 보고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그들이 그 빛을 통해 다시 신앙의 양심을 회복하도록, 우리의 빛을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세상의 빛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14~16에서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빛을 산 속 깊숙한 곳이나 말 아래에 숨겨두지 맙시다.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밝혀 둡시다. 이제 우리 좋은나무교회에 언제나 기도와 선행의 불빛이 새어나가게 합시다. 우리의 매순간 삶이 언제나 하느님의 빛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합시다. 빛이 빛 되는 이유는 어두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아니면 여자이듯이 어두움이 아니어야 빛일 수 있습니다. 그 중간 회색 지대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밝히 드러내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창문’이라는 이미지입니다.
몇 년 전, 거의 ‘믿거나 말거나’ 수준에 해당하는 길거리 심리학 한 줄을 누군가에게 전해 듣고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자리로 본 사람들의 유형 분석이라는 것인데, 사람들이 즐겨 앉거나 선호하는 자리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유추해 보는 일종의 심리테스트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눈에 제일 잘 띄는 자리에 주로 앉는 사람들은 권력 지향성이 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구석진 자리에 주로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구리는 것이 많은 음모형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문가 쪽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발을 뺄 준비를 하는 참여소극형이라는 것입니다.
길거리 심리학을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본문 말씀과 연계시켜 보면 그냥 흘러 들을 수만도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유두고를 봅시다. 그는 창문에 걸터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문은 예배가 드려지던 그 장소에서 유일하게 아까 말씀드렸던 밤중의 이미지와 등불의 이미지가 만나고 교차하는 곳입니다. 밖도 볼 수 있고 동시에 안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창문이었던 것입니다. 이 자리가 어찌 보면 탐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실상 그런 경계선에 앉은 사람들은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두고도 그랬습니다. 분명히 모임 가운데 참석하여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그는 말씀 가운데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그 밤에 그는 그 경계선에 걸터앉았다가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졸음에 겨워 그만 실족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감리교를 창시하신 요한 웨슬레 목사님의 설교문 가운데 "Almost Christian"이란 것이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거의 크리스찬’, ‘대체로 크리스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의역해서 ‘형식적 위선적 크리스찬’이라고 번역합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어느 수험생이 시험을 친 뒤 합격과 불합격 여부를 통보 받는데 그 결과가 ‘거의 합격’이라고 왔다고 칩시다. 이 수험생은 합격한 것입니까, 불합격한 것입니까? 애매할 것 없습니다. 불합격한 것입니다. 이 ‘거의’라는 말, ‘almost’라는 말이 경우에 따라 이와 같이 무서운 것입니다. ‘거의’만으로 도저히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의’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크리스찬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신앙적 윤리적 가치관과 세상의 타협적 통속적 가치관이 정면으로 부딪힐 경우, 그 가운데 애매하게 서서 양쪽을 다 저울질 하는 경계선 인간! 그러한 사람이 바로 ‘Almost Christian’ 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어디에 앉아 계십니까? 혹시 유두고처럼 예수의 계명과 세상의 처세 중간 앉아 이 쪽도 보고 저 쪽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거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항상 교회에 나와 앉아 있거나 세상일은 내팽개치고 교회 일만 하자거나 세상 모임에 참여하지 말자거나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살고 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애매하지 않습니다. 매우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초대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창문에 걸터앉아 설교도 듣고 바깥 밤풍경도 동시에 감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기름 냄새 때문에 코와 목이 매캐하더라도 등불 환히 켜진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일에 집중하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등불 환히 붙여서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자신 있게 전진해 나갈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잠간 곁길로 빠지는 말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혹시 오늘 저의 이 설교를 듣고 예수 믿는 게 너무 힘들고 어렵게 느껴져 아예 창 밖 세상을 택하여 나가고자 하시는 분이 계실까 걱정되어 말씀드립니다. 그래도 교회 안에 계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것은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을망정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둠이 짙어진 세상 속으로 떠나느니 차라리 창가에 걸터앉아 있을망정 주님의 집에 있는 것이 여러모로 신상에 좋습니다. 또 만일 오늘 말씀에 감동이 오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이제 경계선에 있는 창문에서 과감히 내려오셔서 밝은 등불 기름 냄새 매캐하게 진동하는 하느님의 품으로 완전히 안기시기 바랍니다.
3.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아까 읽은 첫 번째 성서봉독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첫 번째 불순종의 죄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는 수치심이었습니다. 둘은 깊은 수치심에 황급히 하느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그늘 아래 숨었습니다. 그 때 하느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 물으셨을까요? 아닙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하느님의 질문은 아담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 못 찾겠다 꾀꼬리 하는 의미로 던지신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자리에 대한 질문인 것입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정말 너 있을 곳이 맞는가? 잘못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더구나 ‘아담’의 원뜻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것은 아담 개인에게 하신 질문이기도 하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는 뜻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무개야. 지금 너의 영적 자리가 정말 네가 있을 자리냐?’하고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시간이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영적 위치를 진지하게 진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크리스찬’이 아니라 ‘전적인 크리스찬’이 되어야 하며 경계선에서 머뭇거리는 신앙이 아니라 결단하고 뛰어 드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합시다. 오늘 읽고 묵상했던 바로 그 질문을 화두처럼 가슴 한복판에 던져 스스로 파문을 일으켜 봅시다. 그리고 그 질문에 심각하고 진지하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어디에 앉아 계십니까?”
첫댓글 친애하는 믿음교회 교우여러분, 모두 평안하시지요?
제가 부산에 온지 만 6년이 되었습니다.
이 설교는 다음주일10.17일 설교원고입니다.
함께 나누고 싶어서 올렸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영화 '울지마 톤즈'를 보셨나요?
서면 cgv에서 하고 있습니다. 곧 막을 내릴 것 같습니다.
안 보신분은 꼭 보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준비한 말씀을 저희교회에 먼저 올려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저희들 사랑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알면서도
자주 뵙지 못하니 아쉽습니다.
저희들 이번주 움직이는 교회로 견불동에 갑니다.
연말을 넘기기 전에 한번 뵈야겠지요?
늘 건강하십시오.
울지마 톤즈,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