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의 비잔티움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니카 봉기 당시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출할까 고민했지만 테오도라가 “제국은 아름다운 수의"라며 도망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 말마따나 유스티니아누스의 관은 그의 이름으로 거둔 승리의 장면들을 새긴 수의로 덮였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뒤는 테오도라의 조카 소피아와 결혼한 조카 유스티누스 2세가 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에게 반대할 기미만 보여도 숙청을 했지만, 막 즉위한 새 황제 유스티누스는 삼촌과는 다른 방식을 선택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잔티움 제국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번성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바르인에 대한 연공 지불은 중단되었는데, 이 조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아바르인이 랑고바르드인과 동맹을 맺고 공통의 적 게피드 왕국을 공격한 것이다.
이후 아바르인은 게피드 왕국이 지배하는 판노니아로 건너가 정착한 뒤 남쪽과 서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랑고바르드인들은 서쪽으로 도망쳐서 568년 이탈리아를 침입했다. 이미 수십 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이탈리아에게는 저항할 힘이없었다. 570년대에 북이탈리아가 랑고바르드인들의 손에 들어갔고, 그다음 20년 동안 남쪽을 압박하여 결국 베네벤토에 공국을 세웠다. 비잔티움 제국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겨우 다시 정복한 이탈리아 대부분을 상실했으나(로마와 라벤나만 겨우 지킬 수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탓에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유스티누스가 페르시아에 대한 연공 지불을 거부하자 572년 페르시아가 곧장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인들은 아파메이아(지금의 시리아 칼라트알마디크)와 다라를 점령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더 많은 연공을 바치며 평화 조약을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스페인 지방과 아프리카의 비잔티움 제국 영토도 공격에 노출되었다.
유스티누스 2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이 좋지 않았다(사료에 따르면 다라를 빼앗긴 후 미쳐 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황제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아우구스타 소피아가 권력을 잡았으나, 곧 근위대장이자 유스티누스의 측근인 티베리우스와 권력을 공유하게 되었다. 574년에 부제로 임명되고 황제에게 입양되어 유스티누스가 사망하는 578년까지 실질적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그 후 자연스레 제위에 올라 티베리우스 2세가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적 몰락은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고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옮겨 갔다. 카파도키아 출신군사령관 마우리키우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는 마침내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평화 조약을 목전에 두고 있는 579년 후스라우 1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흐르마즈드4세[보통 이 이름은 호르미즈드(Hormizd)라 표기되고 저자 역시 이에 따랐다. 하지만 사산 왕조 시대기록에는 오흐르마즈드(Ohrmazd)로 나타나기 때문에 당대의 발음에 가까운 표기를 택했다.]는 전쟁을 이어 갔다. 마우리키우스와 가산 왕국의 왕 문디르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의 원정군은 580년과 581년 페르시아 영토로 진군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승리를 선언할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동안 발칸반도에서는 아바르인에게 그토록 많은 연공을 바쳤음에도 명목상으로 아바르 제국에 복속된 다뉴브강남쪽 슬라브 제국의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아바르 제국은 582년에시르미움을 점령했다.
티베리우스는 이해에 갑작스레 죽었지만, 이미 마우리키우스를후계자로 선포한 다음이었다.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제국의영토에 가해지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마우리키우스는 행정부를재편성하고 584년 그리고 591년 일종의 총독부에 해당하는 엑사르카투스Exarchatus를 라벤나와 카르타고에 설치했다. 총독인 엑사르쿠스Exarchus가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여 엑사르카투스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외적의 침략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한 것이며, 이 조치는아프리카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동맹인 프랑크 왕국의 도움을 받아 북이탈리아에서 랑고바르드인을 격파하긴 했지만, 엑사르카투스는 제국의 지배권이 무너지는 것을 간신히 연기했을 뿐이다. 군사령관 마우리키우스와의 불화를 경험한 로마 교회는, 로마 귀족 출신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년. 후일 '대교황'이라 불렸다)의 지도 아래 랑고바르드인과의 직접 교섭에 착수했다.
그레고리우스는 통치자들이 교회의 일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며(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참견은 아직 생생했다),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마우리키우스의 정책에 반대하는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들이 5세기 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에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특히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는 보편 교회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여 전통적인 로마의 수위권에 도전하는 처사로 간주했다.
590년 페르시아 왕 오흐르마즈드가 쿠데타로 몰락하며 동방에서 페르시아의 위협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해소되었다. 나중에 후스라우 2세가 되는 그의 후계자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도망쳐서 마우리키우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젊은 왕자가 옥좌를 되찾을 수 있게 돕기로 결심했다. 서로 끝없는 전쟁을 벌이던 두 제국(세계의 두 눈'으로 비유되기도 한다)이 협조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현상 유지에 대한 욕망이 강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듬해에 후스라우는 권좌를 되찾았고, 양 제국은 과거와 정반대 내용의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옛 영토 다라와 이베리아 지역을 돌려받은 데 더해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 지역까지 손에 넣었다.
마우리키우스는 동부 국경 지역의 군대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발칸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비잔티움 군대는 수차례 원정(몇몇은 황제가 직접 지휘했다)을 통해 슬라브인을 다뉴브강 너머로 몰아냈다. 그러나 황제가 관례상 군대에 휴식이 주어지는 겨울에도 원정을 명령하자 분노한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602년겨울 반란군 규모는 더욱 커졌다.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백인대장 포카스가 이끄는 반란군은 심각한 식량 부족 때문에 마우리키우스에 불만으로 충만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르렀다. 포카스는총대주교의 집전 아래 대관식을 치렀다. 마우리키우스는 아들들과남자 친척들, 측근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남자 친척들이 학살당한 이래 처음 있는 피비린내 나는 정권 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