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배재고보 김소월 향나무
일제강점에서 벗어나 어느덧 눈앞이 해방 79주년이다. 하지만 일본의 거침 없는 역사 왜곡, 독도 침탈과 국내기업 강탈 야욕 등을 손 놓고 바라만 보면서 이를 한일관계 도약이자 관계 복원이라 우기는 한심스런 작태가 윤석열 정권이다. 그렇게 일제강점의 치욕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억압받고 짓눌린 민족의 토속 한과 정서가 깃든 소월 김정식의 시 역시 시대를 이으며 허공을 맴돈다. 바로 소월 이후로 소월을 능가하는 민족시인이 없고, 있다 쳐도 마땅찮은 이유이며 ‘진달래꽃’ 지은이를 묻는 한국 귀화 필기시험 문제가 있는 연유이다.
소월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외가에서 김성도와 장경숙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자랐다. 소월이 두 살 나던 해이다. 아버지 김성도는 처가 나들이에 나섰다. 이때 정주와 곽산에 철도를 놓던 왜 목도꾼들이 말등의 음식을 강탈하려고 집단 폭행을 가했다. 말등에 거꾸로 매달려 돌아온 김성도는 한 달여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났다. 하지만 정신이상으로 방안에 틀어박혀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게…’ 등의 혼잣소리를 중얼거리다 굶어 죽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은 소월의 평생을 좌우하는 아픔이었다.
소월이 정주 오산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6년이다. 14살의 소월은 할아버지의 뜻으로 할아버지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했다. 그런데 소월에게는 같은 오산학교의 ‘오순’이라는 여학생이 맘에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결혼을 했기에 둘의 인연은 오순이 19살에 시집을 가면서 끝이 났다. 그런데 오순은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살에 죽고 말았다. 소월의 시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쓴 시이니, 어긋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슬픔은 역시 소월의 영혼을 삼킨 천추의 한이었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소월은 한양의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 주옥같은 시를 쓴다. 1923년 일본 유학에 나서 도쿄상과대학에 다녔으나, 9월의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하였다. 1925년, 그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이 스승 김억의 도움으로 나왔다.
1924년 소월은 상속받은 전답을 팔아 처가가 있는 구성군 평지동으로 갔다. ‘동아일보’ 지국을 인계받아 혼자 신문 배포와 수금 등 경영을 도맡았으나 곧 파산에 이르고, 고리 대금업에도 손을 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1934년 12월 23일이다. 온통 수심 가득한 얼굴의 소월이 인적 드문 산자락의 무덤을 찾았다. 마른풀이 하늘거리는 무덤에 절을 하고 술잔의 술을 흩뿌린 뒤, 털퍼덕 주저앉아 남은 술을 마셨다. 한모금 한모금 삼키듯 마신 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허청거리며 산을 내려왔다. 파장 무렵의 장에 들려 아편을 사더니 술을 또 샀다.
“자 한잔합시다.”
이틀 전에도 아내에게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들구려.’ 하면서 술잔을 기울였던 소월이다. 그날 소월은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아내가 취해 잠이 들자 장에서 사 온 아편을 삼켰다. 이튿날인 1934년 12월 24일 아침, 소월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관청을 드나드는 사람을 태운 수레가 많아서 수렛골(차동)이라고 했던 서울 정동의 배재고보는 소월이 다니며 ‘엄마야 누나야, 봄밤, 진달래꽃, 개여울’ 등의 시를 발표했던 학교이다. 이 배재고등학교에 570여 살 향나무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천부의 재능으로 민족의 정서를 시로 승화시킨 천재 시인 김소월을 지켜본 나무이다. 다시는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게…’와 ‘세상은 참 살기 힘들구려’라는 한탄이 없는 그저 힘없는 민초도 편한 세상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