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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高下島]
충무공 이순신의 혼이 깃든 목포항의 관문이자 용의 모습인 섬
고하도 둘러보기
목포 북항에서 차를 타고 목포대교를 건너 고하도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섬이었던 나지막한 언덕이 나타난다. 이곳이 예전에는 섬이었는데 지금은 주변을 막아 고하도와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 섬이 바로 장구처럼 생겨서 ‘장구섬’이라 하였다 한다. 여기를 지나면 양쪽으로 낮은 야산을 낀 구릉지를 앞두고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가 왼쪽으로 꺾여 들어간다.
▲고하도 바닷가 풍경
구릉지에는 몇 채의 허름한 집이 있다. 오른쪽으로 곶이 있어 이 곶을 ‘작은목’이라 한다. 작은목 앞에 있는 해안가를 ‘작은 목개’라고 한다. 왼쪽으로 곶이 있는데 이곳이 큰목이다. 이 큰목을 돌아 왼쪽 야산을 끼고 얼마 정도 돌아서 가면 큰 길이 끝나고 길이 좁아지면서 오른쪽으로 마을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도로명으로는 ‘고하도안길’이다. 이곳이 ‘고하리’인데 고하도 안쪽에 있는 마을로 원마을이다. 고하도는 면적 2.997km2, 해안선 15.2km이며 88세대. 267명이 살아간다. 섭두르지 4호, 뒷도랑 8호, 큰목 10여 호 등 모두 60여 호가 사는 작은 섬이다. 오죽했으면 목포에서 제일로 치는 유달산 아래 작은 마을이라 해서 고하도라고 했겠는가. 목포시의 남쪽 해안을 감싸 안은 듯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목포시 달동이지만 도시의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동쪽으로는 영산강 하구둑과 마주하고 있고, 산맥이 솟은 북쪽 비탈은 병풍바위의 벼랑을 깎아질러 바다 건너 유달산과 마주 보고 있다. 중심지답게 이곳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교회도 있고 마을복지회관도 자리한다. 복지회관 아래쪽에 위치한 고하도 교회가 있는 곳을 ‘뒷도랑’이라 하는데 탕건바위를 찾아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여기에도 몇 가구가 산다. 마을은 남동쪽 평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도로 옆은 밭과 논이다. 남서쪽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어서 목화 재배 외에 논농사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비해 뒤는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점이 77m일 정도로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섬이다.
▲목포시 달동에 속한 고하도는 농촌과 다름없다
충무공의 혼(魂)과 일제강점기의 한(恨)을 품은 고하도
일제시대에 목포항이 3대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사적 장소인 고하도가 있다. 역사 · 문화적 자원과 함께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려고 이곳에 목화밭을 조성했다. 이 섬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육지면이 재배되었다고 한다. 충무공의 유적지 근처의 언덕 고하도 선착장에는 너비 62cm, 높이 183cm, 폭 33cm의 ‘조선육지면발상지비(朝鮮陸地綿發祥之碑)’가 세워져 있다. 육지면은 고려시대 문익점 선생이 들여온 재래면과 달리, 원산지가 남미로 따뜻한 곳에 잘 자라는 면화이다. 미국면이라고도 하는데 최초의 시험 재배지를 이곳으로 한 것이다. 1899년 일본영사 와카마츠 도사부로가 미국산 육지면을 시험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재배에 성공하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육지면 재배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1936년에 비를 세운 것이다. 이 비에는 ‘1904년에 고하도에서 처음으로 육지면 재배를 시작하였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해방 이후 이 비는 뽑혀서 인근에 버려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래도 역사를 담고 있는 의미가 있는 유산이라며 다시 세웠다고 한다.
러ᆞ일의 고하도 토지 침탈
조선이 개항을 시작할 무렵, 제국주의 나라들은 목포와 마주한 고하도를 전략 지역으로 삼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 사건은 개항 초기 일본의 조선 내 토지침탈의 대표적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러 · 일 양국 세력이 서로 맞서서 격렬하게 이권을 추구했던 사건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육군 부령이 군함을 앞세우고 매입한 토지의 지계발급을 감리에게 요청했다. 이때 일본은 군대의 기밀비를 투입하여 조선인 고관을 앞세워 토지를 매입한 뒤 일본과 영구차용계약을 체결하여 고하도 전토의 대부분을 침탈하였다. 이때 러시아는 고하도 토지 매입을 위해 주민들에게 1만원 정도의 땅값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목포항을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 간의 첩보전이 이 작은 섬을 무대로 전개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만 그랬을까. 지금 우리가 우리의 영토를 잘 지켜가고 있는지를 자문해 볼 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음을 실감하게 된다.
충무공 혼이 깃든 고하도
원마을에서 바닷가 해안길을 따라 가면 유달산이 보이는 쪽으로 충무공을 기리는 모충각(慕忠閣)이 있다. 군량미가 많게 보이기 위해 쌓았다는 유달산 노적봉을 마주하고 있다. 고하도 앞바다에는 해경 경비정과 군함들이 정박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후예들이 자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이 섬을 전략지로 활용, 이곳에 진을 설치하여 왜적의 침투를 막아냈다. 충무공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다음, 이곳에서 1597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17일 완도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108일간을 주둔하며 전력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이곳 고하도가 적들의 수중에 들어가면 호남의 곡창지대로 영산강을 통해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에 매우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서 한 조치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실로 핵심지원전략 요충지였던 셈이다.
▲모충각 입구
지금도 고하도에는 진의 성터가 남아 있다. 진영이 있는 곳은 불당골, 용오름길의 큰산 아래 부근이다. 칼바위에서 말바위 가는 길에는 성터의 흔적도 남아 있다. 자연적인 바위를 이용하여 쌓은 석성의 형태이다. 난중일기에 그 건설된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비축된 군량미는 486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충무공의 정신을 추모하는 탄신제를 해마다 4월 28일 치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하도에는 이충무공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정유재란 때 고하도를 전략기지로 삼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세운 기념비이다. 경종 2년1722년 8월에 통제사 오중주와 충무공의 5대손인 이봉상에 의해 완성되었다. 비문에는 정유재란 때 이충무공이 전진기지로 고하도를 선정하게 된 경위와 전쟁 시 군량미의 중요성, 인조 25년1647년에 진영이 당곶진(목포시 하당 일대)으로 옮겨가게 되어 고하도진이 없어지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오중주 통제사가 비 건립을 주도한 내용, 후임 통제사들에게 고하도진의 터임을 알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남구만이 지었고, 글씨는 조태구가 썼다. 몸돌의 높이는 227cm, 너비는 112cm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에 야산에 버려져 있던 것을 광복이 되면서 현 위치에 세웠다. 비각은 1949년에 세웠다. 외딴 섬에 기념비를 세우는데 공의 후손이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는 일로 보인다.
고하도의 용머리
고하도 마을에서 서쪽으로 가면 왔던 길과 만나는데 그곳에서 길은 또 갈라진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용머리가 나오고 용머리 아래에 공생원이 있다. 북쪽에 있는 해발 62m의 산을 ‘큰산’이라 부르는데 큰산에서 서북쪽 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절벽을 병풍처럼 생겼다 하여 ‘병풍바위’라 하고 병풍바위 끝자락을 용머리라 한다. 목포팔경 중의 하나인 ‘용두귀범(龍頭歸帆)’의 바로 그 용머리이다. 용머리 오른쪽 공생원이 위치한 뒷산을 북산이라고 하는데 해발이 55m다. 섬의 북쪽 비탈은 물 건너 유달산과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영산호 하구언, 목포공항과 마주한다. 이 외에도 목포와 마주하고 있는 섬의 지형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용머리 또는 병풍처럼 펼쳐 있다 하여 병풍바위, 병풍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순수한 우리말로 칼섬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건너편 목포 지역에서는 용섬이라고 친근하게 부르고 있다.
▲고하도 동굴에서 유달산이 보인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낮은 야산을 돌아서 가면 삼거리가 나타나고, 여기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선착장이 나타난다. 섬이었을 때는 이곳으로 목포에서 여객선이 다녔던 곳이다. 율도와 외달도 그리고 달리도와 함께 순환여객선이 하루에 6차례 다녔던 곳이었으나 육지와 연결된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 선착장을 중심으로 북동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급하고, 남서 사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해안에 이어진다.
▲고하도 선착장의 모습
선착장 가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면 학교가 나타난다. 학교는 마을과는 어느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목포서산초등학교 충무분교장’. 고하분교가 아닌 충무분교가 된 것은 1963년 무안군에서 목포시에 편입되면서 충무동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란색의 철제지붕을 한 좌우로 길게 뻗은 교사가 인상적이다. 운동장도 상당히 넓은 편이다. 이곳에 이순신 동상이 있는데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작은 동상일 것 같다. 앙증맞게 작은 크기로 동상을 만들었다. 장난감 같은 느낌의 동상으로 기단이 오히려 이순신상보다 더 크다.
▲목포 갓바위
고하도의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겸손하게 계시는 연유는 무엇일까? 혹여 역사를 통해 깨달아야 할 일을 소홀하게 하고 있는 후손들을 질타하기 위함은 아닐는지 모를 일이다. 학교에서 나와 남쪽으로 이어진 길을 가면 앞은 넓은 고추밭인데 이곳을 ‘갯버들’이라 부른다. 여기서 마주 보이는 작은 섬이 ‘노속도(老束島)’, 지도상에는 ‘노동도’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다리가 보이는데 바로 하사도와 연결되는 다리인 ‘신항교’이고, 그 뒤 대형크레인 있는 곳이 현대삼호중공업이다. 고하도는 목화 재배 외에 논농사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다 할 논밭이 없었지만 구릉지에 야채를 심어서 도선을 타고 나가 목포에 팔았다. 아주 옛날에 남해 사람들이 여수의 인분을 배로 거두어다가 농사를 지었듯이, 이곳 고하도 사람들도 재래식 화장실이 있던 시절 똥배가 목포 사람들의 인분을 싣고 와 뒷도랑의 ‘똥당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밭에 뿌려 야채를 길렀다. 목포 일대의 인분은 모두 모아져서 배로 영산강 일대까지 운반되어 농사를 지었다. 당시 고하도는 목포와 가장 근접 거리에 있고, 배를 정박하기도 좋았으며, 일제시대 때 만든 조선소 한쪽에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구덩이들이 있어 인분을 보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수거한 인분을 모아두었다가 거름으로 사용하여 야채농사를 지은 것이다.
▲마을 전경
똥배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나주에 비료공장이 건설되면서였다. 나주 비료공장과 남해화학 비료공장이 문을 열면서 비료공급이 늘어나고, 농업기술이 진화되면서 비닐하우스가 등장하자 고하도 야채는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바다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81년 농업용지와 수자원의 확보를 목적으로 길이 4,351m의 영산강 하구언 댐이 생겨나자 물길을 막히면서 바다 생태계에 크나큰 변화가 왔다.
▲목화밭 안내문
고하도와 영산강 하구언
고하도 주민들에 의하면 과거 섬 주변 바닷가는 해산물의 보고였다고 한다. 하루에 한 사람이 바지락을 100kg 정도를 캘 수 있었다는 것이다. 뻘이 매우 부드러워 그냥 손으로 긁으면 바지락이 나오고, 굴과 낙지 또한 지천이었다. 그런데 영산강 하구언과 신항만이 들어서면서 바다를 막는 바람에 해산물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영산강 하구언이 둑으로 막히면서 물길이 변하고 수위가 상승하면서, 고하도와 허사도 · 달리도 등 인근 어민들의 생활에 큰 지장을 가져왔다. 김양식과 바지락과 굴, 낙지를 비롯해 갯벌에 의지해 살아왔던 어민들은 삶의 터전이 무너진 것이다. 곧 이어서 금호호와 영암호 등 화원반도의 거대한 바다의 물길도 막아버렸다. 그러자 이 일대 갯벌에서 낙지와 바지락 굴을 잡던 어민들은 더 이상 바다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다 바로 옆에 있는 허사도에 ‘신외항’이 건설되면서 그나마 조금 남았던 용머리와 큰목의 갯벌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때는 달리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니 순박한 주민들에게는 너무 가혹했던 처분이었다. 생활터전이 무너져가도 말 한마디 못하고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술잔에 넣고 다시 털어 마시기만 했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무엇이든지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 자연이 한없이 주는 선물을 인공적인 간척 때문에 웃고 우는 고하도 사람들이 된 것이다.
영산강 하구언이 막히기 전에는 영산강 하구에까지 산란을 위해 찾아온 고기들이 많았다. 배를 가지고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농어와 민어 등 고급 어종이 아니면 잡지 않을 정도로 풍어를 이루었다. 배를 타고 해남의 금호도와 영암 갯벌로 조금만 나가면 세발낙지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은 “여기가 농어, 민어, 숭어, 낙지들이 겁나게 많이 났어요. 영산강 막고 신외항을 만드는 탓에 바다가 죽였제”라고 했다. 지금 농사는 바다에서 고기 나온 것에 비해 10분의 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고하도는 세발낙지조차 편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고 하니, 주변이 발전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좋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닌 셈이다.
▲배나무 꽃 전경
공생원에 얽힌 사연
마지막 코스로 용머리 갯벌을 답사하면서 근처에 있는 복지시설 공생원을 방문하였다. 고하도에서 가장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새롭게 난 길로 가까이 가서 보니 아담한 건물에 신체장애자들이 수용되어 있다. 이 시설은 일제 치하인 1928년에 일본인 윤학자 여사와 윤치호 전도사 부부가 7명의 고아를 데리고 설립한 목포공생원 고하도 건물이다. 공생원은 목포시 죽교동 해양대 뒤편에 있다. 공생원은 일제시대인 193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국의 불량아을 수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가 재생원으로 개칭돼 고아들을 수용했다. 재생원은 1960년 폐원되었고, 1984년 공생재활원으로 부활됐다. 이곳은 현재 120여 명의 발달장애인이 생활하고 있다.
목포공생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1928년 윤치호 전도사가 기독교정신으로 설립한 것이다. 그는 1938년 일본인 여성 윤학자(다우치 지즈코) 여사와 결혼했으나 6 · 25 사변 당시 행방불명됐다. 그 후 윤학자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6 · 25 사변으로 생긴 수많은 전쟁고아를 수용하여 희생과 봉사 정신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지즈코 여사의 부친은 조선총독부의 관리였다. 일본 고치현에서 태어나 부모와 함께 7살에 목포로 건너와 정명여고를 졸업하고 그곳의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목포공생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다 1938년 원장인 윤치호 선생으로부터 결혼제의를 받고 결혼한다. 6 · 25 사변으로 인해 전쟁고아들이 넘쳐나자 남편이자 원장인 윤치호 선생은 광주도청으로 자금 조달을 위해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된다. 그녀는 남편의 대를 이어 원장으로서 공생원의 아이들을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고하도 곳곳에 있는 무화과나무 전경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그녀의 선행은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1964년 4월 대통령이 직접 공생원을 방문하여 ‘문화훈장국마장’을 수여한다. 일본의 언론에서도 알려져 일본의 NHK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일본인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1968년 10월 31일 57세의 나이로 작고하자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시 역사상 최초로 목포시민장으로 열린 장례식장에는 시민들이 3만 명이나 몰렸다는 것이다. 그녀는 임종 직전에 “우메보시 타베따이.......” 즉, 우메보시(일본식 매실 장아찌)를 먹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이 알려져 2000년 3월 오부치 전 총리가 목포공생원에 매화나무 묘목 20여 그루를 보내와 그녀의 기념비 주위에 심었는데 현재까지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또 1997년에는 그녀의 고향인 고치현(高知市 岩松町)에 그녀의 영면일에 맞추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녀의 일대기는 일본에서 ‘사랑의 묵시록(愛の默示錄)’이란 영화로 만들어져 일본인들을 감동시켰고, 일본문화 해제금지의 서막을 열고 국내에 들어와 상영됨으로써 한일가교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실로 고귀한 정신을 가지고 실천했던 분이었다.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분교 1개교, 경찰출장소, 교회 1개소가 있다. 탕건바위놀이 등이 전해지며 해송림과 낚시터가 있어 관광객이 자주 찾고 있다. 한편, 고하도에 골프장과 영화공원이 들어선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고하도 일대 171만m2에 골프장, 선박박물관, 영화테마공원 등을 조성하는 유원지 개발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고하도 마을 안에 있는 새우양식장 전경
관광명소
이충무공기념비(도 유형문화재) :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1597년(선조 30년) 10월에서 1598년 3월까지 108일 동안 머물면서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였다. 통제사 오중주가 비를 세우기 시작하여 1722년(경종 2년) 8월에 충무공의 5대손인 통제사 이봉상이 완성하였다. 비문은 남구만이 지었고, 글씨는 조태기가 썼다. 비신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쏜 총흔이 있으나 거의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이충무공유적(도 기념물) : 진주 정씨 종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목포시 충무동에 있는데, 전체 면적은 66,545m2에 이른다. 명량대첩 후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 이순신 장군은 이듬해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여기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이순신 장군은 남서쪽으로 길이 1km, 높이 2m, 폭 1m의 석성을 쌓았다. 적의 배를 구별하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오가는 배들에게 1~3석의 식량을 내어놓고 통행첩을 받아가도록 하는 제도를 운영하였다. 이로써 열흘 만에 일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며, 병기와 배도 만들어 전열을 가다듬었던 유적지이다.
▲고하도 둘레숲길 입구
병풍바위와 용머리 : 고하도 큰산에서 서북쪽 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절벽을 병풍처럼 생겼다 하여 병풍바위라 하고 병풍바위 끝자락을 용머리라 한다. 목포팔경 중의 하나인 ‘용두귀범(龍頭歸帆)’의 바로 그 용머리이다.
목포 삼학도 : 가수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에 등장하는 삼학도가 최근에 복원됐다. 삼학도는 여객선터미널 인근 내항과 연결돼 있다. 육지와 연결된 다리는 모두 5개이다. 본래 목포 동쪽 앞바다에 나란히 있던 3개의 섬이었으나 1968~1973년 간척공사로 인해 뭍으로 변한 뒤 ‘삼학도’라는 이름만 남아 있었다. 아담한 구름다리를 건너면 소삼학도에 닿는다. 간척사업으로 평평하게 만든 땅에 다시 원형을 살려 흙과 돌로 봉우리를 만들었다. 소삼학도는 중삼학도와 또다시 다리로 연결돼 있고 섬 주변으로는 구불구불하게 멋을 낸 인공수로가 흐른다. 수로의 길이는 70m, 깊이는 2.5~3m에 이르고 폭은 20m 내외다. 수로를 따라 자전거도로와 산책길이 잘 만들어졌다. 다시 살아난 삼학도가 학처럼 목포항을 밝게 날기를 기원해 본다.
▲이순신 장군의 군사 터전 안내문
고하도 [高下島] - 충무공 이순신의 혼이 깃든 목포항의 관문이자 용의 모습인 섬
출처:(한국의 섬)
2023-11-18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