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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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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참으로 어렵다 하겠다.
수천년 이상 지난 아주 오래 전의 일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이 쉬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의 고대사서이던지 간에 100%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하겠다.
사마천의 사기 역시 고대의 기록에는 문제도 많다고 하겠다.
2천여년전 인물인 사마천이 그보다 2천년 이상 전인 4천수백년전 일도 기록하고 있는데 오류가 없을 수 없다 하겠다.
그런데 같은 사건에 대해서 여러 관점에서 본 기록이 있으면 비교분석이 가능하다.
중국에는 사기 등이 있고 일본에는 일본서기 등이 있다.
그런데 한국의 고대사서들은 중국과 일제의 압박으로 거의 씨가 말랐다.
중국, 일본의 고대기록이 100% 정확할 수 없듯이
한국의 고대사서들도 100%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나라의 고대에 관한 기록들도 100%는 정확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규원사화, 한단고기, 부도지 등을 무조건 위서로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며
중국, 일본 고대기록 등과 비교하며 활발한 비교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한국인이 쓴 고대기록은 이렇게 후대에 전해지기가 어려웠을까.
중국, 일제 등 강대국들의 집요한 압박과 식민정책 때문.
조선 세조는 쿠데타로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이 되었다.
그래서 대체로 민심이 좋지 않았다.
그가 왕위에 오를 명분이 부족했으므로.
그러므로 세조는 '중국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하겠다.
민심도 안좋은데 중국의 눈밖에까지 난다면?
세조의 왕위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세조는 중국의 비위를 많이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겠다.
세조 3년(1457년)때 세조는 전국에 영을 내려서 고대한국사서를 모두 수거하라 명한다.
각나라의 정사(正史)라는 책들 즉 국가공인 역사책들은 모두 그 나라의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졌다.
'자기 나라에 유리하게' 쓰여지지 않으면 '국가공인'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 일본의 고대사서들도 모두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졌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좀 다르다.
예를들어 삼국사기.
사대주의 하느라고 국수주의는 커녕...
각나라의 역사책들을 비교, 분석, 종합해야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강대국들이 자신들이 쓴 역사책들은 남겨놓고
약소국의 역사책은 없애려 한 것.
그렇게 되면 한쪽의 일방적 진술만 남으므로 진실을 찾기가 어렵다 하겠다.
중국이 계속적으로 조선에 고대한국사서들을 모두 없애라고 강요했을 것이고
조선왕조는 이 강요를 막아내느라 나름 애썼을 것이다.
그러다가 세조가 즉위하고 그는 '즉위명분이 약한' 임금이었기 때문에
국내 민심도 그러한데다가 중국의 비위마저 거스르면 중국의 공격도 동시에 받게 되므로
중국의 비위를 맞춰주기로 한 모양.
세조 3년(1457년)때 세조는 전국에 영을 내려서 고대한국사서를 모두 수거하라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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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3년(1457년) 5월 26일 3번째기사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 · 《대변설(大辯說)》 · 《조대기(朝代記)》 ·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 《지공기(誌公記)》
·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 《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 《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
문태산(文泰山) · 왕거인(王居人) · 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 《수찬기소(修撰企所)》 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 · 《마슬록(磨蝨錄)》 · 《통천록(通天錄)》 · 《호중록(壺中錄)》 · 《지화록(地華錄)》 · 《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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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등 당시 존재했던 모든 고대한국사서들을
개인이 소장하는 것을 금하고 국가에 바치라는 이야기.
나름 민족사서 지키기에 애썼던 조선왕조의 노력이 세조 때 많은 부분 무너졌다 하겠다.
위 기사에 《조대기(朝代記)》와 《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 수거하라 한다.
《조대기(朝代記)》는 규원사화의 모태이고
《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는 한단고기의 일부라 하겠다.
그런데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도 같은 영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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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1년(1469년) 9월 18일 3번째기사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 《지공기(志公記)》 · 《표훈천사(表訓天詞)》 · 《삼성밀기(三聖密記)》
· 《도증기(道證記)》 · 《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 문태(文泰) · 옥거인(玉居仁) · 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 《지화록(地華錄)》 · 《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 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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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이듯이 《삼성밀기(三聖密記)》등을 바치면 상을 주고
숨기면 참형(斬刑)에 처한다고 한다. 즉 목을 베겠다고 한다.
《삼성밀기(三聖密記)》란 [삼성(三聖)] 즉 [환인임금 환웅임금 단군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책으로 본다.
위 기사는 예종 1년 때 즉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서 한 일인데
이 또한 세조처럼 중국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 한 것이라 본다.
세조가 전국의 모든 고대한국사서들을 수거하라고 영을 내렸지만
뜻있는 사람들이 상당 수 숨기고 바치지 않으므로
중국의 압력이 계속되고
예종이 다시 " 안바치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한 것.
뒤이어 성종도 즉위년에 같은 교서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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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즉위년(1469년 ) 12월 9일 6번째기사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 《지공기(志公記)》 · 《표훈천사(表訓天詞)》 · 《삼성밀기(三聖密記)》 · 《도증기(道證記)》
· 《지리성모(智異聖母)》 · 《하소량훈(河少良訓)》 , 문태(文泰) · 왕거인(王居仁) · 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 《지화록(地華錄)》 · 《명경수(明鏡數)》 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 · 《도선참기(道銑讖記)》 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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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3년, 예종 1년, 성종 즉위년
세 임금이 즉위하자마자 얼마 안돼서 이런 명령을 내린 것.
예종과 성종은 당시 어린 나이였으므로 자신의 결정이었다기 보다는
측근과 신하들의 결정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는 이름 그대로 고조선 역사를 기록한 책일 것이고
《조대기(朝代記)》는 발해 때 [조대(朝代)] 즉 조선시대 즉 [고조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전해지고
《조대기(朝代記)》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 《진역유기(震域游記)》
진역유기(震域游記)는 고조선 특히 [진한]에 대해서 쓴 책이라는 뜻인데 고려 말 청평(淸平) 이명(李茗)이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진역유기(震域游記)》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 현존하는 [규원사화(揆園史話)]
[조대기(朝代記)]-> [진역유기(震域游記)]-> [규원사화(揆園史話)]
[규원사화(揆園史話)]는 광복 직후 국립중앙도서관 직원이 서울의 한 책방에서 구입하여
1946년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 629번, 고서 2105-1번으로 등록되었다.
조선 숙종 2년(1675년) 때 쓰여진 진본이라는 감정결과가 이미 나와 있다.
[한단고기]는 [규원사화(揆園史話)]와 그 내용이 많이 비슷하니
[한단고기] 또한 무조건 위서로 몰아붙일 일이 아니다.
필자는 규원사화, 한단고기의 내용이 모두 맞다고 보지는 않고
부분적으로는 틀린 서술도 있다 본다.
하지만 어차피 어느 나라에도 모두 맞는 기록만 쓰여진 고대사서는 없다.
사마천의 사기 역시 고대부분은 오류 많다.
규원사화, 한단고기, 부도지는 기본적으로 '장난'으로 쓰여질 수는 없는 기록들이고
만약 이 책들을 근세에 누가 '창작'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 하겠다. 노벨문학상을 한 백개 정도 받아도 부족할 정도로.
위 실록에 나오는《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와 《삼성밀기(三聖密記)》는 한단고기의 한 부분인 [삼성기(三聖記)]와 상통한다 하겠다.
《지리성모 하사량훈(智異聖母 河沙良訓)》은 지리(智異)산의 성모(聖母)
즉 한반도 남부지방의 고대 여성 지도자 즉 [마고할머니]에 대해서 쓴 책으로 보이는데
[부도지]와 상통한다 하겠다.
[원조 고대한국문명 ] 즉 [마 문명] <- 관련글
위에서 조선 때 《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등 여러 책들을 조정에서 압수해 갔는데
공식적으로는 지금은 한권도 남아있지 않다.
다 어디로 갔나.
조선 조정이 이를 모두 불태우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조선의 국립도서관인 [규장각]의 창고에 상당히 많은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규장각의 책들은 1911년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이때 넘어간 도서는 5,353부 10만 187책, 각종 기록은 1만 730책.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격.
총독부는 한국에 유리한 서적은 불태우고 또는 일본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일본왕실도서관 창고] 같은데 깊숙히 쌓아놨을 것이다.
실제로 중앙일보 1999년 12월 6일자 19면에 보면 1962년에 사망한 박창화(朴昌和)씨가
1933년부터 12년간 일본 궁내청 쇼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고
그곳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다"고 최기철(崔基哲)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털어놨다.
단군관련 史書 日왕실 도서관에 가득 <- 관련글
중국황제의 압력으로 조선 조정이 고대한국사서들을 수거해 갔지만
그걸 다 없애지는 않았을 것이고
규장각을 넘겨받은 총독부도 상당수는 없애지 않고 일본으로 가져 갔을 것이다.
물론 일본 왕실도서관의 책자들은 공개된 것만 볼 수가 있다.
나머지는 외부인이 볼 수 없다.
그런데 일본 왕실도서관은 지금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다 치더라도
지금의 서울대에서 관리하는 규장각 도서들은?
총독부가 완벽하게 한국고대사서들을 없애고 가져 갔을까.
실수로라도 또는 '쫌 약한 것'이라 하여
남겨 둔 것은 없을까.
현 서울대 규장각 수장고에는 정리안된 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것이 관계자의 증언.
그 중에 한국고대사서는 없을까.
필자는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게 총장의 허가가 아니면 볼 수 없다고 하니...
국내에 있는 것도 밝히지 못하는 못난 후손들 아닌가...
규원사화, 한단고기, 부도지 등은 민간에서 어렵게 전해져 왔다고 한다.
안바치면 목을 베겠다고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명령도 내려오고 그랬으니
목숨을 걸고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다.
일제 때도 총독부에 의해서 민족사서들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강탈되는데
이 또한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
민족혼이 죽지 않으면 결국 광복을 추구할 것이고
한국고대사서들이 많이 남아있으면 한국의 민족혼이 죽지 않기 때문.
결국 한국의 민족혼은 죽지 않고 살아서
밝은 미래를 향해서 고비 고비를 넘어가고 있다 하겠다.
진실은 아무리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다.
영.원.히.
이상4장 -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전북 군산시 비응도 풍력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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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덕수궁
[ 모두 퍼온 사진들 : 출처 - 디시인사이드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ool ]
[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첫댓글 열심이신 보답이 반드시 있으리라 봅니다. 힘내시길...
어용사가였던 사마천의 기록을 바이블로 중화민족을 내세우는 데..정말 어처구니 없는 신화를 근거로 일본은 ~~~서울대박물관의 고서를 공개하라는 전국민 서명운동이라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젠 백성들도 나서서 우리것을 찾아야한다고 봅니다. 자국의 고서를 볼수 없는 민족이라면 그것을 감추는 자는 분명 매국노이거나 과거정치사가 더러움으로 얼룩진 흔적이 있기에 그럴것이라...통재라...
한숨만 나옵니다. 우리역사를 이렇게 묻어놓고 마음편한 위정자들 .....서명운동합시다.
안타깝고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 대한민족! 우리의 진실된 역사도 못 찾는 현실에 슬프다 못해 허탈합니다.
긍정은긍정을.부정은부정을낳는법이지요.한번의거짓이계속된다는걸.지나족이나왜인들은그걸간과하였슴니다
페이스북으로 모시고 갑니다...
이 방원 ,태종때 민족사서들을 수거하고 금한 기록을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