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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시와 사랑이야기
황진이 편
보내고 그리는 정...
해어화(解語話)란 말이 있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기녀(妓女)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황진이는 왜 기녀가 되었을까. 일세를 풍미했던 그녀가 왜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쳐야 했을까?
황진이는 본명이요, 별명은 진랑, 명월은 기명이다. 그녀의 출생에 관한 설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의 부친인 황진사가 길을 가던 도중 병부교 아래 맑은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름다운 처자 진현금에게 물을 청하여 마셨다. 그때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이른바 눈이 맞은 것이다. 결국 그날 한 쪽박의 물은 합환주가 되었고, 그렇게 야합(?)하여 절세가인 황진이를 낳았다 하는 '황진사 서녀' 설이 있다.
또 하나는 자세히 밝혀진 기록은 없지만 '장님의 딸'이라는 설이다. 대체로 진이의 출생은 전자의 경우로 많이 알려져 있다.
황진이의 확실한 생존 년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화담 서경덕(1489∼1544)과 백호 임제(1549∼1587)의 연대로 추정해 볼 때 조선 중종조 대 사람으로 생각된다.
그럼 황진이가 기녀가 된 연유는 무엇일까? 재와 색을 겸비한 절세가인이 왜 기녀가 되어야만 했을까? 가인박명이라더니 운명였을까? 이에 대해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다.
진이가 살던 마을 이웃에 사는 ‘홍윤보’ 라는 총각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며 진이에 대한 연정을 품어 왔다. 진이는 아니더라도 총각에겐 진이가 첫사랑였던 것이다. 진이에 대한 사랑은 성장해 갈수록 커져만 가는데 진이 또한 처녀티가 나고 진이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총각에겐 오르지 못한 나무처럼 높아만 갔다.
가난한 살림에 보잘 것 없는 신분이었으나 총각의 가슴에 진이의 모습이 크게 자리를 잡아 갔다. 진이를 향하는 자신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용기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진이 어머니의 극력 반대가 있었다. 총각은 마침내 상사병으로 몸 져 눕게 되고 안타까운 젊은 나이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총각의 장사행렬이 지나가는 도중 진이의 문 앞에 이르자 상여가 땅에 붙어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연을 들은 진이가 속적삼을 벗어 주어 운구를 덮게 하니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이때 진이 나이 열다섯,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인지라 그로 하여 진이는 항상 마음이 괴로웠고, 자기를 그토록 애절하게 그리다가 죽어간 외로운 넋을 생각한 나머지 죄책감에 휩싸이곤 했다. 마침내 진이는 평범한 여자로서의 행복을 버리고 스스로 명월이란 이름을 짓고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녀가 되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자신이 서출임을 비관하여 기생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도 그럴 가능성이야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 세인들은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전자에 더 흥미를 더 느끼고 믿어왔다.
조선시대 기생은 조선 8천(賤) 중의 하나로 천민계급이다. 하지만 대하는 사람들은 고관대작이기 때문에 여러 방면에 능통해야 했다. 시, 산문, 노래, 가야금, 거문고, 그림, 춤 등 고관대작들을 대하기 위해서 매우 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다. 그중에서도 그 실력이 아주 뛰어나 이름이 알려진 기생을 명기라고 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기생 중에 엘리트 기생이라고 할 수 있다. 황진이는 조선조의 가장 유명한 명기가 되었다.
그런 재와 기와 색을 두루 갖춘 황진이의 남성 편력은 다채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 편력들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첫 번째 남자는 송악산의 부운거사 김경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세상사에 뜻이 없고 오직 자연을 즐기며 풍류를 좋아했던 헌헌장부요 방랑시인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황진이의 첫사랑으로 그에 관한 사랑시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첫사랑인 만큼 미련도 많았고 아픔도 컸을 것이다. 부운은 그야말로 뜬구름처럼 떠나버린 후 다시는 못 만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남자는 개성 유수 송공이다. 대부인 연회석에 황진이를 초대하였는데 그때 여러 사람들이 황진이의 빼어난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황진이가 유명해 지게 된다. 황진이는 송공과 그전부터 함께 지낸 사이라고 한다.
세 번째 남자는 선전관 이사종이다. 사신으로 송도를 지나다가 천사원 냇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아주 출중하였다고 한다. 황진이가 그 노래에 깊이 빠져들어, ‘개성에 이사종이라는 사람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데 그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고 알아보게 하였는데 정말 이사종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찾아가 서로 마음속에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여러 밤을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마음에 들었는지 이사종에게 ‘내 마땅히 당신과 6년을 살아야겠소.’라고 말하고는 이사종의 집에 3년 동안 먹고 살 돈을 가져가서 살고, 3년 후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살았으며 6년이 지난 후에는 깨끗이 헤어졌다고 한다. 이걸 보면 황진이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했으며 당당한 여자인지 알 수 있다.
네 번째 남자는 양곡 소세양이다. 소세양은 ‘남자가 여색에 혹함은 남자가 아니다!’ 라고 호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황진이와 30일을 지내고 깨끗이 끝내겠다.’ 라고 큰소리 쳤다고 한다. 황진이와 30일을 지낸 후 황진이가 <송별소양곡>을 지어 불렀다. 그걸 듣고 소세양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며칠을 더 머물렀다고 한다.
다섯 번째 남자는 종실 벽계수(이창곤)이다. 이른바 벽계수 낙마곡으로도 유명한 시조 한 수가 전해지고 있다. 중복되므로 뒤에 시조 감상에서 자세히 소개하겠다.
여섯 번째 남자는 황진이가 말년에 금강산 유랑을 하고 싶어 하여 동행을 청해서 함께 금강산을 돌아다녔다는 이생도령이다. 갈 때 이생이 먹을 것을 짊어지고 갔는데 여행 도중 다 떨어져서 곳곳의 절을 돌아다니며 황진이가 몸을 팔아 음식을 얻었다고 한다. 여행이 끝나고 헤어졌다 한다.
일곱 번째 남자는 지족선사로 그는 면벽수련 30년으로 당대의 최고의 고승이었다. 그래서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찾아가 유혹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그 용모가 빼어났던지 면벽수련 30년을 깨고 파계승이 되어 하산하였다고 한다.
여덟 번째 남자는 황진이가 진정으로 사모한 서경덕이었다. 황진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높음을 듣고 서경덕에게 가서 유혹하였으나 넘어가질 않았다.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고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서경덕은 의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감탄하여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수련에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서경덕은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끝까지 나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진정 성인이다.’라고 말하고 서경덕에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했다 한다. 그래서 제자가 됐고 황진이는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이 셋을 송도삼절이라고 불렀다 한다.
黃眞伊의 첫사랑
冬至(동지)ㅅ달 기나진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春風(춘풍) 니블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첫사랑이었기에 더욱 못 잊고 그리웠으리라. 부운거사 김경원은 구름처럼 떠나고 말았다. 그 님이 다시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여인의 애절한 소망이 노래되어 있다.
시간을 공간화하여 표현한 것이 기발하다.
초장에서는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 그 날의 밤 시간 중에 한 허리를 칼로 베어 내어서,
중장에서는 그것을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속에 넣어두었다가,
종장에서는 사랑하는 님이 오신 밤에 꺼내 굽이굽이 펼치겠다는 것이다.
님과 함께하는 밤이 얼마나 짧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러니 가장 길다는 동지의 밤 시간을 잘라 내어 님이 오시는 날 밤에 펼쳐 님과의 밤을 더욱 길게 만들겠다는 생각. 황진이다운 멋들어진 발상이다.
천하 명기 황진이도 첫사랑만큼은 쉬 잊지 못하였던가. 그래 외롭고 긴 밤을 견디며 님이 행여 다시 오실 날을 상상해 본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밤을 새워 운우의 정을 길이 나누리라. 그런 기대로 이 시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황진이의 첫사랑도 이것으로 끝이다. 부운거사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누구나 첫사랑을 잊기란 쉽지 않다. 황진이 또한 부운거사를 오래 잊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 둔 채 살았을 것이다.
* 2006년 6월, 계간 ‘나래시조’는 현대시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조 시인 9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시조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고시조로 바로 이 시조를 뽑았다.
상사몽(相思夢)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濃訪歡時歡訪濃 (농방환시환방농) 님을 찾아 반길 때, 님도 나를 찾아 반기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일시에 길을 떠나, 중로에서 만나기를......
아무래도 잊혀지지 않는 님이다. 못내 잊지 못해 님의 꿈을 꾼다. 그립고 야속한 사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린 첫 사랑, 부운거사를 만날 길은 꿈길 밖에 없다.
내가 당신을 꿈속에서 만날 때는 당신은 나를 찾아 꿈길을 오네. 다음부터는 같은 시간에 동시에 떠나는 같은 꿈을 꾸면 길 가운데서 만나게 될 테니 긔 아니 좋겠느냐는 것이다.
別金慶元 (별김경원)
三世金緣成燕尾 (삼세금연성연미) 삼세의 굳은 인연 좋은 짝이 되니
此中生死兩心知 (차중생사양심지) 이 중에서 생사는 두 마음만 알리로다
楊州芳約吾無負 (양주방약오무부) 양주의 꽃다운 언약 내 아니 저버렸건만
恐子還如杜牧之 (공자환여두목지) 그대가 두목지(杜牧之) 같은 한량이라 두렵네.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하는 것이 첫사랑이다. 부운거사는 황진이에게 꿈에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였던 것이다.
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
古寺簫然傍御溝(고사소연방어구) 개울 곁 옛 절은 쓸쓸도 하네.
夕陽喬木使人愁(석양교목사인수) 석양에 키 큰 나무 애를 끊노라
烟霧冷落殘僧夢(연무냉락잔승몽) 안개는 차겁게 내리고 중은 꿈속에 있네.
歲月錚嶸破塔頭(세월쟁영파탑두) 깨어진 탑머리에 세월 간 자취
黃鳳羽歸飛鳥雀(황봉우귀비조작) 봉황새 어디 가고 참새만 나니
杜鵑花發牧羊牛(두견화발목양우) 진달래꽃 핀 곳에 염소를 치네.
神古憶得繁華夢(신고억득번화몽) 호사롭던 그 옛날 그려 보나니
豈意如今春似秋(기의여금춘사추) 오늘 이리 쓸쓸할 줄 뉘 알았으랴.
부운거사와의 첫사랑의 홍역을 치르고 난 진이는 부운거사와의 모든 추억을 떨쳐버리려고 어느 봄날 만월대에 올라 인생무상과 사랑의 덧없음 슬퍼하며 지은 시다. 첫사랑은 늘 그렇게 아픈 추억으로 남는 법이다.
* 명창 이사종과 나눈 사랑 시
황진이와 이사종의 이야기는 <어우야담>에 나온다. 선전관(宣傳官) 이사종(李士宗)은 노래를 잘했다. 일찍이 송도를 지날 때 황진이와 같이 놀고자 하여 천수원(天壽院) 냇가에서 말에서 내려 갓을 벗어 배위에 올려놓고 드러누워서 소리 높여 노래를 몇 고조 불렀다. 그때 마침 주위에 있던 황진이가 역시 말에서 내려 쉬다가 그 노래를 귀담아 듣더니, ‘드문 노래 소리다. 반드시 촌가(村家)의 속된 곡조가 아니다. 서울의 풍류객 이사종이 당대 절창이라고 들었는데 그 사람인가 보다’ 하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과연 그였다.
이에 자리를 옮겨 가까이 즐기다가 황진이의 집에 데려와서 며칠을 같이 지낸 후 말하기를
“마땅히 그대와 함께 6년을 살겠습니다.” 하더니, 이튿날로 3년 동안 살림을 살 만한 재산을 이사종의 집으로 옮기고는 그의 부모와 처자를 섬기고 첩으로서의 예를 다하며 그의 가족을 먹여 살렸다.
3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황진이가 그의 집에 했듯이 이사종이 황진이의 일가를 돌보았으며, 꼭 6년이 되던 날 황진이는 “이미 약속이 이루어지고 기일이 다 되었습니다.” 하고는 그만 하직했다.
천하 명기 황진이도 일부종사가 어떤 것인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사종의 첩이 되어 6년이나 되는 세월을 함께 했다. 그러나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 해도 어느 정도 함께 하다보면 서로 조건이 달라서 자신의 길을 가야 할 경우가 있는 것이다. 아니, 그녀에게 일부종사는 견디기 어려운 굴레였을지도 모른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초장에서는 자신의 뜻을 청산에 비유하고, 님의 정을 녹수에 비유하고 있다.
중장에서는 님이 변절하여 떠나간다 한들 나의 신의와 지조는 변하지 않을 거라 하고 있다.
그러나 종장에 가서 님도 청산을 잊지 못하고 울며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서 이별은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다 같이 슬픈 일이다. 이사종을 보내는 황진이는 울고 있었을 것이다. 떠나는 이사종 또한 울며 떠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울음은 속으로 우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슬퍼도 스프지 않은 척 태연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슬픈 것이다. 애이불비(哀而不悲)! 이것이 우리네 여인들의 전통적인 이별관 아니었던가.이렇게 황진이와 이사종의 6년간의 러브스토리는 막을 내렸다.
* 소세양에 대한 사랑시
소세양은 7살 때 한시를 지을 만큼 신동이라 불리던 조선조 명문장가였다. 소세양이 소싯적에 이르기를,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호언장담해 왔다.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나는 사람이 아니네.’ 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미인이었다.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주연(酒宴)을 베풀고 시 한 편을 읊는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서 ‘吾其非人哉(나는 사람이 아니다) 爲之更留(다시 머무르리라)’고 하여 자기의 장담을 스스로 탄식하면서 마음을 돌려 며칠 더 머물렀다 한다. 황진이의 미색을 짐작하게 해 주는 일화다. 이 때 황진이가 읊은 시가 바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 소판서 세양을 이별하며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밤에 오동잎 다 떨어지니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거운대 들국화 노랗다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과 한 자 사이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님은 천 잔의 술로 취하였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냉) 흐르는 물은 거문고소리와 화하여 차가운데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 매화는 피리소리 속에서 향기롭다.
今日相別後(금일상별후) 오늘 서로 헤어진 후면
憶君碧波長(억군벽파장) 그대 그리는 마음 강물처럼 길이 흐르리
이 시에는 소세양과의 사랑과 행복을 잊지 못하여 이제 떠나려는 소판서를 하루라도 더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오늘 서로 헤어진 후면 그대 그리는 마음 강물처럼 길이 흐르리'로 끝맺은 진이의 곡진한 사연에 소판서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눌러앉고 말았던 것이다.
영반월(詠半月)
誰斷崑崙玉(수단곤륜옥) 누가 곤륜의 옥을 잘라내어
裁成織女梳(재성직녀소)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나
牽牛一去後(견우일거후) 견우가 한 번 떠나간 뒤
愁擲碧空虛(수척벽공허) 시름으로 푸른 허공에 던졌구나
이 시는 직녀의 빗 같은 초승달을 쳐다보며 임을 생각하는 가련하고 요염한 자신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양곡 소세양과의 이별 후에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이별의 슬픔을 초승달에 기탁하여 간접적으로 읊은 노래이다.
다음은 황진이가 소세양을 떠나보낸 뒤 남긴 시조다.
어져 내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냐.
이시라 더면 가랴마 제 구여
보고 그리 情(정)은 나도 몰라 노라.
이 노래는 임을 떠나보낸 후의 회한(悔恨)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외롭고 연약한 여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표현상 묘미는 중장의 '제 구여'의 행간(行間) 걸침에 있다.
'제 구태여'는 '임이 구태여', '내가 구태여'로 다 해석이 가능하다. 즉 이 부분을 '이시라 하더면 제 구태야 가랴마난 '의 도치로 본다면 '제'는 임이 되겠지만, '제 구태야 보내고'로 본다면 '제'는 시적 자아 자신이 될 수 있다.
이 노래는 이별의 정한을 참신한 표현 기법으로 형상화하여, 여성 특유의 작품세계를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 속요인 '가시리', '서경별곡'과 현대의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이어지는
이별시의 압권이라 하겠다.
소세양과의 이별을 하였지만 그래도 회한이야 없었겠는가. 그러나 한편 그렇게 떠나보냈기에 이런 멋진 시도 태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인간사가 다 그렇듯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알아야 한다. 그때의 뒷모습은 아쉽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 벽계수를 낙마시킨 황진이의 시
황진이와 벽계수와의 이야기는 서유영(徐有英,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자세히 전한다.
황진이의 명성이 온 나라에 널리 퍼졌다. 종실(宗室) 벽계수(이창곤)도 황진이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며 황진이를 한 번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명사(風流名士)'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그대가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하는데 따를 수 있겠소?’ 라고 물으니 벽계수는 ‘당연히 그대의 말을 따르리다.’ 라고 답했다.
이달이 말하기를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라고 했다.
벽계수가 그 말을 따라서 작은 나귀를 타고 소동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들게 하여 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탄 후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니, 황진이가 과연 뒤를 따랐다.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시조 한 수를 읊는다.
靑山裏(청산리) 碧溪水(벽계수)ㅣ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일도창해)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明月(명월)이 滿空山(만공산)하니 수여 간들 엇더리.
이 노래의 묘미는 중의적인 표현에 있다. '벽계수'는 흐르는 물과 왕족인 벽계수(碧溪水)를 뜻한다. ‘명월’은 밝은 달과 황진이를 뜻한다.
초장의 '청산'은 영원히 변함없는 자연을 나타내며, '벽계수'는 흘러가는 푸른 시냇물이란 뜻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가는 인간의 삶을 의미한다.
중장에서는 한 번 흘러가 버리면 되돌아올 수 없다는 무상감의 표현이다.
종장에서는 그러니 달빛 그윽한 이 빈산에서 덧없는 인생을 이 명월이와 풍류로 한 번 즐겨보자는 기녀다운 유혹의 노래라 할 수 있다.
벽계수가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가 황진이의 미모에 그만 나귀에서 떨어졌다 한다. 황진이가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랑일 뿐이다’ 하며 돌아가 버렸다. 벽계수는 매우 부끄럽고 한스러워했다. 이 시조는 벽계수 낙마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족선사 파계
지족선사와의 이야기는 문헌상으로는 오직 <성옹지소록>에 ‘30년 면벽(面壁)의 지족선사도 나에게 무너졌다’는 황진이의 회고가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성옹지소록 [惺翁識小錄]: 조선 중기 문신 허균(許筠)이 조선 중기의 고실(故實)과 장고(掌故)를 수록한 책. 필사본. 3권 1책. 1611년(광해군 3) 저작. 저자가 1610년에 과시(科試) 문제로 순군옥(巡軍獄)에 42일간 갇혀 있다가 함흥(咸興)으로 유배되었을 때 옥중에서 기록했던 것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기왕의 유명한 사대부의 행적과 고실 ·장고 ·기문(記文)과 이견(異見) 194개 항목을 열거한 것이다. 이 가운데는 사대(事大) ·외교 ·관방제도(官房制度)와 육조(六曹) ·옥당(玉堂) ·사관(四館) ·호당(湖堂) ·경연(經筵) ·공신(功臣) ·과거(科擧) ·시호(諡號) ·역관(譯官) 등에 대한 설화와 그 밖에 사회적 기사(徐敬德과 黃眞伊의 교우관계 따위), 그리고 역대 명사들의 출세 연령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책머리에 1611년 4월에 쓴 저자의 소인(小引)이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은 저자의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도 수록되어 있다.
황진이 관련 소설 등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지족선사의 일은 구전 야담을 통하여 전해온 것이다. 먼저 세간에 전하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지족선사는 송도 근교 천마산 깊은 곳의 지족암에서 30년이란 긴 세월을 수도를 해온 스님으로 송도 사람들은 그를 생불(生佛)이라 존경하였다. 황진이는 어느 날 하얗게 소복을 하고 찾아가 자기는 청상(靑孀)인데 스님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애원한다. 깊은 산중에서 주야로 독경삼매(讀經三昧)로 속세와 절연하고 살아온 스님은 난데없는 미녀의 출현에 당황하였다. 자신의 수양부족을 탓해가면서 마귀 쫓는 주문만 열심히 외웠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강도를 높여 유혹하니 결국 30년 수련은 공염불이 되어버렸고, 당대의 고승 지족선사는 파계승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후 지족은 ‘음양의 도를 훔쳤으니 운수행각이나 나서야지’ 하며 종적을 감추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생사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당대의 대표적인 고승과 최고 명기의 만남이니, 어쨌든 황진이 관련 에피소드 중 가장 흥미로운 대목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민속놀이 <만석중놀이>는 지족선사의 파계를 풍자한 것이라 한다.
다음은 문화영님의 <황진이, 선악과를 말한다>에서 황진이가 지족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 일부이다. 참고해 볼 일이다.
“스님이셨으나 참으로 저를 아껴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俗)에서는 파계라 하나 저는 파계라 생각지 않습니다. 파계라면 그것은 불교에서 주장하는 말일 것이나 지족 선사는 기존의 인간들이 행했던 음탕한 생각으로 저와 함께 하셨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숭고한 사랑으로 저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선사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였으며, 선사 또한 숭고한 사랑의 한 방법으로 저를 다독여 주신 것입니다.
그 후로 저는 신성한 관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이후 다른 남성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그때 생각했던 바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선사는 저에게 성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심어준 분이었으며 남녀 간의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주신 분입니다. 성적인 스승이 지족 선사라면, 정신적 스승이 화담 선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남성들은 상호간에 즐기면서 주고받았던 사람들로서 풋사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花譚 서경덕에 대한 연정과 사랑시
화담 서경덕은 당시 도학군자로서 학덕과 인격이 널리 알려진 위인이었는데, 황진이의 농락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느 날 화담정사에 놀러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황진이가 별안간 복통을 일으켜 신음하기 시작했다. 서경덕은 한 채밖에 없는 이불을 펴주었다.
화담은 늦도록 책을 읽었다. 꾀병을 앓으면서도 연방 서경덕의 동태를 살폈으나 일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화담은 윗목에 조그마한 포대기를 얌전히 개켜놓고 단정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전날의 자세 그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황진이는 자기의 부질없는 연극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선생님 송도에는 삼절이 있다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서경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첫째는 박연폭포요, 둘째는 화담선생님이시고 셋째는 저 황진이입니다."
서화담은 성종 20년(1489)에 나서 명종 1년(1546)까지 산 당대의 석학이었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육성에만 전념하였다. 황진이도 서화담에게 글을 배우러 오는 문하생이 되었다. 그런데 진이가 오는 날이 뜸해졌다. 밤은 깊고 주위는 적막한데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는가 싶어 영창을 열고 기울여보았으나 주위는 더욱 적막하기만 하였다. 다시금 영창을 닫았다. 불을 껐다. 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정신은 자꾸만 맑아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진이는 오지 않았다. 서화담은 초연히 앉아 어둠 속에서 이렇게 노래를 읊었다.
마음이 어린 후(後)ㅣ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늬 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초장은 인간의 본능인 사랑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시적화자 자신의 한계를 자책하는 내용이고,
중장에서는 만중운산(萬重雲山), 즉 구름이 겹겹이 쌓인 험하고 깊은 산이 막고 있어 임이 올 수 없는 상황을 제시하여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타는 심정을 고조시킨다.
종장에서는 감정이 한껏 고조되어 나뭇잎 지는 소리나 바람소리가 마치 임의 발자국 소리나 옷깃 스치는 소리가 아닌가 하고 님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드러나 있다.
진이는 문 밖에 와있었다. 자신의 사무치는 마음을 화담 스승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 속 깊이 깔려있던 그 동안의 오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참을 추스렸다가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요
초장에서는 내가 신의 없어 님을 언제 속인 일이 있느냐 반문하고 있다.
중장에서는 달을 베고 누운 깊은 밤에 찾아오신 적은 한 번도 없음을 원망하고 있다.
종장에서는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야 낸들 어찌 하겠습니까.’ 하면서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하는 화담의 은근한 연정을 넌지시 받아서 ’가을바람에 지는 잎 소리를 낸들 어쩌겠느냐‘ 고 타는 마음을 체념하듯 노래하고 있다
화담의 다른 시조 한 수도 보자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내 늙을 적이면 너는 아니 늙을소냐
아마도 너 쫓아다니다가 남우일까 하노라
초장에서는 ‘마음아 너는 어찌하여 항상 젊은 줄만 아느냐’며 마음을 탓하고 있다.
중장에서는 몸이 늙는데 마음인들 늙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반문한다.
종장에서는 내가 아무래도 마음 쏠리는 대로 쫓아다니다가는 남의 웃음꺼리가 될까 걱정이라’ 하고 있다. 화담 역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진이의 금강산 유람
이생(李生)과 황진이의 일화는 <어우야담>에 전한다. 이생은 재상의 아들이라고만 나와 있으며 본명은 전하지 않는다.
황진이는 금강산(金剛山)이 천하제일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꼭 한번 가려고 했으나 동행할 사람이 없었다. 마침 서울에서 이생이라는 청년이 놀러왔는데, 재상의 아들이며 사람이 호탕하고 소탈해서 함께 유람을 할 만하였다. 황진이가 조용히 이생에게 말했다.
“제가 들으니, 중국 사람도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라는데, 하물며 우리나라 사람으로 이 나라에 태어나서, 그것도 신선이 산다는 금강산을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 구경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 이 몸이 우연히 선랑(仙郞)을 모시게 되었으니 같이 신선처럼 놀기에 마침 잘 되었습니다. 산의야복(山衣野服)으로 그윽하고 뛰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돌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생이 허락하자 일체의 시동이나 종도 따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무명옷에 초립을 쓰고 양식 주머니까지도 몸소 젊어졌다. 황진이도 스스로 여승처럼 고깔을 만들어 쓰고, 몸에는 갈포로 지은 장삼과 무명 치마에 짚신을 신고 죽장까지 들었다.
두 사람이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깊숙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절을 두루 찾아 밥을 빌어먹었고, 어떤 때는 황진이가 몸을 팔아 중한테 양식을 얻기도 했지만, 같이 간 이생은 나무라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수풀 속을 헤매는 동안에 굶주리고 피곤해서 그전과는 모양이 딴판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한 곳에 가니 선비 여남은 명이 냇물 위 송림 속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황진이가 지나가며 인사를 하니 ‘술 할 줄 아시오?’ 하며 한 좌석을 내주었다.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시며 노래를 부르니 노랫소리가 유난히 맑아 수풀과 바위 속까지 울렸다. 선비들이 놀라 ‘안주도 뭐든지 마음대로 들구려.’ 하니 진이는 ‘저에게 하인이 하나 있는데 불러서 여기 술 남는 것 좀 먹이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생을 불러 술과 고기를 먹였다.
<성옹지소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일찍이 산수를 유람하면서 풍악(楓岳, 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지나 금성(나주)에 오니, 고을 원이 절도사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는데, 풍악과 기생이 좌석에 가득하였다. 황진이는 다 떨어진 옷에 때 묻은 얼굴로 끼어 앉아서 태연스레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여러 기생이 기가 죽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금강산은 반드시 한번 다녀가야 할 곳으로 인식되었다. 금강산뿐 아니라 전국의 명산을 직접 발로 밟으며 견문을 넓히는 것은 사대부들의 한 공부 방법이었다. 한국의 선승(禪僧)들 사이에서 ‘10년 경전(經典) 공부, 10년 참선(參禪), 그리고 10년 만행(萬行)’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경덕 또한 금강산, 지리산 등을 두루 유람하였다고 전해진다.
송도로 돌아온 황진이
황진이는 38세라는 짧은 일생을 두고 세상의 풍류남아와 영웅호걸은 원근을 불문하고 모두가 자기의 님이요, 사랑이라고 했다. 주마등처럼 지나온 역정들이 스쳐 지나간다. 남가일몽처럼 덧없는 생각이 든다. 베치마 두른 채 한 많은 유람을 마치고 온갖 회포를 달래주는 정든 송도 땅을 찾으니 누구하나 반겨줄 이 없는 슬픔이 밀려든다. 자연은 옛 그대로이나 자기와 사랑을 나누었던 님들은 물과 같이 흘러가 버렸으니 뇌리에 스치는 허전한 마음은 형언할 길 없다.
山은 녜ㅅ山이로되 물은 녜ㅅ물 안이로다
晝夜에 흘은이 녜ㅅ물리 이실손가
人傑도 물과 갓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초장에서는 산은 옛날과 같은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다.
중장에서는 밤낮으로 흘러갔으니 옛 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종장에서는 사람도 물과 같아서 한 번 가고는 오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다.
인생무상의 감회가 물씬 풍기는 시다.
자기의 기방을 거쳐 간 수많은 남자들! 황진이는 그들 모두에게 사랑을 주었다. 그들 역시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을 것이나, 아내로 삼지 않는 바에야 언제까지 기방을 출입하며 만날 수는 없는 일. 결국 저마다의 연(緣) 따라 제 길을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황진이(黃眞伊)의 임종(臨終)과 백호(白湖) 임제(林悌)
그녀의 출생이 신비 속에 쌓여 있듯이 그녀의 임종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으나 그녀의 유언에 관한 이야기가 <성옹직소록>에 보인다.
죽음을 앞둔 진이는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후회도 원망도 없는 고요한 체념만이 가슴에 가득한 채, '내가 죽거든 울지도 말고 북과 풍악[鼓樂]으로서 상여를 전송해 달라'고 한 말은 일세의 명기다운 얘기이나, '생전에 업보로 관도 쓰지 말고 동문밖에 자기의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으라' 한 것을 보면 너무도 자신을 잘 알고 있었던 한 여인의 가혹한 자책이기도 하다.
어쨌든 진이는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재질이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그것이 그녀를 평범한 한 여인으로 살 수 없게 하였다. 그렇게 자유분방한 여인이어서 주옥같은 많은 문학작품을 남긴 여인이었는지도 모른다.
황진이가 죽고 난 뒤의 이야기로는 활달한 호남아요 당대의 한량이었던 백호 임제가 평안감사로 임명되어 가는 길에 평소에 보고 싶었던 황진이를 찾았는데 이미 고인이 된 뒤라 백호는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술을 권하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을 어디두고 백골만 뭇쳣는다
잔잡아 권하리 업스니 글을 슬허 하노라
하며 노래했고, 그렇게 사모하며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한 번 죽으면 잡초가 우거진 무덤에 백골만 묻혔는가 하는 덧없는 인생을 한탄하는 애끊는 심정을 표현했다. 생전에 명성을 떨쳐 세인의 심금을 울리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허무감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백호(白湖) 임제(林梯)는 황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치제(致祭)했다 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을 당하고 말았으니 이후 사색당쟁의 벼슬길을 스스로 버리고 야인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평소 인연이 되지 않았지만 사모하였던 여류 시인의 무덤에 술 한 잔 올렸다는 이유로 관직을 떠나 초야에 묻히게 된 임제의 사연이 씁쓸한 여운을 자아낸다.
*황진이의 시편들은 <식소록 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 松都紀異>·<금계필담 錦溪筆談>·<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중경지 中京誌>·<조야휘언 朝野彙言> <성옹직소록> 등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와 함께 실려 전한다.
이선희가 부른 <알고 없어요> 표절 시비
月夜思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 밝은 밤이면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나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을 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때로는 제 이름도 적어보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저를 만나 기쁘셨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에 제 생각 얼마만큼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얘기해도 제 말이 재미있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알고 싶어요 - 이선희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 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황진이가 사랑했던 소세양에게 동선이를 시켜 보냈던 한시로 황진이 시를 이선희가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진상은 정반대로 <알고 싶어요>의 양인자 작사가의 노랫말을 이재운이 그의 소설에서 한시로 번역한 것이라 한다.
다음은 야후 블로그에 올려진 양인자 작가의 글이다.
이재운씨라는 작가가 계십니다. 그분은 토정비결을 만드신 토정 이지함 선생의 후손이시기도 한데 "연암 박지원" "소설 토정비결" "금강경" 등 많은 작품을 쓰셨지요. 만나면 서로 반가워하는 사인데 95년 어느 날 전화가 왔었어요.
그때 그분은 주간조선에 역사 뒤집어보기 "청사홍사"를 쓰고 계셨는데 황진이 편에 이선희가 부른 <알고 싶어요>를 쓰고 싶다는 거였어요. 엥? 얼fms 머리가 잘 안돌아가데요.
역사 뒤집기라고 해서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시대를 재단하고 인물을 재조명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노래를 엇다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이른 아침, 잠에 묻힌 채 받은 전화라 길게 물어보지는 않고
"선생님 작품에 제 노래가 들어간다면 영광이지요."
그러고는 다시 잠 속으로 기어들어갔는데 그때부터 그 노래의 수난이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 노래는 이재운 선생님의 빛나는 한문 실력으로 멋진 한시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황진이가 소세양이라는 남자를 유혹하는데 쓰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잘 읽어보면 황진이가 구기동에 사는(당시 나는 구기동에 살고 있었음)
양시인을 찾아가 소세양을 꼬시고 싶소. 글 하나 주시오 해서 그 글을 받았다는 대목이 나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후로 ‘알고 싶어요’는 양인자가 황진이의 한시를 표절한 것으로 바람을 타지요. 나보다도 더 당황한 이재운씨가 자신의 연재소설 말미에 되풀이 사건의 전말을 밝혔건만 10년이 지난 이 시간까지 바로잡아지지 않고 있네요.
- 출처, <시인, 그들만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흙돌 심재방 시인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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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것두~~길게 ~~~잘 보았습니다...이런 자료들 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