追慕辭
故 서의필 교수님께 삼가 추모의 글을 올립니다. 한국 통일을 보기 전에는 눈을 감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지난 5월 11일 향년 95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군요. 연약한 육체는 흙으로 그리고 영은 하나님 곁에 가신 것을 믿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한남대학의 정신적 지주셨습니다. 1954년 한국에 선교사로 오셔서 목포지회에 계실 때부터 전주에서 열리는 제8차 한국 남장로교선교대회에 참석하여 대학을 세울 곳을 선정하였으며 대전으로 확정되자 인돈학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다섯 명의 대학위원의 목포대표가 되셨습니다. 이어 대전에 선교부지로 확정된 곳을 답사하며 이 오정골에 행정관 위치를 결정하는 일도 하셨습니다. 교육부에 대학설립 허가서를 제출하면서 대학의 사명선언을 하였습니다. 이 대학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국가와 인류를 섬길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대학은 한국에 생기는 또 하나의 대학이 아니라 한국에 큰 사명을 갖고 태어난 대학이었습니다. 이것은 한남대학의 창학이념; ‘진리, 자유, 봉사’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 대학의 산파 역할을 하신 교수님은 한국인을 깊이 이해하려면 자신이 먼저 한문을 알아야겠다고 1963년에는 성균관 대학에 입학하여 동양철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으신 뒤 한국 족보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다시 1966년 하버드대학에서 동아시아 연구를 계속하여 드디어는 박사학위까지 받으셨습니다. 서울의 신학교에서 강의하시다가 한남대학에는 1968년에 취임하셨는데 1994년, 떠나시기까지 26년간 자신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국가와 인류를 섬기는 본을 보여 주시며 떠나셨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어려운 분들을 교수님은 예수님처럼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교수님의 회갑에 앞서 제자들이 回甲記念 논문집을 내면서 어떤 분들의 글을 받고 싶으시냐고 물었을 때 여기에 글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제자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교수님이 사랑했던 분들은 청소하시는 분, 택시 기사, 노동자, 농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회갑연도 시내에 나가시지 않고 사시던 집에서 조촐하게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오정교회에 다니던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정덕순 집사를 가정 도우미로 쓰셨는데 은퇴 시까지 끝까지 돌보셔서 교수님 자녀들은 정 집사를 두 번째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자녀들은 정 집사를 잊지 않고 2014년 막내아들과 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진도의 요양원까지 정 집사를 찾아간 일은 자녀에게까지 미친 교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교수님은 전두환 군사정권 때 언론이 통제되어 신문 칼럼이 빈칸으로 나올 때도 우리 대학의 학생들은 사태를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생각하며,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대전 장동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올바른 기사를 찾아와 연구실 앞문에 붙여 놓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군사정권에서는 교수님은 눈엣가시였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세계적 부흥강사이며 처남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 때문이었는지 한국에서 추방하지 못하고 3개월 단기 체류 비자만 주었는데 교수님은 3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하면서 독재에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국선언을 자주 해, 해직 교수가 많던 ‘韓國基督者 교수협의회’에도 늘 출석하셨습니다.
특별히 이북이 민주화되지 못한 왕정 국가라고 말하면서도 굶주리고 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1995년 인돈 학장의 손자 인세반 회장이 함경북도 지방을 강타한 태풍과 수해가 심했던 해에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신학교 동문이 모인 자리에서 특강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해가 바로 인세반의 외증조부 배유지 목사 내한 100주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거기서 여러 사람의 호의를 힘입어 인세반은 EBCF(Eugene Bell Centennial Foundation) 재단을 설립하고 이북 난민, 특히 폐결핵 환자를 돕기로 했는데 교수님을 그때 재단 이사로 계셨습니다. 후에 교수님은 같은 해에 EBCF와 뜻을 같이한 분들이 만든 CFK(Christian Friend of Korea), 즉 이북의 불쌍한 백성들을 돕는 재단 이사로 오래 근무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수님께 큰 은혜를 입을 사람입니다. 6‧25 때 인민군으로 차출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던 내 동생이 이북에서 계관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1990년 알게 되었는데 캐나다에 있는 처조카가 그곳 언론사 New Korea Times 사장이 이북의 동생을 인터뷰하고 오면서 동생 전화번호를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 서 교수님은 이북을 방문할 때 그 번호로 동생과 연락하고 고려호텔에서 만났을 뿐 아니라 그의 집까지 방문해서 그의 서재에서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어오며 자세한 소식을 여러 번 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북을 방문한 고급 손님도 전화는 금지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교수님은 돕고 싶은면 앞뒤를 가리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모님과 함께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0년 8월, 제1회 남북이산가족 상봉 전에 많은 정보를 얻게 되고 동생의 詩도 받아 보았습니다. 저는 서 교수님께 많은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할 때는 교수님은 댈러스의 미국 남장로 교회에서 제가 한남대학에서 귀하게 일할 사람이라고 여비보조까지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언제나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6주년 기념관이 우리 대학에 세워지고 그곳에 「서의필 기념관」이 만들어져 초청을 받았을 때, 교수님은 기뻐하기에 앞서 대학이 창학이념을 이어받아 잘 운영되고 있느냐고 먼저 저에게 물었습니다. 진리-하나님의 생각으로 가치관이 바뀌고, 자유- 권력과 명예욕과 죄에서 자유로우며, 봉사- 이웃을 섬기는데 본을 보이며 살고 있는가? 이런 창학이념을 구현하고 있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물이 지도자가 되고 학생들을 기르는 교수들이기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창학정신의 구현이라는 것이 학생들이 채플에 잘 참석하고 있는가? 교직원은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잘 내고 있는가? 이런 형식적인 일보다는 대학이 지역사회에 본이 되는 봉사를 하고 있는가? 구성원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게, 관심의 초점이셨습니다. 자기 흉상을 만들어 놓았다고 누구에게 감사하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았습니다.
아! 이제는 서 교수님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천국에까지 우리 대학과 우리나라 걱정 가지고 가지 마시고 편히 안식하십시오. 이 모든 걱정은 교수님을 모시고 따르던 후배들의 몫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소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천국에서 편히 쉬소서.
2023년 6월 8일
평소에 사랑 받던 오승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