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利他積善이타적선의 劍舞검무 - 소설가 박영준(朴榮濬) 편 (1) 이승을 떠날 때까지 '명동백작 明洞伯爵'이라는 별칭을 달고 살던 소설가 이봉구 저술의 '명동'을 읽은 사람이라면, 명동의 거리거리 골목골목을 노량노량 수놓았던 예술인들의 돋뵈는 멋거리가 지금까지 눈에 선하리라고 믿는다.그래서 그 적의 명동이야말로 예술적 낭만의 적소였다는 확신과 함께, 한술 더 떠서, 한창 팔팔한 예술지망생들에겐 예술의 수련장 몫을 했고,기성예술인들에게는 예술적 연수원 구실을 했었다는 이런 외고집도 마다하지 않을 성싶다. 그럴 만도 하다.이봉구의 '명동'에 등장하는 예술인들은 거의 행동거지나 언사가 철딱서니 없고 툽상스러운 열혈의 예술적 맹문이들이 아니라 곰삭은 예술적 세미가련 어지간히 말캉거리는 예술인들의 점묘에더 가깝기 때문이다.그렇지 않겠는가. 한통속의 고뇌라도 막소주 몇 잔 넘겼다하면 온혈 동물적(?)외쪽 생각으로 울고불고 어깃장대는 생급스러운 짓거리와, 텀블 잔을 앞에 놓고 카페의 푹신한 쇼파에 묻혀 양주를 할짝거리며 다분히 서구풍으로 사념에 잠기는 '멜랑코리의 눅눅한 정조情調는, 생판 격이 다를테니깐 말이다. 그런데 내가 겪은 60년대의 명동은 이봉구의 '명동'과는 사뭇 본색이 다르다. 그 적 명동에도 양주만 파는 고급카페가 서너 곳 있었다고 기억한다. 소설가 정비석,전광룡,연출가 이해랑,극작가 이근삼, 오화섭,한운사, 시인 조병화.정한모.이봉래, 화가 김영주.이충근 제씨가 그쪽의 빈객들이었던가. 어잿든 나는 술패거리로는 '25시 주점'의 '카바이트 막거리'한사발에도 곧 저리는 시인 이추림.정두수. 박기원.이정기. 박영우.변중식, 연극인 윤계영.이진수.길영림, 소설가 지망생 강홍규. 손영철 등과, 당구패로는 소설가 홍성유,시인 김원태, 시나리오 작가 조홍종,이이령, 그리고 만능재인 이규석 등과 똘똘 뭉쳐 명동을 어긋매기며 살았다. '술패 당구패'를 통털어 홍성유. 김원태.조홍종. 이이령이 사는 것도 가년스럽지 않고 매사에 짱짱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의 면목을 굳이 흠잡자면 흔한 말로 '법 없이도 살'덕성과 절직 切直함을 갖췄으나 집안 살림살이 꼴은 적빈여세 赤貧如洗의 가난함을 벗어나지 못한 이른바'든거지난부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술패들은 '송원기원'과 '금문다방'을 오르내리며 흥이야 항이야 노닥거리다가 그 짓도 지치면 술자리 요량하느라 서로 얼굴만 흘끔거리는 면면상고面面相顧하는 허전함으로 일과를 채울 정도였다. 이렇게 두수없던 상황이 64년 초여름에 들어서면서 부터 살그미 본을 바꿨다.명동으로 누그름한 어둠이 내리면 교통비 명색의 푼돈냥을 만지작거리며 두 눈만 끄덕거리던 술패거리가 별안간 생기를 띠며 우꾼우꾼 달뜨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발걸음은 역빠르게 '명동당구장'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때쯤 해서 배부른 검정가방을 든 소설가 박영준이 느럭느럭 명동당구장으로 들어서기 떼문이다. 졸연한 도깨비놀음이나 다름없는 이 변고의 속사정이 이렇다.'금문다방'을 나서서 옆발치의 좁은 골목길을 곧추 서북진하면 '갈채다방'이요,그 건너편에 4층 건물이 있었다. 1층은 중화요리점 '라일구', 2층은 '라일구다방',그리고 3층에 '명동당구장'이 들어있었다. 명동당구장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는 각양각색의 단골손님들이 빈 당구대가 없을 정도로 하루 온종일 북새통을 이루는 장님도가 기본이라는 것이요,또 하나는 단골손님들이 거지반 250에서 300점을 치는 고점 자들이어서 편을 짜서 겨루는 '편 당구'가 대세요,지는 편이 게임값은 물론이요, 술자리(혹은 음식값)까지 뒤집어 써야하는 '곱새치기'내기 당구가 주를 이룬다는 것이었다.박영준이 가세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지는 편에서 게임값이나 치르고 운 좋은 날엔 싸구려 술집에서의 뒤풀이도 그냥저냥 흉내내는, 영세(?)하되 별 탈 없는 당구놀이를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부터 난두 좀 끼워 주. 80점 강이니깐 백 점 실력 어림잡아도 무리는 아닐게요." 하며 너글너글 덥적이는 통에 염피않고 그를 받아주는 준 것이 인턱거리의 실마리가 되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 박영준의 당구 실력을 밝혀야 한다. 80점 급수는 무슨,늑줄잡고 봐 줘야 겨우 기본기를 익힌 50점 정도의 핫길이라는 걸 거니채고도 남았다. 더욱 정확히 발그집자면 당구에 관해서만큼은 아무리 가르쳐도 효험이 없는 대못박이였고 길들이기도 어려운 노마駑馬였다. 당구실력의 내역은 이렇다치자. 실력보다 더 견뎌내기 어려운 탈이 있었으니 당구봉만 쥐어 잡았다하면 아예 딴 사람으로 표변해 버리는,느닷없는 妄悖(망패)가 그것이었다.그쯤 부드럽고 찬찬한 성정과 자늑자늑한 몸가짐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우두망찰 혼이 나갈 지경인데 그가 한 판의 게임을 시작해서 끝내기까지의 면면을 얼추잡으면 이렇다. 판세를 읽는 눈은 거진 닷곱장님이려든 일단 '당구봉'을 들었다하면 강도의 가감없이 다짜고짜 서벗돌 부수는 돌도끼질 본새로 당구알이 깨져라 벼락쳐놓고 본다. 곧이어 그는 당구알을 따라 그 당구알이 멈출때까지 질기게도 휘두르는 당구봉의 너름새가 시작되는데,처음엔 주릿대 악죈 형리 기세이다가 이내 옅은물목 벗어나는 뱃사람의 갈급한 상앗대질로 변하는가 하면,급기야 마귀들을 향해 항마검을 둘러치는 '부동명왕不動明王'의 칼춤 기세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쯤 요란한 굿마당이 파장이라고 곱게 마감될 수 있겠는가.그의 당구봉 도리깨질에 옆 당구대의 손님이 볼 따귀를 움켜쥐곤"아갸각"비명을 지르기 일쑤였는데 ,막돼먹은 꼼바리는 "근데 이 낭반이 당구를 치나 사람을 잡나?"악장치며 핏발 선 눈을 독살스레 지릅뜨기 예사요,그나마 좀 사람답다 할 수있는 손님들의 비아냥거림마저"죄송 죄송 하시는 데에-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죄송 그만하시고당구를 치세요! 알아듣겠어요?" 할 정도였다. '숫눈길에도 바람 길은 남는다'는 속담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예상했던 불투정들이 사번스러워졌다. 당연한 일이었다.열 걸음도 버거운 '노마'에게 채찍을 안긴다고 십 리를 단숨에 뛰랴? 명색이 빨강 알만 골라쳐야 하고 자칫 흰알을 건드렸다가는 그 당장 벌점을 덧게 비치는 이른바 '아까도리'게임이려든,앞사람이 점수를 올차게 벌어놔봐야 흰 알 빨강 알 가림 않고 도거리로 때려 부수는(?)박영준의 차례가 됐다 하면 '우박 앞의 담배농사' 격으로 그 당장 결단 나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박영준은 태연했다. 겨드랑이 자개미에 風痰(풍담)이 들 정도로 함박웃음을 껄껄대며 "이러다간 월사금 뒷줄도 바닥나겠는 걸?....한사람도 빠지지 말고 어서들 와요. 요 아래 중국집? 아니면 어디 돼지갈비집?"하면서 무리를 챙겼고 푸짐한 뒤풀이를 관장했었다.그렇다면 이제야말로 내 '술패'들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 박영준을 따라 '명동당구장'으로 발맘발맘들어서는 짓거리며,그 긴 시간 동안 무작정 굼닐굼닐 뭉쳐 있는 이들의 속사정은 대체 어떤 것인가.즉 이들이야말로 당구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사람들로서 박영준이 도맡은 뒤풀이를 노리고 괜히 "쯧쯧,기가 막히게 자알 치셨는데 빠낑이 되어버렸네요!" 어쩌고 적절히 알랑방귀를 꿔대며 게임이 끝날 때까지 장성세게 버티고 보는,바로 식객들이었던 것이다. (2)편에 계속됩니다. 이 글은 문학계간지 '문학과 행동' 창간호 특집으로 현재 목포에서 병마와 투병하고 있는 천승세 선생님의 회고록이다. 나는 작년 8월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생전 처음 뵙는 것이었지만 얼마나 만나고 싶었던 분인 줄 모른다.올해로 80쯤 되시는 선생님의 정확한 나이는 수 십년 같이생활한 문우들도 잘 모르신다. 어떤 때는 이복 형인 천승걸 교수가 자기 동생이라고도 했다는 이야기가 문인들 사이에 나돌 정도다. 어머니는 '벼랑에 피는 꽃'등으로 유명했던 여류소설가 박화성 여사이다. 피골이 상접하여 체중이 요즘은 40킬로그램 정도 밖에 안 나간다는 선생님의 주먹알은 엷은 손등 쭈글쭈글한 피부사이에서 호도알크기로 우뚝우뚝 솟아있고,안광은 형형했다. 점심식사를 하는 내내,소주 한 잔을 들었다 놓았다하시면서 짧지 않은 식사시간을 견지하시는 선생님을 보면서 같이 내려간 민충근선생님은 너무나 마음 아파하셨다.그렇게 술을 잘 드셨는데 저런 상태가 되어서 너무도 안타깝다고 귀경하는 열차안에서 거푸 탄식하셨다 얼마 못 사시겠다고..... 그런데 몇일 전에 경향신문에 난 기사를 보았다. 창간하는 '문학과 행동'문학잡지의 상임편집고문을 맡으셨고 글도 싣는다' 는 기사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이틀 후 딸더러 책을 사 오라고 했다. '황구의 비명','만선','포대령' '혜자의 눈꽃' '낙월도'등 걸작을 남겼으면서도 큰 인기는 얻지 못하신 천선생님은 천재였다 고 민선생님은 여러번 내게 말씀해주셨다. 천상병시인과도 가장 뜨겁고 진득한 관계를 가졌고 기인인 천승세의 새 글을 보면서 그 분의 작품을 읽으신 여러분들과 그의 풍부한 어휘력을 짐작이나마 하고 싶어 베껴 써 본다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