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경술 원년(950)

*고려4대 광종 (드라마 '제국의아침' )
경술 원년(950) 봄 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 뿌리를 뽑았다. 왕이 이 재변을 물리치는 방법에 대하여 물으니 사천(司天-천문관)이 말하기를 도덕을 닦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왕은 일상적으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었다.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공포하였다.
광종 신해 2년(951)
신해 2년(951)에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성 남쪽에 창건하여 태조의 원당(願堂)으로 하고 또 불일사(佛日寺)를 개경 동쪽 교외에 창건하여 죽은 어머니 유씨(劉氏)의 원당(願堂)으로 하였다.
겨울 12월에 처음으로 후주(後周)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광종 임자 3년(952)
임자 3년(952)에 광평시랑 서봉(徐逢)을 후주에 보내 토산물을 선사하였다.
광종 계축 4년(953)
계축 4년(953)에 후주에서 위위경(衛尉卿) 왕연(王演)과 장작소감(將作少監) 여계빈(呂繼斌)을 보내 왕을 특진 검교 대보, 사지절 현토주도독, 충 대의군사 겸 어사대부, 고려국왕으로 책봉하였다.
광종 갑인 5년(954)
갑인 5년(954) 봄에 숭선사(崇善寺)를 창건하여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광종 을묘 6년(955)
을묘 6년(955)에 대상 왕융(王融)을 주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선사하였다.
광평시랑 순질(筍質)을 주나라에 보내 후주 세종이 왕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였다
광종 병진 7년(956)
병진 7년(956)에 주나라에서 장작감 설문우(薛文遇)를 보내 왕을 개부의 동삼사 검교 태사로 책봉하는 동시에 백관들의 복식을 중국 제도와 같이 하게 하였다. 주나라의 전 대리평사(大理評使) 쌍기(雙冀)가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왔다.
광종 정사 8년(957)
정사 8년(957) 봄 정월에 왕이 구정(毬庭)에서 궁술을 관람하였다.
광종 무오 9년(958)
무오 9년(958) 여름 5월에 비로소 과거 제도를 설정하고 한림학사 쌍기에게 명령하여 진사를 선발하게 하였다.
병신일에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나와서 방(榜)을 붙이고 최섬(崔暹)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이해에 주나라에서 상서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郞) 한언경(韓彦卿)과 상연봉어(尙輦奉御) 김언영(金彦英)을 보내 비단 수천 필을 가지고 동(銅)을 무역하여 갔다.
광종 기미 10년(959)
기미 10년(959) 봄에 좌승 왕긍(王兢)과 좌윤 황보 위광(黃甫魏光)을 주나라에 보내 좋은 말과 의복, 활, 칼 등속을 선사하였다.
가을에 사신을 주나라에 보내 별서효경(別序孝經) 1 권, 월왕효경신의(越王孝經新義) 8 권, 황령효경(黃靈孝經) 1 권, 효경자웅도(孝經雌雄圖) 3 권을 선사하였다.
주나라에서 좌효위(左驍衛) 대장군 대교(戴交)를 보내 왔다.
겨울에 사신을 주나라에 보내 구리 5만 근, 자색 수정과 흰 수정 각 2천 개를 선사하였다.
주나라 시어(侍御) 쌍철(雙哲)이 고려에 왔다. 그에게 좌승의 작위를 주었다.
광종 경신 11년(960)
경신 11년 (960) 봄 3월 갑인일에 최광범(崔光範)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백관의 관복 제도를 제정하였다.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로 각각 고치었다.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참소하기를 대상 준홍(俊弘), 좌승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꾸민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내쫓았다. 이 때로부터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충성 있고 현량한 사람들을 모함하였으며 노비가 제 주인을 걸어 고소하고 아들이 제 아비를 참소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 차게 되었다. 이리하여 따로 임시 감옥까지 설치하였다. 죄 없이 잡혀 죽는 자가 계속 생겨 나고 시기하는 버릇이 날로 심하여졌다. 왕실 일족들도 많이 잡혀 죽었고 왕의 외아들 왕주까지도 역시 의심을 받아 왕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되니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감히 마주 앉아서 이야기도 하지 못하였다.
광종 신유 12년(961)
신유 12년(961)에 궁궐을 수리하였다. 왕은 그 동안 정광 왕육(王育)의 집에 가 있었다.
왕거(王擧)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광종 임술 13년(962)
임술 13년(962)겨울에 광평시랑 이흥우(李興祐)를 송(宋)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선사하였다.
광종 계해 14년(963)
계해 14년(963) 여름 6월에 왕이 대궐로 돌아 와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근자에 대궐을 수리하는 일로 하여 오래 동안 별궁에 가 있는 동안 마음에는 항상 경각성을 가지고 일 처리도 평상시와는 달랐으나 백관들이 일을 보고하는 데 내가 직접 듣지 못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마음에 혹 의심이 생길듯 하여 이 걱정을 잠 잘 때나 밥 먹을 때도 잊기 어려웠노라.
그러나 지금은 벌써 수리하는 일이 끝났고 정사를 처리할 장소도 있게 되었다. 무릇 너희 백관들은 각각 자기 일을 충실히 집행하고 전과 같이 보고하여 조금도 사무가 침체되지 않게 할 것이며 임금과 신하가 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서로 화합하여 조금이라도 간격이 없게 하라!”
가을 7월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였다.
겨울 12월부터 송나라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송나라에서 책명 사절 시찬(時贊)을 파견하여 왔다. 이들중에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90 명이었는데 찬이 홀로 면하였던 것이다. 왕이 특히 그를 극진하게 위로 하였다.
광종 갑자 15년(964)
갑자 15년(964) 봄 3월에 김책(金策)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와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하고 책에게 명령하여 연회에 참가하게 하였다.
가을 8월 임자일에 대광 박수경(朴守卿)이 죽었다.
광종 을축 16년(965)
을축 16년(965) 봄 2월에 아들 왕주에게 관(冠)을 씌우고 그를 왕태자, 내사(內史), 제군사, 내의령, 정윤으로 책봉하고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장생전(長生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대승 내봉령 왕로(王輅)를 송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선사하였다. 송나라 황제가 노에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벼슬과 식읍 3백 호를 주고 아울러 관고(官誥)를 주었다.
가을 7월 병오일에 내의령 서필(徐弼)이 죽었다.
광종 병인 17년(966)
병인 17년(966)에 최거업(崔居業)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광종 정묘 18년(967)
정묘 18년(967).
광종 무진 19년(968)
무진 19년(968)에 홍화(弘化), 유암(遊巖), 삼귀(三歸) 등 사찰들을 창건하였다.
승려 혜거(惠居)를 국사(國師)로 삼고 탄문(坦文)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왕이 아첨하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을 죽였으므로 내심으로 가책을 받게 되었다. 이리 하여 자기 죄악을 덜기 위하여 재회(齋會)를 광범히 가지게 되니 많은 무뢰배들이 가짜로 중이 되어 배부르게 먹을 것을 생각하고 모여 들었다. 이따금 떡, 쌀, 시탄 등을 가지고 서울과 지방의 길거리에서 일반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수 없이 많았다. 또 방생소(放生所)를 많이 설치하여 놓고 부근 사원들에게 불경을 강연하였다. 동물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고 왕궁에서 쓰는 고기도 시장에서 사들이었다.
광종 기사 20년(969)
기사 20년(969) 겨울 11월에 왕의 아우 욱(旭)이 죽었다.
광종 경오 21년(970)
경오 21년(970)에 왕이 귀법사(歸法寺)에 갔다.
광종 신미 22년(971)
신미 22년(971) 겨울 12월 임인일에 지진이 있었다.
광종 임신 23년(972)
임신 23년(972) 봄 2월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에 대사령을 내렸다.
이 해에 양연(楊演)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내의시랑 서희(徐熙) 등을 송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선사하였다.송나라 황제가 조서를 보내 왕의 식읍을 더 주고 추성 순화 수절 보의 공신(推誠順化守節保義功臣) 칭호를 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 병부상서를, 부사(副使)인 내봉경 최업(崔業)에게는 검교 사농경 겸 어사대부를, 판관(判官)인 광평시랑 강례(康禮)에게는 검교 소부소감을, 녹사(錄事)인 광평원외랑 유은(劉隱)에게는 검교 상서 금부랑중을 각각 주고 아울러 관고(官誥)를 주었다.
광종 계유 24년(973)
계유 24년(973) 봄 2월에 백사유(白思柔)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광종 갑술 25년(974)
갑술 25년(974) 봄 3월에 한린경(韓藺卿)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이 해에 서경의 승려 연가(緣可)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잡혀 죽었다.
중 혜거(惠居)가 죽으매 탄문(坦文)을 국사로 삼았다.
광종 을해 26년(975)
을해 26년(975) 여름 5월에 왕이 병 들어 갑오일에 정침에서 죽었다. 재위 연수는 26 년이요, 향수는 51 세였다. 왕이 즉위초에는 신하들을 예절로 대우하고 정사 처리에 밝았으며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선비를 중하게 여기며 밤낮으로 근면하여 정치가 잘 될듯도 하더니 중년 이후에는 참소를 듣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으며 불법을 혹심하게 믿었고 사치에 제한이 없었다.
시호를 대성(大成)으로, 묘효를 광종(光宗)으로 하였다. 송악산 북쪽 기슭에 장사 지내니 능호는 헌릉(憲陵)이었다. 목종(穆宗) 5년에는 선렬(宣烈)로, 현종(顯宗) 5년에는 평세(平世)로, 동 18년에는 숙헌(肅憲)으로, 문종(文宗) 10년에는 의효(懿孝)로, 고종 40년에는 강혜(康惠)로 각각 시호를 더 붙이었다.
이제현의 평: 광종이 쌍기(雙冀)를 등용한 사실은 현명한 사람을 대하는 데는 일정한 틀이 없었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쌍기가 과연 현명하였더라면 어찌 임금을 착한 데로 인도하여 그로 하여금 참소를 듣고 형벌을 남용하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하지 못하였겠는가. 과거 제도를 설정하여 선비를 선발한 것은 광종이 본래부터 문화를 가지고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쌍기도 왕의 지향에 순응하여 왕의 미덕을 성취시켰더라면 문화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고 다만 부화한 문품을 내세워서 후세에까지 그 폐해가 막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