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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詩性) 혹은 시적인 것에의 의지
―곽은주 시집 『풋사과 머뭇거리다』에 대하여
이은봉(시인, 광주대 명예교수, 전 대전문학관 관장)
시인이라면 누구라도 시를 쓰는 동안 ‘시성(詩性)’ 혹은 ‘시적인 것’에 깊이 몰입하는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시성 혹은 시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간략하게 정의적으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이 예술성, 심미성, 작품성 등과 근친의 관계에 있는 것까지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시성(詩性) 혹은 시적인 것이 예술성, 심미성, 작품성 등과 근친의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대상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의 감정(感情)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시성 혹은 시적인 것과 관련하여 인간의 감정(感情)을 말하려다가 보면 그것이 감(感)과 정(情)의 결합체라는 것부터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느낌이라고 번역하는 감(感)은 대상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으로 주체의 마음에 투사되는 이미지를 가리킨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온(五蘊)의 과정, 곧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과정에 색(色)의 직접적인 반영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마음속에 현현되는 색, 곧 이미지는 곧바로 정(情)으로 내화(內化)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형성된 마음속의 감과 정, 곧 감정(感情)을 두고 흔히 정서(情緖)라고도 부른다. 많은 사람이 시를 두고 흔히 정서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정화된 감정을 두고 정서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감(感)이 내화된 정(情)은 마음속에서 지(志)를 낳고, 지는 다시 의(意)를 낳고, 의는 다시 식(識)을 낳는다고 한다. 그리고 식(識)이라는 진리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현현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불립문자라고 하더라도 ‘언어’로 현현되지 않는 식(識)은 공유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오온(五蘊)의 과정, 곧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과정으로 설명하지만 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시(詩)도 앎의 한 형식, 곧 인식의 한 형식이라고 하지 많을 수 없다. 시의 인식의 방식이 학술이나 과학의 그것과는 다르더라도 말이다. 학술의 인식이나 과학의 인식과 달리 시의 인식은 감과 정의 방식, 곧 감정의 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인식이 감정의 방식을 취한다는 것은 시의 인식이 감정 사유의 방식을 따른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논리 사유가 아니라 감정 사유의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이때의 감정 사유를 두고 사람들은 흔히 정서 사유, 이미지 사유, 형상 사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엇이라고 부르더라도 이들 사유, 곧 형상 사유가 논리 사유(개념 사유)보다 급하고 빠른 것은 사실이다.
시를 시답게 만드는 특징이 정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를 시답게 하는 특성, 곧 곧 시성을 두고 사람들은 다른 말로 형상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형상화되지 않으면 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형상을 이루는 데 가장 긴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정서이기는 하다. 하지만 형상을 이루는 데는 정서 이외에도 작용하는 요소가 없지 않다. 정서 이전에 지각하는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이야기도 형상을 이루는 데 매우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시적인 것을 만드는 자질이 무엇인가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시가 자연 친화적인 것, 대지와 분리되기 이전의 주체가 갖는 화합 혹은 일치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이때의 화합 혹은 일치의 정서를 두고 조화 혹은 균형의 정서라고 불러도 좋다. 시는 본래 하나에로의 정서, 곧 사랑과 평화의 정서를 지향하는 언어예술 형식이 아닌가. 주체와 세계의 합일을 꿈꾸는 것이 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합일의 세계는 장년의 시간보다는 유년의 시간에 풍부하게 체험되기 마련이다. 기존의 많은 시가 유년의 세계를 지향하거나 시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유년의 세계를 지향하거나 시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는 유년의 언어나 시원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시의 언어가 추상적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 생활의 언어에 가까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가 유년의 시간, 유년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곽은주의 이번 시집의 제목이 『풋사과 머뭇거리다』인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이번 시집 제목에 드러나 있는 ‘풋사과’는 ‘아직 덜 익은 사과’를 가리킨다. 따라서 ‘풋사과’가 유년의 것, 시원의 것을 상징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집 제목에 나오는 ‘머뭇거리다’라는 동사도 미숙한 주체의 어물쩡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 ‘머뭇거리다’가 사물의 태도가 아니라 사람의 태도를 뜻하는 단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이러한 얘기를 하는 까닭은 ‘시성(詩性) 혹은 ‘시적인 것’이 항용 ‘의인관(擬人觀)적 세계관’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의인관적 세계관은 서정시의 본질적 세계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의 안에서는 신과 자연이 인간과 동등한 자격으로 존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물이나 정신도 인간처럼 참여하는 것이 시의 세계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의인관적 세계관은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를 너(du)로, 곧 인간 자신으로 파악하는 비논리적 인식 방식을 가리킨다, 모든 존재를 사람처럼 받아들이고 사람처럼 표현하는 세계관이 의인관적 세계관이라는 얘기이다.
성질 빼기 보통 아니라는
엉겅퀴도 순허지
구기자도 빨간 열매 감추는
가시 있더라
어여쁜 볼
두근 반 한숨 반 주머니
스란스란 분홍치마 허리춤에 달려
내 안다
니 장독대 우두커니 서서
먼 산 두견 울 때
서러운 가시
꼭꼭 감추었어도
볼 붉게 시드는 것을
―「봉숭아」 전문
이 시의 중심 대상인 ‘봉숭아’는 자연물 중의 하나, 특히 식물 중의 하나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시에서 ‘봉숭아’는 사물로 존재하지 않고 인간으로 존재한다. 우선은 1연의 중심 소재인 ‘엉겅퀴’와 ‘구기자’가 사람으로 표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여쁜 볼”을 하고 “두근 반 한숨 반 주머니/스란스란 분홍치마 허리춤에 달려” 있는 2연의 봉숭아, “장독대 우두커니 서” 있는 봉숭아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시는 이처럼 ‘엉겅퀴’, ‘구기자’, ‘봉숭아’, ‘두견’ 등을 의인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성 혹은 시적인 것을 확보한다.
물론 이 시의 이러한 특징을 가리켜 의인법이 실현된 예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뿐만 아니라 시의 발상 과정에 적용되는 의인법은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른바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의인법이기 때문이다. 의인법을 바탕으로 하는 의인관적인 세계관을 두고 시의 기본적인 발상법이라고도 부른들 어떠하랴.
시의 기본적인 발상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의인관적 세계관은 의인관적인 언어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보통이다. 의인관적 세계관이 좀 더 풍부하게 작동되는 언어는 신화의 언어, 곧 시원의 언어라고 해야 마땅하다. 신화의 언어, 곧 시원의 언어는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이 구획되기 이전의 언어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신과, 자연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던 시절의 언어가 예의 언어라는 것이다.
이때의 언어가 역사적으로는 원시를 지향하고, 개인적으로는 유년을 지향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원시의 언어, 유년의 언어는 문법적 자질이나 구조가 완성되기 이전의 단어문이나 명사문이기 일쑤이다. 곽은주의 시가 특별히 명사문을 지향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바다 물살에 하얀 살 말갛게 드러낸 나뭇가지
뿌리부터 잔가지까지 벌거벗은 통 것으로 햇볕 반사하는
검은 고요
오래 앉아 있어도 건지지 못한 노래
조각난 숲의 도착
―「표류」 전문
이 시는 모두 4개의 명사형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4개의 문장은 모두 “나뭇가지”, “고요”, “노래”, “도착” 등의 명사가 각 문장의 서술어로 작용한다. 이처럼 명사가 서술어를 대신하게 되면 독자의 머릿속에서 시적 형상이 훨씬 강화되기 쉽다. 명사형 문장은 각각의 문장이 지니는 형상의 밀도를 증가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얘기이다.
명사형 문장은 원시의 문장이고 유년의 문장이다, 바꿔 말하면 시원의 문장이고 애초의 문장이 명사형 문장이다. 기본적으로 시는 시원에의 지향성, 원시에의 지향성을 지닌다. 시가 지니는 이러한 특징을 두고 신화시대에의 의지라고 불러도 좋다. 시원의 시대, 원시의 시대, 신화의 시대일수록 자연과의 분리에 따른 대립이나 갈등이 적었으리라는 것은 명확하다. 조화와 균형, 합일과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 시 정신의 근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말 문장의 독특한 특징인 명사문은 리듬을 살리기에 좋다는 점에서도 시성 혹은 시적인 것과 친연성을 갖는다. 리듬을 살리기에 좋다는 것은 서정적 정취나 서정적 분위기를 살리는 데 좋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다음의 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은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점, 점 흩어져
붉은 선혈
선언서 찬란히 읽어
새카만 눈동자 알알이 바치는
가을의 제
하늘에 빌고
땅에 빌고
마음에 남아 맴도는 이름들
마지막으로 빌고
한밤 타닥타닥 불꽃
첫새벽 안개등
붉게 사르는
점
점 뭉쳐
가을의 제(祭)
―「크림슨 맨드라미」 전문
이 시는 ‘크림슨 맨드라미’, 곧 진홍색 맨드라미가 핵심 대상으로 하고 있다. 모두 5개의 명사형 문장을 통해 시적 화폭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수식어를 포함에 각 문장의 서술어를 정리해 보면 “붉은 선혈”, “가을의 제”, “맴도는 이름들”, “타닥타닥 불꽃”, “가을의 제(祭)”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술어를 사물을 지시하는 명사로 받아들이려면 항용 조사나 어미를 생략하기 일쑤이다. 조사나 어미를 생략하게 되면 이미지가 강화되기는 하지만 자칫 문맥을 잃을 수 있다. 문맥을 잃게 되면 구문의 내포가 혼란해지기 마련이다. 곽은주의 이 시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인데, “첫새벽 안개등/붉게 사르는”과 같은 구절이 특히 그렇다. “새벽 안개등(을)/붉게 사르는”으로 읽어야 할지 어쩔지 혼란스럽다는 뜻이다.
이들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명사형 문장의 서술어는 이미지를 매개로 하는 시적 형상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시인이 추구하는 진실을 강화하는 데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명사형 문장은 주체의 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객체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 시는 ‘크림슨 맨드라미’, 곧 진홍색 맨드라미의 강화된 이미지를 통해 “가을의 제(祭)”를 느끼도록 하는 데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크림슨 맨드라미’, 곧 진홍색 맨드라미라는 이미지를 강화해 가을의 정취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시인의 의도라는 것이다. 이 시가 시원의 정서, 신화의 정서, 나아가 유년의 정서와 함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다음의 시는 몇몇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봄의 정취를 형상화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구름에 뜬 듯 배밭
꿈인 듯 몽글
분홍 볼 부비는
4월 언덕
과수원에 두고 온 소녀는 아직 소녀
세상을 다 돌아
꿈인 듯 몽글
―「강진 가는 길」 전문
모두 7행의 이 시 역시 명사형 문장으로 일관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시의 명사형 문장은 모두 3개라고 해야 옳을 듯싶다. “몽글”로 끝나는 시의 행이 있기는 하지만 “몽글”은 “몽글몽글”의 줄임말로 부사로 받아들여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몽글”을 서술어로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 시에서 3개 명사형 문장의 종결어미는 “배밭”, “4월 언덕”, “소녀”이다. 이들 세 개의 이미지는 이 시의 시인이 “강진 가는 길”에 만난 핵심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들 장면을 통해 시인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 말할 것 없이 그것은 봄의 정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 개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으로 “강진 가는 길”에 만난 봄의 정취를 그려내고 싶은 것이 시인의 의도라는 뜻이다.
시에서 명사형 문장은 이미지 중심의 형상을 통해 서정적 정서를 고무하는 데 유효하다. 그것이 시의 본질적 정서인 시원의 정서, 유년의 정서, 동심의 마음 등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성 혹은 시적인 것을 강화하기 위해 시인 곽은주가 시도하는 언어(문장)의 특징은 다음의 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유사한 통사구조를 반복하는 연의 병렬을 통해서도 시성 혹은 시적인 것을 고무하고 있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음양의 조각 돌기둥
촛불만큼 비추어
가슴 찌르는 것은
조금씩 돌 쪼아내던
쇠망치 소리
지붕 구멍 내놓아
촛불만큼 돌바닥 비추어
남김없이 태워 오르는 것은
바닥 끌어안은
웅얼웅얼 엎드린 기도 소리
―「수도원」 전문
이 시는 모두 2개의 명사형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개의 명사형 문장을 병렬시키는 것을 통해 시성 혹은 시적인 것을 고취하는 것이 이 시다. 그렇다. 이 시는 유사한 구조로 되어 있는 2개의 명사형 문장을 각 연으로 병렬시키는 것을 통해 시적 흥취를 살리고 있어 주목된다. 물론 5행씩 분할된 것이 이 시의 각 연이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이 시에서 2개 연을 이루는 각각의 명사형 문장은 모두 “소리”로 끝나는 서술어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 1연은 “쇠망치 소리”로 매조지가 되고, 2연은 “가도 소리”로 매조지가 되고 있다. 다소간 차이가 있기는 하더라도 이 시에서 시인 곽은주가 연의 병렬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시성 혹은 시적인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처럼 그는 명사형 문장을 반복하거나, 그것이 이루는 명사형 연을 반복하는 방식을 통해 시성 혹은 시적인 것에 이르려고도 한다. 물론 더러는 유사 구문의 행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시적 효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그이기도 하다. 행의 반복이든, 구문(문장)의 반복이든, 연의 반복이든 반복을 통해 그가 자신의 시에서 이루려는 일차적인 목표는 리듬이다.
북극성 안보일 때
함께 있을게
안개 내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우뚝 서 있을게
등불 들고 있을게
―「등대도 견디는 중」 부분
이 시에서 시인은 각 문장의 조건절을 유도하는 연결어미 “~ㄹ 때”를 두 번 반복하고, 약한 동조를 뜻하는 종결어미 “~있을게”를 세 번 반복하면서 시행을 전개한다. 물론 시행의 끝에 “~ㄹ 때”를 반복하거나, “~있을게”를 반복하며 시인이 노리는 것은 리듬의 효과다. 이 시를 통해 그가 추구하는 리듬의 효과가 운과 율의 효과까지 포괄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또한 시성 혹은 시적인 것을 고무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술형 종결어미를 반복해 리듬의 효과를 얻으려는 그의 노력은 이 시의 이어지는 부분에도 계속되고 있다.
회오리 광풍 조각배 뒤집을 때
굵은 밧줄 닻 던져
빛 비추고 있을 거야
파도 뚫고
반짝반짝
손 내밀 거야
큰 소리 부르고 있을 거야
여전한 눈매로 마주 바라며
항구 안식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
―「등대도 견디는 중」 부분
위 시에서는 “~거야”라는 서술형 종결어미를 반복해 각운을 포함한 리듬의 효과를 얻고 있다. 이 시 앞부분의 서술형 종결어미 “~있을게”와는 달리 여기서는 “~거야”라는 서술형 종결어미를 반복해 시성 혹은 시적인 것에 이르려 하는 것이 그이다.
이처럼 시인 곽은주는 주체가 깨닫는 진실이나 진리의 구현보다는 언어(문장)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시의 심미성 혹은 예술성에 이르려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의 심미성 혹은 예술성이 낭만성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낭만성 또한 중요한 미적 정서의 하나이다. 더불어 낭만주의 시대의 전개와 함께 시라는 언어예술 장르가 문학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낭만성과 유리된 채 좋은 시가 태어나기는 어렵다. 그렇다. 낭만주의 시대가 끝났다고는 하더라도 낭만성을 자양분으로 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시가 태어나기는 힘들다. 심미 의식의 하나로 낭만성을 구현하는 가장 보편적인 삶의 방식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이야말로 각자의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낭만성이라는 이름의 심미 의식을 실현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해야 옳다.
곽은주의 이번 시집에도 심미 의식의 하나로 낭만성을 구현하고 있는 여행시는 적잖다. 여행 중에 만나는 경험들과 사물들이 불러일으키는 감흥 또한 그의 시의 중요한 내용이 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번 시집에 드러나 있는 그의 여행시는 국내 여행 중에 만나는 감정과 풍경을 제재로 한 것도 있고, 해외여행 중에 만나는 감정과 풍경을 제재로 한 것도 있다. 해외여행 중에 만나는 감정과 풍경을 제재로 한 시는 국내 여행 중에 만나는 감정과 풍경을 제재로 한 시에 비해 훨씬 적기는 하다. 「동해 북쪽」, 「얼어붙은 창」 정도가 해외여행 중에 만나는 감정과 풍경을 제재로 한 시이기 때문이다. 국내 여행 중에 만나는 감정과 풍경을 제재로 한 시가 훨씬 더 많은데, 「천왕사 동자」, 「대원사」, 「강진 가는 길」, 「끝 봄」, 「산청에 비」, 「월출산 이유」, 「흩뿌려진 다도해」, 「민들레 꽃대」, 「소년의 비탈 마을」, 「섬 동백」, 「고속도로」, 「바다 감정」, 「강진만 따라 내릴 때」, 「등대도 견디는 중」, 「보내고 맞이하고」 등이 그 예이다,
다음의 시는 이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예이다.
계곡물 거슬러 산사 오르는 여인
산사 돌아 모질게 흘러가는 시냇물
법당 뒤 언덕
비탈진 진달래 붉어
법을 외어도
두견 울고
불타버린 절에
함께 타버린 연등들의 소원
앞산 새싹 돋은 활엽수 묵은 침엽수 어우러져
주저주저 왔는데
멈칫멈칫 계곡물 흘러
꽃등 걸어 초파일
새 등을 달았네
―「대원사」 전문
이 시는 ‘대원사’라는 사찰을 찾았던 체험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시의 중심 대상인 대원사가 어디에 있는 사찰인지를 바로 알기는 어렵다. 대한민국이 ‘대원사’라는 이름의 여러 사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가 남도 기행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가 찾은 대원사가 경상남도 산청의 대원사(大源寺)인지 전라남도 보성의 대원사(大原寺)인지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시인 곽은주는 자신의 대원사 여행을 자신의 시에 매우 객관적으로 투사하고 있다. 이는 시인이 여행의 낭만성을 십분 감추는 데서도 드러난다. 시인이 저 자신을 “계곡물 거슬러 산사 오르는 여인”이라고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것은 확인된다. “앞산 새싹 돋은 활엽수 묵은 침엽수 어우러져//주저주저 왔는데” 등의 구절에 이르면 시인의 주관적인 태도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곽은주의 이번 시집에는 기행시도 상당히 들어 있지만 인물 형상시도 상당히 들어 있다. 「외지 직장인」, 「원복이」, 「창수네 대문 말뚝」, 「소년의 비탈 마을」 등의 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가 하면 자연의 사물을 객관적으로 노래하는 시도 적잖이 들어 있는 것이 그의 이번 시집이다. 자연은 본래 물질로 구성되어 있거니와, 물질은 사물로 구현되기 마련이다. 사물이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대상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연은 언제나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현현되기 마련이다. 그의 이번 시집에는 그러한 뜻에서의 사물이 시로 형상화된 예도 허다하다. 이들 사물 존재의 형상을 노래한 시, 이른바 풍경시를 통해 시인이 어떤 특별한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풍경시 일반이 그렇듯이 그에 의해 생산된 풍경시도 무의미한 이미지나 장면을 투사하는 데서 그치기 일쑤이다.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이미지나 장면을 재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심미적 쾌감을 주는 것이 그의 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빗자루」, 「첫눈」, 「바람」, 「개구리」, 「산청에 비」, 「비어 있는 집」, 「산밭」 등의 시가 그 실제의 예이다. 다음은 그것 중의 하나인 「비어 있는 집」의 전문이거니와, 이 시 또한 명사형 문장으로 일관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그러한 특징 또한 시성 혹은 시적인 것을 강화하기 위한 그의 오랜 노력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이 시를 독자 여러분과 큰소리로 함께 읽으며 글을 맺는다. (곽은주 시집 『풋사과 머뭇거리다』(2024) 해설)
소금 바람에 녹슨 문 열면
옛적 사람 바다를 망망히 보던 창가
창문에 빛 한 다발
나무계단 삐걱 소리
거친 일손 비로소 녹이던 따뜻한 찻잔
거두지 못한 빈 그물
배 바닥 붙은 소금 거품일랑
따뜻이 말려지던 포구 향해
널어 논 그물
태풍에서 돌아오던 어부
창밖 바라보며 함께 말려지던 의자
―「비어 있는 집」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