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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경(지은이)의 말
잊는다는 것이
결핍이 된다는 것을
소렌토에 가서 알았다.
나의 바다
나의 하늘이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한 시절
뜨거운 나뭇잎이
발등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2023년 11월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방의 나라 혹은 오래된 집에서 쓰는 편지
2023년 《강원작가》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안유경 시인의 첫 시집 『호텔 나나』가 문학의전당 시인선 386으로 출간되었다. 안유경 시집 『호텔 나나』는 첫 시집답게 다양한 층위의 내용들이 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초현실적인 자아 분열과 내적 서사, 지나간 것들에 대한 추억과 일상의 이면적 의미에 대한 탐구 등 상당 기간 시를 쓴 문학적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쩌면 첫 시집이 가진 매력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무엇과 싸울 것인가,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탐색이야말로 왜 글을 쓰는가에 준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의식에 대한 탐구 그리고 환상적 현실에서의 발화 등과 함께 안유경의 시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준다. 안유경의 시인으로서의 다음 행보가 집요한 이미지의 변주(變奏)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인의 출현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끝없이 해석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 해설 엿보기
안유경 시집 『호텔 나나』는 첫 시집답게 다양한 층위의 내용들이 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초현실적인 자아 분열과 내적 서사, 지나간 것들에 대한 추억과 일상의 이면적 의미에 대한 탐구 등 상당 기간 시를 쓴 문학적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쩌면 첫 시집이 가진 매력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무엇과 싸울 것인가,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탐색이야말로 왜 글을 쓰는가에 준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언제나 빈방이 많아
건물이 아주 낡았기 때문이지
해 질 무렵
호텔을 나와 흐릿한 간판 아래 서 있으면
민트색과 핑크색 물방울이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한낮에 꾸는 꿈을 꾸는 것 같아
방금 호텔 앞에 빨강 포르셰가 서고
노랑 레깅스에 흰색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고양이 걸음으로 호텔로 들어갔어
한쪽 어깨가 몹시 기울어진 남자가 그 뒤를 따라갔지
어제는 몸이 풍선처럼 부푼 여자가
귀밑 애교머리를 넘기면서
장딴지가 굵은 남자에 떠밀려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없어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쇠창살에 뚫린 조그만 구멍으로 아주 낡은 말소리와
열쇠가 매달린, 202호라고 쓴 나무 판때기가 불쑥 나오지
주인 여자는 호텔처럼 백골이 다 된 듯해
언젠가, 언제나 푸른 꽃인 곰팡이가
이곳을 완전히 덮어 버릴지 몰라
어떤 이들은 사랑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오겠지만
어떤 이들은 이별하기 위해서도 오겠지
창문 밖으로 자동차 바퀴에 다리 잘린 고양이가
집채 같은 몸을 끌고 가는 게 보였어
― 「호텔 나나」 전문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호텔 나나」는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포착된 시적 화자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빈방이 많”고 “건물이 아주 낡”은 ‘호텔 나나’의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민트색과 핑크색 물방울이 공중에서 날아다니는,/한낮에 꾸는 꿈을 꾸는 것 같”다는 호텔에 대한 묘사는 ‘호텔 나나’가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상상 속 꿈의 공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호텔에 드나드는 인간 군상은 과장된 옷차림과 몸놀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진다. “노란 레깅스에 흰색 하이힐을 신은 여자”, “한쪽 어깨가 몹시 기울어진 남자”, “몸이 풍선처럼 부푼 여자”, “장딴지가 굵은 남자” 등의 인물들은 풍속화의 도구적 인물처럼 그려진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없”다는 진술은 매우 의미심장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인물에 대한 과장과 인물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상통한다. 이 시에 나타난 사랑이란 심드렁한 일상일 뿐이며 심지어 부조리하다는 수식조차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호텔 나나’의 운명이 “언젠가, 언제나 푸른 꽃인 곰팡이가/이곳을 완전히 덮어 버릴지” 모른다는 진술은 심각한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시적 화자가 인식한 사랑이란 심드렁한 일상이며 “줄 수도 없고/받을 수도 없는”(「봄, 다시」) 관념인 것이다. “자동차 바퀴에 다리 잘린 고양이가/집채 같은 몸을 끌고 가는”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기표 주변을 어슬렁대는 실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호텔 나나’는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탐구는 자아의 분열된 양상을 보여준다.
― 우대식(시인)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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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23년 강원자가로 등단한 안유경 시인의 첫 시집 발간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