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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3 - 케이타이왕(천황)과 구다라(백제) 왕이라고도 불린 비타츠왕(천황)
규슈 왜국의 지배자들이 신라 서라벌을 포위했다가 고구려 5만 대군에 패해 철수한후 세토나이카이
를 건너 오사카 가와치에 상륙해 토착세력을 정복하고 오사카 동쪽 나라현 가시하라노미야
(橿原宮)에 야마토(大和) 왜국의 창설한 사람은 오진왕(응신천황)이며 그 아들 “닌토쿠왕(천황)
은 모국 백제로 부터 백제신(百濟神) 의 신주를 왕실로 모셔왔다” (‘風土記’ 8~10C 편찬) 고 합니다.
그후 일본서기에 보면 부여곤지는 461년에 도왜하기 전에 개로왕에게 후궁을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왜
출산이 임박한 시점에서 함께 보내달라고 요구한 것인지 추측이 난무하니 부여곤지가 개로왕에게
도왜하라고 명령을 받은 시기는 4월이고 6월에 무령왕이 일본에서 출산되니,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 맞다고 주장하는건 일본 학계이고 한국 학계는 곤지의 아들로 보는데 양쪽 모두 일리있는 주장입니다.
25대 부레쓰왕이 죽자 케이타이왕(계체천황)이 추대되고, 정실부인과 자식을 둔 상태였지만 케이타이는 21대
웅략(雄略유랴쿠)왕의 손녀이자 24대 인현왕(仁賢닌켄)의 3녀이며 무열(武烈 부레쓰)왕의 누이인 수백향
(手白香)을 왕후로 맞아들이는데, 왜국 왕실에서 방계 혈통인 케이타이왕은 성골 수백향을 정실로 맞아들임
으로써 왕실과 융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데릴사위 형태로라도 혈통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백향 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흠명(欽明 킨메이)이 27세 안한(安閑 2년 재위)과 28세 선화(宣化 4년
재위) 두 이복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받았으며, 흠명왕은 이복형 선화왕의 딸 석희(石姬이시히메)를
왕후로 삼아 민달(敏達 비다쓰)왕을 얻었으며 선화왕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으나 모후와 함께 순장되었
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다음 보위에 오르기로 되어 있던 킨메이왕(흠명천황)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백제왕실의 혈통(?)이라는 설이 있는 케이타이(계체왕)와 왜 왕실의 성골 수백향 왕후 사이에
태어난 킨메이왕(흠명천황) 의 혈통이 만세일계(萬世一係)의 전통을 세워가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니...... 2001년 아키히도 일왕은 “옛 칸무(桓武: 781~806)왕의 생모(다카노노 니가사)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 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 라고 발언했습니다.
(1) 수백향은 백제 무녕왕의 딸이 맞는가?
문정창씨는 “상게서” 에서 수백향을 백제 무녕왕의 딸로 추정해 케이타이왕(계체천황) 이
무녕왕의 사위이고 흠명왕이 외손자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① 이미 기혼자였던 케이타이(계체)가 왕이 된후 조강지처는 그대로 비로 놓아둔 상태에서,
어린 수백향을 정실왕후로 맞이했다는 것은 수백향이 백제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
② 수백향이 낳은 태자(흠명)의 이름이 천국배개광정(天國排開廣庭) 즉‘천국(상국)이 밀쳐주다'
라는 뜻이 되므로 태자가 백제 왕실의 외손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문정창씨의 주장은 사료적 근거는 없으나 정황적으로 일리가 없다고도 할수 없으니 나이도 많지
않고 8년 재위기간 뿐인 무열왕이 갑자기 죽은 이유는 포악하여 신하들이 반정을 일으켜 계체왕
을 추대한 것으로 보이는데...... 만일 그렇다면 어찌 폐주의 누이를 새롭게 추대한 왕의 왕후로
들이고 수백향 왕후 소생인 흠명을 어린 적자(嫡子而幼年)로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2013년 9월 30일부터 2014년 3월 14일까지 방영됐던 MBC 사극 제목이 “수백향”
인데, 연속극에서는 무녕왕의 딸로 케이타이 덴노의 왕비가 되었다고 설정했으나....
수백향에 대한 사료가 매우 적을 뿐더러 무녕왕의 딸이라고 할 근거가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에 역사 왜곡 논란이 일자 MBC 제작진은 드라마를 가상 역사 드라마로 변질시킵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작품성은 인정받았으니 초기 시청율이 높았는데 “수백향” 은 향이 깊은 나무인 심향목에서
백년에 한번 피는 꽃으로, 꽃이 피어 그 향기가 퍼지면 전장의 전사들이 검을 거두고 병에 시달리던 사람들
의 고통이 멈추고 헤어졌던 정인들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는 식으로 전설을 창작하여 버린 것입니다?
수백향이란 인물은 일본 닌켄 덴노의 딸인 타시라카 황녀인데 이 여인을 백제 무령왕의 딸
이라고 설정하여 역사왜곡 논란이 일자 제작진은 기발하게도 수백향의 한자를 ‘手白香’
에서 ‘守白香’ 으로 바꾸었으며, 일부 옹호자들은 수백향은 가상의 인물이라고
변호했으나..... 제작 발표회에서 이미 수백향을 '역사적 인물' 로 표현해 버렸으니 어쩐다?
(2) 일본 왕실 케이타이왕(천황) 의 조상은 백제왕인가?
실질적으로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大和) 왜국을 연 오진(應神 응신) 왕의 15세손으로...
당시 왜 왕실에서 방계 혈통에 속했던 26대 케이타이왕(계체천황)은 성골인
수백향(手白香 다시라카) 왕녀를 왕후로 맞아들여 흠명(欽明 긴메이)을 낳고, 그 혈통이
이후부터 만세일계 (萬世一係) 의 전통을 세워가며 지금의 일본 왕실 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왕실은 처음부터 만세일계는 아니고 가야계(부여계?) 스진왕(숭신천황)에서 백제계(가야계?)
인 오진왕(응신천황)으로 한번 바뀌고 다시 케이타이로 바뀌니 3번째 일본왕조인데, 성씨가 바뀌었다는
케이타이(계체) 왜왕은 백제 무녕왕의 남동생이라는 설이 있으니.... 이를 입증하는 것이 일본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찌만(隅田八幡) 신사에 보관된 일본 국보 제2호 인물화상경이라고 생각됩니다.
“癸未年 八月 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痲念長壽
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 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계미년(503) 팔월 십일 대왕(백제 무녕왕)해에 오시사카(意紫沙加)궁에 있는 오오도
(男弟,南大迹 = 계체왕) 왕에게 사마(斯痲 = 무녕왕)가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2인을 시켜 양질의 백동 200간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노라.”
그러니까 계미년(癸未年)을 503년으로 보면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던 무녕왕이 되고 케이타이왕(계체왕)의
휘(이름)인 남대적(南大迹)은 남동생이란 뜻인 남제(男弟)의 훈인‘오오도’와 같은 발음이니 남제왕
(男弟王)을 게이타이왕으로 보면.... 케이타이왕은 무령왕의 동생이 되고 그의 아버지는 사실상
개로왕의 아우인 곤지왕이 되니 케이타이왕 부터 만세일계로 이어지는 일본 왕실은 백제계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남대적(= 게이타이= 계체)왕 은 언주인왕(彦主人王) 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11세 수인(垂仁)왕의 7세손인 진원(振媛)이다. 왕이 어릴 때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모친인 진원이 친정인 고향(高向)으로 돌아가 양육했다.” 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렇다면 이 언주인왕 하고 백제 무녕왕의 부왕 곤지와는 어떠한 혈연관계가 있을까요?
무녕왕의 출생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국본기”는 “455년에 즉위한 21대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처형당한 475년에 아들 문주왕이 뒤를 잇고, 477년에 문주왕이 죽자 장자 삼근왕이
13세에 즉위했다가 일찍 죽었으며.... 문주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 동성왕이 479년에 즉위
했다가 재위 23년에 죽자 그의 둘째 아들 25대 무령왕이 501년에 즉위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 웅략 5년조는 이와는 전혀 다르니“웅략 5년(461) 여름 4월 백제의 가수리군(加須利君
=개로왕)은 아우 군군(軍君=곤지)에게‘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니 군군은
‘상군(上君=개로왕)의 명에 어긋날수는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군의 부인을 저에게 주신후에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며‘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월이 되었다. 도중에 출산하게 되면 어디에 있든 배를 태워 속히 돌려보내도록 해라’ 고 부탁했다.”
“드디어 헤어져 (일본)조정에 보냈다. 6월 임신한 부인은 과연 가수리군의 말대로 축자(규슈) 각라도
(築紫各羅嶋) 에서 출산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도군(島君)이라 했고, 군군은 배 1척을
마련해 어머니와 같이 백제로 돌려보내니 이가 무녕(武寧)왕이다. 백제인은
이 섬을 국주도(國主島)라고 했다. 여름 7월 군군이 도성에 들어왔을 때 이미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위 일본서기의 내용에 의하면 곤지는 개로왕의 차남이 아니라 아우이고 무녕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며.... 게다가 무녕왕의 이름은 섬에서 태어났다 하여 도군(島君)이라고 불렀는데, 島(도) 의
일본어 발음이 시마(しま)이며 무녕왕의 휘인 사마(斯麻)의 일본어 발음 역시 시마(しま)로 발음됩니다.
또한 공주에 있는 무녕왕릉 지석에 무녕왕은 523년 62세의 나이에 붕어했다고 새겨져 있어 무녕왕은 461년
생으로 위 “일본서기”의 생몰 연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니.... 무녕왕의 출생에 대해서는 720년
일본서기의 기록이 한국 고려시대 1145년 김부식의 삼국사기 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백제 동성왕과 무령왕
일본서기 웅략(雄略)왕조에 “23년(479)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이 곤지의 5명
아들 중 2자인 말다(동성왕)가 유년(幼年 15세)임에도 불구하고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로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밀하게 타이르고는 백제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기를
주고 축자국 군사인 왜군 500인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가 동성왕이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성왕이 왕위에 오를 때 일왕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정도로 유년의 나이라 했으므로 15세가 넘지 않았을 것
으로 추정되며, 즉위후 23년간 재위에 있다가 502년에 죽었으므로 약 37세가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 동성왕이 죽었을 당시 무녕왕의 나이가 41세였으므로 무녕왕의 나이가 동성왕 보다
많아야 할 것이니 따라서 고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무녕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 무열(武烈)왕조에 “4년(502) 백제의 말다(末多=동성) 왕이 무도해 백성들에게 포학한
짓을 함에 나라사람들이 제거하고 島王(시마)을 세우니 무녕왕이라 한다. (백제신찬에 전하기를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왕이니 곤지왕자의 아들로 즉 말다왕의 이복형이다. 지금 생각하니
시마왕(무녕왕) 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말다왕(동성왕) 은 곤지왕의 아들인데 이복형이라 함은
미상이다.” 라는 기록이 있어 무녕왕이 곤지왕의 아들로 동성왕의 이복형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서기> 웅략왕 5년 기록에 무녕왕이 일본으로 가다가 섬에서 태어났을 때 곤지에게 5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했으며, 웅략왕 23년 기록에는 동성왕이 곤지의 5명 아들 중 2째이므로 동성왕의 나이가 무녕왕보다 많아야
할 것인데 “말다(동성왕) 가 유년(幼年) 임에도 총명하므로 궁궐로 불러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제의 왕으로
삼았다.” 는 기록은 그야말로 앞뒤가 안맞는 이상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어느 기록이 맞는 것일까요?
일본서기 웅략왕조에는 이런 기록이 있으니...“20년(475) 겨울 고구려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백제기에서 전하기를 고구려 대군이 와서 왕성이 함락되었고, 국왕 및 대후와 왕자등
모두가 적의 손에 죽었다. 21년 봄 3월 천황은 구마나리(久麻那利=웅진)를 문주왕에게 주어
나라를 다시 일으키게 했다.” 고 기록되어 있어 개로왕의 왕후와 왕자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섬에서 태어나 백제로 보내진 사마(무녕왕)는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처형당할 당시 14살의 왕자 신분이었을 것이며.... 개로왕의 모든 왕비와 왕자들이 고구려군
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다음 왕위가 신라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가 돌아온 문주에게로
넘어간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면 그 때 사마 왕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문주왕이 즉위 4년만에 해구에게 시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보위에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즉위
한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며.... 또한 삼근왕 마저 즉위 3년 만에 갑자기 죽었을(시해) 때 왕위계승 서열에
있어 훨씬 우위에 있던 개로왕의 사마왕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치고 당시 일본에 있었던 곤지의
2자 말다(동성왕)가 왕자신분이 아니었음에도 다음 보위를 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백제 성왕과 일본 킨메이왕(흠명천황)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포교한 것은 서기 552년(538년 설도 있다, 아니면 민간에서?) 의
일이니,‘일본서기’와‘부상략기’에 따르면 “그해 552년 10월 13일에 백제국의
성왕이 킨메이 천황(일왕)에게 금동석가상과 불경등을 보내주었으니 성왕은
‘불교가 이 세상의 모든 법(法) 중에 으뜸가는 것이므로 불교를 믿으라’고 권유했다” 고 합니다.
금동석가상은 왜 나라 최고위 대신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505~570년)가 킨메이왕(천황)으로 부터 하사
받아 그의 저택에 모셨으니 소가노 이나메 대신은 백제국에서 포교된 불교를 돈독하게 믿게 되었다. 자기
저택을 불전으로 개축해서 코겐지(向原寺 향원사)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니 이 사찰이 왜국 최초의 절입니다.
백제 26대 성왕(聖王)은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기고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꾸었는데 뿌리가 북부여이기
때문에 국호를 바꿈으로써 북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일본 고대 역사학자인
고바야시 야스코 교수는 백제 성왕이 신라군과 싸우다 잡혀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변복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제29대 킨메이왕(欽明天皇 흠명천황)이 됐다는데.... 홍윤기
교수도 성왕이 일본의 킨메이왕(흠명천황) 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저로서는 믿기 힘든 말입니다?
고대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는 그의 저서(‘二つの顔の大王’ 大藝春秋社 1991)에서 “성왕 18년
(서기 540년)에 고구려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다가 패전한 성왕은 즉각 왜국(倭國)으로 망명
하였다. 그리하여 왜국의 가나사시노미야(金刺宮)에 거처를 삼고 왜국왕(倭國王)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이 일본으로 망명한 서기 540년이 킨메이 원년(欽明元年)이 되는 것이다.”
가나사시노미야라고 일컫는 궁의 위치는 지금의 나라현 사쿠라이시 가네야(櫻井市 金屋)부근인데....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에는 백제국 성왕이 “성왕 18년(서기 540년) 9월에
왕은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해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라고만 기록돼 있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에 관한 ‘삼국사기’ 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를 살펴보면 “안원왕(安原王)
10년(540년) 가을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했기 때문에 왕은 정예 기병5,000명
을 파견하여 이를 토벌해서 도주케 했다.”이처럼 ‘고구려본기’ 나 ‘백제본기’ 를
보면 서기 540년에 백제국 성왕이 고구려국 우산성을 공격했으나 패전한 것은 확실합니다.
또한 백제 성왕이 붕어한 시기는 그 후 14년 뒤인 554년으로 기록돼 있으니 즉 “성왕 32년(서기 554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서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이끌고 밤중에 구천(狗川)에 도달했다. 그러나
신라의 복병(伏兵)이 달려들어서 난전이 벌어졌고, 왕은 부상당해 승하했다”는 것이 ‘백제본기’ 의 기사입니다.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의 백제본기 :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
하고자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싸웠으나 복병에게 해침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 조 :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했다. 백제왕 명농(성왕) 이
가량(가야) 과 함께 관산성(옥천) 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우도도라는 사람이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명과 군사 2만 9천6백명 의 목을 베니 한 마리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서 540년에 성왕이 왜국으로 망명했다는 기사는 없고 더구나 그는 14년 후인
554년에 신라에 기습 작전을 감행하다가 전사합니다. 반면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를
살펴보면 539년 12월 5일에 킨메이천황(일왕)이 등극하고, 서기 540년을 원년(元年)
으로 삼아 1월에 정비(正妃)를 정하게 되며 원년 2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2월에 백제사람 기지부(己知部, 코치후)가 건너왔다. 그를 왜국의 소후노카미코호리(添上郡) 의 야마무라
(山村, 현재의 나라시 터전)에 살게 했다. 그는 지금(서기 720년경)의 야마무라의 코치후(己知部)의
선조다.” 즉 당시 백제인들이 왜나라 백제인 왕실에 건너와 고관으로 활약한 사항들이 기록돼 있으며
또한 ‘일본서기’ 에는 같은해 7월 “왕도(王都)를 시키시마(磯城山島, 지금 나라현 사쿠라이시
가네야) 에 천도했다. 그리하여 왕궁의 호칭을 시키시마의 가나사시노미야(金刺宮) 로 부르게 되었다”
(5) 백제인 목만치는 목협만치로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백제기” 는 "목만치 라는 사람은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태어난 사람으로 아버지의 공으로 임나(任那 가야)에서 전횡하였는데,
우리나라(일본)로 들어와 귀국과 왕래하였다. 천조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의 정사를
맡았고 권세가세상에 떨쳤다. 그리하여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 그를 불렀다." 라고 하였다.
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 討新羅時, 娶其國婦, 而所生也. 以其父功, 專於任那. 來入我國, 往還貴國.
承制天朝, 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朝聞其暴, 召之." 《일본서기》 권10 <오진 덴노> 25년 조 주석
문자 그대로의 5세기 19대 구이신왕 시기의 백제의 권신인 목만치 만을 말하는 경우라면
아버지 목라근자 처럼 국내나 중국의 사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일본서기》 의 기록
에만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실존 여부가 의심되기도 하지만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기” 인용이 나름대로 신뢰성이 있기에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21대 개로왕 시기의 충신 목협만치와 동일 인물로 보는 설이 있고, 5세기 가야
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왜국으로 건너간 장수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 와 동일인물
로 보는 설, 또 가야에서 학정을 자행하다 왜국으로 추방된 인물인 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 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습니다.
'목만치(木滿致)= 목협만치(木協滿致)=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紀 生磐宿禰)= 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
=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 인데.... 목만치가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紀 生磐宿禰)나
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와 동일 인물이라면 가야 혹은 왜국 출신일 수도 있다는
설이 있으나 위의 기록과도 같이 《일본서기》에 따르면 목만치는 분명한 한반도 출신 입니다.
《일본서기》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백제기(百濟記)' 를 인용하면서 목만치는 13대 근초고왕
대에 임나와 신라를 평정하여 백제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백제 장수
목라근자의 아들인데... 어머니는 신라의 여인이며 임나에서 일을 도맡아 보다가
백제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임나는 가야 지방 전체 혹은 대가야를 말합니다.
18대 전지왕이 죽고, 나이가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목만치가 국정을 잡게 되었는데 그는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며 왕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니.... 그 권세의 높기가 하늘을 덮을 정도였다고
전하는데, 결국 목만치의 횡포를 보다 못한 오진왕(천황)이 목만치를 왜국으로 다시 불렀다는 내용입니다.
전지왕의 죽음과 목만치의 기록은 오진왕(천황) 25년의 기사인데, 오진 덴노의 재위기간은 270 ~ 310년이기
때문에 오진 덴노의 기록에 구이신왕이 나온다는 것은 이상한데, 구이신왕 재위기는 420 ~ 427년이므로
기록대로면 오진왕 보다 100여년 후의 사람이니 바로 여기서 일본 고대 기록이 이갑자 다시말해 120년
을 올린 것이 나오니, 오진왕의 재위 기간을 390년 ~ 430년으로 보면 구이신왕 시기와 딱 맞아들어 갑니다!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권세가 있는 인물이지만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기록에서는 이름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의문이 있기는 한데, 다만 일본서기는 당대인 서기 720년에 씌여졌지만 고려시대 삼국사기는
1145년에 편찬 되었으니, 목만치 시대 보다 700여년이나 후대에 만들어진지라 김부식 당대에는
“백제기” 등 옛 역사서는 유실되어 없었고 기록 자체가 워낙 부족했으니 사료가 없었던지라
누락될수도 있다고 보는데 삼국사기에 목협만치가 나오니 그가 바로 목만치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목만치 = 키도 오이와노 스쿠네 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데 1. 목만치가 가야 지방에 거점을 뒀다는 점
2. 일본서기의 등장인물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生磐宿禰)가 가야 일대에 거점을 두고, 고구려와 연계
해서 백제-가야-왜 동맹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해 왜국으로 건너갔다는 점을 합쳐볼 때, 목만치
가 오이와노 스쿠네(生磐宿禰)와 동일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반란에 긴밀하게 얽혀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목협만치(木劦滿致) 가 등장하는데 목만치가 19대 구이신왕(420 ~ 427)시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21대 개로왕(455 ~ 475) 시기에 등장한 목협만치는 후대에 등장한 인물이니... 목협만치
는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참살당한 후 태자 부여문주와 함께 사태를 수습하고 수도를
웅진성으로 옮기는데 기여한 인물로 나와있지만 그러나 이후로는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두 인물의 이름이 매우 유사하며, 백제 조정의 중요한 인물인 동시에 시기적으로도 유사성이 있어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으나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 목만치가 등장하는 일본서기오진 덴노 25년은 120년을 뒤로
당겨봤을때 414년이고, 삼국사기에 「목협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 21년(475년)으로 시대
가 61년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지만 목라근자가 평정한후 오랜 후에 현지처를 얻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이름만 놓고 보면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木)씨는 목라(木羅), 목례(木刕), 목협(木劦)으로 나타
나는 복성의 축약형에 해당하는데.... 언어의 표준화가 이루어져 정확한 표기를 하는 현재와
달리 옛날에는 기록자 마음대로 축약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목라(木羅)와 목례(木刕)는
일본서기에서 똑같이 '모쿠라' 라고 읽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그냥 목라씨 였다는게 거의 확증됩니다.
목협(木劦)의 경우는 목례(木刕)의 오자인 것으로 보이니 한자를 틀려 잘못 기재한 경우는 꽤 흔했으며
게다가 이름인 만치(滿致)의 경우 목만치와 목협만치 양자가 한자도 포함해서 정확히 일치하니...
이를 종합하면 목협만치는 실수 때문에 원래는 '목례만치(木刕滿致)' 였던 것으로 보이며
목(木) 은 목례(木刕) 의 축약형에 해당하기 때문에 적어도 두 인물의 이름은 완전히 같습니다.
5세기의 인물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生磐宿禰)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는데 일본어로 나무가 '키' 이므로
목(木)씨와 성의 의미가 통하고 기록상 목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와 오이와노 스쿠네(生磐宿禰)의 아버지
키노 오유미노 스쿠네(紀 小弓宿禰)가 둘 다 신라를 정벌, 임나를 평정했다고 했으며 아버지의 공으로
자식인 목만치와 오이와노 스쿠네(生磐宿禰)가 임나와 백제에서 전횡하다가 왜국으로 소환된 점이 같습니다.
게다가 임나(任那 가야)를 거점으로 백제에 대항하다가 왜국으로 건너갔다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인데
기록상으로 오이와노 스쿠네(生磐宿禰)는 목만치와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다른 인물인 소가노 마치
(蘇我 満智) 의 아들인 소가노 카라코(蘇我 韓子 소아 한자) 를 화살로 쏴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5세기말인 백제 21대 개로왕 대에 장수왕의 고구려군에게 한성백제가 대대적으로 침략을 당한후 22대
문주왕과 23대 삼근왕은 암살로 죽었고, 24대 동성왕은 금강 유역을 기반으로 한 사씨, 연씨,
백씨등을 기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모습이 보이는데... 하남위례성(서울)에서
쫓기듯이 남쪽 웅진성(공주)으로 천도한 뒤 백제의 왕권이 엄청나게 흔들렸음이 짐작됩니다.
이 무렵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라는 인물은 동성왕/겐소왕(천황) 재위기에
가야 지방에서 고구려와 연계해 백제-가야-왜 동맹에 대항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 설이
맞다면 아버지 대부터 정복활동을 주도하며, 가야 지방에 세력 거점을 두었던 목만치는 여기서 반란군
과 관련된 유력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여기서 무언가 문제가 생겨 왜국으로 건너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6) 백제인 목만치(木滿致)는 일본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 인가?
소가(蘇我)씨는 일본 아스카 시대에 활약한 권신 가문으로 친백제파였으며 불교를 백제로부터 받아
들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는 소가씨 선조로 불리는 인물이니 소가씨
에서 유명한 인물로는 마치의 고손자이자 권신인 소가노 우마코(蘇我 馬子)와 그 아들이자
을사의변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인 소가노 이루카(蘇我 入鹿)가 있으니... 소아 마치 -
소아 한자 -소아 고려 - 소아 도목(우마코) - 소아 하이(에미시) - 소아 입록(이루카)로 이어집니다.
이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의 이름인 '마치(満智)' 가 목만치의 이름인 '만치(滿致)' 와 유사하기 때문에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존재하는데, '만(満)'과 '만(滿)' 은 이체자 관계이고, 뒤에 붙는 '치(致)' 는 삼한
공통으로 나타나는 존칭접사 '지(智)' 와 음이 비슷하며 또한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 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이 각각 소가노 카라코(蘇我 韓子) 와 소가노 코마(蘇我 高麗) 로 가야와 고구려를 뜻합니다.
하지만 백제인의 후예가 왜 고구려인 코마(蘇我 高麗) 라는 이름을 사용했느냐 하는 의문에서 현재
일본에선 목만치(木滿致) =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 설을 지지하는 학자가 많지 않으나....
《상궁성덕법왕제설》에선 소가씨가 원래 임(林)씨라고 표기한 기록이 있으며, 또 다른
서적인 《신찬성씨록》의 경우 임(林)씨는 본래 백제 사람 목(木)씨였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또한 목만치는 백제 출신이 아닌 마한계 출신으로 비정되는데 마한은 백제와 달리 태조대왕 시기
예맥- 위말갈 등과 연합적인 군사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후삼국시대 때도 후백제를
지원한 기존의 백제와는 다르게 고려에 친화적인 행보를 보이는 등 세부적으로 백제와
다른 행보가 사서에 나타나니 이름에 고구려를 넣어 짓는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됩니다.
(7) 불교(佛敎)의 전래:
서기 545년 백제 무녕왕의 아들인 성왕이 게이타이왕의 아들인 긴메이 천황(일왕)에게 불상
을 보내오자 신도( 神道: 조상신) 를 믿던 왜국조정은 불교 수용을 놓고 양분되었으니,
모모노베 (물부 物部)등 중신들의 반대로 개로왕이 왜국에 보낸 목협만치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소가씨(소가 이나메) 가 자기 집에 모시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후 공교롭게도 수도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일본 토착 귀신을 노하게 한 것으로 간주되어 불상을
빼앗아 강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소가씨는 쇼토쿠(성덕)태자와 손을 잡고 거사를 일으켜
모노노베 씨족을 몰살하고 불교를 수용하는데 쇼토쿠 태자에 의해 불교는 일본 국교로 지정됩니다.
(8) 불교를 둘러싼 소가씨와 모노노베씨의 대립
고대 일본에는 조상신등 전통 신(神)을 모시는 신앙인 신토(神道; 신도) 의 신사(神社)가 있었으니, 4~ 5세기
야마토에도 신토 신앙이 토착종교로서 자리잡고 있었으는데 고신도(古神道) 라고 부르며 고신도의
신사를 관할하던 유력한 호족세력 중에는 모노노베씨(物部氏) 와 나카토미씨(中臣氏) 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이 무렵 한반도에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으니 고구려에서는 중국 전진(前秦)에서 온
순도(順道) 가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오면서 소수림왕이 국교로 공인했고, 백제에서는 중국 동진(東晉)
에서 포교하던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로 오면서 전래되었고 침류왕이 공식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일본으로 넘어온 한반도계 도래인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소가씨(蘇我氏) 가문도 백제계 도래인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휘하에 두고 있었던
가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불교를 믿게 되었으니 토착신들을 모시는 신토를 믿던
모노노베씨와 나카토미씨 입장에서 불교의 신은 토착신이 아닌 오랑캐들의 신이라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6세기 중반 센카 오오키미(宣化大王; 선화천황)가 즉위한후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가 오오오미(大臣; 대신)
로 임명되었고 몇년후 백제의 성왕이 야마토 조정에 불교를 전해주면서 일본에도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게 되는데, 불교의 전래 연도에 관하여 선화천황 대인 538년설과 흠명천황 대인 552년
설이 존재하며 이보다 앞선 시기에 도래인과 함께 사적 신앙으로 불교가 일본에 들어왔다고 봅니다.
백제에서 불상과 경전이 들어오자 오오키미(대왕)는 호족들에게 불상과 경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으니 오오오미 소가노 이나메는 서쪽의 나라들이 모두 불을 숭상하는데
야마토만 그러지 않다면서 불교 수용을 주장하였고, 오오무라지(大連; 대련) 였던 모노
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 와 나카토미씨 등은 전통 신들이 노여워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합니다.
이후 소가노 이나메가 킨메이 오오키미(欽明大王; 흠명천황)와 강력한 외척관계를 형성하게 되면서 소가씨는
불당을 짓는 것에 대한 허가를 받고 눈치 보지 않고 불교를 믿을 수 있게 되었으나.... 이후 갑자기
일본 전역에 역병이 크게 유행하게 되면서 반대파인 모노노베씨와 나카토미씨에게 빌미를 잡히게 됩니다.
모노노베씨는 역병이 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국신(国臣)이 화난 것이라고 주장하여 킨메이 오오키미
의 허락을 받아 소가씨의 불당에 불을 질러버리고 불상을 다 폐기처분 해버리니..... 서로 원수
지간이 되어 자식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소가노 이나메로 부터 오오오미직을 물려받은 소가노 우마코는 비다츠 오오키미(敏達大王; 민달천황)로
부터 사적으로 불교를 수용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다시 받아내고는 백제로 부터 직접 불상을
수입해와 적극적으로 교단을 조직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전에 돌았던 역병이 또 다시 유행합니다.
그러자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나카토미노 카츠미(中臣勝海)는 다시 소가씨 불교 숭배 때문에 역병이 도는거라
면서 불교 탄압을 실시하니 이번에는 단순히 불상을 폐기하고 절을 불태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자승려
들의 옷을 벗기고 채찍질을 하는 등의 심각한 인권유린을 감행하였는데... 하지만 불교를 탄압했음
에도 역병이 사그라들지 않자 일각에서는 불교를 탄압해서 역병이 생긴거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가씨에 희망이 생기니 비다츠 사후 즉위한 요메이 오오키미(用明天皇; 용명천황)가 불교에
귀의하고 공인하고 싶어했기 때문인데 요메이는 킨메이 오오키미와 소가노 이나메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니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였던 것이며, 일본 신토에는 케가레(穢れ)
라고 하는 부정(不淨) 또는 금기가 있었는데...... 이 케가레에는 피나 병, 죽음 등이 속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와 관련되게 되면 부정이 옮기 때문에 은둔이나 격리로써 이를 씻어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
요메이는 즉위 당시 병마와 싸우고 있었는데 신토의 입장에서는 병도 케가레이기 때문에 요메이도 격리
대상이 될수도 있었던 것이니 따라서 요메이는 이를 피하기 위해 불교로 정식 귀의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요메이는 불교를 공인하려고 했으나 결국 병이 발목을 잡아 즉위한지 2년만에 병사하게 되자, 불교를 둘러싼
소가씨와 모노노베씨의 싸움은 이제 후대 대왕 추대 문제를 둘러싼 정치 싸움으로 까지 번지니 불교
탄압에 분노하며 모노노베씨를 벼르고 있었던 소가노 우마코는 자신의 지지자를 대왕에
옹립하기 위해 무력을 통해서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공격하는데 이를 정미의 난(丁未の乱)이라고 합니다.
(9) 최초로 ‘백제궁’ 을 세운 비다쓰 왕(敏達天皇)
720년에 씌어진‘일본서기’에는“제30대 비타쓰 천황(敏達·572~585 재위)은 즉위 원년인 572년
4월에 나라(奈良)에 ‘구다라오이궁(百濟大井宮)’ 곧 곧 백제대정궁을 지었다”(元年夏四月,
是月宮于百濟大井)”는 대목이 있으니...... 나라의 백제인 집단 거주지‘구다라오이
(百濟大井)’에 왕궁을 지었다는 얘기라 이 기록 또한 비타쓰왕이 백제 왕족 출신임을 방증합니다.
또‘부상략기’(扶桑略記, 14세기경)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에 기술된 비다쓰 천황 행적에는,
“비다쓰천황이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 을 야마토 (大和) 의 도읍에 마련했다”
고 밝히고 있는데 비다쓰천황 시기에 이르기까지 천황 중에 왕도에 ‘백제궁(百濟宮)’ 이라고
호칭하는 왕궁(王宮)을 지은 이는 비다쓰천황(일왕) 이 최초로, 이와 같은 사실은 최초의
백제인 지배자였던 정복왕 오진(應神, 4세기말) 천황 이래 15대(代)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신찬성씨록’ 이 백제왕족이라고 명기한 비타쓰왕은 긴메이왕(백제 성왕)이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했는데
할아버지 26대 게이타이왕은 오진(응신)의 5대손으로 방계라 극적으로 왕위를 이었으니, 오진의 아들
닌토쿠가 16대왕에 오른후 17대에서 25대까지 10명 후손이 왕위를 잇다가 25대 부레츠왕이 후사없이
죽자 일본 왜왕조 창시자라 할 수 있는 15대 오진의 5대손으로 방계 게이타이가 26대 왕에 오른 것입니다.
비타쓰왕(572~585 재위) 은 즉위 후 최고 대신으로 20세의 백제인 귀족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를
등용했는데,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소가노우마코 대신이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 재위) 의 신하였던 ‘백제조신 목만치(木滿致)의 5대손’ 이라고 밝혔으며
비타쓰왕은 576년 3월 18세의 이복동생인 가시키야 공주를 왕후로 맞았으니 훗날 스이코여왕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