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게 되면 염라대왕이 이승에서 지은 공덕을 묻는다고 한다.
가장 먼저 묻는 것이 “활인공덕(活人功德)하였느냐?”이다.
인생사에 사람 살리는 공덕보다 큰 공덕은 없을 것이다.
활인공덕도 여러 가지이다.
성현의 가르침으로 교화하여 무지한 백성을 깨우치게 하고
참되고 옳은 길을 가도록 인도해 주는 것도 활인공덕이며,
충무공 이순신처럼 살신성인하여 적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킨 것은
최고의 공덕일 것이다.
허준선생처럼 의술로 병든 자를 치료하여
생명을 살린 것 또한 활인공덕을 한 것이며,
경주 최부자처럼 자기의 곡간을 털어가며 굶주린 자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준 것 또한 활인공덕을 지은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크고 작은 활인공덕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다음으로 묻는 것이 월천공덕(越川功德)하였느냐? “이다.
월천공덕은 약한 자를 업어서 내(川)를 건너 주었거나
나룻배로 강이나 바다를 건네준 공덕,
개천이나 강에 다리를 놓아 백성들이 마음대로 건너다닐 수 있게 해 준 공덕을 말한다.
전국곳곳 가는 곳 마다 개천이나 강이 없는 곳이 없으며
이 들은 가는 길을 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특히나 섬지방에 생활하는 사람들이 육지로 나오려면
그 불편함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승에서는 월천공덕을
인생사에 두 번째로 큰 공덕으로 삼는다고 한다.
오늘날은 다리를 건설하는 기술이 고도화 되어
전국 어느 곳을 가나 강이나 바다에 수많은 다리들이 놓이게 되고
국민들의 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다리를 놓아 국민생활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의 공덕은 대단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다리는 백성들의 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남해에도 70년대 초반에 다리가 놓였다.
남해 노량에서 하동 노량을 잇는 길이 660미터의 현수교이다.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서울이나 부산 등지로 나가려면
여수에서 부산을 오가는 여객선을 이용해야 만 했으며
노량에서 도선을 이용하여 객지로 나 다니기도 하였다.
다리의 건설은 남해군민들에게는 최대의 숙원사업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남해출신 정치인의 노력으로
다리가 건설되고 바야흐로 개통을 보게 되니
남해군민의 기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1973년 다리가 개통 되었다.
이 날 대통령이 참석하여 개통테이프를 끊고
13만 군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함께 다리를 건넜다.
다리 이름을 ‘남해대교’로 명명하였다.
다리의 개통으로 군민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수교라는 생소한 이름을 가진 남해대교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다리 모습이
유명세를 타자 전국각지에서 다리구경을 오는 관광객들로 다리는 온통 북새통을 이루고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사실 다리가 놓이기 이전에는 남해는 우리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이었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이전이니 남해를 찾아오는 관광객 또한 많지 아니했다.
다리가 개통된 지 어언 5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하루에 많은 차량이 이 다리를 오고간다.
남해는 이 다리를 통해서 발전을 거듭해왔고
이 다리로 하여 남해가 전국에 알려지고 관광 명소로 자리하게 되었다.
세월의 흐름만큼 다리도 낡아 차량의 중량을 봐가며 통행을 통제를 하고 있다.
지난 2019년에는 제2남해대교 격인 ‘노량대교’가 완공되었다.
길이 990미터 왕복 4차선의 훤칠한 이 다리는
이순신의 학익진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남해에서 육지로 오가는 다리가 어느덧 8개가 되었다.
남해 노량에 2개, 남해본섬과 창선섬을 연결한 다리가 1개,
창선과 삼천포를 연결하는 다리가 5개이다.
날이 갈수록 인간 생활의 편리함에 비례하여
다리의 중요성도 커지는 듯 하다.
이러한 다리를 놓아준 사람들의 공덕은 빛나고,
다리의 혜택을 보는 우리는 이들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