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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전집] 누비처네 | 조나단-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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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인터파크>에서 퍼옴
아득한 글을 만났다. 누비처네 뜻도 모른채, 목성균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함에도 김종완 해설이라는 글귀만 읽고는 수필계의 거장임에 그를 알기에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누비처네라는 것이 '어느댁네 처'를 이야기 하는 줄 알았다. 그리 아득한 시절이 아닐듯 한데, 이해 못하는 어구들이 상당히 많다. 읽으면서 느낀다. 이글은 수필이 아니라, 어느 작가의 소설같은 느낌이 든다. 살포시 가슴이 뛰다가, 아득해 지다가, 아파오기도 한다. 목성균이라는 인물의 어린 시절, 아니 그의 어머니의 시절 부터 노년에 이르러, 어린 손자 손을 잡고 태권도장에 데리고 가는 그 시간까지 그의 시간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따라간다.
김종완님은 목성균님을 수필계의 기형도라고 칭했다. 기형도가 죽을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지만 사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후배 시인들이 거의 없다고 평가하듯이, 수필계에서는 목성균이 그러하거나 그리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가 한말이기에 믿는다. 에세이스트의 발행인 김종완님이기에, 그가 발행하고 있는 에세이스트가 얼마나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지를 알기에 그가 한 말을 믿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으면서 한편의 소설을 읽는듯 읽혀내려가는 목성균 작가의 수필전집을 읽으면서 참 잘 읽었다 생각이 든다.
목성균님은 이미 7년 전에 작고한 수필가이다. 그의 작품이 남아있는것이 거의 없어 작품집이 절판된 후 많은 사람들이 복사를 해서 공부를 했다니, 이 좋은 책을, 그것도 전집으로 읽는 나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리라. 전집에는 2003년 발간된 <명태에 관한 추억>과 2004년에 발간된 <생명>에 실린 작품들까지 망라해서 실었단다. 그래서 양이 상당하다. 해설집을 제외하고도 장장 600페이지가 넘는다. 그런데, 이작품들이 하나같이 금쪽 같다. 그러기에 작품집 하나하나에 실려있는 제목이 있음에도 아깝고 아까워, <누비처네>를 전집에 제목으로 택했을 거다.
아내가 이불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누비처네를 찾아냈다. 한편은 초록색, 한편은 주황색 천을 맞대고 얇게 솜을 놓아서 누빈것으로 첫애 진숙이를 낳고 산 것이니까 40여 년 가까이 된 물건이다. 낡고 물이 바래서 누더기 같다. - P.24
읽고나서야 누비처네가 뭔지 알았다. 아기 포대기란다. 아들은 외지에 나가있고, 홀로 몸을 푼 며느리를 보는 시아버지. 그리고 아들에게 누비처네 하나 사오라고 소액환을 보내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무섭고 위엄이 있었단다. 누비처네에서 시작된 목성균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개장국을 먹이기 위해 움직이시던 할머니 이야기까지 목성균님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수필작가는 기억력도 좋은가 보다. 어찌 그리 오래된 이야기들을 주저리 주저리 풀어 낼 수 있을까? 목성균님은 어린시절 까마득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부엌 궁둥이에 등을 기대었던 젊은 시절을 이야기 하다가, 목주사로 일을 할때 느꼈던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하다, 어느새 노년에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를. 그러다 또다시 자신과 아내에 이야기를 풀어낸다. 막힘없이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거기에 그 어구들이 너무나 곱다.
9부로 엮어진 이야기들은 하나하나 다른 이야기이면서도 같은 이야기이다. 그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으니 다를리가 없지만, 5부 생명은 가슴을 턱 막히게 만든다. 딱 한번본 고모부와 고모부가 가지고온 마른 돼지 앞다리, 아내의 오라비일지도 모르는 인민군소년병을 향한 할머니의 당목수건,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미움의 세월, 거기의 자신도 닮아가고 있는 손을 보고 쓴 생명, 아버지의 삶이 보이는 아버지의 도장과 할머니의 산소까지.. 한편 한편이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의 글은 아리기만 한게 아니다. 알밤 빠지는 소리에서는 풍광이 느껴지고, 돼지불알은 그 시절 모습과 함께 아내에 대한 정이 느껴진다. 흰눈 소복하게 내리는 그길, 명태와 아내가 짠 목도리로 정을 느끼기도 하고, 파리목숨에서는 그의 필력을 느낀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쩜이리도 나와 다를까? 자신은 군고구마 아주머니를 위한 것이었는데, 아주머니가 자신을 기다려준 줄 나중에야 알게되는 행복한 군고구마와 9부 꽃이 핀 자리에 마지막 이야기, 커피에 관한 추억까지.. 그에 글들은 시이다. 한장으로 끝나는 글도 있고, 몇 장에 걸치는 이야기도 있지만, 지리하지가 않다. 바람꽃일 때 찾아가겠다던 소년과의 약속도 어느덧 세월이 흐름과 같이 바래어져 버렸을텐데, 그의 글에서는 다시 살아난다. 김종완님은 목성균님의 글을 읽으면서 너무 소중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단다. 나에겐 그런 감성이 없는것이, 아니 그리 전문적이지 않아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 귀한 글들로 행복하기만 하니 말이다. 이렇게 귀한 글들을 가슴으로 읽을수 있는 이 호사가 너무나 좋다. 그만에 서정성이 참 좋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싸잡아 들고 와서 서낭신께 바치고 소원을 빌던 동멩이들. 누구의 돌멩이는 소원을 이루고 누구의 돌멩이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을 터이지만 아무도 서낭신을 원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원을 들어주고 안 들어준 서낭신의 기준은 소원의 정당성, 갖절함, 진실성에 둔, 지극히 공정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 고개 중
삽이 실권이라면 살포는 권위다. 그래서 젊은이가 살포를 든다면 지탄받을 일이듯이 늙은이가 삽을 들면 말년을 백안시 당하기 십상이다 - 살포 중
어둠 속에서 하얗게 정체를 드러내는 자리끼가 담긴 사기대접. 그것이 그렇게 얄미울수가 없었다. 사기대접은 마치 노출된 매복병처럼 '어디 한번 걷어 차 보시지, 왜-'하고 하얗게 내게 대들었지만 - 옹기와 사기 중
세월은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시계가 멈춰 선다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시계가 직무를 유기한 것이 아니고 시계가 유기를 당한 것이다. 시계야 어차피 사람이 관리하는 문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기둥시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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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미래는 과거 속에 있다. 과거가 새롭다 삶의 돈독함을 꿈꾸던 목성균 수필의 모든 것
2004년에 세상을 떠난 수필가 목성균의 수필 전집. 1995년 등단하여 시적 언어 구사력과 탄탄한 구성력으로 작고 하찮은 것, 평범한 것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생명력 있는 수작들을 빚어내어 2003년 『명태에 관한 추억』을 출간하는 등 의욕적으로 작품을 쏟아내다 이듬해 타계하였다. 그는 삶의 간과할 수 없는 작은 부가가치들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주조로 비록 넉넉하고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인간적 체취가 있었던 지난 삶들을 애정 어린 필치로 아로새겼다. 지금은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옹기와 사기, 등잔, 살포, 다랑논을 생생히 불러와 묵묵히 자연의 순리와 질서를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돈독한 삶을 그린 그의 수필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만 가는 요즘 세태에 많은 울림을 준다.
죽어서 살아 돌아온 수필가: 우리 산을 지켜 온 이의 절절한 인간 사랑
목성균은 이미 십대에 문학을 꿈꾸었다. 여남은 살에 글쓰기로 세상의 속살을 파헤칠 꿈을 꾸었다. 마치 운명이 응원을 하듯 서라벌예대에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너무 쉽게 뜨겁게 달궈졌을 것이다. 세상은 자기편이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확신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다음 학기에 장학금이 나오지 않았고 그로써 문예창작 공부는 끝이 났다. 이런저런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자 낙향하여 산림공무원이 되었다. 인적 없는 산이 그의 일터였다. 산에서 산으로 옮겨 다니며 벌목꾼들을 단속하고 산짐승들을 보호하고 이끼와 바위와 들꽃과 나무와 얘기하고 바람과 달빛과 사귀었다. 그러길 25년, 정년퇴직 후 하릴없이 또 2년여 해찰하였다. 황혼길에 서서 그는 불현듯 저 유년의 꿈을 떠올렸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에게 문학은 저 젊은 날에 섣부르게 덤벼들어 보기 좋게 무너지고 만 거창한 세계가 아니었다. 인적 없는 산속을 헤매며 그 깊은 자연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인간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흘러 다니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어떤 흐름의 줄기 같은 것. 인간의 삶의 행태들, 그리고 그 속을 흐르는 보이지 않는 진실. 그는 이제야 홀연히 자기 겉껍질을 벗고 속살을 드러낸 채 누군가와 얘기를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뒤늦게 선택한 문학 장르는 수필이었다. 절절했던 만큼 가장 정직하고 직접적인 전달력을 갖는 수필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 역시 터무니없이 짧았다. 채 십 년도 되기 전에, 아니 본격적으로는 세상을 뜨기 전 겨우 사오 년 정도였을 뿐이다. 병상에서 눈을 감기 직전까지 가물가물 흐트러지는 정신을 혼신을 다해 일으켜 세우며 글을 썼다. 해서 몇몇 편은 스케치만 했을 뿐 퇴고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펜을 잡은 채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사람들은 참으로 뒤늦게 그의 글을 한 편 한 편 찾아 읽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어느 새 수필계에선 가장 탁월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것이 ‘죽은 시인의 사회’인가. 죽어서야 회원의 명단에 오를 수 있는, 살아서는 모든 글이 과정이고 습작에 불과하니, 죽은 후에야 모든 예술 작품은 완성되고 비로소 평가될 수 있는 것인가. 어쨌든 우리에게 그는 죽어서야 살아 돌아온 작가임에 틀림없다.
책속으로 계속
나루터에는 피난민들이 가득 모여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나룻배는 이미 피난민들이 떼거지로 덤벼들어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다가 요절을 내버렸고, 흐린 강을 건널 길은 직접 몸으로 강물을 헤쳐서 건너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계셨다. 이윽고 아버지는 옷을 벗으시고 내게도 옷을 벗도록 이르셨다. 그리고 꼭 필요한 옷가지만 바랑에 담아 머리에 이고 허리띠로 턱에 걸어 붙들어 매셨다. 그런 다음 나를 업으셨다. 강을 건너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신 것이다. “아버지 목을 꼭 잡고 얼굴을 등에 꼭 붙여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움직이지 마라.” 나는 아버지의 그 반점을 그때 처음 보았다. 아버지 신체의 비밀을 발견하고 나는 당혹감에 얼굴을 아버지의 등에 대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얼굴을 아비 등에 꼭 붙여라.” 나는 엉겁결에 얼굴을 아버지의 등에 꼭 댔다. 내 얼굴이 반점에 닿지는 않았지만 바로 눈앞에 화난 아버지의 검붉은 얼굴 같은 반점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강을 건너기 시작하셨다. 강 한가운데로 한 발 한 발 꿋꿋하고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나가셨다.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 사람들에게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건너셨다. 떠내려가는 사람에게 부딪치면 같이 쓰러져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강 한복판에 도달하였을 때, 아버지는 강바닥의 모래가 패인 곳을 밟으셨는지 키를 넘는 물에 잠기셨다. 나는 물을 먹고 엉겁결에 얼굴을 들다가 아버지의 불호령이 생각나서 아버지의 목을 더욱 꼭 잡고 얼굴을 등에 댔다. 아버지는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모래 웅덩이에서 헤어 나오셨다. 거기서 아버지가 쓰러지셨으면 다시는 바로 서지 못하고, 우리 부자는 흐린 강물에 떠내려갔으리라. 나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하게 그때가 되살아나서 등골이 오싹해지곤 한다. 아버지의 그 초인적인 의지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할 뿐인데, ‘내 힘이니라’는 듯이 눈앞에 아버지의 반점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드디어 강을 건넜을 때, 아버지는 모래바닥에 나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으시고 모래바닥에 엎드려서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우셨다. 내가 아버지의 우시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 한번뿐이다. 아버지의 그 울음은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넌 감격 때문이었는지, 가혹한 역사의 순간에 대한 공포의 오열이었는지 알 수 없다. 가끔 그게 6?25의 발발 원인만치나 궁금하다.-169쪽
이제 아버지와 나는 다시 아버지의 강에서 만났다. 중풍에 드신 아버지는 그 흐린 강가에 앉아서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하시고 뒤따라오는 자식을 기다리신다. 이제 비로소 내 등에 업혀 강을 건너가시려고 못난 자식에게 기우는 아버지가 가엾고 고맙다. 그 강에서 아버지가 나를 소중히 건사해서 건네주셨듯 이제 내가 아버지의 숨찬 강을 건네 드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등만큼 완강하지 못한 내 등을 감히 아버지께 돌려대 드린다. 그 빈약한 내 등에 기꺼이 업혀 주시는 아버지가 눈물겹도록 고마울 뿐이다.-171쪽
뭍의 발기가 결연한 의지로 바다 깊이 삽입되어 있는 곳이 곶(串)이다. 바다는 궁합이 안 맞는 여편네처럼 곶 끝에서 응얼거린다. 곶은 개의치 않고 정정당당하게 바다의 한녘을 굳건히 장악하고 있다. 아! 수컷다운 기상. 나는 비 오는 곶 끝에 서서 사내의 사기를 진작시켜 본다. 아득하게 우연(雨煙)이 수평선을 가로막고 뿌옇게 흐려 있다. 맑은 날의 거침없는 호형(弧形) 수평선은 참담하게 나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비해서 비 오는 날의 수평선은 쓰고 따뜻한 탕제같이 내 마음을 아늑하게 해준다. 곶 끝에 서 있는 하얀 장기곶 등대가 비 오는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일관되게 늙은 흰 정복차림의 항해사처럼 당당하다. 그가 내게 뚜벅뚜벅 걸어와서 솥뚜껑같이 넓적한 손을 어깨에 턱 얹어 주며 ‘삶이란 게 관점에 따라 다를 뿐, 다 그렇고 그런 거요’ 할 것만 같아서 가슴을 두근거렸다. 곶의 안쪽이 만(灣)이고, 포구는 만 안에 있다. 곶이 만을 감싸고 포구는 남편 잘 만난 아낙네처럼 얌전하게 만의 품에 폭 안겨 비 맞고 몸부림치는 곶 끝의 으르렁거림에도 불구하고 혼곤(昏困)하게 잠들어 있다.-250쪽
자고 나니까 링거액을 주사한 오른팔 손등이 소복하게 부어 있다. 링거액이 샌 모양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멀겋게 부운 아버지의 손, 중풍이 오신 고통스러운 말년의 손을 내가 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자지간의 생명의 바통인가. 나는 아버지의 말년, 그 손을 잡고 병고를 위로해 드리곤 했었다. 아버지의 손은 퍽 크다. 내 손은 아버지의 손에 비하면 너무 병약하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숭배한다. 사랑한다. 어쩌면 지금 내 손이 아버지의 손과 똑같을까? 생명은 닮는다는 뜻일까? 고등학교 몇 학년 때인지 가정실습(家庭實習) 때다. 집에 왔다가 모내기를 돕게 되었다. 뒷골 천수답에 모내기를 했다. 나도 열심히 모를 심었다. 식구들과 일꾼을 몇을 얻어가지고 모를 심었다. 아버지는 며칠 동안 빗물을 잡아서 논을 삶느라고 고삐에 넓적다리가 스쳐서 피가 날 정도였다. 우리 농사 중 파종의 대미는 천수답 모내기를 끝마치는 것이다. 힘들고 의미 있는 과정이다. 그 날 점심때, 우리는 오동나무 그늘에 점심 들밥을 차려놓고 먹었다. 신록이 우거진 그늘에서 뻐꾸기가 낭자하게 울었다. 소들은 모를 심느라고 일으켜 놓은 구정물로 엉덩이에 흙덩이가 엉겨 붙은 채 우리 옆 오동나무 그늘 아래서 풀을 어귀적어귀적 씹으며 흘금흘금 오월 강산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우리 점심 차림은 너무 소박했다. 햇보리 반과 묵은쌀이 반씩 섞인 밥에다 상추겉절이, 배추겉절이, 마늘잎을 넣고 조린 꽁치가 전부였다. 그리고 된장, 지금도 눈에 선한 황금색 튀장(토장) 한 탕기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그 날의 점심 맛을 내준 것은 마늘잎 꽁치조림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맛을 내준 것은 황금색 튀장이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상추이파리 서너 장에 밥을 두어 숟갈 푹 떠서 담고 그 황금색 튀장을 반 숟갈 듬뿍 얹어 꾸기꾸기해서 입에 넣으셨다. 아버지가 상추쌈을 입에 넣고 눈을 끔뻑하면 목울대가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앞산을 건너다보며 볼이 미어지게 상추쌈을 잡숫던 중년 농부의 눈, 그 눈에 뻐꾸기 우는 녹음 방창한 산이 한 귀퉁이씩 그야말로 게 눈 감춰지듯 하는 것이었다. 그 쌈밥을 잡고 있던 두 손이 링거에 손등이 통통히 부은 지금의 내 손과 똑같았다. 그 후 가끔 뒷골 천수답에 모내기를 하면서 아버지의 손등을 떠올려보곤 했지만, 실상 아버지 손등을 보고 천수답 모내기 점심밥 먹던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점심을 먹고 어디론가 가셨던 아버지는 잠시 후 싱싱한 칡잎에 소복하게 산딸기를 따 오셨다. 디저트를 구해 오신 것이다. 쌈밥처럼 두 손으로 잡고 들고 오신 것이다. “받아라.” 나는 아버지의 손등까지 싸잡아 들었다. 아버지의 손은 육감적이고 내 손은 턱없이 왜소하다. 전혀 닮지 않은 손이 운명의 때에 보니 닮아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닮아 있다.-321쪽
어느 날 집에서 보낸 하서(下書)가 당도했는데, 강원도 귀래라는 곳에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참한 규수가 있어서 네 배필(配匹)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리 알라는 내용이었다. 배필이라는 아버님의 굵직한 필적이 젊은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평생 같이 뛰게 내 옆에 붙여줄 암말 한 필, 나는 저녁 식사 후면 돈대에 앉아서 서해 낙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452쪽
중대장은 어느 농가의 문간방을 얻어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산모가 핼쑥한 얼굴로 누워 있다가 부스스 일어나서 마를 맞이했다. 방안 가득한 비릿한 냄새, 아기 냄새인지 아기 엄마 냄새인지 모르지만 내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생전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처음이 아닐지 모른다. 어머니가 내 막내 동생 낳을 때 내가 새벽에 읍내 가서 미역을 사왔으니까, 그때도 맡은 냄새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조차 없다. 그때 내 나이 열다섯에 불과했으니까 그 냄새를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는 중대장 사모님을 뉘어 놓고 주사를 놓았다. 왜 그리 떨렸을까. 핏기 없는 하얀 산모의 팔뚝에서 떨리는 손으로 혈관을 찾아 주사 바늘을 꼽는 일이, 숙달된 위생병의 평소 솜씨와 달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팔이 너무 투명하고 맑아서 그랬을까, 혈관이 파랗게 비치는 데도 불구하고 주사바늘을 혈관에 바르게 꽂느라고 진땀을 흘렸다. 떨리는 손으로 주사바늘을 뺐다 꽂았다 몇 번을 거듭했다. 못 미더운 수병의 주사 솜씨를 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정온(靜穩)하게 견뎌 준 중대장 사모님-. 나는 지금도 그녀의 교양을 존경해 마지않는다. 만약 그때 그녀가 불안하거나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으면 나는 주사 놓기가 오히려 더 수월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면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리도 없고, 내가 지킨 약속 또한 그리 소중하게 기억될 리도 없다. 오전에 한 병 오후에 한 병 소금물 주사를 맞은 중대장 사모님은 딴사람처럼 생기가 돌았다. 굳이 저녁밥까지 해 줘서 먹고 왔다. 나는 밥을 먹고 중대장 사모님은 미역국을 먹고, 우리는 오누이처럼 겸상을 해서 먹었다. 비릿한 냄새 가득한 산모의 방에서 산모가 해준 밥을 마주앉아 먹는 황홀한 영광 때문인지 밥맛도 몰랐다.-455쪽
나는 막 해가 진 바다를 향해서 돈대에 주저앉았다. 흑장미 빛 같은 노을이 해협을 물들이고 있었다. 비로소 손에 든 책표지를 보았다. 『청록집(靑鹿集)』이었다. 책표지가 손때에 곱게 절어 있었다. “위생병님 고마워요. 뭐 드릴게 없어요.” 중대장 댁을 나오는데 사모님이 따라 나와서 내 손에 쥐어준 책이었다. 손을 잡힌 채 바라본 중대장 사모님의 맑고 투명한 얼굴이 처연하리만치 고왔다. 나는 지금도 산모의 얼굴이 배필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456쪽
추천사
목성균의 문학에 배어든 진한 서정성은 그의 수필 작법이 상상력에 기초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필요한 대목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글을 쓴다. 그리하여 화자인 내가 아닌 제삼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고 성격을 만들어낸다. 이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성균의 수필을 소설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 목성균 수필의 강점이 있다. 그가 섹슈얼한 문장을 쓸 수 있는 것도, 수필에 나타나는 인물의 성격을 소설 속의 인물처럼 창조해 내어 독창적인 통일된 세계를 창조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성균은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린 과거를 새로운 해석으로 재현함으로써, 과거란 이미 형해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의 원천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미래는 과거 속에 있다. 과거가 새롭다. -김종완(수필가·문학평론가)
목성균 수필의 주제는 자연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삶이다. 곧 그것은 인간의 정 그리고 자기 정체성의 상징과 이미지다. 작가는 정을 중시한다. 그냥 있는 것들의 정, 잃어버리고 묻혀버린 것들에의 정, 현실적 삶의 정, 그것들은 목성균을 붙들고 있는 자기 정체성이다. 그래서 매 작품 속에선 어떤 원칙 같은 것이 은연중에 내비쳐지곤 한다. 그것이 자신의 경험을 통한 삶의 지혜이든, 그의 순전한 바람(소망)이건 그는 그것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것은 그의 삶뿐 아니라 글쓰기의 원칙인 것이다. -최원현(수필가·문학평론가)
책속으로
추석을 쇠고 우리는 아버지의 명에 의해서 근친을 갔다. 강원도 산골 귀래 장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가위를 지낸 달이 청산 위에 둥실 떴다. 그때부터 십리가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야 했다. 아내는 애를 업고 나는 술병과 고기 둬 근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내 옆에 서서 말없이 걸었다.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으로 흐르듯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 것이 펄쩍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 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아버지는 푸른 달빛에 흠뻑 젖어 아기 업은 제 아내를 데리고 밤길을 가는 인생 노정에 나를 주연으로 출연시키신 것이다. ‘임마, 동반자란 그런 거야’ 하는 의미를 일깨워 준, 아버지는 탁월한 인생 연출자였다. 처네 포대기가 그 연출의 소도구인 셈이었다. 그때 “그 처네 포대기 아버지께서 사오라고 돈을 부쳐 주셔서 사온 거야.” 내가 이실직고를 하자 아내가 “알아요” 했다. 그러고 말하기를, 추석 대목 밑에 어머니가 아기 처네 포대기 사게 돈을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묵묵부답이셨다는 것이다.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려면 애를 업고 갈 포대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하고 성미를 부리자 아버지가 맞받아서 “애 아비가 어련히 사올까” 하시며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아내는 그때 시아버지께서 무심한 신랑과 친정을 보내 주실 모종의 조치를 꾸미고 계시다는 것을 눈치채고 가슴을 두근거렸다고 한다. 교교한 달빛 아래 냇물도 흐름을 멈추고 잠든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내가 아내의 손을 잡았던 모양이다. “그때 내 손을 꼭 잡던 자기 얼굴을 달빛에 보니 깎아 놓은 밤 같았어.” 아내가 누비처네를 쓸어보며 꿈꾸듯 말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칭찬이었다. 아마 그때 내게 손을 잡힌 걸 의미 깊이 받아들였던 모양이다.-27쪽
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추울 때다. 하루 종일 햇볕에 단 부엌궁둥이에 기대 서서 초저녁별을 바라본 적이 있다. 부엌궁둥이가 그렇게 따뜻하고 은밀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지 나는 저녁 밥상이 들어갔는데도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숨었다. 고샅에서 할머니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리고, 방안에서는 “그 놈에자식, 밥도 주지 말어” 하시는 아버지의 역정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바람벽에 외로운 신세를 기대게 될 줄을 알았는지 모를 일이다. 정남향의 바람벽이 동지 섣달 막 저녁 밥상이 들어간 부뚜막처럼 따뜻했다. 거기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어두운 산등성이 위로 돋는 별을 바라보니까 서러웠다. 그 후 새신랑인 나는 꽤 여러 번 해질녘이면 부엌궁둥이의 바람벽에 기대고 서서 초저녁별을 바라보았다. 꿈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심한 농사를 지어야 할 건지 말 건지, 이 부엌궁둥이에 와서 젊은 인생의 전말(顚末)을 화두(話頭)로 잡고 고뇌하면 응결된 가슴이 열렸다.-34쪽
나는 어려서부터 바깥 사랑방에서 증조부와 같이 잠을 잤는데, 증조부께서는 한밤중에 내 엉덩이를 철썩 때리셨다. 오줌 싸지 말고 누고 자라는 사인이었다. 그러면 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 사랑 뜰에 나가서 앞산 위에 뿌려 놓은 별떨기를 세며 오줌독에 오줌을 누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증조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자리끼가 담긴 사기대접을 발로 걷어차서 물 개력을 해 놓고 말았다. 아닌 밤중에 물벼락을 맞으신 증조부께서는 벌떡 일어나서 “어미야-” 하고 안채에다 벽력같이 소릴 치셨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말처럼 어머니야말로 잠결에 달려나오셔서 죄인처럼 황망히 물 개력을 수습하셨다. 그동안 나는 놀란 토끼처럼 구석에서 꼼짝을 하지 못했다.-54쪽
그래도 나는 그런 실수를 두 번 다시는 하지 않았다. 그 실수가 있은 후에는 증조부가 밤중에 엉덩이를 ‘철썩’ 때리시면 나는 일단 일어나서 어둠이 눈에 익기까지 서 있었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 하얗게 정체를 드러내는 자리끼가 담긴 사기대접. 그것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사기대접은 마치 노출된 매복병처럼 ‘어디 한번 걷어차 보시지, 왜-’ 하고 하얗게 내게 대들었지만, 천만에, 나는 그 자리끼가 담긴 사기대접을 잘 피하고 지뢰를 밟지 않은 병사처럼 의기양양해서 가소롭게 노려보았다. 그러면 주무시는 줄 알았던 증조부께서 “오냐, 그렇게 조심성을 길러야 하느니라” 하시는 것이었다.-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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