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상의 불확실성이 워낙 많지만, 람세스 2세는 번영을 누린 군주이기는 해도 번영을 이룩한 군주로 길이 칭송받을 만한 업적의 주인공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워낙 대단했던 그의 ‘선전 작업’ 덕에, 그는 이미 죽은 직후부터 전설이 되었다. 19왕조가 끝난 뒤에도 여러 파라오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람세스 11세까지 나왔으며, 몇백 년 뒤까지 그의 상에 제물이 바쳐졌다. 헤로도토스나 디오도로스 같은 그리스인, 타키투스 같은 로마인들도 그에게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 율 브리너가 연기한 영화 [십계],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집트의 왕자] 등등에서 람세스는 히어로 또는 안티히어로로서 위엄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 요란한 우상화와 거창한 신화 만들기를 마냥 조소할 것은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평범한 개인이 살아갈 낙을 얻고, 공동체에 대한 의심을 잊기 위해 최신 휴대전화를, 최신 게임을, 신상 명품백을 소비하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도 신이자 우상인 파라오의 이미지를 소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세출의 영웅과 함께 한다는 믿음, 신과 같은 지도자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그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었다. 본래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겸손은 미덕이 아니었다. 그는 사막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인류의 희망, 살아 있는 기적으로 스스로를 치장해야 했다. 람세스 2세는 그 궁극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행운 혹은 신의 가호로, 개인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풍요를 누리고 살았다. 다만 늙지도 화내지도 않고 똑같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만 새겨져 있는 그의 수없이 많은 상들 틈에, 진정 고뇌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 그래서 파라오의 영광이 한낱 구경거리가 된 지금 사람들에게는 그가 공감할 수 있는 한 인간이 아닌 값비싼 돌조각으로만 비쳐진다는 점이 혹시 아쉬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어스, 왕 중의 왕이로다. 너희 이른바 강자들이여, 나의 위업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
그리고 그 곁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 거대한 조각상의 부서진 잔해들 주위에는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평탄하고 광활한 모래밭만 끝없이 펼쳐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