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추도 알다시피
나는 한평생 치마 두른 두발도치(두발 달린 짐승)는
온갖 종류 다 먹어봤네
. 숫처녀도 먹어봤고,
유부녀도 먹어봤고,
몸종도,
대갓집 마나님도,
신들린 무당도,
방물장수도,
수절 과부도,
궁녀도.
그러나….”
우 첨지는 탁배기 한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딱 하나 못 먹은 게.”
뜸을 들이던 우 첨지가 말을 이었다.
“여승이야.”
헐헐처사가 ‘헐헐헐헐’ 너털웃음만 허공에 날렸다.
“평생소원일세. 나 좀 도와주게.
이 소원을 못 풀면 죽어서도 구천을 맴돌 거야.
처사님. 나 좀 살려주시오.”
맨날 땡추라 부르다가 궁하면 처사다.
천석꾼 부자에 천하의 노랑이 우 첨지는
거지가 와도 식은 밥 한번 주는 법이 없지만
주색잡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처사님, 이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불가능한 일이오?”
“글쎄.”
헐헐처사가 술자리에서 일어서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가사장삼을 잡는 우 첨지를 뿌리치고
처사는 떠나갔다.
중도 아니고,
관상쟁이도 아니고,
지관도 아니고,
수행하는 도사도 아닌 헐헐처사는
일정한 거처 없이 구름 따라 바람 따라
‘헐헐’ 웃음만 흘리고 다니는 괴짜다.
다음 날
우 첨지가 술이 깨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글쎄’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우 첨지는 눈이 빠지게 처사를 기다렸다.
보름이 지나서야 주막에 사동이 달려와
헐헐처사가 나타났다고 알렸다.
우 첨지는 처사를 주막 안방으로 모시고
너비아니 안주에 머루주로 대낮부터 술판을 벌였다.
두 사람은 술에 취해 주막을 나왔다.
처사가 앞서고 우 첨지가 뒤따랐다.
석가탄신일이 며칠 남았는데
날씨는 초여름처럼 더워 두 사람은 연신 땀을 훔쳤다.
거의 이십여리를 걸었다.
두 사람은 여승들만 수행하는
음곡사로 가는 산길에 접어들었다.
얼마나 올랐나.
앞서가던 헐헐처사의 손짓에
우 첨지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개울 건너 음곡사 소유의 밭에서
여승 하나가 김을 매고 있었다.
기나긴 사월,
해도 떨어지고 숲속에 어둠살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 새소리뿐인 적막강산에
개울 건너 밭매는 여승과 헐헐처사,
그리고 우 첨지뿐.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그때 여승이 일어나 호미를 나뭇가지에 걸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밭가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승복을 모두 벗어 밭둑에 놓고
발가벗은 채 개울로 내려가 멱을 감았다.
우 첨지는 개울을 돌아서 건너
여승이 밭둑에 벗어놓은 옷을 집어들었다.
얼마 후 멱을 감은 여승이 밭둑으로 올라왔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옷이 없어진 것이다.
숲에서 우 첨지가 벌거벗고 나타나
여승을 안고는 옷을 깔아놓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 발버둥치며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쳐봐도
돌아오는 건 가느다란 메아리뿐이었다.
한식경이 지나
우 첨지가 바지춤을 추켜올리며 숲속을 나왔다.
헐헐처사와 함께 부리나케 산길을 내려가는데
컴컴해지는 숲길에서 등짐을 진 오 서방을 만났다.
“첨지 어른, 처사님, 여기는 웬일이십니까요?”
초파일 준비를 한다고
팥을 한자루 지고 오르던 오 서방이
대답도 없이 헐레벌떡 산을 내려가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 날 난리가 났다.
음곡사 여승 하나가 웬 남정네에게 겁탈을 당하고
나뭇가지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문이
온 고을에 파다하게 퍼졌다
. 음곡사의 초파일은
부처님 오신 기쁜 날이 아니라
자살한 스님의 다비식을 올린 슬픈 날이 됐다.
고을 사또의 진두지휘로 수사가 시작됐다.
헐헐처사와 우 첨지가
용의자로 체포돼 옥에 갇혔다
. 다음 날부터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을 판이었다
. 두 사람만 갇혀 있는 옥중에서 벌벌 떨던 우 첨지가
헐헐처사에게 매달렸다.
결국 우 첨지는 재산의 반을 내놓기로 하고 풀려났다.
엄청난 돈으로 음곡사의 비가 새는 요사와 법당을 중건하고,
고을을 가로지르는 용미천 돌다리 공사를 재개했다.
자살한(?) 여승에게도 무거운 전대가 돌아갔다.
밭매던 여승은
삼십리 밖 나루터에서 잔술을 팔며,
실제로는 돗자리를 깔고 몸을 파는 들병이였다.
자살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전대를 받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음곡사 마당에서 행해진 다비식도 가짜였다
. 헐헐처사가 총감독을 하고
나루터 들병이, 사또, 음곡사 주지,
등짐을 지고 가던 오 서방이 출연하여
마당극을 펼친 것이다.
너무나 감쪽같은 연출이라
두고두고 우 첨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 첨지는 평생소원이었던
여승(?)에 대한 욕심을 풀었지만
재산의 반이 날아가고 매독에 걸렸다.
첫댓글 헐 ~~~~ !!
잘못하면 망하는법이죠
ㅎㅎㅎ 고소하네요ㆍ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기꾼은 있었네요
거기에 사또까지 가세하면 안속을사람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