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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입문 스크랩 朱子語類卷第五 性理二
篤敬先生 추천 0 조회 161 12.10.19 11: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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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語類卷第五

 

性理二

 

性情心意等名義

 

5:1 問: “天與命, 性與理, 四者之別: 天則就其自然者言之, 命則就其流行而賦於物者言之, 性則就其全體而萬物所得以爲生者言之, 理則就其事事物物各有其則者言之. 到得合而言之, 則天卽理也, 命卽性也, 性卽理也, 是如此否?”

問 : 하늘[天]과 명命, 본성[性]과 이치[理] 네 가지를 구별하겠습니다. 하늘은 그 저절로 그러한 것을 말하며, 명命은 그것이 유행하여 만물에 부여된 것을 말하며, 본성은 그 온전한 모습을 만물이 품부받아 생겨난 것을 말하며, 이치는 모든 것이 각각 그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총괄하여 말하면, 하늘은 곧 이치이고 명命은 곧 본성이며, 본성은 곧 이치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맞습니까? [섭하손-賀孫]

 

曰: “然. 但如今人說, 天非蒼蒼之謂. 據某看來, 亦捨不得這箇蒼蒼底.” 賀孫(62이후). <以下論性命.>

曰 : 그렇다. 다만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은 저 푸른 하늘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건대, 저 푸른 하늘도 역시 제외할 수는 없다.

 

 

5:2 理者, 天之體; 命者, 理之用. 性是人之所受, 情是性之用. 道夫(60이후).

이치는 하늘의 본체이고, 명命은 이치의 작용이다. 본성은 사람이 품부받은 것이고, 감정은 본성의 작용이다. [양도부-道夫]

 

 

5:3 命猶誥?, 性猶職事, 情猶施設, 心則其人也. 賀孫(62이후).

명命은 임명장과 같고 본성은 맡은 직무와 같다. 감정은 펼쳐서 베푸는 것이고, 마음은 사람이다. [섭하손-賀孫]

 

 

5:4 天所賦爲命, 物所受爲性. 賦者命也, 所賦者氣也; 受者性也, 所受者氣也. ?(61이후).

하늘이 부여한 것이 명命이 되고, 만물이 품부받은 것이 본성이 된다. 부여한 것은 명命이고, 부여받은 곳은 기운이다. 품부받은 것은 본성이고, 품부받은 곳은 기운이다. [서우-寓]

 

5:5 道卽性, 性卽道, 固只是一物. 然須看因甚喚做性, 因甚喚做道. 淳(61·70세). 以下論性.

도道가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도道이니, 진실로 하나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본성이라 부르고, 무엇 때문에 도道라고 부르는지를 살펴야 한다. [진순-淳]

 

5:6 性卽理也. 在心喚做性, 在事喚做理. 燾(70세).

본성은 곧 이치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본성이라 부르고, 모든 일에 있는 것을 이치라고 부른다. [여도-燾]

 

5:7 生之理謂性. 節(64이후).

낳고 낳는 이치를 본성이라 말한다. [감절-節]

 

5:8 性只是此理. 節(64이후).

본성은 단지 이치일 뿐이다. [감절-節]

 

 5:9 性是合當底. 同.

본성은 합당한 것이다. [감절-節]

 

 5:10 性則純是善底. 同.

본성은 순수히 선善한 것이다. [감절-節]

 

 5:11 性是天生成許多道理. 同.

본성은 하늘이 생성한 수많은 도리道理이다. [감절-節]

 

 5:12 性是許多理散在處爲性. 同.

본성은 수많은 이치이고, 곳곳에 흩어져서 본성이 된다. [감절-節]

 

 5:13 問: “性旣無形, 復言以理, 理又不可見.”

問 : 본성도 형체가 없기 때문에 다시 이치를 통해서 말하지만, 이치 또한 볼 수 없습니다. [감절-節]

 

曰: “父子有父子之理, 君臣有君臣之理.” 節(64이후).

曰 :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부모와 자식의 이치가 있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임금과 신하의 이치가 있다.

 

 5:14 性是實理, 仁義禮智皆具. 德明(44이후).

본성 속에는 이치가 가득차 있는데, 인자함[仁] · 의로움[義] · 예의바름[禮] · 지혜로움[智]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요덕명-德明]

 

 5:15 問: “性固是理. 然性之得名, 是就人生稟得言之否?”

問 : 본성은 본디 이치입니다. 그러나 본성이라는 이름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품부받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진순-淳]

 

曰: “‘繼之者善, 成之者性.’ 這箇理在天地間時, 只是善, 無有不善者. 生物得來, 方始名曰‘性’. 只是這理, 在天則曰‘命’, 在人則曰‘性’.” 淳(61·70세).

曰 : `잇는 것은 선善함이고, 이루는 것은 본성이다` 라고 하였다. 이치가 천지 사이에 있을 때는 오직 선善할 따름이니, 선善하지 않은 것은 없다. 만물을 낳은 뒤에 비로소 본성이라고 이름한다. 단지 이치일 뿐이지만, 하늘에 있으면 명命이라 말하고 사람에게 있으면 본성이라 말한다.

 

 5:16 鄭問: “先生謂性是未發, 善是已發, 何也?”

問 : 정중리鄭仲履가 물었다 - 선생님께서는 `본성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고, 선善함은 이미 드러난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曰: “?成箇人影子, 許多道理便都在那人上. 其惻隱, 便是仁之善; 羞惡, 便是義之善. 到動極復靜處, 依舊只是理.”

曰 : 어떤 사람의 모습이 이루어지면 수많은 도리가 모두 그 사람에게 있게 된다. 가슴아파하는 마음은 인자함[仁] 중에서 가장 선善한 것이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은 의로움[義] 중에서 가장 선善한 것이다. 움직임이 극極에 달했다가 고요함을 회복하게 되어도 여전히 단지 이치일 뿐이다.

 

 

問: “這善, 也是性中道理, 到此方見否?”

問 : 선善함 또한 본성 가운데의 도리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생각해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까?

 

曰: “這須就那地頭看.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在天地言, 則善在先, 性在後, 是發出來方生人物. 發出來是善, 生人物便成箇性. 在人言, 則性在先, 善在後.”

曰 : 그것은 반드시 초점에 맞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을 잇는 것은 선善함이고, 이루는 것은 본성이다` 라는 말은 천지의 측면에서 말하면, 선善함이 먼저 있고 본성이 나중에 있다는 뜻이니, 선善함이 드러나야 비로소 사람과 외물이 생긴다. 드러나는 것은 선善함이고, 사람과 외물이 생기면 곧 본성을 이룬다. 사람의 측면에서 말하면, 본성이 먼저 있고 선善함이 나중에 있다.

 

 

或擧“孟子道性善”.

問 : 어떤 사람이 `맹자가 본성이 선善하다고 말한 것`을 사례로 들었다. [진순-淳]

 

曰: “此則‘性’字重, ‘善’字輕, 非對言也. 文字須活看. 此且就此說, 彼則就彼說, 不可死看. 牽此合彼, 便處處有?.” 淳(61·70세).

曰 : 그것은 본성이라는 낱말을 중시하고 선善함이라는 낱말을 경시한 것이니, 상대시켜 말한 것이 아니다. 문자는 반드시 유동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것에 나아가 설명하고 저것은 저것에 나아가 설명하는 것이니, 고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이것을 끌어다가 저것에 붙이면, 곳곳에서 장애가 생긴다.

 

 

 5:17 性不是卓然一物可見者. 只是窮理·格物, 性自在其中, 不須求, 故聖人罕言性. 德明(44이후).

본성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치를 궁구하여 외물과 일처리에 이르면, 본성은 본디 그 속에 있으니, 반드시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성인께서도 본성은 드물게 말씀하셨다. [요덕명-德明]

 

 

 5:18 諸儒論性不同, 非是於善惡上不明, 乃“性”字安頓不著. 砥(61세).

여러 유학자들이 본성에 대하여 논의한 것이 같지 않은 이유는 선善함과 악惡함을 분명하게 구별짓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본성이라는 낱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지-砥]

 

 

 5:19 聖人只是識得性. 百家紛紛, 只是不識“性”字. 揚子??突突, 荀子又所謂隔靴爬痒. 揚(54-6세).

성인은 단지 본성을 알았을 뿐이다. 여러 학파가 어지럽게 일어난 것은 단지 본성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자揚子는 흐리멍텅했고, 순자는 신발을 신은 채로 가려운 발바닥을 긁었다고 말할 수 있다. [포양-揚]

 

 

 5:20 致道謂“心爲太極”, 林正卿謂“心具太極”, 致道擧以爲問.

問 : 치도致道가 `마음이 태극太極이 된다`라고 말한 것과 임정경林正卿이 `마음이 태극太極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 것을 치도致道가 거론하며 물었다. [섭하손-賀孫]

 

先生曰: “這般處極細, 難說. 看來心有動靜: 其體, 則謂之易; 其理, 則謂之道; 其用, 則謂之神.” 直卿退而發明

曰 : 그와 같은 것은 지극히 세밀하여 말하기 어렵다. 살펴본다면, 마음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기 때문에 `그 체질을 역易이라 부르고 그 이치를 도道라고 부르며, 그 작용을 신神이라 부른다.`

 

 

問: “先生道理精熟, 容易說出來, 須至極.”

問 : 직경直卿이 물러나서 설명하였다 - 선생님의 도리는 정밀하고 완숙하여 쉽게 설명하신 것도 반드시 지극하다.

 

 

賀孫問: “‘其體則謂之易’, 體是如何?”

問 : `그 체體를 역易이라 부른다`에서 체體는 무엇입니까? [섭하손-賀孫]

 

曰: “體不是‘體用’之‘體’, 恰似說‘體質’之‘體’, 猶云‘其質則謂之易’. 理卽是性, 這般所在, 當活看. 如‘心’字, 各有地頭說. 如孟子云: ‘仁, 人心也.’ 仁便是人心, 這說心是合理說. 如說‘顔子其心三月不違仁’, 是心爲主而不違乎理. 就地頭看, 始得.”

曰 : 체體는 본체와 작용이라고 말할 때의 본체가 아니다. 체질이라고 말할 때의 체體와 흡사하니, `그 체질을 역易이라 부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치는 곧 본성이지만 여기서는 당연히 유동적인 의미로 보아야 한다. 마치 마음이라는 낱말에도 각각 초점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컨대 맹자는 `인자함[仁]은 사람의 마음이다` 라고 말했다. 인자함[仁]은 곧 사람의 마음이니,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이치를 합하여 말한 것이다. 예컨대 `안회는 그 마음이 3 달 동안 인자함[仁]으 ㄹ거스르지 않았다` 고 말한 것은 마음이 위주가 되어 있지만 이치를 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점을 살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又云: “先生太極圖解云: ‘動靜者, 所乘之機也.’ 蔡季通聰明, 看得這般處出, 謂先生下此語最精. 蓋太極是理, 形而上者; 陰陽是氣, 形而下者. 然理無形, 而氣?有跡. 氣旣有動靜, 則所載之理亦安得謂之無動靜!”

問 : 선생님께서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서 `움직임과 고요함은 태극太極을 태우는 기틀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채계통蔡季通은 총명하여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컨대, 태극太極은 이치이고 형이상形而上의 것이며, 음양陰陽은 기운이고 형이하形而下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치에는 형태가 없지만 기운에는 오히려 자취가 있습니다. 기운에 이미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다면, 기운에 실려 있는 이치에 어찌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又擧通書動靜篇云: “‘動而無靜, 靜而無動, 物也; 動而無動, 靜而無靜, 神也. 動而無動, 靜而無靜, 非不動不靜也. 物則不通, 神妙萬物.’ 動靜者, 所乘之機也.”

다시 『통서 · 동정動靜』을 거론하며 말하였다 - `움직일 때는 고요하지 않고, 고요할 때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외물입니다.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은 것은 신묘함입니다.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다는 것은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물은 통하지 못하지만, 신묘함은 만물을 오묘하게 합니다.` 움직임과 고요함은 태극太極이 올라 타는 기틀입니다. [섭하손-賀孫]

 

 

先生因云: “某向來分別得這般所在. 今心力短, 便是這般所在都說不到.”

曰 : 이전에 나는 그것을 분별할 수 있었다. 지금은 기력이 떨어져서 그것을 완전히 설명할 수가 없다.

 

因云: “向要至雲谷, 自下上山, 半塗大雨, 通身皆濕, 得到地頭, 因思著: ‘天地之塞, 吾其體; 天地之帥, 吾其性.’ 時季通及某人同在那裏. 某因各人解此兩句, 自亦作兩句解. 後來看, 也自說得著, 所以??便作西銘等解.” 賀孫(62이후). <以下論心.>

이전에 운곡雲谷에 가려고 산기슭에서부터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도중에 소나기를 만나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그곳에 도착했다. 그 때 나는 `천지를 모두 채운 것은 나의 몸이고, 천지를 이끄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라는 구절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계통 선생과 어떤 사람이 그곳에 함께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그 두 구절을 풀이하였기 때문에 나도 두 구절에 대하여 풀이를 하였다. 나중에 보았더니, 역시 그 자체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내친김에 『서명西銘』등의 풀이를 지었다.

 

 

 5:21 心之理是太極, 心之動靜是陰陽. 振(미상).

마음의 이치는 태극太極이고, 마음의 움직임과 고요함은 음陰의 기운과 양陽의 기운이다. [오진-振]

 

 5:22 惟心無對. 方子(59이후).

오직 마음만이 상대되는 것이 없다. [이방자-方子]

 

 

 5:23 問: “靈處是心, 抑是性?”

問 : 영명[靈]한 것은 마음입니까, 아니면 본성입니까? [진순-淳]

 

曰: “靈處只是心, 不是性. 性只是理.” 淳(61·70세).

曰 : 영명한 것은 마음이지 본성이 아니다. 본성은 단지 이치일 뿐이다.

 

 

 5:24 問: “知覺是心之靈固如此, 抑氣之爲邪?”

問 : 지각知覺은 마음의 영명함이 진실로 그와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기운이 활동하는 것입니까? [진순-淳]

 

曰: “不專是氣, 是先有知覺之理. 理未知覺, 氣聚成形, 理與氣合, 便能知覺. 譬如這燭火, 是因得這脂膏, 便有許多光?.”

曰 : 오로지 기운만 활동하는 것은 아니며, 지각의 이치가 먼저 있다. 이치만으로는 아직 지각하지 못하지만, 기운이 모여서 형체를 이루고 이치가 기운과 합해지면 지각할 수 있다. 비유컨대 이 호롱불에 기름이 있기 때문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

 

 

問: “心之發處是氣否?”

問 : 마음이 드러나는 것은 기운이 아닙니까? [진순-淳]

 

曰: “也只是知覺.” 淳(61·70세).

曰 : 역시 지각일 뿐이다.

 

 

 5:25 所知覺者是理. 理不離知覺, 知覺不離理. 節(64이후).

지각되는 것은 이치이다. 이치는 지각과 떨어지지 않고, 지각은 이치와 떨어지지 않는다. [감절-節]

 

 

 5:26 問: “心是知覺, 性是理. 心與理如何得貫通爲一?”

問 : 마음은 지각이고, 본성은 이치입니다. 마음과 이치를 어떻게 하나로 관통시킬 수 있습니까? [감절-節]

 

曰: “不須去著實通, 本來貫通.”

曰 : 본래 관통하고 있으니, 억지로 관통시킬 필요가 없다.

 

 

“如何本來貫通?”

問 : 어떻게 본래 관통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감절-節]

 

曰: “理無心, 則無著處.” 節(64이후).

曰 : 이치는 마음이 없다면, 머무를 곳이 없다.

 

 

 5:27 所覺者, 心之理也; 能覺者, 氣之靈也. 節(64이후).

지각되는 것은 마음 속의 이치이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운의 영명함[靈]이다. [감절-節]

 

 5:28 心者, 氣之精爽. 節(64이후).

마음은 기운의 정수이다. [감절-節]

 

 5:29 心官至靈, 藏往知來. 燾(70세).

마음은 지극히 영명하여 지나간 것을 기억하고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도-燾]

 

 

 5:30 發明“心”字, 曰: “一言以蔽之, 曰‘生’而已. ‘天地之大德曰生’, 人受天地之氣而生, 故此心必仁, 仁則生矣.” 力行(62세).

마음이라는 낱말을 설명하면서 말씀하셨다 - 한 마디로 말하면 `낳는 것[生]`이라고 말할 뿐이다. "천지의 큰 덕德을 `끊임없이 낳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 하였다. 사람은 천지의 기운을 품부받아 태어나기 때문에 마음은 반드시 인자하다. 인자함[仁]은 곧 낳는 것이다. [왕역행-力行]

 

 

 5:31 心須兼廣大流行底意看, 又須兼生意看. 且如程先生言: ‘仁者, 天地生物之心.’ 只天地便廣大, 生物便流行, 生生不窮. 端蒙(50이후).

마음은 반드시 광대하고 유행하는 뜻을 겸비하여 보아야 하고, 또 낳는 뜻도 겸비하여 보아야 한다. 예컨대 이정 선생이 `인자함[仁]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천지는 곧 광대하고 만물을 낳는 것은 곧 유행하는 것이니, 끊임없이 낳고 또 낳는다. [정단몽-端蒙]

 

 

 5:32 “心與理一, 不是理在前面爲一物. 理便在心之中, 心包蓄不住, 隨事而發.” 因笑云: “說到此, 自好笑. 恰似那藏相似, 除了經函, 裏面點燈, 四方八面皆如此光明粲爛, 但今人亦少能看得如此.” 廣(65이후).

마음과 이치는 하나이니, 이치는 앞서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치는 마음 속에 있지만, 마음이 감싸서 가두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드러난다. 계속해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 그렇게 말하니, 저절로 웃음이 난다. 마치 저 보관하는 곳과 비슷하니, 경함經函을 열고서 안에서 불을 켜면, 사방이 모두 저렇게 찬란히 빛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조금 밖에는 보지 못한다. [보광-廣]

 

 

 5:33 問: “心之爲物, 衆理具足. 所發之善, 固出於心. 至所發不善, 皆氣稟物欲之私, 亦出於心否?”

問 : 마음이라는 것에는 많은 이치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선하게 드러나는 것은 진실로 마음에서 나옵니다. 선하지 않게 드러나는 것도 모두 품부받은 기운과 외물에 대한 욕망의 사사로움 때문이니, 역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전목지-木之]

 

曰: “固非心之本體, 然亦是出於心也.”

曰 : 마음의 본래 모습은 아니지만, 그러나 역시 마음에서 나온다.

 

 

又問: “此所謂人心否?”

問 : 이것이 `사람의 마음[人心]`입니까? [전목지-木之]

 

曰: “是.”

曰 : 그렇다.

 

 

子升因問: “人心亦兼善惡否?”

問 : 자승子升이 계속해서 물었다 - `사람의 마음`은 선善함과 악惡함을 겸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목지-木之]

 

曰: “亦兼說.” 木之(68세). 

曰 : 물론 겸비하여 말한 것이다.

 

 

 5:34 或問: “心有善惡否?”

問 : 어떤 이가 물었다 - 마음에는 선함과 악함이 있지 않습니까? [요겸-謙]

 

曰: “心是動底物事, 自然有善惡. 且如惻隱是善也, 見孺子入井而無惻隱之心, 便是惡矣. 離著善, 便是惡. 然心之本體未嘗不善, 又?不可說惡全不是心. 若不是心, 是甚?做出來? 古人學問便要窮理·知至, 直是下工夫消磨惡去, 善自然漸次可復. 操存是後面事, 不是善惡時事.”

曰 : 마음은 움직이는 것이니, 자연히 선함과 악함이 있다. 예컨대 가슴아파하는 마음은 선하지만,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도 가슴아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곧 악함이다. 선함에서 벗어나면 곧 악함이다. 그러나 마음의 본래 모습은 일찍이 선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악함이 전혀 마음과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 만들겠는가? 옛 사람의 학문은 이치를 궁구하여 앎이 지극해지도록 하는 것이었으니, 곧 악함을 없애가는 공부를 통해서 선함이 저절로 점차 회복될 수 있었다. 잡으면 간직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 선함과 악함이 갈라지는 때의 일이 아니다.

 

 

問: “明善·擇善如何?”

問 : 선함을 밝히는 것과 선함을 택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요겸-謙]

 

曰: “能擇, 方能明. 且如有五件好底物事, 有五件不好底物事, 將來揀擇, 方解理會得好底. 不擇, 如何解明?” 謙(65세).

曰 : 선택할 수 있어야 비로소 밝힐 수 있다. 예컨대 다섯 가지의 좋은 일이 있고 다섯 가지의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경우, 장차 선택해야만 비로소 무엇이 좋은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선택하지 않고서 어떻게 밝히겠는가?

 

 

 5:35 心無間於已發未發. 徹頭徹尾都是, 那處截做已發未發! 如放僻邪侈, 此心亦在, 不可謂非心. 淳(61·70세).

마음은 이미 드러난 것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 사이에 간격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이 마음이니, 어디에서 이미 드러난 것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자르겠는가! 예컨대 방자하고 편벽되고 사악하고 거만한 것도 역시 이 마음에 있는 것이니, 마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진순-淳]

 

 

 5:36 問: “形體之動, 與心相關否?”

問 : 형체가 움직이는 것은 마음과 서로 관련이 없습니까?

 

曰: “豈不相關? 自是心使他動.”

曰 : 어찌 서로 관련이 없겠는가? 본디 마음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問: “喜怒哀樂未發之前, 形體亦有運動, 耳目亦有視聽, 此是心已發, 抑未發?”

問 :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아직 드러나기 이전에도 형체는 운동을 하고 눈과 귀도 역시 보고 듣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이미 드러난 것입니까, 아니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입니까? [진순-淳]

 

曰: “喜怒哀樂未發, 又是一般. 然視聽行動, 亦是心向那裏. 若形體之行動心都不知, 便是心不在. 行動都沒理會了, 說甚未發! 未發不是漠然全不省, 亦常醒在這裏, 不恁地困.” 淳(61·70세).

曰 :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보고 듣거나 거동하면 역시 마음이 거기로 향한다. 만약 형체가 움직이는데, 마음이 전혀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곧 마음이 없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말하겠는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막연하여 전혀 살필 수 없는 것이 아니니, 그 상태에서도 언제나 깨어 있다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5:37 問: “惻隱·羞惡·喜怒·哀樂, 固是心之發, 曉然易見處. 如未惻隱·羞惡·喜怒·哀樂之前, 便是寂然而靜時, 然豈得塊然槁木! 其耳目亦必有自然之聞見, 其手足亦必有自然之擧動, 不審此時喚作如何.” 問 : 가슴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며,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진실로 마음이 드러난 것이니 분명하고 쉽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슴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며,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기 이전은 곧 적막하여 고요한 때이지만, 그렇다고 어찌 덩그렇게 말라 버린 나무와 같겠습니까! 눈과 귀는 틀림없이 저절로 그렇게 보고 들은 것이고, 손과 발도 틀림없이 저절로 그렇게 거동할 것이니, 그러한 때를 어떻게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진순-淳]

 

曰: “喜怒哀樂未發, 只是這心未發耳. 其手足運動, 自是形體如此.” 淳(61·70세).

曰 :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단지 마음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손과 발의 운동은 형체가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5:38 問: “先生前日以揮扇是氣, 節後思之: 心之所思, 耳之所聽, 目之所視, 手之持, 足之履, 似非氣之所能到. 氣之所運, 必有以主之者.”

問 : 선생님께서 지번번에 부채를 부치는 것을 기운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마음으로 생각하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움켜쥐고 발로 밟는 것은 아마도 기운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기운의 운행에는 반드시 그것을 주재하는 것이 있을 듯 합니다. [감절-節]

 

曰: “氣中自有箇靈底物事.” 節(64이후).

曰 : 기운 속에 본디 영명한 어떤 것이 있다.

 

 

 5:39 虛靈自是心之本體, 非我所能虛也. 耳目之視聽, 所以視聽者卽其心也, 豈有形象. 然有耳目以視聽之, 則猶有形象也. 若心之虛靈, 何嘗有物! 人傑(51이후).

텅비어 있고 영명한 것은 원래 마음의 본래 모습이지, 내가 텅비게 할 수는 없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만, 보고 듣는 근거는 그 마음이다. 어찌 형사잉 있겠는가! 그러나 보고 듣는 데는 눈과 귀가 있으니, 형상이 있는 셈이다. 마음은 텅비어 있고 영명한데, 어찌 형상이 있겠는가! [감절-節]

 

 

 5:40 問: “五行在人爲五臟. 然心?具得五行之理, 以心虛靈之故否?”

問 : 오행五行은 사람에게 있어서 다섯 내장內臟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은 오히려 오행五行의 이치를 갖추고 있으니, 이것은 마음이 텅비어 있고 영명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심한]

 

曰: “心屬火, 緣是箇光明發動底物, 所以具得許多道理.” ?(69이후).

曰 : 마음은 불의 기운에 속하는데, 밝게 빛나며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이치를 갖추고 있다.

 

 

 5:41 問: “人心形而上下如何?”

問 : 사람의 마음은 형이상形而上의 것입니까, 형이하形而下의 것입니까?

 

曰: “如肺肝五臟之心, ?是實有一物. 若今學者所論操舍存亡之心, 則自是神明不測. 故五臟之心受病, 則可用藥補之; 這箇心, 則非菖蒲·茯?所可補也.”

曰 : 예컨대 폐나 간과 같은 다섯 내장으로서의 심장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즘 배우는 사람들이 논의하는 잡으면 간직하고 놓으면 잃어버리는 마음 같은 것은 본디 신명神明하여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다섯 내장內臟으로서의 심장은 병病을 얻으면 약藥을 써서 보양할 수 있지만, 이 마음은 창포菖蒲나 복령茯笭으로 치료할 수 없다.

 

 

問: “如此, 則心之理乃是形而上否?”

問 : 그렇다면 마음의 이치는 형이상形而上의 것이 아닙니까? [요겸-謙]

 

曰: “心比性, 則微有跡; 比氣, 則自然又靈.” 謙(65세).

曰 : 마음은 본성과 비교한다면 약간의 자취가 있고, 기운과 비교한다면 저절로 그러하면서 영명하다.

 

 

 5:42 問: “先生嘗言, 心不是這一塊. 某竊謂, 滿體皆心也, 此特其樞紐耳.”

問 : 선생님께서 이전에 마음은 하나의 덩어리[心臟]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몸에 가득찬 것이 모두 마음이며, 그것은 특히 온몸의 중심일 뿐입니다.

 

曰: “不然, 此非心也, 乃心之神明升降之舍. 人有病心者, 乃其舍不寧也. 凡五臟皆然. 心豈無運用, 須常在軀殼之內. 譬如此建陽知縣, 須常在衙裏. 始管得這一縣也.”

曰 : 그렇지 않다. 그것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신명神明나게 오르내리다가 머무는 집이다.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은 그 집이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 내장內臟도 모두 그렇다. 마음이 어찌 운용하지 않고 언제나 몸 속에 머물러 있겠는가? 비유하면 이곳 건양建陽의 현령이 반드시 항상 관청 안에 머물러야 비로소 이 하나의 현縣을 관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某曰: “然則程子言‘心要在腔子裏’, 謂當在舍之內, 而不當在舍之外耶?”

問 : 어떤 사람이 말했다 - 그렇다면 이정 선생이 `마음은 심장 속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집 안에 있어야 마땅하지, 집 밖에 있어서는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황의강-義剛]

 

曰: “不必如此. 若言心不可在脚上, 又不可在手上, 只得在這些子上也.” 義剛(64이후).

曰 : 꼭 그렇지는 않다. 마음은 다리에 있을 수도 있고, 손에 있을 수도 없지만, 단지 심장에 어느 정도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5:43 性猶太極也, 心猶陰陽也. 太極只在陰陽之中, 非能離陰陽也. 然至論太極, 自是太極; 陰陽自是陰陽. 惟性與心亦然. 所謂一而二, 二而一也. 韓子以仁義禮智信言性, 以喜怒哀樂言情, 蓋愈於諸子之言性. 然至分三品, ?只說得氣, 不曾說得性. 砥(61세). <以下總論心性.>

본성이 태극太極과 같다면, 마음은 음양陰陽의 기운과 같다. 태극太極은 음양陰陽의 기운 속에 있으며, 음양陰陽의 기운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논변한다면 태극太極은 본래 태극太極이고, 음양陰陽의 기운은 본래 음양陰陽의 기운이다. 본성과 마음도 역시 그렇다. 이른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자韓子가 인자함[仁] · 의로움[義] · 예의바름[禮] · 지혜로움[智] · 믿음직함[信]을 본성이라고 말하고, 기뻐함[喜] · 노여워함[怒] · 슬퍼함[哀] · 즐거워함[樂]을 감정이라고 말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본성에 대하여 말한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본성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서 단지 기운을 설명했을 뿐, 본성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하였다. [유지-砥]

 

 

 5:44 問: “天之付與人物者爲命, 人物之受於天者爲性, 主於身者爲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爲明德否?”

問 : 하늘이 사람과 외물에 부여한 것은 `명命`이고, 사람과 외물이 하늘에서 받은 것은 `본성[性]`이고, 몸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心]`이며, 하늘에서 얻어서 광명하고 정대한 것은 `밝은 덕[明德]`이 아닙니까? [대아-大雅]

 

曰: “心與性如何分別? 明如何安頓? 受與得又何以異? 人與物與身又何間別? 明德合是心, 合是性?”

曰 : 마음은 본성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밝은 덕은 어떻게 자기 자리를 얻는가? 받다[受]와 얻다[得]는 또 어떻게 다른가? 사람과 외물 그리고 몸은 또 어떻게 구별되는가? 밝은 덕은 마음에 합치되는 것인가, 본성에 합치되는 것인가?

 

 

曰: “性?實. 以感應虛明言之, 則心之意亦多.”

曰 : 대답하였다. 본성은 꽉 차있는 것입니다. 느끼고 응하며 텅비어 있고 밝은 것에 감응하는 측면에서 말하면 마음의 의미도 많아집니다. [대아-大雅]

 

曰: “此兩箇說著一箇, 則一箇隨到, 元不可相離, 亦自難與分別. 捨心則無以見性, 捨性又無以見心, 故孟子言心性, 每每相隨說. 仁義禮智是性, 又言‘惻隱之心·羞惡之心·辭遜·是非之心’, 更細思量.” 大雅(49이후).

曰 : 그 두가지는 어느 하나를 말하면 다른 하나가 따라 나오니, 원래 떨어질 수도 없으며, 역시 본디 구별하기도 어렵다. 마음을 버리면 본성을 볼 수 없고, 본성을 버리면 또한 마음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맹자는 마음이나 본성을 말할 때 언제나 서로를 연결지어서 말했다. 인자함[仁] · 의로움[義] · 예의바름[禮] · 지혜로움[智]을 본성이라 하고, 다시 가슴아파하는 마음 ·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 ·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 · 참과 거짓을 가리는 마음을 말했으니, 더욱 세밀하게 생각한 것이다.

 

 

 5:45 或問心性之別.

問 : 어떤 사람이 마음과 본성의 구별에 대하여 물었다. [임학몽-學蒙]

 

曰: “這箇極難說, 且是難爲譬喩. 如伊川以水喩性, 其說本好, ?使曉不得者生病. 心, 大槪似箇官人; 天命, 便是君之命; 性, 便如職事一般. 此亦大槪如此, 要自理會得.

曰 : 이것은 설명하기도 아주 어렵고, 비유하기도 어렵다. 예컨대 이천 선생은 물로서 본성을 비유하셨는데, 그 설명은 본디 좋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병폐가 되었다. 마음은 관리와 흡사하고, 하늘의 명命은 임금의 명령과 같으며, 본성은 맡은 직무와 같다. 그러한 설명은 대략 그렇다는 것이니,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

 

如邵子云: “性者, 道之形體.” 蓋道只是合當如此, 性則有一箇根苗, 生出君臣之義, 父子之仁. 性雖虛, 都是實理. 心雖是一物, ?虛, 故能包含萬理. 這箇要人自體察始得.” 學蒙(65이후). <方子錄云: “性本是無, ?是實理. 心似乎有影象, 然其體?虛.”>

예컨대 강절康節 선생은 `본성은 도道의 형체이다` 라고 말하였다. 생각컨데 도道는 단지 그렇게 합당할 뿐이다. 본성에는 하나의 근원이 있어서 임금과 신하의 의로움이나 부모와 자식의 인자함[仁]을 낳는다. 본성은 본디 텅비어 있지만, 모두 가득차 있는 이치이다. 마음은 비록 한정된 것이지만, 텅비어 있기 때문에 많은 이치를 담을 수 있다. 그것은 각자 스스로 체험하고 관찰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5:46 舊嘗以論心·論性處, 皆類聚看. 看熟, 久則自見. 淳(61·70세).

이전에 마음과 본성을 논의한 것을 모두 종류별로 모아서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깊이 살펴보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진순-淳]

 

 5:47 性便是心之所有之理, 心便是理之所會之地. <下“心”字, 饒錄作“性”.> 升卿(62세).

본성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이치이며, 마음은 이치가 모이는 곳이다. [황승경-升卿]

 

 5:48 性是理, 心是包含該載, 敷施發用底. ?孫(68이후).

본성은 이치이며, 마음은 그것을 감싸서 갖추고 있다가 널리 베풀면서 드러내는 것이다. [임기손-夔孫]

 

 

 5:49 問心之動·性之動.

問 : 마음의 움직임과 본성의 움직임에 대하여 묻습니다. [서우-寓]

 

曰: “動處是心, 動底是性.” ?(61이후).

曰 : 움직이는 곳은 마음이고, 움직이는 것은 본성이다.

 

 

 5:50 心以性爲體, 心將性做?子模樣. 蓋心之所以具是理者, 以有性故也. 蓋卿(65세).

마음은 본성을 본체로 삼으니, 마음은 본성을 떡이나 만두의 알맹이처럼 가지고 있다. 생각컨대 마음이 이치를 갖추고 있는 까닭은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습개경-蓋卿]

 

 5:51 心有善惡, 性無不善. 若論氣質之性, 亦有不善. 節(64이후).

마음에는 선함과 악함이 있지만 본성은 선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기질 속의 본성을 논의한다면, 또한 선하지 않을 수 있다. [감절-節]

 

 

 5:52 鄭仲履問: “先生昨說性無不善, 心固有不善. 然本心則元無不善.”

問 : 정중리鄭仲履가 물었다 - 선생님께서는 이전에 `본성은 선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마음은 진실로 선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마음은 원래 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습개경-蓋卿]

 

曰: “固是本心元無不善, 誰敎?而今?不善了! 今人外面做許多不善, ?只說我本心之善自在, 如何得!” 蓋卿(65세).

曰 : 진실로 본래의 마음은 원래 선하지 않을 수 없는데, 누가 너에게 선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쳤느냐! 요즘 사람들은 겉으로 수없이 선하지 않은 행동을 저지르면서 단지 나의 본래 마음은 저절로 선하게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깨닫겠는가?

 

 

 5:53 心·性·理, 拈著一箇, 則都貫穿, 惟觀其所指處輕重如何. 如“養心莫善於寡欲, 雖有不存焉者寡矣”. “存”雖指理言, 然心自在其中. “操則存”, 此“存”雖指心言, 然理自在其中. 端蒙(50이후).

마음과 본성 그리고 이치는 하나만 집어 들면 모두 꿰어서 나오니, 오직 그것이 가리키는 것의 무게가 어떤지 살필 따름이다. 예컨대 `마음을 기르는 것은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비록 간직하지 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적을 것이다` 라고 말할 때의 `간직한다[存]`는 것은 비록 이치를 가리켜서 말했지만, 마음도 본디 그 속에 있다. `잡으면 간직된다`고 말할 때의 `간직된다[存]`는 것은 비록 마음을 가리켜서 말했지만, 이치도 본디 그 속에 있다. [정단몽-端蒙]

 

 

 5:54 或問: “人之生, 稟乎天之理以爲性, 其氣淸則爲知覺. 而心又不可以知覺言, 當如何?”

問 : 어떤이가 물었다 - 사람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품부받은 이치가 본성이 되고, 그 기운 가운데 맑은 것이 지각知覺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은 또한 지각으로써 말할 수 없으니, 마땅히 어떠해야 합니까? [서고-高]

 

曰: “難說. 以‘天命之謂性’觀之, 則命是性, 天是心, 心有主宰之義. 然不可無分別, 亦不可太說開成兩箇, 當熟玩而?識其主宰之意可也.” 高(65세).

曰 : 말하기 어렵다. `하늘이 명령한 것을 본성이라 말한다` 는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명命은 본성이고 하늘은 마음이니, 마음에 주재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분별하지 않을 수 없지만, 또한 과장되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없으니, 마땅히 주재한다는 의미를 깊게 음미하고 묵묵하게 깨달아야 한다.

 

 

 5:55 說得出, 又名得出, 方是見得分明. 如心·性, 亦難說. 嘗曰: “性者, 心之理; 情者, 性之動; 心者, 性情之

主.” 德明(44이후).

설명도 하고 이름도 지어야만, 비로소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예컨대 마음과 본성도 역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찍이 `본성은 마음의 이치이다. 감정은 본성의 움직인 것이다.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주재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요덕명-德明]

 

 5:56 性對情言, 心對性情言. 合如此是性, 動處是情, 主宰是心. 大抵心與性, 似一而二, 似二而一, 此處最當體認. 可學(62세).

본성은 감정에 상대하여 말한 것이며, 마음은 본성과 감정에 상대하여 말한 것이다. 마땅히 그러한 것이 본성이고, 움직인 것이 감정이며, 주재하는 것이 마음이다. 무릇 마음과 본성은 흡사 하나인 듯하지만 둘이고 흡사 둘인 듯하지만 하나이니, 이것을 가장 절실하게 체득해야 한다. [정가학-可學]

 

 

 5:57 有這性, 便發出這情; 因這情, 便見得這性. 因今日有這情, 便見得本來有這性. 方子(59이후).

본성이 있으면 곧 감정이 드러나서 나온다. 감정을 통해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다. 지금 감정이 있기 때문에 본래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방자-方子]

 

 

 5:58 性不可言. 所以言性善者, 只看他惻隱·辭遜四端之善則可以見其性之善, 如見水流之淸, 則知源頭必淸矣. 四端, 情也, 性則理也. 發者, 情也, 其本則性也, 如見影知形之意. 力行(62세).

본성은 말할 수 없다. 본성이 선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다만 가슴 아파하고, 겸손하고 양보하는 등의 네 실마리가 선하다는 것을 통해서 그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물이 맑게 흐르는 것을 통해서 근원이 반드시 맑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네 실마리는 감정이고, 본성은 이치이다. 드러난 것은 감정이고, 그 근본은 본성이니, 마치 그림자를 보고서 형체를 알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왕역행-力行]

 

 

 5:59 在天爲命, 稟於人爲性, 旣發爲情. 此其脈理甚實, 仍更分明易曉. 唯心乃虛明洞徹, 統前後而爲言耳. 據性上說“寂然不動”處是心, 亦得; 據情上說“感而遂通”處是心, 亦得. 故孟子說“盡其心者, 知其性也”, 文義可見. 性則具仁義禮智之端, 實而易察. 知此實理, 則心無不盡, 盡亦只是盡曉得耳. 如云盡曉得此心者, 由知其性也. 大雅(49이후).

하늘에 있어서는 명命이고, 사람에게 품수되면 본성이며, 이미 드러나면 감정이 된다. 이것은 그 맥락이 매우 충실하여, 여전히 분명하고 이해하기 쉽다. 오직 마음은 텅비어 있고 밝아서 완전히 통하는 것이니, 앞의 본성과 뒤의 감정을 통괄해서 말하는 것이다. 본성에 근거하여 `적막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맹자가 `그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그 본성을 안다`고 말한 의미를 알 수 있다. 본성은 인자함[仁] · 의로움[義] · 예의바름[禮] · 지혜로움[智]의 실마리를 갖추고 있으니, 가득차 있어서 살펴보기도 쉽다. 그렇게 가득차 있는 이치를 알게 되면,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다한다는 것은 다만 모두 깨닫는 것일 뿐이다. 마치 `이 마음을 모두 깨닫는 것은 본성을 아는 것에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대아-大雅]

 

 

 5:60 景紹問心性之別.

問 : 경소景紹가 마음과 본성의 구분에 대하여 물었다. [양도부-道夫]

 

曰: “性是心之道理, 心是主宰於身者. 四端便是情, 是心之發見處. 四者之萌皆出於心, 而其所以然者, 則是此性之理所在也.”

曰 : 본성은 마음의 도리이고, 마음은 몸을 주재하는 것이다. 네 실마리는 곧 감정이니,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네 실마리의 싹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렇게 되는 까닭은 본성의 이치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道夫問: “‘滿腔子是惻隱之心’, 如何?”

問 : 내가 물었다 - `몸에 가득찬 것은 가슴아파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양도부-道夫]

 

曰: “腔子是人之軀殼. 上蔡見明道, 擧經史不錯一字, 頗以自矜. 明道曰: ‘賢?記得許多, 可謂玩物喪志矣?’ 上蔡見明道說, 遂滿面發赤, 汗流浹背. 明道曰: ‘只此便是惻隱之心.’ 公要見滿腔子之說, 但以是觀之.”

曰 : 몸은 사람의 신체이다. 상채 선생이 명도 선생을 만나서 경문과 역사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기하고는 자못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명도 선생은 `훌륭하긴 하지만 수없이 암기만 하고 있으니, `외물에 희롱을 당해서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라고 평가하였다. 상채 선생은 명도 선생의 말씀을 듣고서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고 등줄기에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 명도 선생은 `그것은 단지 가슴아파하는 마음일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대가 `몸에 가득찬 것`에 대한 학설을 깨우치고 싶다면, 그 일화를 살펴야 한다.

 

 

問: “玩物之說主甚事?”

問 : `외물에 희롱을 당했다`는 학설은 어떤 일을 가리킵니까? [양도부-道夫]

 

曰: “也只是‘矜’字.” 道夫(60이후).

曰 : `자랑한다`는 낱말을 가리킨다.

 

 

 5:61 伯?論性有已發之性, 有未發之性.

問 : 오백풍吳伯豊이 본성에는 이미 드러난 본성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본성이 있다고 논의하였다. [여대아-大雅]

 

曰: “性?發, 便是情. 情有善惡, 性則全善. 心又是一箇包總性情底. 大抵言性, 便須見得是元受命於天, 其所稟賦自有本根, 非若心可以一槪言也. ?是漢儒解‘天命之謂性’, 云‘木神仁, 金神義’等語, ?有意思, 非苟言者. 學者要體會親切.”

曰 : 본성은 드러나자마자 곧 감정이 된다. 감정에는 선함과 악함이 있지만 본성은 완전히 선하다. 마음은 또한 본성과 감정을 모두 총괄하고 있다. 무릇 본성을 말할 때는 본래 하늘에서 명령을 받아서 그 품부받은 것도 저절로 근본이 있기 때문에 마음처럼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오히려 한나라 유학자가 `하늘이 명命한 것을 본성이라 말한다`는 것을 풀이하여 `나무의 신묘한 기운은 인자하고, 쇠의 신묘한 기운은 의롭다` 고 말한 것 등은 의미 있는 것이지 구차한 말이 아니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몸소 절실히 이해해야 한다.

 

又嘆曰: “若不用明破, 只恁涵養, 自有到處, 亦自省力. 若欲立言示訓, 則須契勘敎子細, 庶不悖於古人!” 大雅(49이후).

다시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 만약 명석하게 파헤치지는 못해도 그렇게 함양을 통해서라도 스스로 도달하는 경계가 있다면, 그 역시 자연히 힘을 덜 것이다. 만약 학설을 세워서 가르침을 보이려고 한다면, 반드시 서로 비교해서 그 진위를 자세하게 살펴야만 옛 사람과 거의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5:62 履之問未發之前心性之別.

問 : 리지履之가 아직 드러나기 이전 상태에서의 마음과 본성의 구분에 대하여 물었다. [양도부-道夫]

 

曰: “心有體用, 未發之前是心之體, 已發之際乃心之用, 如何指定說得! 蓋主宰運用底便是心, 性便是會恁地做底理. 性則一定在這裏, 到主宰運用?在心. 情只是幾箇路子, 隨這路子恁地做去底, ?又是心.” 道夫(60이후).

曰 : 마음에는 본체와 작용이 있다. 드러나기 이전은 마음의 본체이고 이미 드러났을 때는 마음의 작용이니, 어찌 고정시켜서 말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주재하고 운용하는 것은 마음이고, 본성은 곧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치이다. 본성은 틀림없이 내면에 있지만, 주재하고 운용하는 작용은 오히려 마음에 달려 있다. 감정은 단지 몇 갈래의 길이며, 그 길을 따라서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은 오히려 마음이다.

 

 

 

 5:63 或問: “靜是性, 動是情?”

問 : 어떤 사람이 물었다 - 고요한 것은 본성이고, 움직이는 것은 감정입니까? [섭하손-賀孫]

 

曰: “大抵都主於心. ‘性’字從‘心’, 從‘生’; ‘情’字從‘心’, 從‘靑’. 性是有此理. 且如‘天命之謂性’, 要須天命箇心了, 方是性.”

曰 : 무릇 모든 것은 마음이 주관한다. `본성[性]`이라는 낱말은 `마음[心]`이라는 낱말과 `낳는다[生]`라는 낱말에 연유하고 있으며, `감정[情]`이라는 낱말은 `마음[心]`이라는 낱말과 `푸르다[靑]`라는 낱말에 연유하고 있다. 본성에는 이치가 있다. 예컨대 `하늘이 명命한 것을 본성이라 말한다`는 것은 반드시 하늘이 그 마음에 명命한 뒤에야 비로소 본성이 된다는 것이다.

 

 

漢卿問: “心如箇藏, 四方八面都恁地光明皎潔, 如佛家所謂六?中有一?, 這邊叫也應, 那邊叫也應.”

問 : 한경漢卿이 물었다 - 마음은 일종의 감추는 곳과 같아서 사방 모든 곳이 그렇게 해의 빛처럼 밝고 달의 빛처럼 맑게 되면, 마치 불교에서 `여섯 창문에 한 마리의 원숭이가 여기서 불러도 반응하고 저기서 불러도 반응한다`고 말했던 것과 같아집니다. [섭하손-賀孫]

 

曰: “佛家說心處, ?有好處. 前輩云, 勝於楊墨.” 賀孫(62이후).

曰 : 불교에서 마음에 대하여 말한 것은 조금 좋은 점이 있기 때문에 전의 배우는 사람들은 양주나 묵적보다 낫다고 말했다.

 

 

 5:64 叔器問: “先生見敎, 謂‘動處是心, 動底是性’. 竊推此二句只在‘底’·‘處’兩字上. 如穀種然, 生處便是穀, 生底?是那裏面些子.”

問 : 숙기叔器가 물었다 - 선생님께서 가르치실 때 `움직이는 곳은 마음이고 움직이는 것은 본성이다`라고 하셨느데, 제가 그 두 구절을 살펴보니 다만 `곳`과 `것` 두 글자만 차이가 있습니다. 곡식을 심는 것에 비유한다면, 자라는 곳은 곡식이고 자라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조그만 것입니다. [황의강-義剛]

 

曰: “若以穀譬之, 穀便是心, 那爲粟, 爲菽, 爲禾, 爲稻底, 便是性. 康節所謂“心者, 性之?郭”是也. 包?底是心, 發出不同底是性. 心是箇沒思量底, 只會生. 又如喫藥, 喫得會治病是藥力, 或?, 或寒, 或熱, 便是藥性. 至於喫了有寒證, 有熱證, 便是情.” 義剛(64이후).

曰 : 만약 곡식에 비유한다면 곡식은 곧 마음이고, 밤 · 콩 · 모화 · 벼가 되는 것이 바로 본성이다. 즉 강절康節 선생이 `마음은 본성의 외곽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안을 감싸서 포함하고 있는 것은 마음이고,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은 본성이다. 마음은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낳고 낳을 뿐이다. 만약 약을 먹는 것에 비유한다면 약을 먹어서 병을 낳게 하는 것은 약의 힘이고, 시원하거나 차갑고 뜨거운 것은 약의 본성이다. 약을 먹고서 차가워지거나 뜨거워지는 효험이 있는 것은 감정이다.

 

 5:65 舊看五峰說, 只將心對性說, 一箇情字都無下落. 後來看橫渠“心統性情”之說, 乃知此話有大功, 始尋得箇“情”字著落, 與孟子說一般. 孟子言: “惻隱之心, 仁之端也.” 仁, 性也; 惻隱, 情也, 此是情上見得心.

又曰“仁義禮智根於心”, 此是性上見得心. 蓋心便是包得那性情, 性是體, 情是用. “心”字只一箇字母, 故“性”·“情”字皆從“心”. ?(69이후).

이전에 오봉五峯 선생의 학설을 보았는데, 단지 마음을 본성에 상대시켜 말했기 때문에 `감정`이라는 낱말을 설정할 곳이 없었다. 나중에 횡거 선생이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른다` 고 말씀하신것을 보자마자 그 말씀이 뛰어난 공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비로소 `감정`이라는 낱말을 설정할 곳을 찾았는데, 맹자의 학설과 같았다. 맹자가 `가슴아파하는 마음은 인자함의 실마리이다` 라고 했는데, 인자함은 본성이고 가슴아파하는 마음은 감정이니, 이것은 감정으로부터 마음을 파악한 것이다.

 

`인자함[仁] · 의로움[義] · 예의바름[禮] · 지혜로움[智]은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는 것은 본성으로부터 마음을 파악한 것이다. 생각컨대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모두 포괄하니, 본성은 본체이고 감정은 작용이다. `마음[心]`이라는 글자는 단지 낱자[字母]이기 때문에, `본성[性]`과 `감정[情]`이라는 글자는 모두 `마음[心]`을 부수로 삼는다. [심한]

 

 

 5:66 人多說性方說心, 看來當先說心. 古人制字, 亦先制得“心”字, “性”與“情”皆從“心”. 以人之生言之, 固是先得這道理. 然才生這許多道理, ?都具在心裏. 且如仁義自是性, 孟子則曰“仁義之心”; 惻隱·羞惡自是情, 孟子則曰“惻隱之心, 羞惡之心”. 蓋性卽心之理, 情卽性之用. 今先說一箇心, 便敎人識得箇情性底總腦, 敎人知得箇道理存著處. 若先說性, ?似性中別有一箇心. 橫渠“心統性情”語極好.

又曰: “合性與知覺有心之名, 則恐不能無病, 便似性外別有一箇知覺了!”

사람들은 거의 본성을 말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말하는데, 살펴보니, 마땅히 마음을 먼저 말해야 한다. 옛 사람이 글자를 만들때도 먼저 `마음[心]`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는데, `본성[性]`과 `감정[情]`도 모두 `마음[心]`을 부수로 삼는다. 사람이 태어나는 측면에서 말하면, 진실로 먼저 도리를 품부받게 된다. 그러나 수많은 도리가 생기자마자 모두 마음 속에 갖춰진다. 예컨대 인자함[仁]과 의로움[義]은 본디 본성이기 때문에, 맹자는 `인자하고 의로운 마음`이라고 말했고, 가슴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곧 감정이기 때문에, 맹자는 `가슴아파하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생각컨대 본성은 마음의 이치이고, 감정은 본성의 작용이다. 지금 먼저 마음을 말하면 바로 사람들에게 감정과 본성의 총체를 깨닫게 할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도리가 머물러 있는 곳을 깨닫게 할 수 있다. 만약 먼저 본성을 말하면 오히려 본성 가운데 따로 마음이 있는 것과 비슷해진다. 횡거 선생이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른다`고 말씀하신 것이 매우 좋다.

또 말씀하셨다 - 본성과 지각을 합하여 `마음`이라고 이름짓는 것은 아마도 병폐가 아닐 수 없으니, 마치 본성 밖에 따로 지각이 있는 듯하다.

 

 

 5:67 或問心情性.

問 : 어떤이가 마음과 감정과 본성에 대하여 물었다. [요겸-謙]

 

曰: “孟子說‘惻隱之心, 仁之端也’一段, 極分曉. 惻隱·羞惡·是非·辭遜是情之發, 仁義禮智是性之體. 性中只有仁義禮智, 發之爲惻隱·辭遜·是非, 乃性之情也. 如今人說性, 多如佛老說, 別有一件物事在那裏, 至玄至妙, 一向說開去, 便入虛無寂滅. 吾儒論性?不然. 程子云: ‘性卽理也.’ 此言極無病. ‘孟子道性善’, 善是性合有底道理. 然亦要子細識得善處, 不可但隨人言語說了. 若子細下工夫, 子細尋究, 自然見得.

 

如今人全不曾理會, 才見一庸人胡說, 便從他去. 嘗得項平甫書云, 見陳君擧門人說: ‘儒釋, 只論其是處, 不問其同異.’ 遂敬信其說. 此是甚說話! 元來無所有底人, 見人胡說話, 便惑將去. 若果有學, 如何?得他! 如擧天下說生薑辣, 待我喫得眞箇辣, 方敢信. 胡五峰說性多從東坡子由們見識說去.” 謙(65세).

 

曰 : 맹자孟子가 `가슴아파하는 마음은 인자함의 실마리이다` 라고 말한 것이 매우 분명하다. 가슴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며, 참과 거짓을 가리고, 겸손하고 양보하는 것은 모두 감정이 드러난 것이며, 인자함[仁] · 의로움[義] · 예의바름[禮] · 지혜로움[智] 은 본성의 본래 모습이다. 본성속에는 단지 인자함[仁] · 의로움[義] · 예의바름[禮] · 지혜로움[智]만 있으니, 드러나서 가슴아파하고, 겸손하고 양보하며, 참과 거짓을 가리는 것은 본성의 감정이다. 요즘 사람들이 본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거의 불교나 노장老莊의 학설과 같은데, 따로 어떤 것이 마음 속에 있다고 하면서, 지극히 신비하고 오묘하게 계속해서 설명하지만, 곧 허무하고 적막한 데 빠진다. 우리 유가儒家에서 본성을 논의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이천 선생이 `본성은 곧 이치이다[性卽理也]`라고 말씀하신 것이 가장 병폐가 없다. `맹자가 본성이 선하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선善함도 본성이 함께 가지고 있는 도리이다. 그러나 역시 선善함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단지 사람들의 말만 좇아서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자세히 공부하고 자세히 살핀다면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 단지 평범한 사람들의 근거없는 말만을 듣고는 바로 그것을 따른다. 일찍이 항평보項平甫 가 편지에서 "진군거陳君擧의 문인들이 `유가와 불교는 자기들의 옳은 것만을 말할 뿐이지, 둘 사이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묻지 않는다" 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마침내 그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한 것을 보았는데, 이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인가? 원래 학식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근거도 없는 말만을 듣고는 곧 미혹되어 버린다. 만약 정말로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그를 속일 수 있겠는가? 예컨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생강이 맵다고 말하더라도, 내가 먹어서 정말 매운 것을 알아야 비로소 믿을 수 있다. 호오봉胡五峰이 본성을 말한 것은 거의 대부분 소동파蘇東坡 와 소자유蘇子由 등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5:68 問性·情·心·仁.

問 : 본성과 감정, 마음과 인자함에 대하여 물었다. [요겸-謙]

 

曰: “橫渠說得最好, 言: ‘心, 統性情者也.’ 孟子言: ‘惻隱之心, 仁之端; 羞惡之心, 義之端.’ 極說得性·情·心好. 性無不善. 心所發爲情, 或有不善. 說不善非是心, 亦不得. ?是心之本體本無不善, 其流爲不善者, 情之遷於物而然也. 性是理之總名, 仁義禮智皆性中一理之名. 惻隱·羞惡·辭遜·是非是情之所發之名, 此情之出於性而善者也. 其端所發甚微, 皆從此心出, 故曰: ‘心, 統性情者也.’ 性不是別有一物在心裏. 心具此性情. 心失其主, ?有時不善.

曰 : 횡거 선생이 말씀하신 것이 가장 좋은데,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른다` 고 하였다. 맹자孟子가 `가슴아파하는 마음은 인자함의 실마리이다.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은 의로움의 실마리이다` 라고 말한 것도 본성과 감정과 마음을 매우 잘 표현하였다. 본성은 선善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마음이 드러나서 감정이 되면 선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선善하지 않은 것은 마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음의 본래 모습은 본디 선善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이 선善하지 않게 흐르는 것은 감정이 외물에 옮겨져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본성은 이치의 총체적인 이름이며, 인자함[仁] · 의로움[義] · 예의바름[禮] · 지혜로움[智] 은 모두가 본성 가운데 있는 이치의 부분적인 이름이다. 가슴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며, 겸손하고 양보하고, 참과 거짓을 가리는 것은 감정의 드러난 이름인데, 이것은 감정이 본성에서 비롯되어 선善한 것이다. 그 실마리가 드러난 것은 매우 미미하지만, 모두가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른다` 고 말했으니, 본성은 따로 마음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갖추고 있다. 마음이 그 중심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선善하지 않을 때가 있다.

 

如‘我欲仁, 斯仁至’; 我欲不仁, 斯失其仁矣. ‘回也三月不違仁’, 言不違仁, 是心有時乎違仁也. ‘出入無時, 莫知其鄕.’ 存養主一, 使之不失去, 乃善. 大要在致知, 致知在窮理, 理窮自然知至. 要驗學問工夫, 只看所知至與不至, 不是要逐件知過, 因一事硏磨一理, 久久自然光明. 如一鏡然, 今日磨些, 明日磨些, 不覺自光. 若一些子光, 工夫又歇, 仍舊一塵鏡, 已光處會昏, 未光處不復光矣.

예컨대 `내가 인자하려고 노력하면, 곧 인자함에 이른다` 고 했는데, 내가 인자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곧 인자함을 잃게 된다. `안회顔回가 3 달 동안 인자함을 거스르지 않았다` 고 말했는데, 인자함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이 인자함을 거스를 때도 있다는 말이다.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어서 그 방향을 알 수 없다` 는 것은 간직하고 수양하며 하나로 집중하여 잃어버리지 않아야 선善하다는 뜻이다. 중요한 요점은 지혜롭게 되는 데 있고, 지혜롭게 되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는 데 있으니, 이치가 궁구되면 저절로 지극히 지혜롭게 된다. 학문 공부를 돌아보고 싶으면, 다만 지혜로움이 지극한지 지극하지 못한지를 살피면 되는데, 모든 일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에서 하나의 이치를 연마하는 것이 오래되면 저절로 환하게 밝아진다. 예컨대 하나의 거울을 오늘 조금 닦고 내일 조금 닦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밝아지는 것과 같다. 만약 조금 밝아졌는데 공부를 멈추면, 여전히 먼지가 있는 거울이 되어서 이미 밝아진 곳도 다시 더러워지고, 아직 닦지 못한 곳은 다시 밝아지지 못한다.

 

且如‘仁’之一字, 上蔡只說知仁, 孔子便說爲仁. 是要做工夫去爲仁, 豈可道知得便休! 今學問流而爲禪, 上蔡爲之首. 今人自無實學, 見得說這一般好, 也投降; 那一般好, 也投降. 許久南軒在此講學, 諸公全無實得處. 胡亂有一人入潭州城裏說, 人便靡然從之, 此是何道理!

또한 예컨대 `인자함[仁]`이라는 하나의 낱말을 상채 선생은 단지 `인자함을 안다` 고 말했으며, 공자는 `인자함을 행한다` 고 말씀하셨다. 공부를 통해서 인자함을 실천하려고 하면서 어찌 인자함을 알고 나면 곧 쉬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날 학문이 변질되어 선학禪學이 되었는데, 상채 선생이 그 우두머리이다. 요즘 사람들은 진실한 학문이 없어서, 이것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이리로 좇아가고, 저것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역시 저리로 좇아간다. 오래 전에 남헌南軒 선생이 여기에서 학문을 강의하였지만 여러 제자들은 모두 진실하게 깨닫지 못하였다. 괴상하게 생긴 어떤 사람이 담주성潭州城 에 들어와서 떠들었는데, 사람들은 곧 우루루 그를 좇아 갔으니,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

 

 

學問只理會箇是與不是, 不要添許多無益說話. 今人爲學, 多是爲名, 又去安排討名, 全不顧義理.

학문은 다만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이해하는 것이니, 수없이 무익한 말들을 첨가할 필요가 없다. 요즘 사람들은 공부할 때 대부분은 명성을 위하고, 또는 이론을 꾸며서 개념만을 토론하며 의리는 돌아보지 않는다.

 

說苑載證父者以爲直, 及加刑, 又請代受以爲孝. 孔子曰: ‘父一也, 而取二名!’ 此是宛轉取名之弊. 學問只要心裏見得分明, 便從上面做去. 如‘殺身成仁’, 不是自家計較要成仁方死, 只是見得此事生爲不安, 死爲安, 便自殺身. 旁人見得, 便說能成仁. 此旁人之言, 非我之心要如此. 所謂‘經德不回, 非以干祿; 哭死而哀, 非爲生也’. 若有一毫爲人之心, 便不是了. 南軒云: ‘爲己之學, 無所爲而然.’ 是也.” 謙(65세).

『설원說苑』에 `아버지를 고발하여 정직하다고 여겨진 사람이 있었는데, 다시 아버지가 징벌을 받게 되었을 때 또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징벌을 받겠다고 간청하여 효성스럽다고 여겨졌다` 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공자가 `아버지는 한 사람인데, 두 가지 명분을 취하였다` 고 말했다. 그것은 슬그머니 명분을 취하는 폐단이라는 뜻이다. 학문은 반드시 마음 속에서 분명하게 깨달아야만 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예컨대 `목숨을 바쳐 인자함을 이룬다` 는 것은 자기가 의도적으로 인자함을 이루려고 죽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사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죽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옆 사람이 깨달아서 인자함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옆 사람의 말일 뿐이지, 나의 마음이 그렇게 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항상 덕德을 지켜서 굽하지 않는 것은 봉록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며, 죽은 사람을 곡하며 슬퍼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남에게 내보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옳지 못하다. 즉, 남헌 선생이 `자기를 위하는 공부는 작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5:69 性·情·心, 惟孟子橫渠說得好. 仁是性, 惻隱是情, 須從心上發出來. “心, 統性情者也.” 性只是合如此底, 只是理, 非有箇物事. 若是有底物事, 則旣有善, 亦必有惡. 惟其無此物, 只是理, 故無不善. 蓋卿(65세).

본성과 감정 그리고 마음은 오직 맹자와 횡거 선생이 말씀하신 것이 좋다. 인자함은 본성이고 가슴아파하는 것은 감정이니, 반드시 마음에서 드러난다.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르는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본성은 다만 그렇게 마땅한 것이고 단지 이치일 뿐이지, 구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구체적인 어떤 것이면, 이미 선善함도 있고 반드시 악惡함도 있게 된다. 그러한 것은 없으며, 단지 이치일 뿐이기 때문에 선善하지 않을 수 없다. [습개경-蓋卿]

 

 

 5:70 伊川“性卽理也”, 橫渠“心統性情”二句, 顚撲不破! 砥(61세).

이천 선생이 `본성은 곧 이치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과 횡거 선생이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른다` 고 말씀하신 두 구절은 결코 반박하여 깨뜨릴 수 없다. [유지-砥]

 

 

 5:71 “性是未動, 情是已動, 心包得已動未動. 蓋心之未動則爲性, 已動則爲情, 所謂‘心統性情’也. 欲是情發出來底. 心如水, 性猶水之靜, 情則水之流, 欲則水之波瀾, 但波瀾有好底, 有不好底. 欲之好底, 如‘我欲仁’之類; 不好底則一向奔馳出去, 若波濤飜浪; 大段不好底欲則滅?天理, 如水之壅決, 無所不害. 孟子謂情可以爲善, 是說那情之正, 從性中流出來者, 元無不好也.

본성은 아직 움직이지 않은 것이고, 감정은 이미 움직인 것이며, 마음은 이미 움직인 것과 아직 움직이지 않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생각컨대 마음이 움직이기 이전은 본성이 되고, 이미 움직인 뒤에는 감정이 되니,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른다`고 말한다. 욕망은 감정이 드러난 것이다. 마음을 물에 비유한다면, 본성은 물이 고요한 것이고, 감정은 물이 흐르는 것이다. 욕망은 물이 파도치는 것인데, 파도치는 것은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 욕망 가운데 좋은 것은 `나는 인자하려고 노력한다`는 뜻과 같으며, 좋지 않은 것은 줄곧 마구 달려나가서 거세게 파도치는 것과 같다. 대개 좋지 않은 욕망이 오히려 하늘의 이치를 없애는데, 마치 막혀있는 물이 터져서 피해를 보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맹자가 `감정은 선善하다고 할 수 있다` 고 말했는데, 이것은 감정의 올바름이 본성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원래 좋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동수-銖]

 

 

” 因問: “‘可欲之謂善’之‘欲’, 如何?”

問 : `욕망할 만한 것을 선함이라고 말한다` 고 했을 때의 `욕망[慾]` 은 무엇입니까? [동수-銖]

 

曰: “此不是‘情欲’之‘欲’, 乃是可愛之意.” 銖(67이후). 明作錄略.

曰 : 그것은 `감정의 욕망` 이라고 했을 때의 `욕망`과 다르니, 즉 `사랑할 만하다`는 뜻이다.

 

 

 5:72 心, 主宰之謂也. 動靜皆主宰, 非是靜時無所用, 及至動時方有主宰也. 言主宰, 則混然體統自在其中. 心統攝性情, 非??與性情爲一物而不分別也. 端蒙(50이후).

마음은 주재하는 것을 말한다. 움직이고 고요할 때 모두 주재하고 있으니, 고요할 때 작용하지 않다가 움직일 때 비로소 주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재한다고 말하면 혼연한 모습이 본디 그 속에 있다.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르지만, 몽롱하게 본성과 감정을 하나로 여기고 분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단몽-端蒙]

 

 

 5:73 性以理言, 情乃發用處, 心卽管攝性情者也. 故程子曰“有指體而言者, ‘寂然不動’是也”, 此言性也; “有指用而言者, ‘感而遂通’是也”, 此言情也. 端蒙(50이후).

본성은 이치로써 말한 것이고, 감정은 드러나서 작용한 것이며,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천 선생은 "본체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 있으니, 즉 `적막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본성을 말한 것이다. "작용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있으니, 즉 `느껴서 확 통한다` 는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감정을 말한 것이다. [정단몽-端蒙]

 

 

 5:74 “心統性情”, 故言心之體用, 嘗跨過兩頭未發·已發處說. 仁之得名, 只專在未發上. 惻隱便是已發, ?是相對言之. 端蒙(50이후).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르기 때문에 마음의 본체와 작용을 말했는데, 일찍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과 이미 드러난 것의 두 가지로 구분했던 것을 뛰어 넘었다. 인자함이라는 이름은 오로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에 기반하고 있다. 가슴아파하는 것은 곧 이미 드러난 것이니, 상대하여 말하였다. [정단몽-端蒙]

 

 

 5:75 心者, 主乎性而行乎情. 故“喜怒哀樂未發則謂之中, 發而皆中節則謂之和”, 心是做工夫處. 端蒙(50이후).

마음은 본성을 근거로 하고 감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기뻐하여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아직 드러나지 않으면 `표준[中]`이라고 말하고, 드러나서 모두 도리에 맞으면 `조화[和]`라고 말한다` 고 하였으니, 마음은 공부하는 곳이다. [정단몽-端蒙]

 

 

 5:76 心之全體湛然虛明, 萬理具足, 無一毫私欲之間; 其流行該遍, 貫乎動靜, 而妙用又無不在焉. 故以其未發而全體者言之, 則性也; 以其已發而妙用者言之, 則情也. 然“心統性情”, 只就渾淪一物之中, 指其已發·未發而爲言爾; 非是性是一箇地頭, 心是一箇地頭, 情又是一箇地頭, 如此懸隔也. 端蒙(50이후).

마음의 온전한 본체는 담연하게 텅비어 있고 밝아서 온갖 이치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며,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욕망이 끼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두루 유행하여 움직일 때와 고요할 때를 관통하니, 신묘한 작용이 항상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온전한 본체로써 말하면 본성이고, 이미 드러난 신묘한 작용으로써 말하면 감정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른다`는 것은 단지 뒤섞여 있는 어떤 것 가운데 이미 드러난 것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가리켜서 말했을 뿐이지, 본성이 따로 하나이고, 마음도 따로 하나이며, 감정도 또한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뚜렷이 구별된다는 것은 아니다. [정단몽-端蒙]

 

 

 

 5:77 問: “人當無事時, 其中虛明不昧, 此是氣自然動處, 便是性.”

問 : 사람이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마음 속이 텅비어 밝아서 어둡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운이 저절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니, 곧 본성입니다. [임기손-夔孫]

 

曰: “虛明不昧, 便是心; 此理具足於中, 無少欠闕, 便是性; 感物而動, 便是情. 橫渠說得好, ‘由太虛有“天”之名, 由氣化有“道”之名’, 此是總說. ‘合虛與氣, 有“性”之名; 合性與知覺, 有“心”之名’, 是就人物上說.” ?孫(68이후).

曰 : 텅비고 밝아서 어둡지 않은 것은 마음이고, 이치가 마음 속에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은 본성이며, 외물을 느껴서 움직이는 것은 감정이다. 횡거 선생이 말한 것이 좋은데, `태허太虛에서 하늘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기운의 변화로부터 도道라는 이름이 생겼다` 는 것은 총괄하여 말한 것이며, `태허太虛와 기운을 합하여 본성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본성과 지각을 합하여 마음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는 것은 사람과 외물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5:78 問心性情之辨.

問 : 마음과 본성과 감정의 구분에 대하여 물었다. [황균-畇]

 

曰: “程子云: ‘心譬如穀種, 其中具生之理是性, 陽氣發生處是情.’ 推而論之, 物物皆然.” ■(59세).

曰 : 이천 선생은 `마음은 마치 곡식의 씨앗과 같은데, 그 속에 끊임없이 낳는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 본성이며, 양陽의 기운이 발생한 것` 이 감정이다` 라고 말했는데, 추론하여 본다면 만물이 모두 그렇다.

 

 

 5:79 因言, 心·性·情之分, 自程子張子合下見得定了, 便都不差. 如程子諸門人傳得他師見成底說, ?一齊差! ?或曰: “程子張子是他自見得, 門人不過只聽得他師見成說底說, 所以後來一向差.”

問 : 어떤 이가 말했다 - 이정 선생과 횡거 선생은 직접 깨달으셨고, 문인들은 그 스승이 깨달아서 완성한 학설을 듣고서 알게 된 것을 말했을 뿐이기 때문에 나중에 줄곧 차이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줄곧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심한]

 

曰: “只那聽得, 早差了也!” ?(69이후).

曰 : 단지 그들이 들었을 때부터 이미 차이가 생겼다.

 

 

 5:80 性主“具”字, “有”字. 許多道理. 昭昭然者屬性; 未發理具, 已發理應, 則屬心; 動發則情. 所以“存其心”, 則“養其性”. 心該備通貫, 主宰運用. 呂云: “未發時心體昭昭.” 程云: “有指體而言者, 有指用而言者.” 李先生云: “心者貫幽明, 通有無.” 方(41세).

본성은 수많은 도리를 주재하며 갖추고 있다. 매우 밝은 것은 본성에 속하며,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는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이미 드러났을 때 이치가 응대하는 것은 마음에 속하며, 움직여서 드러난 것은 감정이다. 그런 까닭에 `그 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그 본성을 기르는 것`이다. 마음은 두루 갖추고 관통하며, 주재하고 작용한다. 여여숙呂與叔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는 마음의 본체가 매우 밝다` 고 말했다. 이정 선생은 `본체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 있고, 작용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있다` 고 하였다. 연평 선생은 `마음은 그윽한 것과 밝은 것을 관통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통한다` 고 말했다. [양방-方]

 

 

 5:81 心如水, 情是動處, 愛卽流向去處. 椿(59세).

마음은 마치 물과 같은데, 감정은 물이 움직이는 것이고, 사랑은 흘러서 향하는 곳이다. [위춘-椿]

 

 

 5:82 問: “意是心之運用處, 是發處?”

問 : 뜻은 마음이 작용한 것입니까, 드러난 것입니까? [서우-寓]

 

曰: “運用是發了.”

曰 : 작용한 것이 곧 드러난 것이다.

 

 

問: “情亦是發處, 何以別?”

問 : 감정도 역시 드러난 것인데,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서우-寓]

 

曰: “情是性之發, 情是發出恁地, 意是主張要恁地. 如愛那物是情, 所以去愛那物是意. 情如舟車, 意如人去使那舟車一般.” ?(61이후). 以下兼論意.

曰 : 감정은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감정은 이렇게 드러나지만, 뜻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은 감정이며, 그것을 사랑하는 까닭은 뜻이다. 감정은 마치 배나 수레와 같으며, 뜻은 마치 사람이 그 배나 수레를 부리는 것과 같다.

 

 

 5:83 心·意猶有痕跡. 如性, 則全無兆朕, 只是許多道理在這裏. 砥(61세).

마음과 뜻은 오히려 자취가 있다. 본성은 전혀 조짐이 없으며, 단지 수많은 도리가 그 속에 있을 뿐이다. [유지-砥]

 

 

 5:84 問: “意是心之所發, 又說有心而後有意. 則是發處依舊是心主之, 到私意盛時, 心也隨去.”

問 : 뜻은 마음이 드러난 것인데, 또 마음이 있은 뒤에 뜻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드러난 곳에서도 여전히 마음이 그것을 주재한다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뜻이 왕성하게 되면, 마음도 따라갑니다. [황의강-義剛]

 

曰: “固然.”

曰 : 진실로 그렇다.

 

 

 5:85 李夢先問情·意之別.

問 : 이몽선李夢先이 감정과 뜻의 구별에 대하여 물었다. [황의강-義剛]

 

曰: “情是會做底, 意是去百般計較做底, 意因有是情而後用.”

曰 : 감정은 작위하여 드러난 것이며, 뜻은 여러 가지로 따져서 생각한 것이다. 뜻은 어떤 감정이 있은 뒤에 작용한다.

 

?孫錄云: “因是有情而後用其意.” 義剛(64이후).

 

 

 5:86 問: “情·意, 如何體認?”

問 : 어떻게 감정이나 뜻을 체험적으로 깨닫습니까? [황사의-士毅]

 

曰: “性·情則一. 性是不動, 情是動處, 意則有主向. 如好惡是情, ‘好好色, 惡惡臭’, 便是意.” 士毅(미상).

曰 : 본성과 감정은 하나이다. 본성은 움직이지 않으나 감정은 움직이는 것이며, 뜻은 지향하는 것이 있다. 예컨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감정이고,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한다` 는 것은 곧 뜻[志]이다.

 

 

 5:87 未動而能動者, 理也; 未動而欲動者, 意也. 若海(道夫-60이후-아들).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이치이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뜻이다. [양약해-若海]

 

 

 5:88 性者, 卽天理也, 萬物稟而受之, 無一理之不具. 心者, 一身之主宰; 意者, 心之所發; 情者, 心之所動; 志者, 心之所之, 比於情·意尤重; 氣者, 卽吾之血氣而充乎體者也, 比於他, 則有形器而較(分+鹿)者也.

又曰: “舍心無以見性, 舍性無以見心.” 椿(59세). 以下兼論志.

본성은 곧 하늘의 이치이니, 만물은 그것을 품부받아서 하나의 이치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마음은 몸을 주재하는 것이고, 뜻은 마음이 드러난 것이며, 감정은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의지는 마음이 가는 곳인데, 감정과 뜻에 비해서 더욱 중요하다. 기운은 우리의 혈기血氣로서 몸에 충만한 것인데, 다른 것에 비해서 형기形器가 있기 때문에 비교적 거칠다.

마음을 버리면 본성을 깨달을 수 없으며, 본성을 버리면 마음을 깨달을 수 없다. [위춘-椿]

 

 

 5:89 “心之所之謂之志, 日之所之謂之時. ‘志’字從‘之’, 從‘心’; ‘?’字從‘之’, 從‘日’. 如日在午時, 在寅時, 制字之義由此. 志是心之所之, 一直去底. 意又是志之經營往來底, 是那志底脚. 凡營爲·謀度·往來, 皆意也. 所以橫渠云: ‘志公而意私.’”

마음이 가는 것을 의지[志]라고 말하며, 해가 가는 것을 시간[時]이라고 말한다. 의지[志]라는 낱말은 가다[之]와 마음[心]이라는 낱말로 만든다. 마치 태양이 오시午時에 있고 인시寅時에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글자를 만든 의미는 거기에서 비롯된다. 의지는 마음이 가는 곳으로서, 일관되게 가는 것이다. 뜻은 또한 의지가 통솔하여 왕래하는 것이니, 의지의 다리가 된다. 무릇 영위하고 도모하고 왕래하는 것은 모두 뜻이다. 그런 까닭에 횡거 선생은 `의지는 공정하지만 뜻은 사사롭다` 고 말했다. [심한]

 

 

問: “情比意如何?”

問 : 감정을 뜻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심한]

 

曰: “情又是意底骨子. 志與意都屬情, ‘情’字較大, ‘性·情’字皆從‘心’, 所以說‘心統性情’. 心兼體用而言. 性是心之理, 情是心之用.” ?(69이후).

曰 : 감정은 또한 뜻의 뼈대이다. 의지와 뜻은 모두 감정에 속하니, 감정[情]이라는 낱말은 비교적 크다. 본성[性]과 감정[情]이라는 낱말은 모두 마음[心]이라는 낱말로 만들기 때문에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른다`고 말했다. 마음은 본체와 작용을 겸비하여 말한 것이다. 본성은 마음의 이치이며, 감정은 마음의 작용이다.

 

 

 5:90 問意志.

問 : 뜻과 의지에 대하여 물었다. [황탁-卓]

 

曰: “橫渠云: ‘以“意·志”兩字言, 則志公而意私, 志剛而意柔, 志陽而意陰.’” 卓(미상).

曰 : 횡거 선생은 `뜻과 의지라는 두 낱말로써 말하면, 의지는 공정하지만 뜻은 사사롭다` 고 말했는데, 의지는 강건하고 뜻은 유약하며, 의지는 양陽의 기운이고 뜻은 음陰의 기운이다.

 

 

 5:91 志是公然主張要做底事, 意是私地潛行間發處. 志如伐, 意如侵. 升卿(62세).

의지는 떳떳하게 하려는 일을 주장하는 것이며, 뜻은 사사롭게 멋대로 행동하는 가운데 드러난 것이다. 의지는 마치 정벌하는 것과 같으며, 뜻은 마치 몰래 침입하는 것과 같다. [황승경-升卿]

 

 

 5:92 問: “情與才何別?”

問 : 감정과 재능은 어떻게 구별합니까? [유지-砥]

 

曰: “情只是所發之路陌, 才是會恁地去做底. 且如惻隱, 有懇切者, 有不懇切者, 是則才之有不同.”

曰 : 감정은 단지 드러나 있는 길이며, 재능은 그렇게 행위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가슴아파할 때 간절한 사람도 있고 간절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재능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又問: “如此, 則才與心之用相類?”

問 : 그렇다면 재능과 마음의 작용은 서로 같은 부류입니까? [유지-砥]

 

曰: “才是心之力, 是有氣力去做底. 心是管攝主宰者, 此心之所以爲大也. 心譬水也; 性, 水之理也. 性所以立乎水之靜, 情所以行乎水之動, 欲則水之流而至於濫也. 才者, 水之氣力所以能流者, 然其流有急有緩, 則是才之不同. 伊川謂‘性稟於天, 才稟於氣’, 是也. 只有性是一定. 情與心與才, 便合著氣了. 心本未嘗不同, 隨人生得來便別了. 情則可以善, 可以惡.”

曰 : 재능은 마음의 힘이니, 기운의 힘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마음은 아우르고 주재하는 것이니, 이것이 마음이 위대한 까닭이다. 마음은 비유하면 물과 같으며, 본성은 물의 이치와 같다. 본성은 물이 고요하게 머무르는 까닭이며, 감정은 물이 움직여서 흐르는 까닭이며, 욕망은 물이 흘러서 범람하는 것과 같다. 재능은 물의 기력이 흐를 수 있는 까닭이지만, 그 흐름이 급박하거나 완만한 것은 재능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천 선생이 `본성은 하늘에서 품부받았고, 재능은 기운에서 품부받았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본성에만 일정함이 있고, 감정과 마음 그리고 재능은 기운과 합하고 있다. 마음은 본디 같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사람이 태어나서 얻는 것에 따라서 구별된다. 감정은 선善할 수도 악惡할 수도 있다.

 

又曰: “要見得分曉, 但看明道云: ‘其體則謂之易, 其理則謂之道, 其用則謂之神.’ 易, 心也; 道, 性也; 神, 情也. 此天地之心·性·情也.” 砥(61세). 以下兼論才.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는데, 다만 명도 선생이 " 그 체질을 `역易`이라 부르고, 그 이치를 `도道`라고 부르며, 그 작용을 `신神`이라 부른다` 고 하신 것을 보면 역易은 마음이고, 도道는 본성이며, 신神은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천지의 마음 · 본성 · 감정이다.

 

 

 5:93 性者, 心之理; 情者, 心之動. 才便是那情之會恁地者. 情與才絶相近. 但情是遇物而發, 路陌曲折恁地去底; 才是那會如此底. 要之, 千頭萬緖, 皆是從心上來. 道夫(60이후).

본성은 마음의 이치이며, 감정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재능은 그 감정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감정과 재능은 매우 비슷하다. 단지 감정은 외물을 만나고 드러나서 그렇게 여러 갈래로 길이 구부러지는 것이고, 재능은 감정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수많은 단서가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양도부-道夫]

 

 

 5:94 問: “性之所以無不善, 以其出於天也; 才之所以有善不善, 以其出於氣也. 要之, 性出於天, 氣亦出於天, 何故便至於此?”

問 : 본성이 선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하늘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재능이 선할 수도 선하지 않을 수도 있는 까닭은 기운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본성은 하늘에서 나왔고 기운 역시 하늘에서 나온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양도부-道夫]

 

曰: “性是形而上者, 氣是形而下者. 形而上者全是天理, 形而下者只是那査滓. 至於形, 又是査滓至濁者也.” 道夫(60이후).

曰 : 본성은 형이상形而上의 것이며, 기운은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다. 형이상의 것은 온전히 하늘의 이치이며, 형이하의 것은 단지 그 찌꺼기이다. 형체도 또한 그 찌꺼기가 혼탁해진 것이다.

 

 

 5:95 問: “才出於氣, 德出於性?”

問 : 재능은 기운에서 나왔고 덕德은 본성에서 나왔습니까? [임기손-夔孫]

 

曰: “不可. 才也是性中出, 德也是有是氣而後有是德. 人之有才者出來做得事業, 也是?性中有了, 便出來做得. 但溫厚篤實便是德, 剛明果敢便是才. 只爲他氣之所稟者生到那裏多, 故爲才.” ?孫(68이후).

曰 : 그렇지 않다. 재능은 본성 속에서 나왔으며, 덕德도 역시 기운이 생긴 뒤에 덕德이 있게 된다. 사람에게 있는 재능이 드러나서 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본성 속에 있다가 곧 드러나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온후하고 독실한 것은 덕德이며, 강건하고 과감한 것은 재능이다. 다만 품부받은 그 기운은 태어나면서 여기에 도달할 때 수없이 다르기 때문에 재능이 된다.

 

 

 5:96 問: “能爲善, 便是才.”

問 : 선善할 수 있는 것은 곧 재능입니까? [만인걸-人傑]

 

曰: “能爲善而本善者是才. 若云能爲善便是才, 則能爲惡亦是才也.” 人傑(51이후).

曰 : 선善할 수 있으면서 선善함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재능이다. 만약 선善할 수 있는 것이 재능이라고만 말한다면, 악惡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재능이다.

 

 

 5:97 論才氣, 曰: “氣是敢做底, 才是能做底.” 德明(44이후).

재능과 기운을 논의하셨다 - 기운은 감히 하려는 것이고, 재능은 할 수 있는 것이다. [요덕명-德明]

 

 

 5:98 問: “‘天命之謂性’, 充體謂氣, 感觸謂情, 主宰謂心, 立趨向謂志, 有所思謂意, 有所逐謂欲.”

問 : 하늘이 명령한 것을 본성이라 말하고, 몸에 가득 찬 것을 기운이라고 말하며, 느껴서 생겨난 것을 감정이라 말하고, 주재하는 것을 마음이라고 말하며, 지향하여 세운 것을 의지라고 말하고, 사려함이 있는 것을 뜻이라고 말하며, 좇는 것이 있는 것을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答云: “此語或中或否, 皆出臆度. 要之, 未可遽論. 且涵泳玩索, 久之當自有見.”

曰 : 그 말은 맞든지 틀리든지, 모두 억측하여 나온 것이다. 요컨대 아직 성급하게 논의할 수는 없다. 우선 오래 동안 깊이 사색하면 마땅히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銖嘗見先生云: “名義之語極難下. 如說性, 則有天地之性, 氣質之性. 說仁, 則伊川有專言之仁, 偏言之仁. 此等且要?識心通.” 人傑(51이후).

수銖 가 일찍이 선생님을 뵈었을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마음, 본성, 감정, 뜻, 의지, 재능 등의 개념의 의미는 언어로 표현하기가 너무 어렵다. 예컨대 본성을 말한다면 천지의 본성과 기질 속의 본성이 있다. 인자함을 말한다면 이천 선생의 경우 전체적 측면에서 말하는 인자함과 부분적 측면에서 말하는 인자함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또한 묵묵히 깨달아서 마음으로 통해야 한다. [만인걸-人傑]

 

 

 5:99 問: “知與思, 於人身最緊要.”

問 : 지혜와 생각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황탁-卓]

 

曰: “然. 二者也只是一事. 知與手相似, 思是交這手去做事也, 思所以用夫知也.” 卓(미상). 付①.

曰 : 그렇다. 두 가지는 단지 하나의 일이다. 지혜는 손과 같고 사려는 손을 움직여서 일을 하는 것이니, 사려는 지혜를 이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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