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오웬 (1771-1851)] (Owen, Robert)
웨일즈의 기업가이자 사업개혁가. 스코틀랜드의 뉴라나크에서 산업공동체 모델을 구상하였고 협동 조합을 개척했다. “사회에 대한 새로운 견해A New View Of Society(1816)라는 책을 썼다.
엥겔스는 “사회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때 29세의 한 공장주가 개혁가로서 등장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순진하고도 고상한 품성을 지녔으며 보기 드물게 타고난 지도자였다. 로버트 오언은 인간의 성격이 타고난 체질의 산물인 동시에 인간의 일생, 특히 그의 발육기의 여러 환경 조건의 산물이라고 하는 유물론적 계몽주의의 학설을 채택했다. 오언과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업 혁명을, 단지 흐린 물에서 고기 잡기 좋듯 졸부가 되기에 알맞은 무질서와 혼돈으로밖에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오언은 산업 혁명을 자신이 동경하는 사상을 실현하여 이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기에 좋은 기회로 보았다. 맨체스터에서 이미 그는 5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의 지배인으로서 이 사상을 적용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800년부터 1829년까지, 그는 지배인인 동시에 동업자의 한 사람으로서 스코틀랜드 뉴라나크의 커다란 방직 공장을 관리하는 데서도 똑같은 노선을 취했다. 이번에는 훨씬 더 자유롭게 활동하여 오래지 않아 그의 이름이 전유럽에 알려질 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다. 뉴라나크의 주민은 점점 늘어나 2500명에 이르렀고, 처음에는 아주 잡다하고 대부분 몹시 타락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오언은 이를 완전히 모범적인 주민 집단으로 변화시켰다. 여기서는 폭음, 경찰, 형사 재판, 소송 사건, 빈민 구제와 자선 사업 등등이 전혀 필요 없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좀 더 인간에 알맞은 환경에 두고 특히 자라나는 세대를 잘 교육하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오언이 창안한 유치원이 뉴라나크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거기서는 2세 이상의 어린이들을 받았는데, 어린이들은 이 유치원에서 어찌나 잘 지냈던지 부모들이 그 애들을 집으로 데려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오언의 경쟁자들은 자기 노동자들에게 매일 13시간 또는 14시간 작업할 것을 강요했는데, 뉴라나크에서는 노동 시간이 10시간 반밖에 디지 않았다. 면화 공황으로 하는 수 없이 4개월간 휴업하게 되었을 때에도 휴업 노동자들에게 임금의 전액을 계속 지불했다. 그런데도 공장의 가치는 2배 넘게 늘어났고 끝까지 소유자에게 많은 이득을 보장했다.
그러나 오언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 준 생활 조건도 그의 눈에는 아직 인간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나의 노예였다.” 그가 말한 것은, 자신이 뉴라나크 노동자들에게 만들어 준 비교적 좋은 조건이란, 자유로운 생산 활동은 제쳐놓고라도 그들의 성격과 지능을 올바르고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아직 대단히 불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2500명의 노동 부대는 사회를 위해, 불과 반세기 전에는 60만 명을 가지고서야 겨우 생산할 수 있었던 대량의 현실적 부를 만들어 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2500명이 소비하는 부와 60만 명이 소비했을 부의 차액은 어디로 갔느냐고.”
대답은 명백했다. 그 차액은 기업에 투하된 자본에 대한 5%의 이자와, 그 밖에도 30만 파운드가 넘는 이득을 얻은 공장 소유주들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이 사실은 뉴라나크에서보다 훨씬 더 크게 영국의 다른 모든 공장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이 새로운 부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을 타도하고 귀족적 사회 제도의 원칙을 보존하기 위한 전쟁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힘은 노동자 계급의 창조물이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반드시 노동자 계급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다만 개인의 부유와 대중의 예속화에 봉사해 온 데 지나지 않은 이 새로운 강대한 생산력이 오언에게는 사회 개조의 기초로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모든 이의 공동 재산으로서 모든 이의 공동 복리를 위해서만 쓰여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순전히 실무적인 원칙 위에서, 말하자면 상인적 계산의 결과로서 오언의 공산주의가 생겨났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을 언제 어디서나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1823년에 오언은 공산주의 이민지를 창설하여 아일랜드의 빈궁을 없앨 안을 작성하고, 거기에 필요한 투자액, 매년 지출과 수입 예상액에 관한 상세한 계산서를 덧붙였다. 오언은 미래의 제도에 대한 자기의 마지막 계획에서 평면도와 정면도, 조감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술적 세목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깊은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일단 그의 사회 개조 방법이 채용된다면 심지어 전문가의 입장에서도 그 세목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산주의로 옮아 간 것은 오언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가 단순히 박애주의에 머물렀던 동안, 그는 오직 부와 칭송과 존경과 명예를 거두었을 뿐이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명성 높은 사람이었다. 그와 비슷한 사회적 처지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ㅏ 정치가들과 군주들까지 그의 말에는 호의를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을 들고 나타나자 사태는 급변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사회 변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 개의 큰 장애물, 즉 사적 소유, 종교, 현존 결혼 제도였다. 이러한 장애물과 투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자기가 공적인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언은 이 점을 고려해서 그 장애물에 대한 자신의 가차없는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가 예견했던 그대로 되었다. 공적인 사회에서는 내쫓기고 신문에서는 묵살되었으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희생하여 미국에서 실시해 본 공산주의적 실험에 실패한 결과 가난해진 오언은 직접 노동자 계급에 의거하여 그들 속에서 30년 동안이나 확동을 계속했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영국에서 진행된 모든 사회 운동과 이 사회 운동의 모든 실제 성과는 오언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1819년에는, 5년간에 걸쳐 그가 애쓴 덕택에 공장에서의 여성과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최초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는 영국의 모든 노동 조합이 하나의 노동 총동맹으로 결집한 제1차 대회의 의장이었다. 또 그는 완전히 공산주의적인 사회 조직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적 방책으로, 한편으로는 협동 단체(소비 조합과 생산 조합)를 조직했다. 이것은 그 뒤 적어도 상인이나 공장주들이 사회적으로 전혀 필요없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노동자 시장을 조직했는데 여기서는 노동 시간 한 시간을 단위로 하는 노동 증권으로 노동 생산물이 교환되었다. 이 시장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뒤에 나타난 프루동의 교환 은행의 선구자였으며, 그 차이점은 전자가 모든 사회악에 대한 만능약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 전체를 훨씬 더 급진적으로 개혁해 나갈 하나의 첫 조치로 제시되었을 따름이라는 점이다.
이 공상가들의 사고 방식은 19세기 사회주의 사상을 오랫동안 지배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바이틀링을 포함한 이전의 독일 공산주의는 이 사고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사회주의는 절대적 진리․이성․정의의 표현으로서, 발견되기만 하면 그 자체의 힘으로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는 시간과 공간과 인류 역사 발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그것이 발견될 것인가는 실로 순전히 하나의 우연으로 여겨졌다. 동시에 절대적 진리와 이성과 정의도 각 학파의 창시자에 따라 서로 다르며, 각 학파 창시자의 절대적 진리․이성․정의의 특수한 형태는 그 학파 창시자의 주관적인 오성․생활 조건․인식의 넓이와 사고의 발전 정도에 따라 제약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절대적 진리들간에 충돌이 있을 때 이 충돌은 그 서로간의 차이를 마멸시킴으로써만(즉 절충과 타협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고 방식에서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 영국의 대다수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머리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특수한 종류의 절충적이고 평균적인 사회주의 이외에 아무것도 나올 수 없었다. 이 절충적 사회주의는 갖가지 분파 창시자들의 더 온건한 비판적 논평, 경제학적 명제와 미래 사회관이 마구 뒤섞인, 갖가지 색채로 가득 찬 혼합물이었다. 이 혼합물은 그 각 구성 부분이 논쟁의 물결 속에서 마치 시내의 조약돌처럼 그 날카로움을 잃으면 잃을수록 더욱 쉽게 얻어진다.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만들려면 우선 그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사회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내용은 임승수의 홈페이지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엥겔스) (http://reltih.cafe24.com/reading/utopia_science.hwp)에서 가져왔다.
영국 산업혁명기의 사회주의 선구자
(또는‘공상적 사회주의자(Utopian socialist)’/김옥련 <유아교육사> /김제한의 <유아교육개론> )
박애주의자, 특히 유아학교(Infant School)의 창시자로 알려진 오웬은, 1771년 영국 북웨일즈의 뉴타운(New Town)에서 마구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서 이름이 높았고, 4·5세 때부터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7세 때 그 초등학교의 조수(monitor)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이외의 정식교육을 받지 못하고, 9세 때는 가게 점원으로 일하였으며, 20세에 랭커셔 방직공장의 지배인이 되었다.
1798년 「맨체스터 문학 철학회」의 회원으로 추천되었으며,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여 자신의 정신적 성장을 보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 유소년공(幼少年工)들의 과도한 노동과 저임금으로 인한 비참한 생활을 보고, 노동자 계급의 대우 개선과 노동 입법의 제안에 앞장섰다.
1800년 29세 때부터 25년간 스코틀랜드의 뉴래너크(New Lanark)에서,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최신식 방직공장을 경영하였고, 1816년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취업모들을 위해 노동자 자녀들 중 2세~6세 사이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성격형성학원(institute for the formation of character)이라는 최초의 유아학교를 창설하였다.
이 성격형성학원은 첫째 탁아시설 설립운동의 시작을 만들었다는 것, 둘째 영국의 정규학교 제도 중 5~7세 어린이를 위한 「유아학교(Infant School)」의 근원을 만들었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성이 있다. 또한 이 학원이 이룩한 성공적 결과는 공장법(Factory Act)의 제정을 낳게 했다.
1825년, 미국 인디애나주에 건너가서 '뉴하모니 평등촌’을 설립,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고, 1834년 영국 최초의 노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 대노동조합(Grand National Union)을 결성하여 사회주의 사상운동 및 노작활동을 하였다.
그는 1858년 고향인 뉴타운에서 88세로 일생을 마쳤다.
자 료 0
공상적 사회주의를 실천한 로버트 오웬(Robert Owen)
농촌을 떠나 농민에서 노동자로 바뀐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새로운 형태의 일을 해야 했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자본주들은 일정기간 일에 대한 댓가를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는 방식의 고용관계가 형성 되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법정근로시간, 최소임금제, 고용보장, 아동 노동학대방지 등 광범위한 사회보장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 등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산업혁명은 노동자들의 희생의 댓가를 치르면서 이루어졌다. 당시에 일반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희망이 없는 절망의 늪에서 일하는 기계로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흘러 열악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목소리가 높아졌고, 나아가 노동자들의 이런 상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한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들의 이와 같은 처지는 결국 공장이나 그 설비 등과 같은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기 때문”이라며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여야 한다는 일련의 사상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이를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소규모 집단거주지에서 생산수단을 공유하며 평화롭게 살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를 실제적으로 실천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로버트 오웬(1771-1858)이다
로버트 오웬은 1771년 영국 중부에 위치한 웨일즈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고 있었던 당시의 영국사회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시민과 아이들을 노동의 굴레 속에 가둬두고 있었다. 오웬 역시 고용살이를 통해 쓰라린 경험을 했으며, 16세 때에는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맨체스터로 가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생애에 큰 전환기를 가져오게 된다. 3년 후인 19세 때에는 독립해서 공장 경영주가 됐으며, 20세 때에는 직원 500명을 거느린 대공장의 지배인이 된다. 또한 1800년에는 뉴라나크로 진출해 대공장의 경영을 맡게 된다.
오웬은 이 공장에서 이윤의 추구 보다는 노무관리나 후생설비에 전념하면서 생산율과 수익을 증대시켜나갔다. 특히 그는 아픈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 등 노동자의 인권과 복리후생에 많은 신경을 썼다. 또한 오웬은 6세에서 7세정도였던 아동의 노동연령을 10세 이상으로 제한했고 10세 미만인 아동들을 위해 세계 최초의 유치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병폐를 몸소 체험한 오웬은 이러한 문제점을 정리해 『신사회관』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게 된다. 이후 체계화된 사상을 기본으로 자신이 경영하는 방직공장 내에 ‘성격 형성신학원’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또한 오웬은 아동노동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공장법 제정운동을 추진해, 결국 1819년에 이를 이루게 된다. 아동권익이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오웬은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이 화폐가 가치로부터 유리되는 것에서부터 발생한다고 보았고 기계를 이용한 산업이 인류에게 해악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직 사람의 힘만으로 괭이 등 원시적인 농기구들을 이용하여 경작하는 농업공동체를 제안했는데, 모든 농경 작업과 생산물을 공유하며 아이들도 공동으로 보육하는 이 공동체를 '어쏘시에이션(association)'이라 명명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1824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오웬은 인디애나 주에 땅을 사서 '뉴 하모니 타운'을 설립했고 실제로 자신의 공동체 모델을 실험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는 1829년에 다시 영국으로 귀국한다. 이후에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쉬지않고 노동조합운동, 협동조합운동 등 사회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자료출처: http://unibranding.tistory.com/234
자 료 1
< 유토피아 공동체 3 >
시대를 앞서간 아름다운 그리고 위대한 실험 - 로버트 오웬
1785년 산업혁명이 한참 진행 중이던 영국 웨일즈의 가난한 우체부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이 15세 된 해에 런던에서 마구공으로 일하던 형님을 찾아 런던으로 떠난다. 이후 1858년 눈을 감기까지 70 여년 간 로버트 오웬은 영국 산업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실험을 감행한다.
오웬의 사회적 공동체 실험은 기존의 생시몽과 푸리에와 같이 이론적 담론적 수준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몸을 던져 겪는 실천의 영역속에서 이루어진다. 더욱이 그는 당대 면방직 산업 분야에서 크게 성공하고 가장 탁월한 경영자의 한 사람이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특이하며 크게 주목받는 이유가 된다.
20세기 중반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위대한 저서 “거대한 변혁(전환)” 을 저술한 칼 폴라니도 로버트 오웬에게서 많은 영감을 배웠다고 한다.
어린시절 비록 독학수준의 공부였지만 열렬한 탐구심으로 많은 독서를 하면서 지낸 소년시기의 오웬은 기존의 종교체계는 그릇된 환상이라고 느끼면서 참 다운 신앙은 진정한 이웃사랑로 탈바꿈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게 된다.
런던에 도착한 그는 섬유관계의 도소매상 점원으로 일하면서 재고관리, 부기작성, 경영 및 고객관리 그리고 판매에 이르기까지 훗날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는 많은 체험을 밑바닥에서 경험한다. 이후 오웬은 런던에서 면방직의 중심지였던 맨체스터로 일자리를 옮기면서 파란만장한 생애의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한다.
형님에게서 단 돈 100파운드를 빌려서 동업자와 방직기 3 대를 놓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한 때는 꽤나 큰 돈을 벌기도 했지만 결국은 사업을 포기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나, 스무살 되던 해에 행운의 여신이 그를 찾아 온다.
당대 면방직업계의 거물이자 대무역상인 드링크워터라는 사업가가 낸 지배인 채용광고에 응하면서 커다란 기회가 그를 찾아 온다. 약관의 나이에 그는 졸지에 랭커서 지방에서 가장 현대적인 방적공장의 지배인이 된다. 그는 특유의 근면함과 명철함으로 방직사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높이면서 관리자로서 대단한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당시의 14시간이 넘는 장기간 노동과 대단히 열악한 노동환경을 접하면서 그는 두개의 양날, 엄격한 노무관리와 획기적인 노동조건(환경)개선을 도입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를 동의해주지 않는 소유자와 결별하고 1796년 26세에 합자회사를 설립하여 지배인겸 동업자로서 새롭게 출발하면서 대단한 성공을 이룬다.
여유를 찾은 그는 동시에 맨체스터 문예 및 철학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지역의 명사로서 활동하다가 두번째 행운의 여신을 만난다.
뉴라나크의 대방적공장주 데이비드 데일은 동시에 대상인이며 로얄 스코틀랜드 은행의 주요사주이자 박애적 자선가이기도 하다. 바로 그 데일의 딸이 맨체스터 문예회원으로 오웬과 사랑에 빠져 2년후 백녀가약의 부부가 된다.
결혼 몇 달전 데일은 뉴라나크의 방적공장을 매각하나 새로이 매입한 주주들은 오웬을 총지배인으로 지명한다. 이리하여 1800년초부터 미국으로 이주하는 1824년까지 24년간 오웬 스스로 자평한 ‘뉴라나크 통치’ 의 시기가 이루어진다.
당시 산업계에는 기업가와 노동자 양측이 끙끙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 지지않고 기율이 무너진 노동자들의 불량하고 게으른 근무태도 였다. 이를 잡기위해서 기업가들은 협박, 벌금, 해고 등 강압적 수단에 의지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장기간 노동, 열악한 환경, 저임금과 학대, 영양실조 등으로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스스로 높이고 싶어도 높일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상황을 안고 있어서 앞뒤의 두가지 문제들이 뒤엉키여 악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장인인 데일씨는 당대의 보기드문 양심적인 기업인으로 뉴라니크공장에 이미 소년 소녀들의 기숙사를 각각 분리제공하였고, 양호한 급식, 깨끗한 작업 환경을 제공하며 야간학교까지 운영해 왔다.
오웬은 이에 더하여 고임금정책을 유지하고 10세 미만의 아동 노동을 금하고, 인원 감축없이 최신 설비들을 들여와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또한 당시 평균노동시간이 14시간 이상인데 반해 10.5시간으로 대폭 줄였으며, 장인이 기초를 만들었던 여러가지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복지시설을 더욱 확대하였고 근무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웬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노동자들의 교육문제였다. 그는 개인의 행복이 공공적 보편적 행복으로 확대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고 교육이야말로 이성적 사회실현의 참된 지룃대라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교육의 지향은 한마디로 사회교육이였고 교육환경론이였다. 노동자들이 교육과 학습을 통해 스스로 자각하고 새로운 인간형으로 거듭나면, 노동의 주체로서 객관적 능력 향상과 주관적 품성을 갖추는 것이 사업성공의 요체로 굳게 믿었다.
그리고 20년 간 오웬은 자신의 믿음을 확실하게 실천하여, 동일한 노동자 숫자로 생산량을 2-3 배 증대시켰고, 따라서 순익도 두배이상 증대하는 등, 대단한 성공을 만들어 내어서 이윽고 뉴라나크 방적 공장은 사회개량운동의 산지가 되었고, 각지에서 명사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생기는 법 - 외부적 경영환경이 악화되자 다른 주주와 동업자들은 오웬의 운용방식이 자본의 논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하기 시작해했고 급기야 파산의 위기 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동업자들과의 불화가 오웬의 오랜 꿈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지분을 처분하고 1825년 홀연히 미국을 향해 떠난다. 영국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는 와중에 최신기계와 기술을 도임하면서 증대된 생산물과 성과가 생산물을 만들어낸 노동자들에게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그는 증대된 생산물을 선순환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야 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위해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면서, 단기적인 자본주의 이익에 매달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적인 모순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증대된 생산물과 성과를 온전한 기여자인 노동자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해결된다는 취지하에 오웬은 푸리에가 구상한 팔랑주와 비슷한 생산협동의 공동체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구상을 실현시키기에는 조국인 영국은 너무나 전통적 보수적 관행에 젖어 있었고 경제불황과 실업의 확대속에 처해 있었다. 동시에 동업자간의 불화가 그를 동요하게 한다.
선천적으로 낙관적인 오웬에게 미국은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 볼수 있는 신천지로 등장한다. 그는 독일인 목사가 인디애나 주에 창설한 종교공동체인 ‘ 뉴하모니’ 를 사들이고 900여명의 주민들과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예비실험에 들어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실험은 4년만인 1829년에 실패로 끝나게 되고 그는 다시 영국사회로 돌아온다. 여기서 섣불리 오웬의 ‘뉴하모니’ 사회의 실패원인을 언급할 수는 없다. 혹자는 그의 관념적 성급성을 비난할 수 있다. 또는 기존조직원의 종교적 관행과 오웬의 사회경제적 신념의 충돌과 부조화를 지적할 수도 있고 그의 철저하지 못했던 공동체적 방법론을 탓할 수 있다. 사회전반적 변혁없이 부분적 지역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명백한 한계도 언급될 수 있다. 혹은 기회의 땅이였던, 그래서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주의에 의존하던 미국적 풍토에 오웬의 공동체적 이상은 처음부터 궁합이 맞지 않을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오웬의 뉴하모니아 운동에 대한 실패에 대해 어떠한 단정적인 판단은 아직은 유보되어야 한다고 본다.
뉴하모니아 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그의 신념과 구상을 홍보해냈고 1836년 다시 햄프셔에 퀸즈우드라는 공산적 공동체를 건립하였으나 이도 18년뒤인 1854년에 와해된다. 2년뒤 그는 죽기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한다
“ 나는 이 세계에 중요한 진리를 가져왔다. 세상이 그것을 존중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다 “
오웬의 실험적 시도가 실패한후에 자연스레 따라온 것은 19-20세기를 장식한, 노동자조직를 통하여 노동계급주도의 투쟁과 혁명,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이였다. 그리고 우리는 20세기후반 이 역시 참담한 실패를 목격한다. 여기서 우리는 토마스 무어에서 시작하여 생시몽, 푸리에 그리고 토마스 오웬에까지 이르른 참으로 인간적인 인식과 실험, 참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다시 재해석 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마주하게 된다.
출처 )효형출판사 간 - 서강대 박호성 교수의 공동체론
자 료 2
푸리에와 오웬이 꿈꾸었던 멋진 신세계
에드먼드 윌슨
19 세기의 두 괴짜
샤를르 푸리에 (Charles Fourier)와 로버트 오웬 (Robvert Owen)은 19 세기 전반의 독특한 특성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거의 유사한 생애를 살아갔던, 서로 매우 닮은 인물들이다.
푸리에는 브장송의 포목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행상인으로 세상을 떠돌아 다녔고, 오웬은 웨일즈의 말 안장을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포목점 점원으로 일했다. 두 사람 다 당대의 자유주의 정치에 실망하였으며, 당대의 인습적인 문화를 외면하였다. 푸리에는 '과학의 세기인 지난 23 세기 동안' 인류를 '피로 뒤범벅되게' 이끌어 온 유럽 철학의 전통을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그리고 '거의 반무식쟁이이자 상점 점원'인 샤를르 푸리에 자신을 인류에게 신의 뜻을 설명하는 사람으로 선택한 것은 신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직업적 철학가들을 불신하고 '정치 및 도덕에 관한 모든 서적'을 논박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그는 믿었다.
푸리에의 말에 따르자면 천 여 년 동안의 정치인의 잘못은 오직 종교와 행정상의 폐단만을 다루어 왔다는 점에 있었다. "신의 율법은 우선 근본적인 기능인 산업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 정부가 이 일에 착수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며, 더구나 그들은 '자유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산업상의 분열과 상업적 사기'를 조장하는 그릇된 방향을 취했다는 것이다.
한편, 로버트 오웬은 『정치적 정의에 관한 연구』(1793)의 저자인 윌리엄 고드윈 (William Godwin)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이나 이 비슷한 다른 어떤 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던 적이 없었고, 통계 이외의 다른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뜨인 적도 없었다. 정치 조직을 통해 일해 보겠다는 시도는 실패하였으며 단기간이었을 뿐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곤경으로부터 사회를 구제할 다소 합리적인 '그 무엇'을 급진당, 휘그당, 토리당 혹은 어떤 특수 종교 종파에게서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로버트 오웬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고집스럽고 자주적인 영국인다운 코와, 뺨 둘레까지 뻗어나올 듯한 움푹 들어간 순진스런 타원형의 두 눈과, 달걀 모양의 갸름한 얼굴을 지닌 사색에 잠긴 유순한 큰 산토끼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치켜올려 감고 있는 흰 목도리 위의 푸리에와 얼굴은 비록 굳게 다문 입과 날카로운 콧날과 다소 양미간이 넓지만 또렷하고 자애스런 두 눈이 강인한 옛 프랑스인의 합리주의적 위엄을 갖추고 있기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오웬과 비슷한 기이한 순진성을 풍기고 있다.
오웬과 푸리에는 모두 완전히 세속을 벗어난 솔직 담백한 사람으로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지니고 있었다. 양자 모두 심원한 인도주의적 연민과 체계적 정확성에 대한 열정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이 둘은 서구 사회를 가속도로 지배해 가는 상공업제도의 가정 추악한 면을 직접 체험하였다. 푸리에는 국민 의회의 혁명군이 리용을 포위 공격했을 때 자신의 가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가까스로 단두대를 면했다.
또 직물 공업의 성장으로 인해 리용 주민의 생활이 극도로 악화되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그의 고용주가 기근이 한창일 때 쌀 매점에 성공하여, 가격을 유지할 목적으로 일부러 쌀을 썩게 만든 뒤 마르세이유항 앞바다에 내다버리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푸리에는 잔혹한 것을 극도로 혐오했고 동정심이 유별나게 강했기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힘이 약한 동무들을 두둔하다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예순 살 때는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다만 주인 마나님이 몹시 학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 어떤 불쌍한 하녀를 위해 무엇인가 도와줄 작정으로 비를 맞아 가며 몇 시간 동안 헤매고 다닐 정도였다. 인간생활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이와 같은 억제할 수 없는 강인한 충동은 그에게 낙관적인 확신을 불어넣었으며, 그를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보상받지 못하는 일들로 몰고 갔다. 이상스럽게 고독한 생활을 해나가며 푸리에는 자신의 이상적인 공동체 사회를 구성할 다양한 집단들의 상호 관계를 구상하고, 그들이 거주할 건물들의 정확한 비율까지 계산해 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우주의 수명이 정확히 8만 년이라는 것을 계산해 내었다. 그의 계산에 따르자면 그 기간 동안 모든 영혼은 분명히 인간이 살고 있다고 그가 간주한 다른 혹성들과 지구 사이를 810번 여행하며, 정확히 1,626번까지의 생애를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푸리에와 마찬가지로 로버트 오웬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매우 민감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어린 시절 그가 다녔던 무용학교에서 어린 소녀들이 자기 짝을 구하지 못해 실망하였던 광경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떠올리곤 했다. 그는 열 살 되던 해에 집을 뛰쳐나와 단시일 내에 출세하여, 20세에는 벌써 5명의 직공을 거느린 면직 공장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새로운 면방직 기계를 초창기부터 이용했던 오웬은 이윽고 '생명 없는 기계에 대한 끔찍스런 정성과 살아 있는 기계에 대한 혹사와 천대'라는 엄청난 모순에 깊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미대륙의 노예제도는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악하고 어리석은 제도일 터이지만, 이 자제할 줄 모르는 시대에 영국의 공장에서 일하는 백인 노예들은 후일 내가 서인도 제도 및 미국에서 보게 된 가정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보다 훨씬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18세기 말의 영국 농촌의 소작인과 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의 본토의 가내 공장에서 학대받던 소년들과 노동자들보다 여러 면에서, 특히 보건て식품て의복 면에서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그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받던 사람들은 노동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용주 자신도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웬은 말한다. "나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데에만 능숙해진 동료들이 정말 싫어졌다. 이 직업은 우리 본성의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면들을 타락시키고 때로는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온갖 다양한 무역업, 제조업, 상업을 두루 겪어 온 나의 오랜 인생 경험으로부터 나는 이러한 철저히 이기적인 제도 아래에서는 어떠한 훌륭한 품성도 나타낼 수 없음을 깊이 확신한다. 진실, 정직, 미덕은 현재도 그렇고 과거에도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미래에도 오직 명목에 그칠 것이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진정한 문명이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이것은 사람들 간에 대립적인 이해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모든 사람이 서로 적대하도록, 심지어 서로 파멸시키도록 제도적으로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세상사를 처리해 가는 방식으로서는 저열, 비속, 열등, 무지한 것이다. 인격을 배양하고 부를 창조하는 방식으로서 좀더 나은 방식이 이를 대처하지 않는 한, 항구적이고 전면적이며 실질적인 진보는 이룩될 수 없다."
푸리에는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을 거부했다고 믿었고, 오웬은 관찰만으로 자신의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했지만, 양자 모두 자신들 주장의 토대를 루소의 사상에 두고 있었다. 인류는 천성적으로 선량하며 인류를 사악하게 만들어 온 것은 제도일 뿐이라는 루소의 사상은 당대를 완전히 휩쓸었던 사상이었으므로, 책에서 읽지 않더라도 누구나 물들어 있을 지경이었다. 푸리에는 주장하기를 마치 도구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보듯이 인간의 천성을 꺼내 보면, 신이 다양한 목적에 쓰라고 인간에게 주신 몇 가지 인간적 '열정'―본능과 기호―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열정'들은 모두 필요한 것들인데, 근대 사회에서 문제는 이들 '열정'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있을 뿐이요, 적절한 열정이 적절한 방향으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조화'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버트 오웬이 전 생애를 통하여 역설한 원리가 있었다. 즉 자기 스스로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교육과 어린 시절의 감화가 인간의 됨됨이를 형성하는 것인 바,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나쁜 일 대신에 옳은 일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인간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수학적 정확성'을 띠고 누구나 행복하고 선량해질 수 있다는 원리이다.
절대 평등의 이상 사회
개인의 이해가 전체의 이해와 상충되지 않음을 실례로써 입증하기 위해, 푸리에와 오웬은 모두 대사회 내부에 제한된 규모의 몇몇 자족적 사회를 결성해 볼 것을 주창했다.
푸리에가 요구한 공동체는 개인 자본에 의존하며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보통 선거제가 실시되며, 부자와 빈자의 자제가 동일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푸리에는 소득 격차가 너무 현격한 사람들을 동일한 공동체 내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소득 격차와 더불어 종래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긴 하나 계급 제도가 존재하긴 한다. 이 계급 제도에서는 자본가가 맨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먼저 공동체 성원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 줄 몫을 공제한 뒤)배당제로 소득을 분배한다. 단지 4/12만을 자본량에 따라 분배하며, 5/12는 노동량에 따라 나머지 3/12은 발휘한 기량에 따라 분배한다. 하기 싫은 노동은 편한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필수 노동은 단순 유용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으며, 유용 노동은 사치품 생산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다.
푸리에에게서 문제의 초점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관계를 모든 '열정'이 유익한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화한다는 간단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하고 싶어하는 몇 가지 일은 있으니, 모든 일이 행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모든 인간적인 충동에는 유용한 용도가 있으니 모든 충동을 만족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 일에 매력을 느끼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일만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권태나 피곤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누구나 제 나름의 취미와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각자는 다양한 일에 종사함으로써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산업상의 능률은 다양한 집단 간의 경쟁에 의해 촉진된다. 푸리에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서도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조직을 구상해 내었다. 그의 골치를 썩혔던 두 가지 문제―아이들이 흙장난을 좋아한다는 문제와 공동체 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문제―는 서로가 서로의 해결책이 되었다. 즉 쓰레기를 아이들이 치우게 한다는 것이다.
로버트 오웬이 구상한 공동체는 이와 반대로 절대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 공동체의 유일한 계급 제도는 연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장년층이 통치 평의회를 구성한다. 어린이들은 세 살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 전문 교육자와 보모 밑에서 양육되고, 교환 수단의 단위는 한 시간의 몫의 노동으로 한다.
푸리에는 자기 계획의 자기 재정을 담당하고 싶은 부자와 기꺼이 상의하기 위해 매일 정오 자기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공고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 매일 그 시각 그 장소에서 기다렸지만, 한 사람의 후원자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확고한 신념을 지니긴 했지만 매우 실망한 채로 1837년에 세상을 떠났다.
반면 오웬은 자신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오웬은 한때 자기에게 도움을 기대한 푸리에가 자기에게서 제한된 집단으로 공산주의를 실천하려는 사상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여기서 중심 인물―그리고 그 당시 가장 특출한 인물―은 역시 오웬이다.
꿈을 현실로 바꾼 뉴 라나아크
뉴 래너크(New Lanark)
* 18세기에 스코트랜드의 아름다움 경관 속에 형성된 작은 마을.
* 유토피안 이상주의자 Robert Owen이 모범 삼아 개조한 19세기 초의 산업 공동체.
[관련사이트] http://www.visitbritain.co.kr/things-to ··· ark.aspx
사진부터 바로 위까지는 다음에서 자료 펌했다. http://veae.hosting.paran.com/tt/entry/New-Lanark
로버트 오웬의 실제 행적은 오늘날에는 그 당시 소설의 주인공인 칼렙 윌리암스나 프랑켄슈타인만큼이나 기괴하다. 푸리에와 똑같이 사욕을 떠난 사회적 이상주의자인 그의 생애는 헨리 포드의 생애를 연상시킨다. 오웬은 스코틀랜드의 뉴 라나아크에서 최초의 면직 공장을 인수하였을 때, 그 공장 직공들은 더럽고 주정뱅이인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남녀들과―그 당시 어쨌든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고아원에서 실어온 5~10세의 어린이들이었다. 이런 형편없는 인간들을 바탕으로, 또 게다가 모두 스코틀랜드인인데 자기만이 웨일즈인이라는 특히 불리한 조건을 지닌 채, 오웬은 25년 이내에 높은 생활 수준과 상당 수준의 교육을 갖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웬 자신은 그 공동체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았다. 오웬은 공동체 성원들에게 다른 어떤 경쟁 상대보다 높은 임금을 주고 짧은 시간 일하게 했으며, 그들과 함께 불황을 이겨냈다. 그는 자기의 동업자들에게 지불할 배당금을 일정액으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동체의 개량 사업에 돌렸다. 오웬은 사회전체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전세계를 향하여 호소했다. 모든 어린이들을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인수하여 처벌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내가 우리 노동자들의 어린이들 교육하는 방식처럼 교육시키기만 한다면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오웬은 인적 자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혹은 그 인적 자원을 다듬기에 적합한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 어디인지를 우선적으로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인간이란 전반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지와 누구에게 그 시작을 맡길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는 가장 가망성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뉴 라나아크에서 스스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매우 고상한 인격을 지닌 예외적인 인물이며, 뉴 라나아크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만든 것은 질이 나쁜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어린이들의 천성적인 선량함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라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그는 뉴 라나아크가 자기 자신이 건설했으며, 자기가 관리하고 운용해야만 하는 기계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로버트 오웬은 자신의 공장에서 자애롭고 전능한 신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권고만으로는 직공들을 근면하고 정직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그들을 점검하고 억제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는 일터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머리너머로 작은 사각 나무 패찰을 걸어 놓았다. 이 나무 패찰의 네 변에 각각 다른 색깔을 칠해 놓았는데 각 색깔은 각각 다른 품행 등급을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그는 어느 날이건 공장을 둘러볼 때면 십장이 돌려 놓은 패찰의 색깔을 보고 그 직공이 전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품행 극히 나쁨'이나 '품행 좋지 않음'을 나타내는 색깔의 표찰과 마주칠 때마다 그는 지나가면서 태만한 근로자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 그는 색깔이 점차로 검은색에서 파란색으로, 파란색에서 노란색으로, 마침내는 흰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매일의 등급을 일지에 기록하게 하여, 그가 없었던 동안에 노동자들이 어떻게 처신했는가를 돌아온 뒤 자신이 항상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도둑을 추적하여 찾아내는 전혀 실수 없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덕적인 세계를 창출해 낸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던 오웬은 자기가 거느린 교사들이 다른 곳에 가서는 뉴 라나아크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에, 그리고 그의 공동체를 다른 사람이 관리하도록 맡겨 두자 번영하지 못하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후일 오웬과 함께 협동 조합 운동을 벌인 차티스트운동의 한 지도자인 윌리엄 로베트는 오웬이 본래 독재적인 성격이어서 여하한 민주주의적 기반 위에서도 함께 일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의 동업자들이 자신의 방법에 반기를 들 기세가 뚜렷해져서 그가 항상 새로운 동업자를 찾으러 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새로운 동업자를 발견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감에 따라, 그는 점차적으로 자본가들이란 탐욕스럽고 무지한 족속들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의회를 통해 로비 공작을 벌여 온(영국에서는 최초로 제출된) 연소자 노동 금지 법안이 면방업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가 신뢰해 온 피일과 같은 정치가들에 의해 그 법안 내용의 핵심 조항을 삭제당해 버리자 그의 신념은 한층 더 흔들렸다. 오웬은 기대를 걸고 런던의 경제학자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들이 실제 경험은 조금도 없는 사람들로서, 오웬의 말에 따르자면, 단지 공장주들의 추악한 행위를 합리화할 체계를 만드는데 골몰하고 있음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을 뿐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에 뒤따른 절망적인 경제 사정의 타개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캔터베리 대주교를 의장으로 하여 저명한 경제학자, 박애주의자, 정치가, 실업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그도 초대를 받고 참석했다. 그런데 그 회의에서 그는 당시의 실업 사태의 원인이 제대 군인과 군수 산업의 급격한 붕괴에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 참석자가 변변히 교육도 받지 못한 자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기계로 인해 수백만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렸다고 설명하자 모든 참석자들이 놀랄 정도였다. 젊은 시절 그는 면직 공장의 관리자 노릇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매우 가까이 살고 있던 공장주는 단 한 번밖에 공장을 방문한 일이 없었으며, 그 방문조차도 외국 손님에게 공장을 구경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웬은 이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결론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이해시키자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리라는 것을 염려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가혹한 현실
그런데 그럴 즈음에 그들⇬수상, 대주교, 왕 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하류 계급의 불온한 정세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하류 계급을 행복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오웬은 여전히 그들의 공평 무사함을 신뢰하고 있었다. 엄중한 책임을 떠맡고 있는 그들 같은 사람들이 인류의 전반적인 향상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1817년 엑스라 샤펠에서 개최된 열강 회의에 참석하여 그 회의의 간사장인 한 노련한 외교관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 저명 인사에게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덕택으로―만일 인류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인류 자신의 최고의 이익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만 된다면―이제 소수 특권 계급만이 아닌 전체 인류가 훌륭한 교육을 받고, 훌륭한 음식을 먹으며,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여태까지 다종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었다. 그러나 간사장의 대답을 듣고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련한 외교관은 맞는 말이라고 대답한 뒤, 그들―그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유럽의 지배 세력―은 그것을 다 알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일반 대중이 잘 살게 되고 자립적이 된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지배 계급이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 "간사장의 이러한 고백을 듣고 난 뒤, 나는 회의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어버렸다. 장기간에 걸친 험난한 과제가 내게 주어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과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다툰다는 것이 양자 모두의 진정한 이해와 참된 행복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음을 양자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쳐부수어야 할 편견이 모든 나라 모든 계급에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감지했다. 이 편견을 뿌리 뽑자면 무한한 인내와 끈기 이외에도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진함과 사자의 용맹함이 요구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굳은 결의로 시작한 일이니 만큼 단호하게 목표를 향하여 곧장 전진해 나가야 함을 절감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이미 오웬을 파괴적인 이상주의적 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는 공개 연단에서 진리의 주요한 적은 종교라고 단언하였으며, 종교만이 아니라 재산제도와 가족 제도까지 공격했다(이리하여 그는 푸리에보다 훨씬 앞으로 나아갔다. 푸리에는 이 세 가지를 수정한 채로 유지하는 공동체를 계획했었다.). 이제 교회가 그에게 적대감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의 친구들은 그와 어울리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그는 유럽은 병들었으므로 새로운 사회를 창건하려면 신선한 땅을 찾아야만 한다고 단안을 내렸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독일계 라파이트 교파로부터 인디애나주 뉴우 하모니의 3만 에이커의 땅을 인수했다. 오웬은 1826년 7월 4일에 인류의 3대 억압자인 '사유 재산て불합리한 종교て결혼'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정신 독립 선언>을 선포하고, '근면하고 선량한 사람은 국적을 불문하고' 그의 공동체에 참가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유럽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났다. 그러나 미국인은 영국인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뉴 하모니에서 그들은 더욱 형편없었다. 서부인들은 뉴 라나아크의 스코틀랜드 프롤레타리아처럼 온순하지가 않았다. 또 제한 없이 누구나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종 부랑자와 악당이 들끓었다. 오웬은 테일러라는 파렴치한 인물과 동업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그와 손을 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테일러는 자기도 그 땅 위에 공동체를 하나 세울 생각이라고 하면서 오웬에게 손을 끊는 대가로 한 구역의 땅을 요구했다.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날 밤 테일러가 많은 양의 농기구와 가축을 몰래 자기쪽 땅으로 날라 갔기 때문에 그 다음날 거래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것들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 테일러는 자기 땅에 위스키 제조소를 만들어 오웬의 금주 설교를 조롱했고, 제혁 공장을 세워 오웬의 제혁 공장과 경쟁했다. 뉴 하모니는 3년도 버텨 내지 못했다. 오웬은 마침내 재산을 여럿으로 갈라 팔아 버렸다.
그는 그 뒤에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같은 일을 벌여 많은 돈을 이러한 공동체에 날려 버렸다. 그는 돈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뉴 라나아크 시절의 초창기에는 면직업의 경기가 좋았었고 그가 자신의 최초의 공동체만을 소유하고서 스스로 감독할 수 있었으므로, 돈 관계에서의 약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유지해 나갈 방도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설비와 공장을 사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림으로써 많은 돈을 날려 버리곤 했다.
외로운 죽음
그는 마침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자식들의 부양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이상 부유한 공장주도 아니요, 또한 지배 계급의 호의마저도 잃어버린 그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32년의 개정 선거법은 오직 중산 계층에게만 지지를 얻었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환멸과 반항심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환멸을 느낀 오웬은 노동자계급에 가담했다. 그는 뉴 라나아크마저 포기해 버렸으며 이제는 고용주 신분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제 오웬식 협동 조합 운동과 전국 대통합 노동 조합에 관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너무도 못 견뎌한 까닭에, 즉 많은 경험을 했음에도 여전히 자기 제도의 확신성과 필연성을 너무도 확신한 까닭에, 그는 노동자 계급의 장기간에 걸친 고통스런 투쟁에서는 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조직한 후 1년도 채 못되어 노동 조합 운동은 와해되어 버렸다. 오웬은 차티스트 운동과 곡물법 폐지 운동에는 관심이나 공감을 거의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일거에 대뜸 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훨씬 쉬운 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인류가 아직도 너무나 몽매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저승에 간 사람들의 힘에 의지하려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고결한 인물들―생시에 그의 주장을 공감을 갖고 경청하였으며 그의 이상을 정말로 공유하고 있었다고 느껴졌던 사람들로서 이제는 죽어 그의 곁을 떠나간 모든 사람들―즉 셸리, 토마스 제퍼슨, 채닝, 켄트 대공(이 대공이 그에게서 돈을 빌어 쓴 뒤 갚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등이 자기와 여러 가지 약속을 맺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자기와 의논하고 자기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저승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에게 죽은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은 여러 해 전에 그의 머리에 떠올랐으나 지금 세상에서는 아직 확실한 근거를 잡지 못한 몇 가지 생각―"지금의 무지몽매한 인류로서는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을 매우 중대한 어떤 변화가 명백히 진행 중"이라는 생각, "쌓이고 또 쌓이는 엄청난 부 속에서 모든 사람이 빈곤에 허덕이거나 아니면 남의 빈곤 때문에 절박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상호 간의 적대적인 이해 관계에 기초한 제도가 인류를 위해 다행스럽게도 이제 오류와 모순의 극한점에 도달하였다."는 생각, 곧 '단결의 원칙'이 '분열의 원칙'을 대체하게 된다는 생각, 또한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개인의 행복은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행위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확인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큰 돈을 모았다가 깡그리 날려 버린 로버트 오웬은 1858년 웨일즈의 조그마한 마을―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열 살에 사회로 진출하여 꿈같은 출세를 거듭하고, 마침내 면방업계의 개척자가 되었다―로 돌아가 아버지의 말 안장 가게 옆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에드먼드 윌슨/미국의 뉴저지주 출생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차 대전 이후 신문 기자 등으로 활약했다. 후에 비평에 눈을 돌려 20세기 비평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To the Finland station』, 『Axel's Castle』등이 있다.
자료출처:http://cafe.daum.net/eheaven/6QcH/106?docid=Pail|6QcH|106|20030723004155&q=%B7%CE%B9%F6%C6%AE%20%BF%C0%C0%A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