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예수교장로회 아름다운 교회 | |
연합의 3가지 목표 비전 Vision |
①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과의 연합(요15:5,17:11) ② 주님처럼 섬김의 본을 위한 연합(요13:14-15) ③ 선함과 아름다운 실현을 위한 연합(시133:1-3) |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
「평화의 땅」이라는 뜻의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은 이미 모세 때부터 있어 왔는데, 그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평화가 절실한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원 1천년 전 다윗이 수도로 정한 이래 36번이나 전쟁에 함락되었고, 점령자의 이름이 바뀌었으며 열 차례나 무너졌던 피의 살육이 점철된「 전쟁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성채는 1537년 터어키의 오스만 제국 당시 재건된 것이다. 예루살렘 성내 올드 시티라고 부르는 곳은 지금도 아랍 지역, 유대 지역, 기독교 지역,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구획되어진 채, 종족마다 종파마다 갈등과 반목을 계속하면서 외견상으로만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아주 좋은 예로 금요일은 이슬람의 성일이고,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 일요일은 기독교인들의 주일(主日)로 저마다 종교의식에 따라 엄격히 지켜진다. 지금은 황금색 돔의 오마르 회교 사원이 서 있는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 사진은 예루 살렘 신시가지 홀리랜드 호텔에 전시되어 있는 예수 당시 성전건물의 모형이다.
1. 교회 행사 및 소식
➊ 다음주 모임과 행사
- 당회원, 교사회, 생일축하행사, 전도시상.
➋ 담임목사님 총회 목사계속교육 참가하십니다.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➌ 김현우집사님 이사했습니다. 새 처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관심과 기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 김해시 삼방동 한일아파트 5동 204호
➍ 상남동 주민센터에 교회명으로 민원봉투가 제작, 대동아파
트 단지 53군데 게시판에 교회명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용시 참고하시고, 전도에 많은 발판이 되도록 기도
많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➎ 맥추감사절은 7월 7일(첫주일)에 드리겠습니다.
➏ 예배시간 10분 일찍 와 주시기 바랍니다.
➐ 신천지, 구원파 조심조심! 담임목사를 비방하고 교회를 비
방하고 무료성경공부를 빌미로 유혹하는 자가 많으므로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마사다 요새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 하스몬가(家)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롯왕이 개축하였다.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같은 모양을 한 바위산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둘레 1,300m다. 마사다에 얽힌 사건을 역사책 ‘유태전쟁’에 자세히 기록한 요세푸스는 서기 66년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태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나중에 조국에 등을 돌리고 로마군에 넘어갔지만,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싸움을 후세에 전했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이었다. 그 뒤 유태왕 헤로데가 기원전 35년 여기에 성벽을 두르고 무기와 식량을 저장했다. 그는 로마에 기대어 유태를 통치했는데 유태인들은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았다.게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까지 유태 왕국을 자기에게 달라고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게 된 헤로데는 로마가 자기를 배신할까 봐 두려워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를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로데가 죽은 뒤 마사다에는 로마군이 머물렀으나,유태전쟁이 일어나자 반란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서기 70년 로마군은 유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웠다. 모든 유태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그 중 한 무리가 마사다로 도망쳐 로마군에 항거했다.
➊ 재건총회 목사계속교육
-일시 : 6월 24일(월)-27일(목) 3박4일
-장소 : 제주 명성 아카데미 하우스
-강사 : 최영기, 김사형, 강정우 목사
그레데 바울감옥
그레테는 그리스 남쪽 지중해 상의 가장 큰 섬중 하나로 길이가 256km 넓이가 64km정도 된다. 그레테는 에게해와 리비아해를 경계지으며 유럽과 아프리카를 구분하는 점이된다. 많은 섬들과 깊은 계곡이 있고 계곡사이에는 기름진 기름진 토양이 형성되었다. 이 계곡 중사마리아 협곡은 유럽에서 가장 길고 깊은 계곡으로 대자연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지역마다 변화무쌍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곳이 황량하다 싶으면 다른 곳은 숲이 우거져 온화함을 더해준다. 마을들은 과일나무와 채소로 가득채워져있다. 올리브나무, 오렌지, 포도원, 각종 채소들이 자란다. 오래된 돌로 진어진 농가, 수도원 산능선의 마을들, 성채, 경사지에 남은 교회들의 잔재같은 것이 그레테의 시골 풍경이다. 해안은 때때로 험하여 사람들이 접근 못한 바위들로 되있기도 하지만 끝없는 모래와 자갈로 된 해안이 많이 존재한다. 그레테는 여러 야생식물로 유명하다. 밤나무, 상수리, 싸이프러스, 야자나무, 상수리나무 숲이 이곳저곳 위치한다. 바위가 많은 지역에는 각종 약초와 그레테 염소라 불리는 '크리크리'가 자란다. 역사위에서 언급한 환경을 기초로 그레테가 최고로 번성한 시기는 미노아 문명(그레테 문명) 때이다. 주전 2800-1150년 동안 그레테는 지중헤에서 가장 번성한 문명을 이루었다. 미노아인들은 궁전들을 지었는데 유명한 크노소스, 파이스노스, 말리아, 자크로스가 그 당시(주전 1700-1450) 지어졌다. 그들의 벽화와 도자기는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문명은 주전 1450년 산토리니에서 발생한 화산폭팔로 끝을 맺게된다. 그러나 이 것이 끝은 아니었다. 배를 이용한 상업은 계속이루어졌다. 페니키아, 시리아, 이집트인은 그들의 주요 무역대상이었다. 아가야인(미케네 문명)과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신도시인 라토와 압테라가 세워졌다. 라토(Lato)는 주전 7세기에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 식사 및 설거지 봉사자
<금주> 태영분, 장경연, 박부자, 자원자
<다음주> 전소현, 윤차선, 조금연, 자원자
암비볼리(Amphipolis)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要衝地)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아볼로니아(Apollonia)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는 데르마 만의 갑(岬)에 위치한 부산한 항구도시였다. 데살로니가 성읍은 유명한 에그나티아 가도와 북쪽으로 다뉴브에 이르는 대로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으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 성읍의 인구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마게도냐의 최대 도시였다. 주전 167년 마게도냐가 로마에 패하면서 수도가 암비볼리(Amphipolis)로 되었다가 주전 146년부터 데살로니가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Thermaic Gulf)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 B.C.106-43)는 이곳을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다. 이 도시는 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Civitaslibera)의 특권이 주어졌다.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의 도시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살전2:14-16).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살전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여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다(R.N.Longenecker).
**** 주일오전예배 /사회자 / 이종운 장로
트로이 유적지
트로이 유적은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러한 지리학적 위치는 바다와 너무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도 않으며 너무 멀지도 않아 교역의 어려움도 없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매우 적합하다. 그래서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전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갔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파해쳐진 9개층에 이르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된다. 슐리만은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일리아드 이야기를 믿으며 언젠간 꼭 트로이를 찾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자수성가 하여 중년에 이르러서는 백만장자가 된다. 돈이 모이자 슐리만은 바로 트로이를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슐리만은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인해 슐리만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 때 보물상자도 발견하게 되는데(이 때 발견한 보물상자는 트로이보다 1000년전의 유물이다.) 이 상자에는 16000여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까지 있었다.
묵상기도 ᠁᠁᠁᠁᠁ /늘은혜 성가대
예배의 부름 ᠁᠁᠁ / 요14:11
신앙고백 ᠁᠁᠁᠁᠁ / 사도신경
기원 ᠁᠁᠁᠁᠁᠁᠁ / 사회자
※. 찬송 ᠁᠁᠁᠁᠁ / 38장
성시교독 ᠁᠁᠁᠁ / No. 4
찬송 ᠁᠁᠁᠁᠁᠁᠁ / 342장
기도 ᠁᠁᠁᠁᠁᠁᠁ / 이종운 장로
성경봉독 ᠁᠁᠁᠁ / 사사기 1:22-36
특송 ᠁᠁᠁᠁᠁᠁᠁ / 늘은혜 성가대
설교 ᠁᠁᠁᠁᠁᠁᠁ / “쫓아내지 못하매”
봉헌찬송 ᠁᠁᠁᠁᠁ / 317장
봉헌기도 ᠁᠁᠁᠁᠁ / 한용균 목사
밀레도
밀레도는 ‘라트미안’(Latmian) 만의 남부 해안에서 불쑥 나와 있는 갑(岬소)에 위치한다. 아시아 서부 해안에 있는 이오니안 성읍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소아시아 서쪽의 출구역할을 하는 항구도시로 지금까지 유명한 관광지의 명성을 유지하는 곳이다.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의 귀환 때 들린 곳이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승선한 배는 밀레도에 기항하였다(행20:15).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행20:15). 디모데후서 4장 20절의 언급은 밀레도에 대한 또 다른 바울의 방문을 언급한다. 바울은 분명 여행 중에 밀레도를 통과하거나 혹은 그 근처를 지났을 것이라고 추측할수 있으며, 거기에 ‘드라비모’를 남겨 놓았다. B.C. 8C, 흑해 지역에 많은 식민지들을 세웠으며 이집트와도 교역했다. B.C. 608, 이집트 왕 바로 느고는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밀레도 사람들의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했다(왕하 23:29, 대하 35:20).
교회소식 ᠁᠁᠁᠁᠁ / 이종운 장로
※. 찬송 ᠁᠁᠁᠁᠁ / 23장
※. 축도 ᠁᠁᠁᠁᠁ / 한용균 목사
폐회 ᠁᠁᠁᠁᠁᠁᠁ / 성도의 교제
※. 표는 일어 서시기 바랍니다.
루스드라, 디모데의 고향
‘루스드라’는 평야지대의 구릉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중요 도시였으나, 지금은 작은 마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투사라이’에서 오른쪽으로 4km 떨어져 있는 계곡의 구릉지대에 있다. 루스드라는 32km 떨어진 이고니온과 96km 떨어진 더베를 연결하는 도로에 위치하였으며 디모데의 고향이다. 그 위치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885년 ‘스테렛’(J.R.Sterrett)이라고 하는 지리학자는 루스드라의 위치를 루가오니아 지역의 이고니온에서 약 29km 떨어진 터키의 마을 ‘하툰사라이'(Hatum Sarai : 숙녀의 저택) 북쪽, 커다란 언덕으로 보았다.
**** 주일찬양예배 찬양집회 오후3시00-
찬양 : 김현우 간사 와 “주 사랑” 찬양그룹
(박수조, 박성희, 김정윤, 조연신, 김상원, 이한나)
기도 : 오계란 집사
본문 : 신명기 26:16-19
가족찬송 : 장로님
설교 : 한용균 목사
“하나님을 인정하라”
찬송 : 두 손들고 찬양
기도 : 사회자
주기도문 : 오직 믿음으로
이고니온 메블라나 박물관
메블라나 박물관은 콘야인들의 자랑이다. 이 박물관은 콘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하다. 박물관에는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를 창시한 메블라나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궁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왕이 메블라나의 아버지 바하틴 벨레디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이색적으로 인상을 주는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탑은 1396년에 세워진 것이다. 터키 정부가 이곳을 박물관으로 개장한 것은 관은 1927년이다. 휠링 더비쉬의 창시자인 메블라나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던 이 박물관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휠링 더비쉬의 명성 때문에 1년에 백만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수도자들이 추는 더비시 춤판이다. 남성 무용수, 원통형 모자, 하얀 윗도리, 둥근 치마, 침묵 속의 댄스로 요약되는 더비쉬는 춤추는 자를 황홀의 경지로 이끌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러한 특수한 수련 방식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농후하다는 이유로 정통 이스람에서는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이스람은 알라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도록 할 뿐 개인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요일 예배 및 기도회 2013. 6. 26. 저녁7시 30분>
설교자 : 김가연 장로
성경본문 :
설교 :
현재명은 하란이다. 하란이라는 지명은 히브리어 '마른'이나 아카드어 '도로'라는데서 유래하였다. 하란은 '밧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하는데 (창 48:7) 하란과 같은 '도로'라는 의미이다. 리브가가 있었던 '나홀의 성'은 현재의 셀루기(Seruj)로 하란에서 서쪽으로 55km떨어진 틸나히리(Til-Nachiri)로 추정된다. 유브라데강스의 지류인 벨릭(Belik)강변에 위치하여 아브라함이 떠나온 우르와는 940km 정도떨어진 곳이다. 이곳은 동서를 잇는 대상(隊商)로였다. 주전 18/9세기, 갑바도기아 문서(Kultepe texts)의 앗시리아 상인의 사업편지와 법적인 문서에 하란은 당시 중요한 교차로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하란의 에훌훌(E-HULHUL)라 불리는 신전은 메소포타미아의 달신, 신(Sin)을 섬기는 중심지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이 하란 주변에 살던 셈족속이아니라 유랑하는 아람족속임을 고백한다(신 26:5).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란 땅을 자신의 고향이라 부른다(창 24:4). 갑바도기아 서판, 마리문서, 함무라비 법조문등을 보면 아브라함때 하란은 후리아인(Hurrian)과 아모리인들의 요소가 수메르-아카드인 기초하에 혼합된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다음주 예배 봉사위원
주일오전기도 : 김가연 장로
주일오후기도 : 장경연 집사
주일오후찬양 : 권사님
목화의 성이라는 뜻의 "파묵칼레"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신약성서의 골로새서에서 언급되는 히에라폴리스(성서상의 히에라볼리)이다. 히에라볼리는 석회를 함유한 온천지역에 세워진 도시였다. 1840미터 높이의 리코스 산 중턱 단애 위에 위치해 있는데, 단애의 높이가 무려 376미터에 이르러서 산 아래쪽 멀리서 보면 석회가 굳은 모습이 마치 하얀 목화성처럼 보인다고 해서 영어의 코튼 캐스틀(Cotton Castle)로 번역되는 터키어 파묵칼레라(PAMUKKALE)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산 위에서 수 천년을 두고 흘러내린 칼슘성분이 바위를 덮어 산비탈을 온통 순백의 덩어리로 변화시켰으며, 층층이 테라스 모양의 천연 욕조를 놓아 대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더구나 이곳의 온천수는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고 있어서 수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최초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한 군주는 버가모 왕국의 유메네스 2세라고 역사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 도시의 번성은 비잔틴 제국까지 계속되었으며 히에라볼리는 기독교의 대교구가 설치되어 기독교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사도 요한의 수제자중의 한사람이었던 '파파이스와 골소새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에바브라'가 복음 전파에 힘썼다.
**** 중보기도하기
① 온 성도가 날마다 성령충만하여 주의 듯을 분별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며 거룩한 삶에 힘쓰고 능력있는 전도자로 쓰임받게 하소서.
② 교회에 회심과 구원 역사가 증가하도록
③ 창원 땅의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④ 추수할 일군을 세워주소서
⑤ 담임목사의 성령과 은혜와 사랑충만, 하나님을 경외와 말씀의 능력과 부흥을 위해
⑥ 성도의 산업 (모든 직장과 가게, 운전, 병원, 교사, 약사, 옷집, 목장, 경동테크주식회사, 책통클럽 학원을 위해)
⑦ 질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의 질병치유, 건강회복, 믿음과 예배생활의 회복,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➇ 교회를 멀리 한 성도와 군복무중에 있는 형제, 유학중에 있는 성도를 위해
➈ 나라(안보, 평화, 전쟁 막아주심, 경제회복, 사회안정)와 북한(무력도발, 공산체제, 신앙자유, 복음으로 통일)과 한국교회와 재건교단의 신앙의 회복, 하나됨, 복음능력회복을 위해
구브로 섬의 동쪽 연안 파무구스타(Famugusta)만에 위치한 살라미(Salamis)는 이 섬의 중요한 항구이다. 이곳 역시 바보 항구처럼 일찍이 베니게(페니키아)에 의하여 설립된 곳으로 주전 400년께 에바고라스(Evagoras? BC 410∼373년)가 구브로의 태반을 지배하고 살라미를 수도로 정했다. 주전 58년 로마의 속령이 됐고 상업도시로 번영하였다. 신약시대에는 섬의 수도를 바보(Paphos)에 넘겨줬다. 116년 유대인의 반란으로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성읍이 파괴되었고 다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그후 648년 아라비아인에 다시 파괴된 이래 지금까지 폐허가 되었으나 아직도 야외극장과 상당수의 현무암 원주기둥이 산재해 있다. 유적지 바로 옆 바닷가에는 많은 사람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살라미에는 바나바의 무덤과 그 바로 옆에 바나바수도원(교회)가 있다. 바나바는 이곳 살라미 출신으로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 선교사로 파송돼 고향인 이곳에 와서 전도했고 말년에 유대인의 폭동 때 돌에 맞아 순교,이곳에 묻혔다고 전한다. 이것은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성경 외적인 귀중한 정보였다. 교회 안은 나사로 무덤교회와 같이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성화로 채워져 있었다. 지중해 해안가에 있는 살라미(살라미스) 유적이 남아있다.
***** 2013년 6월 추천신앙도서
묵상: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입니다 / 서승동목사/ 예수전도단 / 11,000원
다소 - 바울 생가 우물
다소는 길리기아의 옛 수도로 이 지방의 동쪽, 비옥한 지대인 ‘길리기아 페디아스’의 주요도시이다. 다소는 터키의 남쪽, 소아시아의 남동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길리기아 관구 내에 있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길리기아의 주요도시로 다소강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터키의 남부 도시이며, 지중해로부터 약 19km 정도 북쪽에 떨어져 있다. 다소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선 B.C. 3000경으로 올라가야 한다. 선사시대의 신석기시대로 소급되어지는데, B.C. 3000경에 다소는 이미 요새화된 성읍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소의 초기 역사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B.C. 400경에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점령했다가(B.C. 401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사라졌는데, 그때 당시 크세노폰이 쓴 원정기에 다소가 언급된다.) 그 뒤에 알렉산더 대왕이 지배했다. 알렉산더 이후에는 시리아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B.C. 200경에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여기에 와서 살게 되었고 그 중에는 사도 바울의 조상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B.C. 104에는 로마가 다소지역에 침투하였고, 따라서 다소는 B.C. 65에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동쪽 끝의 모든 민족들을 정복함에 따라 로마의 관할 지역이 되었다.
***** 2013년 6월 요절 암송 요절(사랑) *****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일서 3:15>
앗소 - 아테나 여신전
앗소는 미둘레네 맞은 편에 있는 항구로 천연의 요새 조건을 갖춘 아름다운 도시이다. 소아시아의 서쪽 끝 무시아의 항구도시로 지금의 ‘베흐람쾨이’(Behramkoy) 자리에 해당하는 ‘아드람뭇데노만’(The Gulf of Adramyttium)에 있었다. 앗소는 에게 해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서 드로아 전쟁 때, ‘파다소스’(Padasos)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B.C. 1000, 미둘레네의 식민지였고, 그 후 리디아, 페르시아에 의해 점령 되었다. B.C. 334~241에는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후계자의 지배 하에 있었다. B.C. 241에는 버가모의 식민지였다. 원래 미둘레네(레스보스) ‘이올리아’의 식민지였던 앗소는 버가모의 왕들에 의해 ‘아폴로니아’로 재건되었으며 그 후에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화산 모양의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진 성읍으로 3km에 걸친 방어 성벽이 쌓여있다. 앗소는 스토아 철학자 클레안데스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그 주변이 주로 농경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성읍은 그 항구에서 수출하던 좋은 품질의 밀로 유명했었다. 지금은 조용한, 고급스러운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앗소는 지금도 고고학적 탐사가 계속되어 여러 유물을 찾아냈는데, 286m 산 정상에 세워진 ‘아테나’(A소둠) 신전을 비롯해서 고대 도시의 유적이 남아있다. 그 중에는 도리아식 신전을 비롯하여 중요한 조각품들, 시장, 체육관, 목욕탕, 극장 등이 있다.
성경의 앗소는 바울이 도보로 방문한 성읍이다(행20:13~14). 드로아에서 바울은 자신의 동료들을 배로 ‘렉툼 갑’(Cape Lectum)을 돌아 항해하도록 보내고 자신은 육로를 따라서 앗소로 갔는데, 이는 약 32km의 여정으로서 곶을 돌아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덜 걸리는 여행이었다.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사도행전 20:14
*****차든지 덥든지 하라
- E.M 바운즈 목사 -
기도의 열정이 식었다는 것은 갈망의 강도와 깊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말해주며, 이것은 다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갈망이 줄어든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의 연약함과 실수를 용납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용납하신다. 그분은 회개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살 수 있고 또 실제로 용서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참지 못하시는 것 두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과 미지근한 것이다. 진심이 없는 것과 뜨거움이 없는 것은 그분이 미워하시는 두 가지이다. 그분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표현을 사용하여 라오디게아 교회를 엄하게 책망하셨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 3:15,16.<아멘>
버가
버가는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 지방인 밤빌리아의 중요 도시들 중 하나이다. 밤빌리아 평야에 있는 성읍으로 남쪽 해안에서는 약 13km 떨어진 내륙이며, ‘세스트루스 강’(River cestrus, 현재 ‘아크수’(Ak su)강)에서 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터키 남부 ‘무르타나’(Murtana)와 동일시된다. 버가는 약간 내륙에 위치해 있었고 강과 연결하는 항구 역할을 했다. B.C. 2C 경에 건설된 앗달리아는 뒤에 있는 버가의 항구 역할을 했으며 또한 버가의 번영을 흡수하였다. 몇몇의 폐허는 지금 까지 남아서 고대 버가의 융성한 발자취를 더듬게 한다. 하지만 앗달리아는 지금까지 남아, 현재 활발한 항구 도시를 이루고 있다. 바사 시대의 버가 역사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이곳이 그 당시에 이름난 도시일 수는 없었다. B.C. 334, 알렉산더는 버가에서 길잡이들을 고용했고 이 성읍을 두 차례 통과했다. B.C. 188, 헬라 시대에는 이곳에 셀류커스 왕국의 수비대가 주둔해 있었으며 이때 ‘만리우스 볼소’(Manlius Valso)가 버가에서 진군했다. 이 성읍은 ‘에우메네스’(Eumenes)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188년 이후 자유를 되찾았던 것 같다.희랍 신화에 나오는 ‘몹소스’와 ‘칼카스’가 창건자들이라고 알려져 있는 버가는 희랍 시대 이전에 생긴 명칭으로 선사 시대 때부터 사용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버가는 해안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앗달리아’(Attalia)에서 ‘시데’(Side)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밤빌리아 평원, 서동부의 교통 요충지였으며 자연적인 바위산 요새를 만드는 곳이다.
***** 참된 제자입니까? (요6:66)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 (65)
만일 우리가 즐겨하던 어떤 가치관이 하늘의 비젼과 상충될 때 여전히 그 가치관을 지키려고 하나님과 다툰다면 당신 마음속에서 뭔가 자라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곧 물질에 대한 소욕
이블리미나레(사원)는 13세기 초 셀주크 터키인들이 세운 것이다. 45m 높이의 첨탑을 지니고 있다. 이 첨탑은 술탄 알라딘 케이크바트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사각 받침대 위에 만들어진 벽돌 첨탑은 세로로 홈이 파져 있고, 모자이크 형태로 된 푸른 돌과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본래 동로마 시대 교회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는데, 셀주크 왕조시대에 이스람 사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첨탑을 세운 것이다. 오늘날 보이는 사원은 14세기에 교회 터 위에 지어진 것이다.
과 자기 주장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가치하게 여기시는 것에 대한 욕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욕심들을 예수님과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모든 것들의 뿌리로 여기고 대항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만일 우리가 이 진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는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졌던 멋지고 풍성한 과거 경험의 기억 속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빛에 의해 성경에서 한 가지 기준이 계시되었을 때, 당신은 당신이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기준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는 영적 침체의 시작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의 양심이 더 이상 진리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고 난 후에 당신의 인생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알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더욱 앞으로 나아가든지 뒤로 물러나 포기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아멘>
하드리안 황제 문
안탈랴 항구 성벽 안에 세워진 세 개의 아름다운 아치형 문은 기원전 130년 하드리안 황제가 안탈랴를 침입했을 때 그의 영예를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항구 근처에는 이 문과 성벽의 다른 부분을 나누는 두 개의 탑이 남아 있다.
2013년 6월26일 창원 아름다운교회(055-283-3450)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49-7
아스펜도스는 안탈랴의 동쪽 47킬로 지점, 고대 유리메돈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고대 도시 아스펜도스는 위 부분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와 아랫부분의 로우어 시티(Lower City)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있다. 아고라, 불레테리온, 예배당, 기념분수는 도시의 윗부분인 아크로폴리스에 있고, 극장, 스타디움, 로마 목욕탕과 수로(水路)는 아랫부분에 있다. 원형 극장 아스펜도스는 약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로서, 로마 시대(AD 2세기 후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 121-180) 황제 재임 시 유명한 건축가 제논에 의해 세워졌다. 관중석의 일부는 아크로폴리스 열의 언덕에 의지하여 만들어졌고, 나머지 부분은 둥근 지붕이 있는 하부구조 건물로 만들어졌다. 높은 무대 건물은 대부분의 다른 극장과는 달리 관중석과 분리되어 있다. 구조물은 일반 원형 극장과 별다른 것이 없지만, 입구부터 그 시대 귀족과 평민이 사용하는 문이 구별되어 있고, 관객석 역시 다르게 구별되어 있다.
아름다운교회/한용균목사
마라나타(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아멘!
노아 방주 추정 자리
아라랏산은 현재 터키에 있는 해발 5165m 이상의 고산이다. 이 산은 지난 수백년간 기독교 성서의 `노아의 방주` 목격설이 있던곳으로, 현재까지 이곳은 많은 나라의 탐험가들이 산밑에 거주를 하며 끊임없이 방주를 찾고있다고 한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천번 노아의 방주 조형물 목격담이 있던 터키의 고산 아라랫. 과연 아라랫산에는 수천, 혹은 수만년전 노아가 큰 홍수를 피하기위해 만들었다는 방주가 얼음과 눈속에 파뭍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것일까? 과거 수백 년간 탐험가들과 인근 주민들은 노아의 방주와 그 유물을 찾기 위하여 아라랏 산을 등반했고 방주를 발견하거나 방주의 잔해 조각을 가지고 온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1) 1886년 제임스 브라우스는 단독으로 아라랏 산을 등반하던 중 방주 조각으로 보이는 돌같이 굳은 목재를 가지고 왔다
2) 1887년 죠셉 노우리는 방주를 발견했는데 그 위치는 나무가 한 번도 자란 적 없는 불모지였다.
3) 1905년 목동인 야곱은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가다가 방주를 발견하였다.
4)1908년 목동인 죠지는 아라랏 산에서 방주를 보았다.
5) 1916년 러시아 군인이 비행 중 방주를 발견하였다.
6) 1936년 뉴질랜드인 하드위크 나이트는 아라랏 산 등반 중 직사각형의 선재(船材)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방주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명백한 사실이다. 방주는 목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배였다. 방주가 매우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졌다는 목재의 크기를 보고 능히 추정할 수 있었다. 선체의 대부분은 눈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그 내부구조를 살펴볼 수 없었다.(죤 몽고메리의
7) 1938년 소련 공군의 한 조종사는 아라랏 산 공중 탐사 중 해발 1만4천 피트(4.2km) 상공에서 얼음 밖으로 약 80~90피트(27m)쯤 튀어나온 방주의 사진을 찍었다.
8) 1948년 9월 레쉬트라는 쿠르드인 농부는 협곡에서 녹은 얼음 위로 드러나 있는 방주의 뱃머리를 발견했다. 뱃머리는 거의 완전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방주의 대부분은 아직도 빙하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는 당시의 목격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전에 배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방주를 목격했을 때 그것이 배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9) 1952년 미국인 죠지 제퍼슨 그린은 헬리콥터로 100미터 위에서 6장의 선명한 방주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실제로 본 어느 미국인은 "솔직히 고백해서 나는 성경을 믿어본 적이 없답니다. 하지만 그 사진을 보고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요, 성경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라고 말했다.
10) 1953년 페드랑 나바라가 아라랏 산 탐험 도중 방주를 발견하였다. 그는 후에 아라랏 산에서 노아 방주의 나무 제목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정밀 분석해 본 결과 그 나무는 유프라테스 평원에서만 자라는 나무임이 밝혀졌다(유프라테스 지방은 당시 노아가 배를 만든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11) 1974년 미국 'NASA'의 인공위성 사진에 의해 아라랏 산위에 노아 방주가 발견되었다.
12) 1974년 터키 정부가 아라랏 산에 외국인들의 여행과 탐험활동을 금지한다는 공식 발표를 하였다.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방주가 발견된 곳이 소련의 군사기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라 하였다.
13) 1984년 미국 NASA인공위성 어츠호는 인공위성 사진에 의하여 아라랏 산에 방주가 머물러 있음을 증거하였다(1990년 6월 학생과학)
14) 1984년 미국 국제탐험단의 마빈 스티핀스는 아라랏 산에서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는데 배 모양의 형태는 대략 길이가 136미터 넓이가 24미터 높이가 14미터인데 이는 성경에 나오는 길이 "300규빗, 넓이50규빗, 길이 30규빗'과 같은 것이다.
15) 1992년 현재는 터키 정부가 소련연방의 해체와 무신론인 공산주의의 위협이 퇴조되는 때를 같이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을 하고 있다.
16) 세계적으로 유명한 탐험가인 마르코폴로(A.D1234~1324)는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수천 년간의 쌓인 눈 때문에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아르메니아의 어느 산봉우리에 노아의 방주가 아직도 잠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눈은 결코 녹지 않는다. 눈은 강설(降雪)이 있을 때마다 더 두껍게 쌓일 뿐이다』(마르코 폴로)
...................................................................................................................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특징은 바로 ‘기도’이다.”- E.M 바운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