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9602 - 나거장
제 이름은 나거장(羅巨莊) 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께서 ‘거장(巨莊)’ 이란 이름을 지어 두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소중한 이름입니다. 어렸을 땐 이름으로 인해 친구들이 많이 놀렸기에 부모님께 울면서 이름을 바꿔달라며 떼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이름에 자부심을 가집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지어 주신 이름. 이름값을 하기 위해 노력하자 라고 항상 다짐 합니다.
저는 전남 나주에서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사랑 안에 아무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시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도우시며 집안일을 돌보십니다. 동생은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호기심이 많아 길을 걷다가 개똥벌레 등을 보게 되면 그 벌레를 만지면서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고, 그 벌레들을 주머니에 담고 와서 어머니께서 빨래하실 때 벌레들이 나오게 되는 해프닝을 만들기도 한 장난꾸러기 였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습니다. 비록 어렸었지만 친구들과의 사귐으로 인해 우정이 무엇인지, 상대방을 어떻게 배려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등의 관계를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도 그때의 친구의 사귐을 통해 진정한 친구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신을 건강하게하고, 정말 서로에게 필요할 때 힘이 될 수 있는 친구를, 어떤 어려움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를 얻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이 많아 비록 공부를 소홀히 하여 부모님이 원하시던 공부 잘하는 아들이 되지 못함이 죄송하지만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를 얻게 되어 후회하진 않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나주에서 다니고, 광주대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2학년을 마치고 11개월 후에 군에 입대 했습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복지단’ 이라는 육군 충성마트에 물자를 지원하는 춘천지원본부에 자대 생활을 하게 되어 전산병 시절 전산실장님이 출산 휴가를 가게 되어 업무를 배우고 3개월 정도 그분의 업무를 대신했습니다. 춘천, 화천, 사창리에 있는 모든 충성마트에 관한 보고를 종합하여 월말 결산을 하였기에 실수 하면 상급부대에게 제가 속한 부대 이미지가 좋지 않게 됨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업무에 임했습니다. 3개월 후 전산실장님께서 복귀 하셔서 전산업무를 마치고 판매병 업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판매병(일명 PX병)이라 하면 밖에서는 정말 쉬운 보직이라 보편적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있던 곳은 병력 2명, 판매원 1명 관리관님 한분 이렇게 4명의 인원으로 운영 되는 곳이었는데 월 매출이 2억 가량 되었습니다. 한달에 한번 있는 재물조사를 통해 마트 재산을 관리하고 물건진열, 판매 등을 하였는데 큰돈을 만질 수 있었고 양심을 속이면 넉넉한 군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곳에서 전역하는 날까지 단 한번도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운 적이 없습니다. 전역한 지금도 전산실장님과 관리관님 두분과 종종 연락을 드리는데 보직을 성실히 수행했음을 여전히 칭찬하십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님에도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다른이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사회와 떨어져 힘든 군 생활이었지만 그곳에서의 좋은 경험을 통해 저를 다듬을 수 있었고,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군생활 동안의 후임병의 역할에서부터 선임의 역할까지 소화하면서 선임을 섬기고 후임을 아끼는 마음과 리더쉽을 배우게 되고, 판매병 업무의 특성상 손님을 대하는 서비스 업무를 한 덕분에 봉사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윗사람과 아랫사람에게 어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봉사하는 마음이란, 손님들이 화낼 때 웃는 얼굴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함께 고민하고 걱정하며 적절한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제 스스로 생각하는 저는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며 자기 발전을 위해 아는데 힘쓰는 솔직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아버지 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6남 1녀 중 4째 아들로 태어나 당시 상황으로 공부를 많이 하시진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는 바르게 성장하시어 17세 때 자전거 가게에서 일을 배우셨습니다. 가게에서 싫은 소리도 들으셨고 더위와 추위에 고생하셨지만 성실히 일을 하시어 25세가 되던 해에 나주에서 자전거 가게를 직접 운영하게 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3년 동안 성실히 일을 하시면서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저와 동생을 키우시면서 성실히 일을 하시며 틈틈이 저축을 하신 결과 자립하고 10년이 지난 35세가 되던 해에 나주에 3층 건물을 지으셨고 지금도 이곳에서 가게를 운영하십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제가 힘들어 할 때, 그리고 좌절에 빠졌을 때,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걱정을 해주시고 아픔을 함께 나눠주시고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항상 자식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성실히 일을 하시는 아버지. 항상 좋은 것이 있을 때면 자식부터 생각하시던 아버지.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자상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에 성실히 임하시고, 무엇에든지 적극적인 분이시고, 항상 최선을 다하는 분이셨기에 성공하는 삶을 사시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꼭 성공한 자식의 모습을 보여드리자.’ 이런 다짐을 수도 없이 하게 됩니다.
전역 후 어떤 직업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하고 수많은 고민을 하다가 대학교를 다니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합격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으로 이 시기가 저에게는 가장 힘들었습니다. 비록 쉽지 않았고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저를 믿어주고 힘을 주는 가족, 친구들로 인해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고 공부를 하던 중 나주시니어클럽에서 2012년 3월부터 현재까지 어르신들을 모시고 일자리 사업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 사회복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회복지에 대해 더 공부하기 위해 사이버대학을 통해 사회복지학을 전공 하였고, 현재 동신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중입니다. 업무를 수행하던 처음은 ‘일하시는 어르신들이 나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시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점점 흐르며 ‘실은 그분들이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주셨구나!’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위하여 헌신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결국엔 나 자신에게 복이 된다는 걸 경험했으며,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어르신들을 섬김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일하던 1년 동안 나의 삶에 있어 밑거름이 될 정말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엔 목표로 하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분야에 도전하려는 제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옛날 북방의 한 늙은이가 기르던 말이 달아났다가 준마 한 필을 데려왔는데, 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다리가 부러져 전쟁에 나가지 않게 되어 목숨을 구했다.' 는 '새옹지마'라는 고사를 떠올리며 인생의 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 없다는 내용으로 인해 심란하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고, 주어진 일과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그리고 준비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사실에 주어진 상황에 충실 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라는 상처 위에 인내라는 약을 발라 노력이란 붕대를 감는다면 성공이라는 흉터가 남는다.' 저는 이글을 항상 마음속에 담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실패도 있겠지만 인내하여 성공하리라’ 는 다짐을 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수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약과 붕대를 사용해 성공이라는 흉터를 꼭 간직하자!’라고 다짐 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