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귀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애의 정서를 많이 나타내셨다. 나사로의 죽은 사건을 둘러 싸고 왜 그는 슬퍼하셨을까? 그는 이제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것을 내다보시고 계셨는데 왜 슬퍼하셨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곧, (1) 그에게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같은 이들도 신앙이 부족하였고, 유대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편견을 고집하고 앉아서 예수님을 냉혹히 논단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슴에 송곳을 꽂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 앞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끼신다. 그는 불신앙의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적도 있다.
(2) 예수님은 진리이시니, 진리 그것을 그대로 느끼심. 죽음이 비애라는 것은 천정의 진리이다. 그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죽음이 슬픈 것은 사실이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 본절은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음을 시사한다. '육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코스'는 '살'을 뜻하는 말로서 '영'과 반대되는 물질적인 육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셨으며 인간이 느끼고 당하는 감정이나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시는 대제사장이심을 시사한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본 구절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 중 겟세마네에서 드린 고뇌에 찬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나 예수의 지상 사역 중 어느 특정한 순간에 적용시키기 보다는 그의 대제사장적인 사역 전체에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에서 '올렸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세넹카스'는 희생 제물을 '바치다'라는 의미의 제의적 용어이다 이것은 1절에서 언급된 대제사장의 제사와 평행을 이룬다. 대제사장이 속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물'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올린 '간구와 소원'을 의미한다.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 '경외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라베이아스'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있다.
(1)혹자는 '두려움'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 예수는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을 느끼셨으나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하셨다. (2)혹자는 '율라베이아스'가 '잘'에 해당하는 접두사 '유'와 '붙들다'는 뜻의 헬라어 '람바노'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것의 일례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을 들 때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는 예수의 기도가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실상 예수의 기도의 목적은 고난의 잔을 옮기는 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으므로 그의 기도는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수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
이 사실을 저자가 본절에서 밝히는 이유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의 제사가 항상 받아들여진 것은 아닌 반면에 예수의 기도는 받아들여졌음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본문은 앞에서 언급된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과 연결된다. '죽음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 다나투'는 예수께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예수를 지배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활을 통해 죽음의 영역을 극복하셨음을 시사한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눈물, 사망, 애통, 아픔'은 '처음 것'과 같은 의미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기 이전에 죄와 사망으로 인해 부패되고 변질되었던 옛 질서의 산물이다.
이 산물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소원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임재하셔서 처음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하나님과 백성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