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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재사랑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호산아 오상수
— 랑탕, 내 영혼의 숨결이 뜨거웠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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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AL National Park No.1
2014—HIMALAYA LANGTANG-GOSAINKUNDA TREKKING (5)
랑탕빌리지 롯지에서 바라본 아침 풍경
▶ 2014년 9월 14일 (일요일) * [제6일] 랑탕빌리지→ 강진콤파
* [랑탕계곡 ; 랑탕마을-강진곰파] — 랑탕의 아침 풍경, 그리고 자선(慈善)
☆…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밖에 나와 보니 짙은 안개가 걷히는가 했더니 멀리 동북쪽으로 설산(雪山) 거봉이 그 신비한 모습을 언뜻 드러내다가 이내 운무(雲霧)가 밀려와 뒤덮어버렸다. 그리고 롯지의 정면 남쪽의 거대한 산도 부분적으로 안개가 걷히면서 그 위용을 드러내었지만 피어오르는 안개 때문에 제대로 된 풍경은 볼 수 없었다. 완전하게 관망할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지만, 이번 히말라야 들어 처음 보는 설산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부분적인 풍경마저도 금방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 아침 식사 후, 게스트하우스 마당에서 네팔 주민을 위한 자선(慈善) 행사가 베풀어졌다. 울산의 송기섭 회장이 지인이 경영하는 맞춤옷 가게에서 200여 점이 넘는 남녀의류를 제공받아 가지고 온 것을 랑탕의 현지 주민에게 선물로 주는 행사였다. 거기다가 따로 준비한 양말 수십 점도 같이 주어졌다. 원래 샤브루베시의 부근의 산간학교를 통하여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나, 미리 연락이 되지 않아 마을의 규모가 큰 이 곳 랑탕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행사를 하게 된 것이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을 통해 랑탕마을의 주민들에게 연락하여 마당에는 20여 명의 남녀주민들이 모여들었다.
☆… 의류는 송 회장이 주민 한 사람 한 사람 주민에게 전달하고, 양말은 이상배 대장이 나누어 주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줄을 선 순서에 손에 잡히는 대로 나누어 주는 선물인지라,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분들은 매우 좋아했지만, 마음에 차지 않는 분들도 있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에 드는 것을 받기를 원한다. 똑 같은 물건을 일정하게 주는 게 아닌지라 받아든 표정이 조금씩 달랐다. 그리고 행사가 끝나고 난 뒤, 뒤늦게 나타난 주민은 그냥 빈손으로 돌아서서 참 안타까웠다. 남에게 베푸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치밀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랑탕계곡 ; 랑탕마을 그리고 마니월] — 티벳불교의 유구한 역사
☆… 오전 9시 30분, 오늘의 산행에 들어갔다. 오늘은 트레킹 3일째 되는 날, 이곳 랑탕(Langtang)마을에서 강진곰파(Ganjingompa)까지 올라가는 여정이다. 출발 당시 고소증(高所症)의 기미가 약간 있었으나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에는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주변의 산록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해발 3,430m 고지에 위치한 이곳 랑탕은 비교적 큰 산중 마을이다. 집집이 모두 게스트하우스인 마을은 이 지역 전체의 이름이 될 정도로 대표적인 마을이다. 여기저기 수많은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서양식으로 세련되게 지은 시멘트 건물도 있고, 이곳 특유의 돌벽으로 지은 건물,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은 목조건물도 있다. 지금도 돌과 시멘트로 새로 집을 짓는 곳이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진료소 표시를 한 건물도 있고 음료와 과자를 파는 가게도 있다.
☆… 랑탕마을은 봄이나 가을의 성수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휴양지이기도 하고 강진곰파(Ganjingompa)로 들어가는 트레커들의 중간 거점이다. 그리고 랑탕리룽이나 강첸포를 등반하는 전문산악인들도 고소에 적응하며 결전을 준비하는 곳이다. 올해(2014년) 지난 봄, 한국의 드락마르포리(Drakmarpo Li)를 초등한 2014-비전원정대(단장 이상배)도 우리가 유숙한 이곳 롯지에서 체제를 정비하고 갔다고 했다. 거대한 산록 아래 마을의 가장자리로 너른 평원이 펼쳐져 있고 랑탕의 빤따(phanta, 초원)에는 야크와 말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 랑탕마을을 벗어나,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올라서서 돌아보니 너르게 펼쳐진 초록의 풀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초원의 여기저기에서 야크와 말들이 풀을 뜯는 목가적(牧歌的) 풍경이 참으로 아늑하고 평화스러웠다. 조용한 일요일, 아침 이국 고원에서 만나는 풍경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 다시 발길을 돌려 나아간다. 마을을 벗어나 언덕 위로 올라선 길목, 안개에 싸인 돌탑과 줄을 이은 마니월(Mani Wall) 돌담이 나타났다. 마니월(Mani Wall)은 티벳불교의 신앙생활을 표현하는 양식으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의 중간에 설치함으로써 걸어가는 도중에도 불교 경전(經典)을 암송하는 신앙적 구조물이다. 중간 중간 사이를 두고 끊어진 부분이 있으나 오래된 마니월 돌담이 즐비하게 이어져 있다. 마니월에는 세월의 깊이를 가늠하게 하는 푸른 이끼가 덮여 있고, 돌틈 사이에는 작고 노란 풀꽃이 소복소복하게 피어 있어 은은한 정취를 더해 주었다. 이 대장은 ‘이 오래된 마니월 돌담은 히말라야에서 가장 긴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 마니월(Mani Wall)의 돌판 하나하나에는 티벳불교의 경전(經典)의 구절이 적혀있거나, 간간히 보살상(菩薩像), 연화문(蓮花紋) 같은 것도 양각되어 있다. 마니월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그 왼쪽으로 걸어야 한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돌판의 경전을 더듬으면서 “옴 마니 밧메훔(om mani pabme hum)”을 끊임없이 읊조린다. 이 진언(眞言)의 원래 ‘연꽃 속의 보석을 맞이하라’라는 뜻으로, 이를 암송함으로써 ‘큰 지혜를 얻게 되고 자신이 구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 이곳 사람들에게 오른 손을 성스럽다. 전통음식인 ‘달밧’을 먹을 때도 오른 손으로 비벼서 먹고, 마니차[보륜(寶輪)]를 돌릴 때도 반드시 오른 손을 쓴다. 왼손은 수세식 화장실에서 사용한다. 성(聖)과 속(俗)의 그 역할 분담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원래 마을마다 도로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마니월은 그 속에 경전이 새겨진 원통의 마니차[보륜(寶輪)]를 즐비하게 설치해 놓았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은 그 보륜을 오른 손으로 굴리면서 예의 ‘옴마니 밧 메훔’ 경구를 암송한다. 이곳 마니월은 보륜 대신 자연석 돌판을 이용한 초기의 마니월이 아닌가 한다.
☆… 랑탕 지역은 지리적으로 티벳(Tibet)과 가까운 지역이고 실제로 티벳 사람들이 이곳으로 많이 이주해 왔으므로 자연이 그들의 신앙인 불교가 전래되어 왔을 것이다. 사실 네팔의 어느 곳을 가나 마을마다 집집마다 ‘타르초(tarcho)’와 ‘룽다르(lungdar)’를 설치해 놓았다. 타르초는 30~40미터의 깃대에 경전을 적어놓은 오색의 깃발을 달아 세운 것으로 지상의 사람이 하늘에 기도하는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룽다르는 타르초 꼭대기와 주변의 높은 곳을 연결한 줄에 경전이 씌어진 색색의 깃발을 매달아 놓은 것이다.
타르초(tarcho), 오색의 깃발에서 제일 위의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고 그 다음 하얀색은 구름을 표상한다. 그리고 붉은 색은 불, 초록색은 물, 제일 아래에 있는 노란 색은 대지를 표상한다. 하늘과 구름은 신(神)의 영역이고 그 아래 물과 불은 하늘에서 내리는 에너지의 원천이고, 제일 아래에 있는 대지(大地)는 만물이 생명을 영위해 나가는 터전을 상징한다. 그래서 타르초를 통해 지상의 사람들은 하늘의 은총이 온 누리에 감화하고 감복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산이나 마을이나 네팔의 어디를 가나 타르초와 룽다르의 깃발이 펄럭인다. 그들의 신앙이 삶의 모든 것에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마니월 돌담과 돌담 사이에 자연석으로 쌓은 스투파(Stupa)가 조성되어 있었다. 네팔에서 절[사찰(寺刹)]을 곰파(Gompa)라고 하고, 탑(塔)을 스투파(Stupa)라고 한다. 마니월 돌판 하나하나에 경전을 새기고 그것을 곳곳에 엄청난 길이로 조성을 한 것을 보면 그들이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감지할 수 있다. 지금은 일부 허물어지기도 하고 이끼가 낀 돌판이 긴 세월의 풍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들의 깊은 신앙심에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된다.
☆… 이제 우리가 걷는 지대는 고도 3,000m 이상의 고원이라 장대한 밀림은 보이지 않는다. 완만한 산록의 초원(草原) 여기저기에 관목(灌木)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히말라야 여름의 야생화가 군락을 이루거나 여러 가지 꽃들이 뒤섞여 피어 있기도 하다. 바위틈에 은은히 피어 있는 작은 풀꽃들의 모습이 여린 듯 청초한 자태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 [랑탕계곡 ; 초원의 풍경] — 들꽃 천지의 초원에 유유한 야크와 말들
☆… 오른 쪽으로 저 아래 멀리 랑탕콜라(langtang khola)가 흐르고, 산록의 한 모롱이를 돌아서면 또 다시 초원이 펼쳐져 있고 그곳에는 방목(放牧)하는 말들과 야크(Yak)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야크는 히말라야 3,000고지 이상에서 사는 덩치가 큰 소이다. 수소는 야크(yak), 암소는 나크(nak)라고 한다. 원래는 주인이 없는 야생의 동물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주인이 있는 야생의 동물들이다. 여름철에는 그냥 산에서 산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고산지역의 사람들은 야크가 그들이 살아가는 생명의 근본이다. 우유는 일용하는 밀크차가 되기도 하고, 치즈를 만들기도 하고, 쿠르트(curt)를 만들어 식용하기도 한다. 야크젖으로 만든 발효식품이 야크쿠르트(Yak curt)이다. 우리나라 야쿠르트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야크는 낮에는 산야에서 풀을 뜯고 밤이면 그곳의 적당한 장소에서 깃들어 잠을 잔다고 한다. 그리고 철이 지나 날씨가 추워지면 모두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이것이 일찍이 노자(老子)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생태를 보여준다.
☆… 장자(莊子)는 인간이 그가 지닌 오관(五官)의 작용으로 의식(意識)이 형성됨으로써 인간이 자연성을 상실을 한 것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했다. 장자의 자연관은 깊은 뜻이 있다. 인간의 축척된 의식을 지식(知識)이라고 하고 그것이 인간문명을 이루는 근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은 편리하고 풍요로운 물질문명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 문명이 진화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역설적이게도 반생명적이다. 반자연적이다. 오늘날 지구의 환경문제나 생태계 파괴를 보면 2,400년 전 장자의 지적은 놀랍다. 그래서 장자는 자연과 인간이 피아(彼我)를 구분하여 인간 중심의 법도와 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태를 ‘소꿉장난’에 불과하다고 갈파했다. 자연의 생명성이 갈수록 피폐해지는 현실에서 보면 노장(老莊)의 대갈(大喝)은 참으로 신선한 울림을 준다.
* [랑탕계곡 ; 문두-신둠 마을] — 그리고 인적이 드문 호젓한 초원의 산길
☆… 완만하게 고도를 높여가지만, 얼마간의 고소증(高所症)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일부 대원 중에는 상당히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짙은 안개 속에서 트레킹이 계속되었다. 가끔 가파른 산비탈의 길을 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너른 평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마니월 돌탑이 즐비한 길이 자주 나타난다. 길 주변의 초원, 야생화는 이 시기의 산행에서 만나는 귀한 생명의 잔치, 청신한 기쁨을 안겨주는 활력이 된다. 지나는 길목, 해발 3,550m 문두(Mundu)의 롯지도 안개에 싸여 고즈넉하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마니월, 이어지는 돌밭의 평원에 펼쳐진 야생화 군락, 그 사이를 흐르는 청정한 시냇물이 어울려 곳곳이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히말라야 초원의 아름다운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신둠(Sindhum) 마을에는 이곳 원주민들이 살았을 돌집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근래에 지은 게스트하우스는 현대식 건축미가 가미되어 있지만 원래의 주민은 이곳에 흔한 돌로 집을 짓는다. 4~5m 높이의 야트막한 돌집들이다. 그 허름한 집의 마당에도 예의 타르초나 룽다르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 마을을 지나 평원이나 초원의 어디를 가나 마니월이 길을 안내한다. 산기슭을 돌아 나타나는 초원에는 갈색의 살진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길목에는 차와 음료 등을 파는 외딴집 롯지가 가끔 나타난다. 돌로 지은 작고 허름한 가옥인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 빈집으로 잠겨 있었다. 지금은 몬순의 끝, 비수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빈집 앞 ‘긴 나무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뒤에 따라오는 대원들을 기다린다. 네팔에는 등산객이나 포터들이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도록 곳곳에 돌이나 나무로 이렇게 받침대 의자를 길게 시설해 놓았다. 짐을 내려놓고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비스또리 비스또리!(천천히 천천히!)’를 노래하는 이 대장은 쿡 마일러와 함께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 대장은 몸에서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걷는 게 히말라야 보법(步法)의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 후속 대원들과 합류하여 다시 길을 나선다. 얼마가지 않아 돌밭의 언덕에 하얀색의 본체에 기다란 황금색 첨봉이 솟아있는 스투파(stupa)가 나타났다. 높이 4m 정도의 자연석 바위 위에 세워진 꽤 규모가 큰 스투파 하나, 그 옆에는 예의 타르초와 붕다르가 펄럭이고 그 아래에는 맑은 개울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이정표에는 오늘의 목적지 강진곰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 [랑탕계곡 ; 강진곰파] — 고봉설산, 랑탕히말 지역의 산중 거점마을
☆… 수많은 타르초와 룽다르가 펄럭이는 스투파를 지나고 들꽃과 푸른 잔디가 어우러진 길을 걷다가 한 언덕의 고지에 올라섰다. 울렁거리는 속을 심호흡으로 안정시키며 바라본다. 안개 속에서 여러 채의 게스트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는 꽤 큰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아, 오늘의 목적지인 해발 3,830m의 강진곰파(Kyanjin Gompa)였다. 강진곰파의 ‘강진’은 현지어로 낙타를 뜻하고 ‘곰파’는 절[寺刹]을 의미한다. 옛날 이곳에는 낙타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고 주민들의 신앙의 중심지인 유명한 사찰이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지금은 낙타가 아니라 말과 야크를 주로 방목하고 있다고 한다. 강진곰파는 랑탕계곡의 상류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의 분지에 형성된 마을로 그 연조가 깊다. 이곳에는 게스트하우스가 대부분이지만 야크의 젖으로 만드는 치즈공장도 있다. 마을 안에는 베이커리도 있고 식당과 찻집도 있다. 오늘 비록 안개에 싸여 있지만 좌우를 둘러싸고 있는 거봉이 위압적이다.
☆… 지난 봄 2014-드락마르포리 초등을 위한 비젼원정대가 고소(高所)에 적응하며 3일 동안 심신을 추스르고 간 곳이 이곳이었다. 드락마르포리는 랑탕밸리의 끝에 있는 산봉이다. 여기서 이틀은 더 들어가야 한다. 지난 4월, 김태훈 대장과 다른 대원 하나가 세계최초로 등정에 성공했다. 비젼원정대의 베이스 캠프 단장은 이상배 대장이었다.
* [랑탕계곡 ; 강진곰파] — 하늘을 받치고 솟은 히말라야 설산거봉들 품에 안긴
☆… 이곳 강진곰파는 북쪽의 랑탕Ⅱ봉(6,596m)에서부터 동쪽으로 이어져 내려온 설산이 거봉 랑탕리룽(7,227m)으로 솟아있다. 그 산줄기는 다시 강진곰파의 동쪽의 창부(6,251m), 킨숭(6,781m), 랑탕유브라(6,048m), 유브라(6,264m) 등의 거봉이 유브라히말(YubraHimal)을 형성하면서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것이다. 랑탕리룽(Langtang Lirung)의 산록에는 거대한 빙하(Glacier)가 강진곰파 쪽으로 급(急) 사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는 랑탕리룽 등정의 베이스캠프가 있다.
그리고 강진곰파의 오른쪽(남쪽)에는 우르킹 강가리(5,863m)와 샤부 리(5,202m)등의 거봉들이 이루는 캉자라히말(KangjaraHimal)이 이어져나가고 있으며, 멀리 랑탕계곡의 상류에 자리잡은 강첸포(Ganchenpo, 6,387m)의 거봉이 삼각봉으로 포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강진곰파는 이곳의 주변의 산을 오르고자 하는 산악인들의 거점마을이다. 강진곰파의 동쪽으로 랑탕계곡을 따라가며 강시사 카르카, 강첸포, 랑시사리(6,427m)로 들어가고 그것이 티벳과 국경을 이루는 랑탕히말(LangtangHimal)에 닿는다.
☆… 그러나 오늘, 하늘은 강진곰파 주위의 설산거봉의 장관을 보여주지 않았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의 산봉이 어렴풋이 그 윤곽을 드러낼 뿐이었다. 마을로 내려가 숙소를 잡고 여장을 풀었다. 우리가 든 곳은 게스트하우스 얄라피크(Hotel YaLa Peak) 였다. 1971년에 문을 연 강진굼파에서 가장 오래 된 곳으로 우리가 든 건물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었다. 안내된 2층의 방은 비교적 깨끗하고 공간도 넓었다. 그러나 물 사정이 좋지 않은지 샤워장은 있으나 물은 나오지 않았다.
* [강진곰파 의 롯지에서] — <얄라피크> 게스트하우스의 휴식
☆…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롯지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李) 대장은 산길을 걸을 때도 그렇지만, 히말라야에서는 일정도 이렇게 쉬어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고소 적응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휴식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강진곰파에 들면서 사실 은근히 속이 울렁거리는 고소증이 와서 괴로운 상태였다. 고소증은 움직일 때보다 가만히 있을 때 그 증사이 심하다. 대강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아내고 따뜻한 다운자켓으로 갈아입었다. 날씨는 여전히 안개 속인데, 가만히 있으니 한기가 들고 몸에 허기가 돌았다. 이 대장은 히말라야 고소에서 감기에 걸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며 옷을 따뜻하게 입을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각자 방에 들어가 얼마간을 쉬었다.
* [강진곰파의 오후 (1)] — 조지 말로리와 라인홀트 매스너, 그리고 이상배
☆… 비록 어질머리 고소증이 와 있지만, 모처럼 가지는 망중한(忙中閑)의 여유를 있는 오후이다. 깨끗하고 너른 1층의 식당에 장작으로 난로를 피워 놓았다. 대원들이 따뜻한 식당 안의 가장자리 긴 탁자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런저런 환담을 나누는 가운데, 이상배 대장은 산과 인생, 산과 철학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1953년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나, 1984년 히말라야 8,000급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라인홀트 매스너과 같은 산악인의 도전정신(挑戰精神)에 관한 여러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단순히 ‘산을 잘 타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훌륭한 산악인’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게 된 연유는 그들이 지니는 산에 대한 도전(挑戰)과 철학(哲學),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변함없이 겸손(謙遜)하고 일생을 헌신했던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에드먼드 힐러리리(Edmund Hilary)는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 이후, 힐러리 재단을 만들어 열악한 네팔의 산악지역[굼중]에 학교와 병원 등을 설립하고, 죽을 때까지 매년 그의 사재를 털거나 사회에서 모금한 거금을 지원하였다. 그는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으로 영국의 엘리자벳 여왕으로부터 경(卿)의 칭호를 부여 받았으며, 그의 초상이 뉴질랜드의 5달러 지폐에 실리기까지 했지만, 그의 태도는 늘 겸손했고 그의 삶은 더없이 검소하였다. 죽은 뒤에도 자기의 화장한 뼈를 자기가 늘 사랑한 뉴질랜드 앞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지구상에 표연히 사라졌다. 그는 일생 동안 에베레스트 초등을 내세우거나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다.
☆… ‘산을 왜 오르는가?’라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으므로 오른다.(Because It's there)’고 답한 조지 말로리(Geoge Mallory)의 비극적 최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1924년 6월 8일, 영국의 에베레스트 제3차 원정대 조지 말로리와 동료 앤드류 어빙(Endew Ervine)은 해발 8,100m의 캠프를 떠난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의 험난한 조건과 열악한 복장과 장비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했다는 것,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그 정상에 도전했다는 것은 인간 열정의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는 힐러리보다 29년 앞서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지만 실종(失踪)되고 말았다. 그래서 에베레스트 최초의 등정 논란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단다. 그가 만약 ‘등정(登頂) 후에 조난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에베레스트 초등자는 힐러리가 아니라 말로리가 되는 것이다.
☆… 1924년 말로리와 어빙이 도전에 실패하고 힐러리가 등정에 성공한 1953년까지, 29년 동안 영국인의 도전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조지 말로리가 말했다. “과학적인 장비와 기술적인 도구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성취하겠다는 의지와 용기, 미지의 저 세계에 무엇이 있는가하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 그것이 있으면 된다.”고. 그런데 정상으로 향한 지, 75년만인 1999년 에베레스트 8,160m의 남벽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의 두 팔이 정상을 향해 뻗어있었다고 한다. 이상배 대장은 그의 도전(挑戰) 정신을 강조했다.
☆… 라인홀트 매스너(Reinhold Messner)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급 14좌를 완등하여 그랜드슬램을 이루었고, 또 세계 최초로 8,848m의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올라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장본인이다. 의학계에서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여겼던 일을 실현한 것이었다. 그가 산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이태리의 우아한 최고급 호텔보다 히말라야 산 아래 캠프에 드는 것을 더 좋다’고 한 말을 들려주기도 했다.
☆… 초오유(8,188m)를 등정한 바 있는 이상배 대장은, 히말라야 초오유 등정 50주년을 기념식 때 네팔정부의 초청을 받아 네팔의 카투만두 시내에서 카퍼레이드까지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같이 초청받아서 네팔에 온 매스너(Messner))와 만나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상배 대장은 에베레스트 등정하고 나고 하산 하는 중에 추락하여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화도 들려주었다. 그때 그가 죽음의 조난을 당하였을 때 오직 생각나는 것은 어머니뿐이었다며 ‘어머니 제가 먼저 떠납니다!’라는 글을 통해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회고하기도 했다. 그때 베이스 캠프에서 의식을 회복하기까지 지극정성으로 죽을 떠먹이며 간호한 친구가 지금 우리가 동행하는 쿡 ‘마일러’라고 했다. 마일러는 이 대장의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이상배 대장은 육대주 최고봉을 모두 등정하고 에베레스트, 초오유, 칸첸중가(8,686m) 등 히말라야 8,000m 이상의 산을 오르고 매년 한두 차례씩 히말라야를 찾는 히말리스트이다.
* [강진곰파의 오후 (2)] — 영화 <명량>과 이순신 장군 이야기
☆…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다가, 이 대장이 문학을 전공한 ‘필자’에게 문학이나 역사에 관한 좋은 말씀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사실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와 있는 마당에 ‘세상의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전체 분위기를 생각해서 말문을 열었다. … 최근 한국에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고, 최고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영화 <명량(鳴梁)>을 중심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야기의 중심은 이순신(李舜臣) 장군! 인간 이순신의 우여곡절이 많았던 생애와 풍전등화의 국난을 당하여 남해를 장악한 연승연전의 해전(海戰), 그의 지략과 용맹 등 장군으로서 갖추고 있는 지(智)·인(仁)·용(勇)의 자질에 대해서 갈파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난중일기(亂中日記)』는 세계 어디에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인 기록이다.『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인류의 기록문화유산이다.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45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수행하면서 대승을 거둔 장군이 직접 세세하게 써내려간 전쟁일기이기 때문이다.
☆… 그『난중일기(亂中日記)』 속에는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고뇌와 아픔, 그리고 우국지정과 백성을 위하는 마음, 장수로서의 기개와 결단력, 전쟁을 수행하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문제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적을 대비하는 전략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숨결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노일전쟁 때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무적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 영국의 넬슨 제독보다 이순신 장군이 더욱 훌륭하다’고 하면서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었다는 일화도 들려주었다. 끝으로 무엇보다 당대 조선 사회가 왜군의 침략을 받게 된 전후 사정을 역사적인 상황을 통하여 진지하게 개진하면서 오늘의 우리의 사회의 국론이 분열되고 패거리 파당으로 정치가 실종된 상황이 임란 직전의 조선의 경우와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국(憂國)의 정(情)을 피력했다. 자신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기 위해서 온, 멀고 먼 네팔의 산간오지에서 조국의 아픈 역사와 오늘의 한국정치에 대한 걱정하게 된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