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30.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눅 23:42~43
*제목; 십자가(6) 오늘이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날입니다!
1. 지난 수요성령집회 이야기
지난 수요일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 앞에서 “심히 괴로워하시는 장면”을 묵상했습니다.
이는 십자가가 싫어서도,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이 싫어서도 아닙니다. 주님은 이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심히 괴로워하신 이유”는 우리의 죄값을 지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분이 죄의 자리에 서보시니,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하심”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다가, 이 두려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경험하니 너무도 괴로우셨던 것입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부어진 우리들의 죄를 보니 너무나 더럽고도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놀라시고 슬퍼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자녀인 우리는 이제 이 죄를 멀리하고, 이 세상의 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경험한 자라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라면 당연한 일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진짜로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하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앞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믿음없음을 드러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결단코 믿음을 지켜낼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자녀들이여! 이제 정신 차립시다! 우리 믿음을 바로 세워갑시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이는 주님의 가장 큰 걱정이요, 믿음의 자녀들이 가장 힘을 써서해야 할 일입니다.
2. 오늘은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날입니다.
이제 십자가로 다시 돌아갑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두 개의 십자가가 더 있었습니다. 예수님 좌우로 ‘강도들’이 같이 달린 것입니다. 이는 놀랍게도 이사야서에서 미리 예언된 것입니다. ‘사 53:12’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 53:12)
이처럼 하나님은 항상 말씀으로 계획하심을 미리 알려주시고, 그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도 모든 일을 말씀대로만 행하려 하시고, 그 말씀들을 일일이 이루려 하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복과 하늘 복을 누리려면 딱 하나만 잘 하시면 됩니다. “말씀대로” 사는 삶을 성공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십자가의 우편강도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 선언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2~43)
이 말씀으로 인해 자신의 회개를 지연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은근히 언제든지 회개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농담인지는 모르지만, 인생을 마지막까지 마음대로 즐기다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받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과 심판의 순간은 우리가 그렇게 예측할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오게 되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마지막 때를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0)
또한 마지막 순간이 이 강도처럼 구원받을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조롱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더더욱 구원을 허락받을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 강도는 인생의 수많은 순간을 구원으로 초대되다가 마지막에 선택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구원의 기회를 붙잡은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저주하던 자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마 27:44’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44)
이런 그가 갑자가 회심하게 됩니다. 이는 오직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도 예수님을 함께 욕하다가, 그가 십자가 상에서 하는 말들과 모습들을 보고 이 분은 다른 분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눅 23:34’에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쓰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분을 향한 부인할 수 없는 “경외심과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 23:42’처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마 23:42)
오직 성령의 역사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은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강도의 세 가지 변화를 다시 알아봅시다.
그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눅 23:40’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마 23:40)
다음은 회개와 믿음이 일어납니다. ‘눅 23:41’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1)
그리고 끝으로 주님을 변호하고 높여드립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그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달라”(눅 23:42)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우연이 마지막 순간에 “요행”으로 일어난다는 생각은 착각 중의 착각입니다. 오직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성령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은 매우 공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구원의 은혜와 역사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어떠하든 바른 고백과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곳이 비록 십자가 위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 십자가의 우편강도가 그 증거입니다.
믿음을 가진 뒤에, 그 믿음이 공개적으로 선포되고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지만,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오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눅 23:43’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예수님은 “오늘” 구원의 완성을 선언하십니다.
나중에 믿고, 나중에 구원받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믿고, 지금 고백하고, 지금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고 들렸다면, 지금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바꾸십시오. 그래야 “오늘 주님과 함께 천국에 서게 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이 안 되면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나중에는 결단코 되지 않습니다. 아멘!
첫댓글 오늘이 우리가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구원을 허락 받습니다. "다음에 구원 받겠다, 고백 하겠다, 신앙 하겠다"는 것은 신앙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오늘 믿고 고백하고 변화 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