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 판윤공 휘 지대(之帶)
공(公)의 호는 죽은(竹隱)이며 자헌 한성부 판윤(資憲漢城府判尹-정2품)이시다.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던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의 4세손이시다.
증조부 휘 서종(瑞種)은 종부령(宗簿令- 정4품), 조부 휘 원익(元益)은 대사성(大司成- 3품), 아버지 휘 선(瑄)은 병조판서(兵曹判書- 2품)이시다.
가세(家勢)가 귀하고 혁혁하고 공의 천성이 강명청직(剛明淸直)할 뿐 아니라 바른말을 잘하는 악악지풍(악악之風)을 가졌고 사치(奢侈) 습관이 없고 안색을 바르게 하여 조정에는 청백(淸白)과 강직(剛直)으로 칭찬을 받았다.
일찍 무과를 지망하여 갑과(甲科)에 등과하여 수군(水軍)으로 나아간 공은 경상도 수군 만호(慶尙道水軍萬戶- 정4품)가 되어 바다로부터 오는 왜구를 지켰으며 이조 태조 3년(1394)에 왜선 한 척을 나포하여 공을 세웠다.
이로 말미암아 태조는 그 해 3월에 판교서감사 이문화를 보내어 술과 비단을 하사하여 위로 하였다고 한다.
단종 때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이고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일찍이 벼슬을 버리고 궁벽한 곳을 찾아 은거했으니 경주읍 남쪽 60리에 있는 중리(中里)이며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蔚山廣域市蔚州郡斗西面九良里)이다.
평상시 산인(山人)같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야인(野人) 같은 같은 복장으로 한가히 노닐었으며
점필제 김종직(점畢齋 金宗直-예조판서이며 학자)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공(公)의 유허지(遺墟地)인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에는 공이 한성(漢城-서울)서 가져와 연못 옆에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550년이 넘은 지금도 청청(靑靑)하여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6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높이 22m, 허리 둘레가 12m로 매우 장엄하다.
이 나무를 훼손하면 해를 입는다고 전해오며 아들을 기원하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도 전해와서
상당히 소중히 여기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또 공은 생전에 구량천(九良川)의 흐름이 마을 뒤편으로 바꾸어 흐를 때는 구량에서 떠나라는 말에 따라 어느 해 심한 홍수로 강심(江心)이 마을 뒤로 변하자 자손들이 터를 비우고 흩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공(公)의 묘(墓)는 경주부 동 명활산 아배동(慶州雰明活山阿陪洞) 신좌(辛坐)이고 표갈(表碣-머리부분을 둥글게 한 작은 비석)이 있다.
현 경주시 정래동 보문호 입구 오른쪽 명활산(明活山城)기슭을 따라 (경주 월드가 위치한 쌍탑에서 불국사 호텔과 연결된 도로를 따라간-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도로이나 차가 띄엄띄엄 다녀서 그나마 다행이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불국사 호텔 쪽에 가깝게 도로변 왼쪽에 제실이 있다.
이곳을 '아배동' 또는 '아동'이라 하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물으면 된다.
* 배는 평해 황씨이며 교리불권헌 정의 따님(配平海黃氏校理不倦軒玎女)이시다.
^ 세 아들 점(點)과 묵(默)과 연(然)을 두었다.
○ 중파로 분파
중조 17세인 익재공 휘 제현 할아버지 때에 '익재공파' 인 대파로 분파되고 그로부터 5세손인 중조 21세인 판윤공 휘 지대 할아버지 때에 와서 '익재공후 판윤공파'인 중파로 분파된다.
그 외의 소파(小派), 지파(支派)는 후손들이 필요에 따라 관직명, 호, 지명, 좋은 글자를 붙여서 집안을 구분한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의 판윤공(휘 지대) 기록
○ 이지대(李之帶)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3월 9일(무신) 2번 째 기사
왜적을 격퇴시킨 창평 현령 신원절과 수군 만호 이지대 등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全羅道昌平縣令愼原節率軍官, 斬倭七級, 擒一名, 收兵器衣服以獻:
慶尙道水軍萬戶李之帶獲倭一船。 命判校書監事李文和, 齎宮(온)綺絹, 往賜之帶原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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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溫삼수변 대신 酉)- 술빚을 온
*궁온(宮온)- 궁에서 빚은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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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창평 현령(昌平縣令) 신원절(愼原節)이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왜적(倭賊) 7명을 목베고,
1명을 사로잡고, 병기(兵器)와 의복을 거두어 바쳤으며, 경상도 수군 만호(水軍萬戶) 이지대(李之帶)는 왜적의 배 1척을 잡으니,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궁온(宮온)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가서 지대와 원절에게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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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齎宮온綺絹(재궁온기견)'의 한글 풀이
齎- 가져올 재
宮- 궁궐 궁
온(溫삼수변 대신 酉)- 술 빚을 온
綺- 비단 기. 아름다울 기
絹- 명주 견
- 실록에는 → '궁온(宮온)과 무늬있는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가서'로 역문
- 검색에서는 → 주로 '술과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가서' 와 '술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가서'로 역문 하였다.
* 실록의 역문에 '궁온(宮온)'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해설이 없다.
- 궁온은 '임금이 하사한 술'이라고 한다.
O. 판윤공 王旨(왕지)의 내용
[李之帶爲嘉善大夫檢校漢城尹者 (이지대 위가선대부 검교한성윤자)
永樂十四年(영락14년) 六月(6월) 初二日(초2일)]
태종의 御寶(어보)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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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락 14년 - 1416년.
'영락' 연호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연호(391~412)이기도 하고 중국 명나라 성조의 연호(1403~1424)이나
여기서는 명나라 성조 연호이다.
# 조선 태종16년. 병신년 6월 2일 판윤공에게 내린 왕지이다.
# 이조 초기에는 '왕지'라고 하다가 뒤에는 '교지'라고 하였다.
* 검교(檢校)- 고려· 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벼슬의 정원 외에 임시로 증원할 때나 실제 사무를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게 할 때, 그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이르던 말.
그래서 판윤공은 한성판윤 벼슬을 실제로 한 것이 아니고 명예직으로 받은 것이다.
특별히 조선 영조·정조 때에, 임시로 규장각 제학(提學)이나 직각(直閣)의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의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이르기도 하였다. ≒검직(檢職).
* 御寶(어보)- 국쇄(國璽) -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사용하던 임금의 도장.
≒곤보(袞寶)· 국보(國寶) · 대보(大寶) · 보(寶) · 부새(符璽) · 새(璽) · 신새(神璽) ·
영새(靈 璽) · 옥보(玉寶) · 옥쇄(玉璽) · 인새(印璽).
O. 왕지는 보물 제1474-2호.
경주 이씨 양월 문중 소장 고문서
- 이지대 왕지(慶州李氏楊月門中所藏古文書-李之帶王旨)
종 목 : 보물 제1474-2호
명 칭 : 경주이씨양월문중소장고문서-이지대왕지
(慶州李氏楊月門中所藏古文書-李之帶王旨)
시 대 : 조선 태종 13년(1413)
수 량 : 1점
분 류 : 국왕문서/교령류
지 정 일 : 2006.07.18
소 유 자 : 서울역사박물관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문화재형태 : 낱장
대표문화재 : 보물 제1474-2호
경주이씨 양월문중 소장 고문서- 이지대 왕지 (慶州李氏楊月門中所藏古文書-李之帶王旨)
형 태 서 지 : 이지대 왕지(李之帶王旨)
-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 65.2cmⅹ38.0cm
첫댓글 오랜만에 차분히 앉아 올리신 글 잘 보았습니다. 이제 경주 이씨에 대한 내력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는데 앞으로 족보에 관련하여 시간 투자를 많이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아동 이라고도 하고 하동 이라고도 합니다 ... 경주에선 하동 이라고 하면 다 압니다..
태조실록----전라도 창평 현령(昌平縣令) 신원절(愼原節)이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왜적(倭賊) 7명을 목베고, 1명을 사로잡고, 병기(兵器)와 의복을 거두어 바쳤으며, 경상도 수군 만호(水軍萬戶) 이지대(李之帶)는 왜적의 배 1척을 잡으니,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궁온(宮?)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가서 지대와 원절에게 내려 주게 하였다
판윤공 할아버지 王旨가 서울역사박물관에 있다고 알고있습니다만 왕지의 내용과 품계 관직명을 알수있습니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였기에 어떤관직에 어떤 품계의 직첩을 내릴때 받은 왕지인지는 알지 못하여 확실한 답변을 드릴 수가 없네요.중하 선생이나 야촌 선생께서 혹시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네요.
늘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요새 바빠서 자주 찾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선현들의 발 자취 잘 읽고 갑니다^^
좋은자료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