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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29) 다윗의 진정한 재산, 역대상 27장 25~34절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참으로 번영하게 하셨음을 기록합니다. 성전을 지으려는 소원을 품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큰 번영을 허락해주셨던 것이지요? 물론 물질적인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고 공식을 만드는 오류에 빠지면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필요를 아시며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역대기상 전체가 다윗이 하나님을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섬겼는지,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 25-31절은 다윗 시대에 왕실 재산을 관리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셔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요? 놀랍게도 다윗 시대에는 백성에게 세금을 걷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윗은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 그리고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고 그땅을 차지하여 경작하고 가축을 쳐서 얻은 수익으로, 주변 나라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저들이 바치고 있는 조공들로 왕실과 나라의 살림을 이어나가는데, 백성들에게 짐을 하나도 지우지 않아도 될만큼 부족함이 없게 해주셨습니다.
자, 뭐라고 되어있나 확인해볼까요? 당시 왕궁 곳간뿐 아니라 밭, 성읍, 마을, 망대에도 곳간이 있는데, 사람을 세워 관리해야 할 정도(25절)였습니다. 또 밭이 얼마나 큰지 일하는 농민들을 거느리고 관리하는 사람도 있었고(26절), 포도원과 포도주 곳간을 관리하는 사람이 각각 있었고(27절), 감람나무와 뽕나무, 그리고 기름곳간을 맡은 사람이 있었습니다(28절). 그뿐인가요? 다윗의 소떼는 얼마나 많은지, 둘로 나누어 한 떼는 사론에서, 한 떼는 골짜기에서 따로 먹여야 했는데, 이런 소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고(29절), 그 외에도 낙타, 나귀, 양 떼들을 각각 따로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30절). 아시죠? 저 록펠러는 십일조 계산하는 사람만 열 명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하일교회 식구들도, 여러분의 재산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최소 열두 명은 되어야 하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일전에 저희 충성속회로 예배 드리면서 돈 많은 할매들이 되시라고 말씀드렸는데, 우리 성도님들이 모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르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 하나님께서 구하지 않은 복까지도 날마다 더해주시는 은혜 속에 승리하시길, 대적들은 점점 약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집과 가문은 날로 형통하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전쟁터에서 환란 중에 모은 금은동철 그리고 나무와 돌은 모두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하였기에 다윗의 삶이 금과 은, 보석이 치렁치렁한 삶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오늘 하나님은 그에게 나머지 많은 곡식과 가축을 기름과 포도주를 허락해주셨던 것이지요?
그래요. 이스라엘의 왕답게,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종답게, 하나님은 충분한 권위와 번영을 오늘 그의 집과 나라에 더하시고 허락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도, 하나님께 실컷 평생에 드리고도 남는 은혜와 복을 누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고 오늘 본문은 말하지요? 오늘 다윗의 재산은, 저 곡식과 가축, 기름과 포도주만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32~34절은, 다윗에게 허락하신 참 좋은 사람들, 지혜로운 모사들과 친구들이 있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의 숙부 요나단은 지혜가 있어서 모사가 되며 서기관도 되었고 학모니의 아들 여히엘은 왕자들의 수종자가 되었고 아히도벨은 왕의 모사가 되었고 아렉 사람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고 브나야의 아들 여호야다와 아비아달은 아히도벨의 뒤를 이었고 요압은 왕의 군대 지휘관이 되었더라”(대상27:32-34)
그래요. 무엇보다 귀중한 재산이 사람인 것을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재산이 있습니까? 바라기는 통장의 수많은 잔액보다, 마음을 함께 하고, 목숨을 나눌 수 있고, 내 처자를 맡길 수 있을만큼, 서로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좋은 친구와 벗이, 오늘도 나에게 세상의 얄팍하고 이기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와 명철을 베풀어줄 수 있는 좋은 모사와 벗이 여러분들 곁에 늘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잠언 3장 13-14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3:13-14)
그래요. 진정한 번영은 친구 하나 없는 물질의 번영이 아닙니다. 지혜와 명철의 번영입니다. 지혜와 명철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을 소유한 복된 사람들이 오늘 다윗과 함께 하면서 다윗은 은을 얻는 것보다. 정금으로 얻는 이익보다 많은 복을 누렸던 것이지요. 은으로도 금으로도 살 수 없는 생명을, 이 좋은 친구들이 베푸는 지혜와 명철로,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지혜와 명철로 늘 지키고 보호받으며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요. 다윗은 경제적인 번영을 넘어, 그를 돕는 탁월한 지혜자들과 함께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 여히엘, 아히도벨, 후새, 여호야다, 아비아달, 요압까지 모두 탁월한 지략을 베풀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조언했던 사람들이었고, 저들의 말이라면 다윗이 그대로 행할 만큼 신뢰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요, 이들은 학문, 군사, 종교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로 중대사를 결정하거나 비상상황을 타개해야 할 때,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다윗왕은 탁월한 모사들을 곁에 둠으로 개인과 나라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함께 논의할 수 있었고,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본분을 망각하고 행동하는, 분노와 감정에 움직이는 자신의 생각과 결정을 바르게 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심지어는 원수에게서조차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도 하시는 분이시니, 우리는 우리 곁에 두신 사람들을, 나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함께하고, 더욱 내게 진실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분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우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저 세상사람들처럼, 서로를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이들 말고, 말로 잘 구슬러서 뭐라도 뜯어내려고 하는 분들 말고, 참 좋은 친구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다양한 통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예전에는 동네에서 눈으로 만나는 사람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면, 지금은 오프라인으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정말로 대단한 이들, 각 분야에서 우리의 멘토나 스승이 될 수 있는, 본문의 모사들 같은 수많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어마어마한 통찰력과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들이 공허한 것은, 다시 말해 그렇게 무수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그래요. 그 가운데 진정한 친구가 없기 때문이지요. 늘 그런 친구를 얻고자 하지만, 세상에서 그런 친구를 찾기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 똑똑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내 곁에 있는 친구가 중요합니다. 내게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들, 내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오늘 본문에는 모두 다윗의 훌륭하고 유능한 신하들, 다윗의 국정을 도운 지혜로운 모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이들 가운데, 결국 저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편에, 또한 아비아달과 요압은 아도니아의 편에 서서 다윗을 대적하고 말았던 사람들이지요?
그래요. 성경이 주목하여 기록하기도 했던 두 사람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아히도벨과 후새입니다. 이 둘은 모두 다윗의 모사였습니다. 다윗의 곁에서 상담과 조언을 담당하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다윗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것도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이 둘에게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철저하게 신하로 다윗을 따랐다는 것이고, 후새는 신하인 동시에 다윗의 벗으로 다윗을 섬겼다는 것이지요. 이 차이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다윗의 신하 아히도벨은 압살람의 편에 서서 압살롬을 위해 자기의 지혜와 모략을 베풉니다. 거의 다윗을 멸망시킬 수 있는, 거의 하나님께 물어 얻는 대답과 같은 확실하고 분명했던 전략을 제시합니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다윗과 일행들을 구해낸 사람이 바로 후새이지요? 후새는 압살롬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았고, 아히도벨과는 정 반대가 되는 계략, 급습하여 다윗만 죽이는 작전 말고, 나중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윗이 들어있는 성을 강에 던져버리자고 하며 시간을 벌어 다윗을 살렸던 것이지요? 그 말에 압살롬은 물론 참모들마저 이번만큼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후새의 말을 따르기로 했던 것이지요. 아히도벨은 정확하게 뒷일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이 계략이 아니면 결코 다윗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보다 다윗에게는 물론, 압살롬에게도 친구가 되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가 자결하고 말지요.
그래요. 분명히 아히도벨이 더 똑똑하고 지혜로왔습니다. 상황과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는 그저 신하였습니다. 이 왕을 섬기다, 저 왕을 섬기는 신하였습니다. 이쪽에서보다 저쪽에서 연봉을 더 주면 옮기는 신하였습니다. 여기서도 모략을 베풀고 저기서도 모략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좋은 군주요, 누가 명분이 있는 군주요,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군주인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지혜로 조언만 하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이대로 가버리면 자기 군주 압살롬이 죽을텐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끝이구나 확인하고 자기도 죽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아닌게 아니라 이 땅에 적지 않은 이들이 아히도벨 같습니다. 그저 월급을 더주고, 연봉을 더 준다고 하니 자기의 실력과 국가의 기밀도 다 외국 기업들에 팔아넘기는 것이지요? 내 가치를 몰라준다 싶으면 언제든지 배신하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모실 사람이 누구인지 상관없습니다. 내 지혜와 모략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관심없습니다. 그저 돈만 주면, 내 모략만 사용해주면, 나의 실력을 인정해주고 알아주기만 하면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는 그런 신하들 말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이런 아히도벨 같은 사람은 없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다니는 사람말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옮겨가고 떠나가는 사람 말입니다. 그나마 아히도벨은 괜찮은 점이, 다윗이든, 압살롬이든, 자기 군주에 대해서, 그의 결정과 선택에 대해 입술로 비방이나 비난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또한 자기가 한 행동과 말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질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도 남탓하지 않고 자결했던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후새는 다윗의 친구였습니다. 다윗을 자신처럼 사랑했고, 존경했고, 아꼈습니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실력으로 압살롬을 진압할 수 있음에도, 아들이라고 피난가고 있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월급이, 내가 한 말이 채택되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을 위해 목숨을 건 전쟁에 늘 앞장섰던 사람, 환란당하고 슬픔당한 자를, 자기도 도망다니는 중임에도 거두어 말씀으로 기도로 위로하며 용기를 주었던 사람, 후새는 바로 저 다윗의 편에 서서, 아히도벨보다 뛰어난 모략을 베풀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오늘 목숨을 건 모략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그 어떤 지식과 지혜도 사랑 위에 있어야 합니다. 아니, 지식과 지혜 위에 사랑이 온전히 덮어져야 그 지식과 지혜가 선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매몰찬 지혜, 냉정한 지식, 이익을 위해 몇 푼 돈을 위해 사랑을, 인륜을, 친구를, 말씀을 저버리는 지식과 지혜는 결국 자신과 모두를 망하게 만들 뿐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들 주위에는 누가 있습니까? 지금은 내 편인 것 같지만 곧 나를 떠날 수도 있는 아히도벨과 요압, 아비아달만 있는 것은 아닙니까? 똑똑하고 지혜롭지만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적당한 서로에게 이용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여기며, 그저 몇 푼 돈 때문에 맺고 있는 관계들만 가득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에게는 나를 목숨처럼 사랑할 수 있는 요나단과 같은, 그리고 오늘 브나야와 후새와 같은 오늘 복된 친구들이 오늘 여러분의 곁을 지키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요. 진정한 친구를 가진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역시 내가 먼저 그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내가 진심으로 먼저 친구가 되어야 그 가운데 후새가 생기고, 브나야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아무리 좋은 친구가 되려고 해도, 아히도벨이 있고, 요압이 있는 것처럼 끝까지 우리 마음을, 우리 재산을 이용만 하는, 적당히 관계만 맺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만큼은 끝까지 저들의 친구됨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먼저 좋은 친구가 되시고, 끝까지 좋은 친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낙심하고, 끝까지 함께 해주지 못하는 유한한 인생들만 있다면 참 가련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브나야와 같고 후새와 같은 좋은 친구인데, 변치 않고 영원히 우리에게 끊임없이 친구가 되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오늘도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필요할 때 적당히 이용해 먹으려고만 하는 우리에게, 끝까지 당신의 사랑과 마음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언제든지 떠나고 갈아탈 수 있는 악한 우리에게 끝까지 기대하고 손을 내밀고 당신의 것을 다 내어주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누구?
네,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런 못나고 악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실 뿐 아니라, 그런 죄 많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분입니다. 그런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종삼지 않으시고, 친구가 되시고, 오히려 섬겨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런 분을 알고 섬기고 산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오늘도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라고 말하면서 종처럼 대하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까? 섬긴다고 말만 하지 늘 섬김 받고있는 우리는 아닙니까?
좋은 친구가 되려면, 오랜 교제시간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만나놓고 다 아는 것처럼 친구인 척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러할진대, 예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지으시기 이전부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친구가 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내어 그분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그분의 조언에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분이 가진 능력과 권세와 힘, 그분이 줄 수 있는 복과 은혜만 구할 뿐인 것이지요. 그건 친구가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늘 우리에게 한결같으신 그분과 더욱 가까워지는 친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려면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게으르면 안됩니다. 일이 있을 때만 연락하는 사이만큼 공허한 관계도 없습니다. 그런 관계는 결코 인격적인 관계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친구라 부르시는 예수님과 늘 교제하며, 그 사랑 안에 거하면, 요한복음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고 하셨지요? 이게 친구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야, 무료하고 지겨운 종교생활이 아니라, 생명력이 넘치는 하루하루가 벅차고 감격스런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어려울 때 친구가 가장 좋은 친구고 오래가는 친구입니다. 다윗에게는 후새라고 하는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후새는 다윗이 죽음의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다윗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후새보다 더욱, 아니 후새와 견줄수조차없는 지혜와 명철의 근본이신 예수님이라는 더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한순간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셨습니다. 우리 머리카락의 숫자를 세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또한 천국에 처소를 예비하시고 곧 다시 우리를 맞이하러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윗보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예수님께 진정한 친구요, 진정한 신하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다윗이 누렸던 풍요로움은, 우리 눈이 함몰되어 이는 저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물질의 복은 제일 작은 복입니다. 건강의 복도 작은 복입니다. 큰 복은 역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요,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참된 인간관계가 가장 큰 복입니다. 진정한 풍요와 복을 헷갈리시면 안됩니다. 있다가도 없는, 없다가도 있는 결국 썩고 사라질 물질과 건강이 복이 아닙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 곁에 허락하신 좋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복입니다.
좋은 친구가 되시고, 좋은 친구를 두십시오.
그렇게 친구되신 하나님, 친구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들, 늘 하나님과 사람으로 도우심과 위로를 얻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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