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바다이시던 스님
황청원|시인
나, 황청원은 이젠 세상 사람들 사이에 묻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살아가고 있지만, 한때는 무소유의 수행자를 꿈꾸며 화두 하나 선명하게 지니려 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성성하면 마음도 새벽 별처럼 성성해지고 그것이 흐려지면 마음도 한밤중 어둠처럼 캄캄해졌다. 그래도 늘 마음속에 화두 하나 성성하게 걸어두려고 안과 밖으로 들끓는 치성(熾盛)한 번뇌를 향해 무수히 날카로운 칼날을 던졌던 기억이 문득 살아난다.
벌써 오래된 일이지만 그 화두를 놓치지 않겠다고 지리산 사는 도반의 토굴을 찾아가 겨울 한철을 보낸 적이 있었다. 밥 끓이고, 나무 해오고, 면벽하고, 묵언하고, 멀리 섬진강도 바라보고 하는 일들로 하루하루를 채워 갔다. 잠시 햇볕 좋은 토방 마루에 앉아 안으로는 분명 흘러가거늘 그냥 멈춘 듯 놓여 있는 큰 강물을 관조하는 일이 얼마나 마음을 넉넉하게 했는지 모른다.
강물의 존재는 흘러감의 상징이다. 때론 잔잔하기도 하고, 또 때론 소용돌이치기도 하면서 멈춤 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것이 강물의 본성일 수도 있다. 어디선가 한 방울의 물로 태어나 흘러가는 동안 온갖 것들을 어루만져 부드러움으로 만들며 흘러가는 강물, 그 강물을 한없이 닮고 싶어했던 겨울 한철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연두색 물결이 산 위로 자꾸만 번져갈 이른 봄날에 나는 토굴을 나와 큰절 화엄사로 갔다. 각황전 부처님께 절 올리고 일어서 나가려는데 바람도 비껴갈 만큼 칼칼한 느낌의 스님 한 분이 들어오셨다. 바로 광덕 큰스님이셨다. 나는 한쪽에 조용히 비켜서서 큰스님의 참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절을 올렸더니 섬진강 봄 물빛 같은 환한 미소로 반겨 주셨다. 그런데 곧 이어지는 큰스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께선 큰 시인이시죠. 부처님처럼 사람들 마음 깨우는 시인 되세요. 우리, 운학스님 방에서 만났던 것 같은데…….”
큰스님께서는 나와 단 한번의 만남을 그렇게 떠올리며 손잡아 주시며 좋은 말씀 건네시는 그 모습에서, 겨울 한철 내내 바라보았던 큰 강물의 의미가 스며왔다. 아무런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수면의 고요함 속으로 무엇이든 어루만지는 물결의 그 너그러움이 큰스님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마치 중생들의 끝없는 고뇌 다 안으시고 거두시는 부처님 마음의 실천이 바로 그것임을 보이시는 것 같았다.
다시 광덕 큰스님과의 만남은 안성 죽산에서였다. 큰스님께서 근처에 머무신다는 소식은 접했지만 찾아뵙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항상 가까운 곳에 덕 높으신 노스승 한 분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환희 넘쳤다.
해질 무렵이었다. 나는 죽산 길거리를 지나다가 어느 순간 길을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해를 등지고 시자의 손을 잡고 노스님 한 분이 걸어오고 계셨다. 걷는다기보다는 나비 훨훨 춤추며 날아오듯 너울거리며 오시는 것 같았다. 지는 해가 등 뒤에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어둡게 느껴질 것이 분명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지등에서 불빛 새어 나오는 것처럼 투명한 빛이 느껴졌다. 광덕 큰스님이셨다.
얼른 가까이 다가가 합장했다. 따뜻하게 웃으시며 나에게 손을 내미셨다. 아무런 말씀도 주시지 않았다. 다만 내 등을 몇 번 가만가만 토닥이셨다. 순간 나는 그 손끝에서 모래톱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파도의 감촉을 전해 받았다. 큰스님의 눈빛에서 그 파도를 안아 주는 큰 바다를 보았다. 세상의 모든 물길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도 탓하지 않으며 그저 침묵만으로 받아들임의 진정한 뜻을 보여 주는 큰 바다, 그 자체였다.
나는 가끔 부처님의 가르침을 흐르는 큰 강물이나, 그 강물들 흘러흘러 이른 큰 바다에 비유한다. 분별의 마음 없이 낮추며 살라고 가르침을 보여 주는 강물도, 차별의 마음 없이 받아들이며 살라고 가르침을 보여 주는 큰 바다는 세상 사람들에게 스승 같은 존재이고도 남기 때문이다.
나는 광덕 큰스님과의 옷깃 스쳐가는 듯한 짧은 두 번의 인연을 통해 큰 강물을 보기도 했고 큰 바다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큰 강물은, 그 큰 바다는 지금도 이 시간에도 내 마음 안에서 흘러가고 놓여 있다. 내 생애를 온통 깨우는 자애로운 스승으로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http://blog.daum.net/gomting-a/1062751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ourwith&logNo=30157684758
첫댓글 시인 이시며 한 때 출가를 하신 분이라서인지 표현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어디서 이렇게 적절한 부처님과 큰스님을 표현하셨을까 싶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런 큰 두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바다와 강물처럼 은은히 흐르며 모든 것을 넉넉히 안을 수 있는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또 읽고 또 읽습니다.
아래 두 곳은 이분의 글들을 접할 수 있는 블로그들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모실 스승님이 계시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걷는다기보다는 나비 훨훨 춤추며 날아오듯 너울거리며 오시는 것 같았다. - 다른 글에서도 보았는데 큰스님 모습은 정말 학과 같았나 봅니다..시인의 표현은 큰스님의 모습을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게 했습니다.큰스님께서는 그냥 스치듯 지나셔도 낱낱이 기억하시는 모습에 눈길이 가네요..마하반야바라밀.._()()()_
작은 여울에서 맑고 깨끗한 큰바다되기를 염원하는 청정수 두손 모읍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랴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부처님처럼 사람마음 깨우는 시인 .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