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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찢기는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증언자: 김결(남)
생년월일: 1937.(당시 나이 43세)
직 업: 전파사(현재 전파사)
조사일시: 1989. 2
개 요
1980년 5월 18일, 계모임을 갖던 중 계엄확대와 광주시내 시위상황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김결씨는 즉시 금남로로 나가 시위에 합류했다. 그날 최루탄 파편에 머리가 찢어져 열 바늘 이상을 꿰맸다.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그 후 1980년 광주에서 자행된 전두환의 양민학살에 대한 폭로를 주된 사업으로 하는 '횃불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회원의 밀고로 1982년 3월 체포되어 9개 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현재도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앞장서 투쟁하고 있다.
'빨갱이 가족'으로 멸시받던 어린 시절
공전을 거듭한 우리 민족사의 비극으로 인하여 나는 어린 나이에 두 형님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4남 2녀 중 위의 형님 두 분이 '빨치산활동'을 하신 관계로 우리 가족은 경찰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고 살았다. 형님 한 분은 '여순사건' 이후 입산하여 보성군 복내면 일대에서 활동하셨다. 보성군 복내면 '법화'라는 마을에 잠시 내려오셨다가 경찰에 의해 살해되셨다. 큰 형님은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해방 후에도 '부평경찰서'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셨다. 6·25 때는 '전남도당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셨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1950년) 큰형님이 보성에 오셨다. 큰형님으로부터 연락받고 어머님, 둘째형님, 나 이렇게 셋이서 보성으로 가 형님을 만났다. 그때 하룻밤을 보낸 것이 형님과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 형님은 '빨치산투쟁'을 계속하다 1952년 빨치산 대토벌 당시 지리산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남부군 하권에 사망시기와 당시 상황이 기록되어 있음-조사자 주).
1948년 이후 경찰의 빨치산 토벌작전이 본격화되었다. 그와 때를 맞춰 빨치산 가족에 대한 탄압도 극심했다. 우리 면에서는 지서 옆에 수용소를 지어놓고 그곳에 입산자들의 가족을 감금시켰다. 우리 마을에서 수용소생활을 한 사람이 '5 가구 중 15명'이었다. 우리 가족은 편찮으셨던 아버님을 제외하고 다섯 명이 수용소 생활을 했다.
경찰들은 밤에는 숨어지내다 날만 새면 우리들을 이끌고 산으로 갔다. 경찰의 강요에 못 이겨 산을 쏘다니며 '자수하라'고 소리치며 다녔다. 어린 내 마음에도 그짓이 싫었지만 경찰의 매에 못 이겨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웅치면에서도 일제의 잔재들이 청산되지 않았다. 인공 때 '학생위원회'의 위원장을 했던 김학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부역을 했지만 나중에 돈을 써서 전라북도 도지사까지 지냈다. 그것을 보면서 '대한민국은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일제시대부터 웅치면장을 했던 최씨가 해방 후에도 계속 면장을 했다. 그러자 진보적인 사람들이 '왜 반역자를 계속 면장을 시키냐'면서 그 집에 불질러버렸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뒤 최면장은 빨치산에 의해 죽었다.
유격대원들이 경찰에 쫓겨 입산하고 나자 최면장의 아들 '최송'이라는 자가 빨치산 가족들을 괴롭혔다. '웅치 빨갱이들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다'면서 닥치는대로 때렸다. 나도 그때 '최송' 한테 맞았는데 지금까지 얼굴에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또 인공 때는 '최송'을 잡아놓고 보복행위가 가해졌다. 나도 그 일에 가담했다면 경찰이 진입한 후 또 한바탕의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이렇듯 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형님을 두 분이나 잃어버리는 엄청난 비극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성장과정이 나로 하여금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에 눈뜨게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평화적인 횃불시위
1980년 당시 나는 서동에서 전파사를 했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온 국민은 군사독재가 청산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러한 기대에 들떠 있었다. 당시 '통일당' 당원이었던 나는 정치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정국의 변화에도 민감했다. 정보부장이었던 '전두환'의 부상에 심상찮은 기류를 느꼈으며, 학생들의 시위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
1980년 5월 16일,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학생이 참가하여 '평화적인 횃불시위'를 했다. 전남대 학생회장이던 박관현씨가 시위를 주도했다. 대열은 세 개 조로 나뉘었는데 각 조별로 코스를 정하여 시내를 행진한 다음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하기로 했다. 내가 속한 조는 계림파출소, 서방 그리고 전남대를 거쳐 신역으로 돌았다.
도청에 다시 집결하여 박관현 회장의 연설을 들었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그가 굉장히 똑똑하다는 생각을 했다. 집회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내일(17일)은 데모하지 말고 하루동안 지켜본 후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자'고 했다. 집회가 끝나자 함께 참여했던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밤늦게 헤어졌다.
이튿날(17일)은 별다른 사건 없이 보냈다. 그날 밤 12시를 기해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나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실신하면 트럭에 던져
18일은 동네사람들과 계모임이 있어 시외로 나갔다. 오후에 동네 세탁소에서 일하는 청년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는 계엄군이 광주에 와서 사람을 죽이고 난리가 났다고 했다. 그때야 나는 '계엄령이 확대조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곧바로 버스를 타고 광주로 왔다. 나는 우선 상황파악을 위해 통일당 사무실로 갔다. 통일당 사무실은 중앙로변의 현대예식장 맞은편에 있었다. 사무실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한 당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3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밖을 보니 계엄군이 금남로에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무조건 붙잡았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팼다. 놈들은 쓰러진 젊은이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고 가서 트럭에 던졌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격분한 우리는 금남로로 뛰어나갔다. 광주은행 앞에 계엄군들이 청년들을 붙잡아 옷을 벗겨 꿇어앉혀 놓고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있었다.
우리는 계엄군들 앞으로 갔다. 나는 그들에게 '죄가 있으면 합법적으로 처리할 것이지 왜 때리냐'고 항의했다. 순간 그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나는 그들을 뿌리치고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그때 놈들의 몽둥이에 맞은 팔목이 새파랗게 멍들고 시계도 잃어버렸다. 같이 있었던 한영택씨는 계엄군들에게 붙잡혀 상무대로 끌려갔다. 처음에는 어디로 끌려갔는지 몰랐는데, 우리의 연락을 받은 부인이 여기저기 전화해서 알아냈다. 다음날 그의 부인이 상무대로 가서 같이 나왔다. 그는 얼마나 몰매를 맞았는지 온몸이 붓고 멍들어 있었다.
최루탄에 머리가 찢어지다
19일 오전에 집을 나와 금남로로 갔다. 금남로는 YMCA를 중심으로 도청 쪽은 계엄군이, 반대쪽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날은 비가 왔는데도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 상무관 골목에서 경찰경위가 공수에게 맞는 사태가 벌어졌다. '경찰이 왜 앞장서서 시위진압을 하지 못하냐'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공수에게 때리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경찰에게는 박수를 쳐주었다.
시민들은 YMCA 앞에 앉아 '계엄령 해제하라', '계엄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곳에 있던 당원과 함께 구호를 선창하면서 시민들을 향해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면 절대 안 됩니다'라고 목이 터져라고 외쳤다. 그때 공수들이 최루탄을 쏘며 질주해 왔다. 우리는 최루탄을 피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망치다가 나는 최루탄을 맞았다. 최루탄에 맞은 머리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데도 나는 잡히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피가 어찌나 쏟아지던지 옷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한참을 달린 후 나는 공수들을 피해 부근에 있는 '최원섭외과'로 들어 갔다.
그곳에서 17바늘 정도를 꿰맸다. 병원장은 시위하다 다쳤다는 내 말을 듣고 무척 친절하게 대해 줬고 치료비도 받지 않았다. 치료를 마친 뒤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연락을 받은 집사람이 옷을 챙겨가지고 병원으로 왔다. 나는 피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집사람과 함께 집으로 갔다.
다음날부터 상처부위의 치료는 집에서 겨우 소독만 하는 정도였다.
광주세무서를 불태우고
아마 20일 오후였을 것이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공수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공수들이 탱크 앞 총신에다 어린아이의 손을 묶어 매달아놓고 빙빙 돌리는 것이다. 데모를 했을 리 없는 어린애를 그토록 잔인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런 광경을 보고 분노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20일은 경찰들이 광주에서 물러난 날이다. 그날 시위대들과 함께 월산동 파출소를 갔는데 경찰이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서 기물을 부수고 서류에 불을 질러버렸다. 시위대와 함께 시내를 향해 가는데 인도에 나와 있던 시민들이 계란을 나눠줬다.
그날 밤 늦게 광주세무서 앞으로 갔다. 그곳에 모여 있던 시위군중이 광주세무서를 불태워버리자고 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움직이는 군대가 광주에 와서 시민들을 죽이는 등 난동을 부리니 불질러버리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또 다른 군중들은 '지금 세무서를 불태워 버리면 어차피 우리들이 낸 세금으로 다시 지어야 하니 자중하자'고 했다. 그러나 계엄군의 만행을 똑똑히 봤던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된 상태였다. 그러한 시민들의 의견이 불을 질러버려야 한다고 모아 져 광주세무서를 불태워버린 것이다.
광주세무서가 불탄 후 시위대는 다시 체신청으로 갔다. 체신청도 불을 지르자는 의견과 반대의견으로 분분하다 결국 그곳은 불태우지 않았다.
시민을 향한 집단발포
21일 오전에 금남로로 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YMCA를 중심으로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시민들 사이를 뚫고 장갑차 한 대가 도청을 향해 갔다. 그 장갑차 위에 청년이 타고 있었다. 장갑차가 분수대 쪽으로 가자 계엄군이 총을 쏘았다. 총에 맞은 청년의 목이 뒤로 확 꺾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김재술(당시 노동자)씨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부으며 뛰어갔다. 순간 놈들이 또 총을 갈겼다. 그분도 즉석에서 사망했다.
내 조카도 그때 금남로에서 대퇴부에 총을 맞았다. 총에 맞아 쓰러진 조카를 부축해 시위차량에 올라탔다. 그 차를 타고 조카의 집이 있는 화정동까지 갔다. 조카가 치료받는 것을 도와주고 다시 도청 앞으로 갔다. 벌건 대낮에 시민을 향해 총을 쏘다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금남로에 왔을 때 시민들은 거의 흩어지고 없었다.
시외로 나간 시위대들이 총을 가지고 와 공원에서 총을 나눠준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공원에서는 총기사용법에 대한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모금한 돈으로 수의를 짓다
22일은 집에서 딸을 시켜 대자보를 썼다. 그동안 계엄군이 광주시민에게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한 내용을 적어 동네 곳곳에 붙였다.
23일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에 참석했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굉장히 많은 시민이 모여 계엄군의 만행에 대한 규탄대회가 열렸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모금운동을 했다. 시민들이 정성껏 낸 돈과 평소 알고 지내던 김영용씨가 낸 돈을 가지고 양동시장으로 갔다. 닫힌 포목점의 문을 두드려서 상당히 많은 양의 광목을 샀다. 그 광목을 가지고 즉석에서 플래카드를 써서 붙이기도 하고 수의를 만들어서 도청으로 보내기도 했다.
당시 시민궐기대회가 날마다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는데 아마 25일의 일이었을 것이다. 도청 앞에 있는데 간첩이 나타나 독침을 놓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독침사건의 주범이 전남일보사로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몰려갔다. 굳게 닫힌 셔터문을 열려고 해도 안 되니까 흥분한 시민들이 불을 지른다고 하다가 수그러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이종기씨와 장휴동씨가 분수대로 올라가서 '시민들은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고 했다. 계엄군과의 협상 운운하자 흥분한 시민들이 그들을 연단에서 끌어내렸다. 시민들은 '지금 무기를 반납하는 사람은 광주시민이 아니다'고 하며 '죽여버린다'고 아우성쳤다.
굉장히 의문스러운 일이 생겼다. 궐기대회를 하는 도중에 자꾸 마이크가 꺼져 버렸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망소리사'를 했던 사람이 도청 안으로 들어가서 무선기를 분해해서 못 쓰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러한 사실을 본인으로부터 직접 듣게 되었다. 그 사람이 공화당 때부터 새마을운동 운운하면서 친여당 활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이번 올림픽 때도 무선기사로 활동했다. 얼마 전에 그를 만났는데 올림픽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니 하도 속이 상해 욕을 퍼부었다. "그런 옷을 입고 있다니 광주에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올림픽이 미제국주의자의 앞잡이 노태우 정권의 영구분단을 노리는 매국적인 행위인데 그것도 모르고 그런 옷을 입다니. 에이, 더러운 자식. 빨리 가면을 벗고 살아! 5·18 때도 도청에 들어가서 그런 짓을 했으면서 또 그러면 되겠냐?" 라고 소리쳤더니 자기를 무시한다고 대들었다. 그래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사람들이 말리면서 '저런 인간은 상종도 하지 마라'고 했다.
이처럼 전두환 일당은 5·18 당시 전파사를 한 사람까지 동원해서 방해공작을 폈다. 우리 사위가 그 당시 육군상사였다. 사위의 말을 들어보면 군인들이 사복을 입고 시내에 나왔다고 한다. 그때 우리 사위도 명령에 의해 시내로 나와서 몰래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50장이나 된다. 그런데 쓸만한 사진이 없다. 21일 이후 경찰과 계엄군이 광주를 빠져나간 뒤 현역군인에게 사복을 입혀 시내로 투입시켜 시위상황을 감시한 것이다.
전두환 일당은 그토록 치밀하게 계획적인 음모를 짜서 5·18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놈들은 교통과 통신을 두절시켜 광주를 완전히 고립시킨 다음 의도적으로 광주시민이 들고 일어나게 만든 것이다. 5·18을 조작하여 폭력적인 전두환 정권을 만든 후 정통성에 대한 문제가 생길 때 악이용하기 위해 광주문제를 확대시킨 것이다. 이러한 음모가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평화적인 시위를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의도적으로 과잉진압했던 것이다. 그런 목적이 없었다면 왜 무자비한 살상을 하고 시위현장에 정보원을 투입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시민들을 자극했겠는가!
계엄군의 재진입 소식을 듣고
26일 오후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 때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 소문을 들었다. 그 소문을 듣고 나는 이런 구상을 했다. 당시에도 나는 미국이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국인을 잡아다 감금시키고 그들을 미끼로 계엄군과 협상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기독병원 부근에 양키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궐기대회장에 같이 있었던 기종도씨, 최운용씨 외 몇 사람을 만나 나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나 서로의 의견이 엇갈린 채 합의를 못 보고 결국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그날 도청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정문 앞에서 자정까지 있다가 집으로 갔다. 밤늦게 집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낮에 들었던 계엄군의 재진입설 때문에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문을 모두 담요로 가리고 혹시나 총에 맞을까봐 솜이불을 꺼내서 아이들에게 덮어 씌웠다. 그 동안의 피로가 겹쳐 몹시 고단한데도 좀체로 잠이 오지 않았다. 눈만 멀뚱거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새벽을 맞았다.
그때가 몇 시쯤 되었을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봉창문을 살며시 열고 내다보았다. 우리 집 앞에 빈터가 있었는데 그곳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와 있었다. 그때는 계엄군이 보이지 않았는데 아주머니들이 무슨 소리를 지르니까 계엄군이 나타나 총뿌리를 들이대며 쏘려고 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아주머니들이 도망치는 것을 봤다. 계엄군들은 더 이상 아주머니들을 쫓아가지 않고 곧바로 공원 쪽으로 난 길로 올라갔다.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원에서 굉장히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하여 10일간의 광주항쟁은 막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의 살인극 폭로하다 국가보안법으로
1980년 이후 전두환의 폭력정권이 들어서면서 어느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를 못 하고 있던 시기에 나는 '횃불회'를 조직했다.
그 당시만 해도 김대중씨는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분을 살리는 길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조직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그분에게 도움이 되고 스스로에게도 힘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던 중 나는 '신한민보'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LA에 살던 어떤 국회의원의 딸을 통해서 입수하게 되었다. 그 신문은 안창호 선생이 창간한 것이다. 그 신문에 전두환 정권의 살인극에 대한 폭로와 올림픽 개최를 반대해야 만 하는 당위성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신문을 대량으로 복사해서 나눠 주던 과정에서 '횃불회'가 결성되었다. 10여 명의 회원 가운데 아버지가 경찰인 변동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진보적인 성격을 띤 활동을 계속하자 변동환이는 상당히 거부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를 통해서 우리의 활동이 낱낱이 광주경찰서 정보국에 보고되고 있었다.
횃불회의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회원들의 집을 이용했다.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주제발표회를 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내가 회장으로 있던 1982년 3월 9일 밤 12시에 회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자정에 들이닥친 형사들이 보자기로 얼굴을 뒤집어 씌워서 호남대학 앞에 있는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14일에 걸쳐 온갖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그들은 우리 형님들의 행적을 트집잡아, "너는 빨갱이 가족이니 분명 간첩이다." "언제 김선우(형님)와 접선했어?" 하고 추궁했다. 우리 형님은 6.25 당시 돌아가셨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때 어떤 잡지에 소개되었던 형님의 사망경위에 대해 자세히 말하자 겨우 납득하는 식이었다. 또 월례회 주제발표 때 내가 '올림픽은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올림픽을 개최하려고 한다'는 등의 올림픽 반대의 정당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모두 파악하고 있던 그들은 나를 북괴찬양자로 규정했다. 그 이유는 가정적으로도 불온한 사상을 보유할 수 있는 사람이고 또 북한의 입장과 동일하게 올림픽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끌어들여서 국가보안법에 해당된다고 했다. 회원 중 4명이 기소되고 나머지는 훈방되었다. 나는 9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우리가 붙잡혀 있을 때 부산 미문화원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횃불회와 미문화원방화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해서 눈을 벌겋게 뜨고 조사했다.
횃불회 사건이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굉장히 유명했다. 외국에까지도 사건이 알려져서 교포들이 후원자금을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민족사의 지평을 여는 차원에서 진상규명되어야
광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운동단체들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재정권에 대항해서 싸울만한 구심력이 없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해결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통합된 진보적인 단체를 중심으로 해서 5·18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다. 운동권 내부에서 광주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신이 하나로 되었을 때 44년간 미제의 지배 속에서 수탈당한 민중의 한을 풀고, 나아가서 민족모순을 극복하고 또 민족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전두환의 사과성명이라고 하는 것은 제2의 6·29다. 우리 국민은 유교관념이 깊게 박혀 있어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다. 물론 사사로운 개인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용서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를 거역하고 민족을 죽인 일당을 순순히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자는 민족의 이름으로, 역사의 이름으로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현재까지 민족의 반역자들을 처벌한 경우가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2차대전 후 프랑스에서는 독일군에게 몸을 판 창녀까지도 처벌을 했다고 한다. 민족이 죽어갈 때 적군하고 나쁜 일을 한 반민족적 행위자에 대한 처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프랑스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커다란 비극인 '거창양민학살'이나 '제주도 4·3항쟁', '화순 탄광 부근의 미군 비행기 폭격' 등등은 반드시 파헤쳐야 할 사건들이다. 이러한 작업이 바로 우리 민족의 본질을 조명하고 민족의 원수인 미제의 본질을 폭로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5·18 역시 미제국주의자와 그들의 앞잡이 전두환 일당이 저지른 만행인 것이다. 이러한 민족의 원수를 단순한 사과와 해명으로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5·18의 진상규명은 반드시 우리 민족사의 지평을 여는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이든지간에 민족에게 죄를 지은 자는 역사 앞에 처벌을 받는다는 확실한 선례를 남겨야 한다. 그래야 역사적 오류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확실한 처벌없이 쉽게 용서하고 넘어가면 또다시 민족의 비극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조금 편하기 위해 역사적인 과업을 소홀히 했을 때 엄청난 민족의 비극은 또 다시 되풀이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5·18을 해결해야 한다.
5·18의 배후조정자가 분명 미제국주의자인데 그역시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세계 약소민족에 대한 미제국주의의 약탈과 착취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5·18 부분을 세계 약소민족의 애호와 도덕적인 차원에서 책임을 함께 한다는 입장에서 풀어야 한다. 크게는 광주문제를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세계 약소민족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책임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앞장서서 해야 할 야당이 현재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매진할 수 있는 진보정당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5·18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5·18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통일의 길로 접근해야 한다.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