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11월 20일, 서울 어느 자택에서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품 안에는 스승인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철의 사진이 있었다. 일제가 강요하는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한 항거였다. 그의 이름은 신명균. 호는 주산. 주시경 학파의 맏형이자 조선어연구회 창립 회원,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실질적 설계자. 그러나 해방된 남한 사회는 그를 오랫동안 잊었다. 2017년, 박용규의 집요한 연구가 없었다면 건국훈장 애국장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신명균이 묻혀 있었던 건 단순한 역사적 망각이 아니다. 총을 들지 않은 사람, 만주 벌판을 누비지 않은 사람, 글자를 갈고닦으며 민중의 언어를 지키려 했던 사람은 종종 그런 방식으로 잊힌다.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문화'는 늘 '무장'의 뒤편에 놓였다. 하지만 언어가 사라지면 민족도 사라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그가 평생 실증한 명제였다.
1889년 서울에서 태어난 신명균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을 만났다. 권덕규, 김두봉, 최현배, 이병기가 같은시기 고등과 동기생이었고, 이들은 모두 대종교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훗날 이 무리는 한글 운동의 골격이 된다. 신명균은 그 무리의 맏형이었다. 그가 한 일은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연구자로서의 역할이었고, 다른 하나는 글쓰기 실천가로서의 역할이었다. 이 두 갈래가 한 사람 안에서 팽팽하게 맞물려 있었다는 것, 그것이 신명균을 특별하게 만든 조건이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 창립부터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최종 정리위원까지, 그는 조선어 연구의 핵심 현장을 한 번도 비우지 않았다. 1930년12월 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원안을 작성했고, 1932년 12월 수정위원을 거쳐, 1933년 7월 최종 정리위원으로 통일안을 마무리했다. 오늘날 우리가 '밥물'을 '밤물'이라 적지 않고, 'ㄲ·ㄸ·ㅃ'으로 된소리를 표기하며, 낱말마다 띄어 쓰는 것 - 그 규칙의 뼈대에 신명균의 손이 닿아 있다.
그의 연구 중 특히 주목할 것은 세 방향으로 나뉜 철자법 합리화론이다. 배우기 쉽게, 읽기 쉽게, 인쇄하기 쉽게. 이 세 원칙은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배우기 쉽게 한다는 것은 발음을 현대화한다는 뜻이었다. '쇼'를 '소'로, '녀자'를 '여자'로, 한자음을 실제 발음에 맞게 고치는 것이다. 당시 상당수 지식인들은 역사적 발음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했다. 신명균은 그 관행이 학습과 소통에 쓸모없는 낭비를 만들어낸다고 직격했다. 읽기 쉽게 한다는 것은 더 논쟁적이었다. 그는 소리와 의미 사이에서 의미를 우선했다. 발음대로 적기보다 형태소를 밝혀 적어야 눈으로 읽을 때 의미가 빠르게 잡힌다는 주장이었다. '묵독용 표기'라는 개념이 여기서 나온다. 소리 내어 읽는 시대에서 눈으로 읽는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그는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인쇄하기 쉽게 한다는 것은 출판인으로서의 실용적 감각이었다. 한자 사용을 줄이고 철자를 단일화해야 당시 가장 발달한 인쇄 기계를 제대로 쓸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건 상당히 앞서간 주장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 원칙들을 강의실이나 논문으로만 설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편집하고 발행한 잡지와 독본에서 직접 이 표기를 실험했다. 1924년 신소년에 실린 글에는 아직 된시옷 표기 오류가 남아 있고, 문장을 통째로 붙여 쓰는 구습도 보인다. 그러나 1928년 같은 잡지에 실린 글에서는 그 문제들이 대부분 사라진다. 연구가 글쓰기를 바꾸고, 글쓰기가 다시 연구를 다듬는 과정이 그의 작업 안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그의 글쓰기에는 표기 원칙 말고도 뚜렷한 특징이 하나 더 있다. 독자에 따라 서술자 자체를 바꾼다는 것이다. 어린이를 위해 쓸 때와 지식인을 위해 쓸 때, 그는 동일한 인물 이야기를 전혀 다른 문체로 풀어냈다. 같은 김덕령을 두고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서는 "세상에 힘센사람도 만히잇지마는"으로 시작하고, 지식인 대상의 별건곤에서는 "金德齡은 光州石底村사람이다"로 시작한다. 종결어미부터 한자 비율, 문장 길이까지 다르다. 이것은 단순한 어조 조절이 아니다. 쓰기 주체를 완전히 교체하는 것이다.
신명균은 죽은 아들을 화자로 내세워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숨지는 소년의 이야기를 썼고, 농촌 소년의 목소리로 객지 할아버지께 안부를 전하는 편지를 직접 써서 편지 쓰기의 모범으로 삼았다. 이것은 1920년대 조선의 글쓰기 공간에서 드물었던 근대적 서술 태도였다.
그가 어휘에서 지향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한자 숙어와 고사성어를 걷어내고 민중이 살아 있는 말, 즉 속담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한글 창간호에 실린 글에서 세종대왕을 "産婆(산파)"와 "乳母(유모)"로 의인화하고, 한글의 쇠락을 "개밥의 도토리"에 빗대며, "될성부른 푸성귀는 떡ㅅ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은, 지식인 대상의 글이었음에도 민중의 언어로 논지를 끌어가는 의식적 선택이었다. 그는 1927년 쓴 글에서는 '刀水劒山(도수검산), 溫恭着實(온공착실), 事半功倍(사반공배)' 같은 한자 숙어를 여럿 쓰지만, 1928년에 쓴 글에서는 그 자취가 거의 사라진다. 1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의 글쓰기 원칙은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니었다. 신명균은 명시적으로 말했다. 맞춤법의 합리화는 "문화의 민중적 개방"을 위한 것이라고. "우리가 문화적으로 우리의 전도를 개척하여서 최후의 승리를 얻을 유일한 무기는 이 글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최후의 승리'는 독립을 가리킨다. 그에게 글자를 다듬는 일은 총을 갈고닦는 일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이광수가 그의 노동독본(勞動讀本)을 읽고 "올치 이러케 써야만 해"하고 자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언문일치를 직접 소설에서 실험했던 이광수가, 그리고 문장독본을 낼 만큼 근대 문체에 밝았던 이광수가, 신명균의 문장에서 자신이 못 따른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재료와 조사가 정말 조선인 것"이라는 말로 표현됐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재료로 삼고, 우리말법에 충실한 표기와 편집이 어우러진 글. 노동독본은 1928년 초판 이후 1935년까지 10판을 거듭했다.
신명균은 1889년 태어나 1940년 쉰두 살에 사망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자결한 1940년까지, 그가 다룬 시기는 정확히 국문의 문장 틀은 있지만 표기와 문체에서 한문, 일문, 영문이 뒤엉켜 혼란하던 때였다. 어떻게 소리와 글자를 맞출 것인지, 한자를 어떻게 줄여갈 것인지, 속담과 고유어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표기 원칙들은 그 혼란 속에서 누군가 연구하고 실험하고 실패하며 만들어낸 것들이다. 신명균은 그 작업의 한복판에 있었다.
잊힌 이름들을 불러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적 공정함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읽는 방식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 때, 언어는 그냥 도구가 아니라 투쟁의 흔적이 된다. 신명균이 일생을 걸어 다듬은 것은 결국 우리가 지금 숨 쉬듯 쓰는 이 문장들이다.
스승 나철의 사진을 품고 자결한 그 날, 그는 자신이 지켜온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말이 살아야 민족이 산다는 것을.
글자가 바로 서야 생각이 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글자들이 민중의 손에 닿아야 비로소 독립도 가능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